소설리스트

292화 (292/648)

EP.292 292화. 집으로

"집에 가야지."

힘들다.

몸도 뻐근하고.

마사지가 짧은 시간에 엄청난 집중을 요구해서, 하고 나면 정말 더럽게 피곤하다.

그래도 마지막에 엘리스의 표정을 보니 내 의도대로 되는 것 같아서 기분은 좋네.

곧 현장 실습 덕분에 같이 지낼 시간도 많아진다.

그때는 뭐든 더 진행할 수 있겠지.

길을 걸어가며 별 생각 없이 스마트워치를 켰다가, 수린 누나가 떠올랐다.

"… 보내야겠다."

이거 또 안 보내면 내일 A클래스로 찾아올지도 모른다.

그건 무서워.

- 나 : 누나. 엘리스 병문안 갔다가 집 가는 길이에요. 뭐 하고 있어요?

흐음.

뭐든 보고하라는 누나의 말을 듣고 나니 이상하게 존댓말이 나온단 말이야.

의식적으로 반말을 써야 하나 싶지만, 아직은 이 정도도 괜찮을 것 같다.

메시지에 자세한 내용을 쓰진 않았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병문안 간 김에 엘리스 보지를 애무하다가 왔다고 할 순 없잖아.

- 수린 누나 : 밤에 고생이 많네? 나는 개인적으로 조사할 일이 있어서 일하는 중이야.

조사.

아마 그녀의 아버지 문성민에 대한 일이겠지.

문성민의 행보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모른다. 신상정보가 밝혀지지도 않았고, 아는 거라곤 그의 복수가 실패한다는 것.

- 나 : 뭐든 도움 필요하면 말하세요. 알죠?

- 수린 누나 : 응. 고마워!

"… 이 누나도 참 큰일이네."

뭐든 도와줄 수 있으니 혼자 무리하지만 않았으면 좋겠다.

그렇게 여러 생각을 하며 기숙사로 향하다가, 이제 내 집이 기숙사가 아니란 걸 깨달았다.

"아, 오늘 이사했잖아."

상가까지 가깝다고 하면 가깝고 멀다고 하면 먼 거리.

충분히 걸어갈 수 있지만, 시간이 늦었으니 택시를 잡아 집으로 돌아왔다.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다. 혹시 다른 히로인들이 나 때문에 안 자고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다.

조금이라도 빨리 돌아가야겠지.

조용하면서도 화려하고, 아름다움과 정갈함이 동시에 존재하는 아카데미의 거리.

하늘 높이 솟아있는 건물들과 거대한 엔진, 그리고 마석으로 돌아가는 공장들.

생각해보면 참 어색한 것들인데, 어느새 이런 것들이 익숙해져 버렸다.

요금을 지불하고 택시에서 내렸다.

밤이라 그런지 집 주변에 사람은 없었다.

"이사를 하긴 했는데… 이거 어차피 나올 때나 들어갈 때나 룬의 결계는 써야 하는 거 아니야?"

쯧.

어쩔 수 없지.

여자와 지내려면 그 정도 불편은 감수해야 한다.

아직은 어색한 집의 대문을 열고 들어갔다.

마당을 지나 집으로 들어가자, 전과 다른 거대한 거실이지만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그런데, 익숙한 얼굴 사이에 적색의 머리칼이 눈에 띄었다.

"레베카 씨. 뭐 하세요."

나는 옷을 벗어서 옆의 옷걸이에 걸어놓고 거실로 들어갔다.

웃으며 대화를 나누던 레베카는 내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어, 애기 아빠 왔어?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지. 애기 아빠 여자친구들이랑 우정도 쌓을 겸."

"우정이요?"

슬쩍 뒤를 보니 허겁지겁 치킨을 뜯고 있는 릴리아나와 남다희의 모습이 보였다.

'이 사람 벌써 릴리아나를 다루는 법을 깨달았어…!'

남다은은 웃으며 커피를 마시고 있었고, 스칼렛은 보이지 않았다.

나도 그 옆 소파에 앉아 말을 이었다.

"… 근데 어떻게 찾아온 거에요? 집을 알려준 기억은 없는데."

"다 아는 방법이 있지."

레베카는 다리를 꼬더니 날 바라봤다.

중요한 얘기를 하기 직전의 자세다.

"당장 내일모레잖아? 켄타우로스랑 만날 시간."

"그렇죠. 일주일 이내로 만나는 게 목표긴 해요."

"준비는 다 됐고?"

"릴리아나랑 대충 계획을 짜놓긴 했는데요. 일단 부딪혀봐야죠."

항상 그랬다.

답이 없는 일도 일단 머리를 박아보면 뭐든 구멍이 생기더라.

"괜찮아 괜찮아. 나도 계획 준비해왔거든."

"어, 정말요?"

레베카는 품 안에서 종이들을 꺼냈다.

복잡하게 그려져 있는 마법진들.

그리고 릴리아나의 마력을 분석해 켄타우로스와 비교한 자료들.

순간 엄청난 양의 정보를 보고 당황했지만, 내 마법에 관한 재능은 순식간에 그것들 사이의 인과관계를 파악했다.

"지옥의 마력을 분석해서 추적하는 법… 룬의 결계로 세뇌를 푸는 법… 이거 다 레베카 씨가 준비한 거에요?"

"그걸 순식간에 알아보는 애기 아빠가 더 무서워. 흐흣."

레베카가 웃으며 장난스럽게 아양을 떨었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나도 애기 엄마라고 불러줄 수 있었다.

안 그래도 릴리아나 때문에 켄타우로스는 꼭 잡아야 하는 상황이었으니까.

"와… 정말 고마워요. 레베카 씨. 시간도 꽤 들었을 텐데."

"난 신경 안 써도 돼. 이번 일은 확실하게 처리해야지. 혹시 몰라서 나도 따라갈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레베카 씨도요?"

이번에도 놀랐다.

레베카 정도의 간부가 시간을 막 비워도 되는 건가?

"당연하지. 이번 일을 확실하게 마무리해야 날 임신시켜줄 거 아니야."

"… 아. 네. 당연하죠."

직접적인 언급에 슬쩍 남다은의 눈치를 봤지만, 다행히 별 반응 없이 커피를 홀짝이고만 있었다.

"뭐야. 그 반응? 내가 이렇게 준비해왔는데. 다 가져간다?"

"아니요 아니요. 어떻게 해야 착상이 잘 될까 고민 중이었어요."

"푸흐, 뭐라는 거야."

그 후로도 레베카와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혹시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 있나 확인하며, 켄타우로스를 만났을 때 더욱 확실하게 일을 처리하기 위함이다.

일단 계획은 완벽했다.

내가 마법진을 바로 이해했으니 설명할 필요도 없었고.

"오케이, 애기 아빠. 그럼 그때 봐?"

"네. 감사합니다. 레베카 씨."

꾸벅.

나는 고개를 숙이며 레베카를 배웅했다.

역시 좋은 사람이라니까.

생긴 건 양아치처럼 생겼지만.

덜컥-

레베카가 사라지자마자, 내 방의 문이 혼자 열렸다.

그리고 안에서 스칼렛이 튀어나왔다.

"… 넌 왜 내 방에서 나오냐?"

"죄송합니다."

스칼렛은 표정이 안 좋아 보였다. 어디 아픈 건 아니겠지?

"표정이 안 좋은데? 괜찮아?"

"저분은 저랑 파장이 안 맞아서요… 읍, 죄송합니다."

"아니, 죄송할 것까진 없는데."

얼마나 심하면 헛구역질까지 할 정도인가.

"음음, 어? 레베카 벌써 갔네."

어느새 치킨을 다 해치운 릴리아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릴리아나. 저번에는 레베카 씨 무섭다며."

"응. 근데 치킨을 사 오는 걸 보니 좋은 사람인 것 같아."

"… 그래. 참 다행이다. 혹시 길에서 누가 치킨 사준다고 따라가진 않을 거지?"

"날 바보로 아는 거야?"

릴리아나는 허리에 손을 얹은 채 날 째려봤다.

그래.

저렇게 긍정적인 게 차라리 낫다. 히로인들끼리 사이가 좋아서 나쁠 건 없지.

스칼렛은 머리가 아프다며 2층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그럼 언니가 내 닭 다리를 가져간 건 말이 되고?"

"헉. 어떻게 알았지?!"

남다희와 릴리아나는 평소처럼 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치킨 닭 다리 하나를 가지고 내 거라면서 싸우고 있었는데, 그래도 저렇게 싸우다가 마지막에는 항상 릴리아나가 양보한다.

어린 애와 진심으로 싸우는 찌질한 여자는 아니니까.

"내 꺼야! 내 꺼!"

"으에엥… 언니. 릴리아나 언니가 뺏어…."

"…."

아니겠지.

난 릴리아나의 손에 있는 닭 다리를 뺏어서 남다희에게 쥐어주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헤헤, 고마워 오빠!"

"흥. 잠깐 놀아주고 다시 줄려고 했는데. 이러면 내가 나쁜 사람이 되잖아."

"애가 울면 그냥 줘라. 좀."

옆자리에서 내 팔을 건드리며 툴툴거리는 릴리아나를 보며 나는 웃음을 지었다.

역시 집이 편하구나.

결혼하면 좋은 점 중 가장 큰 게 '집에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안정감.'이라고 한다.

이 정도면 결혼할만하지.

스마트 워치를 보니 슬슬 잘 시간이다.

"아으, 피곤하네. 슬슬 잘까…."

꾸욱-

오른팔에서 느껴지는 촉감에고개를 돌리자 커피를 마시던 남다은이 내 팔을 잡고 있었다.

"잊은거야?"

"… 아니. 네 방에서 같이 자자는 뜻이었어."

"그렇지?"

남다은은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큰일 날 뻔 했네.

아무 생각 없이 방에 들어갈 뻔했어.

"… 다은아. 미안하지만 새로운 집에서의 첫날밤은 양보할 수 없어. 서큐버스에게 큰 경험치가 되거든."

그때. 갑자기 옆에 있던 릴리아나가 벌떡 일어났다.

하는 말은 당연히 헛소리였다.

"야. 병원에서도 그렇고, 경험치를 쌓으면 뭐가 좋은데."

"엘리트 서큐버스가 될 수 있어."

"…."

아무리 봐도 개소리 같은데.

하지만 릴리아나는 진지한 것 같았다.

가슴을 쭉 빼며 남다은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런 릴리아나를 보던 남다은은 고개를 푹 숙였다.

"릴리아나 씨는… 호연이랑 같이 프랑스에 가잖아요. 스칼렛 씨도 데려간다고 하고. 그럼 그동안 저는 다희랑 쓸쓸하게 집에 있어야 해요."

"…… 감성팔이 따위에 서큐버스는 당하지 않아."

"알겠어요. 그럼 앞으로 집안일은 똑같이 분담해서 하기로 하죠."

남다은은 이게 안 통한다면 어쩔 수 없다는 듯, 팔짱을 끼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릴리아나도 당당하게 피고 있던 허리를 살짝 굽혔다.

"잠시만. 다은아. 여기서 집안일이 왜 나와?"

"그야, 릴리아나 님은 집안일을 안 하잖아요."

"아니 나는 네가 오기 전에 기숙사에서 충분히 했다니까? 그리고 난 방송으로 우리 집의 생계를 이어가고 있어!"

"방송… 릴리아나 씨. 그 좁은 기숙사랑 이 넓은 집이랑은 달라요. 보나 마나 스칼렛 씨한테 다 떠넘길 생각이었죠?"

"스, 스카웃은 내 노예거든? 그래도 괜찮아!"

"그래도 세 걸음 옆에 정수기가 있으면서 목마르니까 물 떠오라는 명령을 하는 건 좀 심했어요."

"그건 조크야! 네가 지옥식 농담을 알아? 그리고 그거 이호연한테 안 이르기로 했잖아! 너무해!"

"얘들아… 그만해 그만."

나는 손으로 이마를 붙잡은 채 고개를 저었다.

대체 왜 이런 거로 싸우고 있는 건데.

릴리아나는 나를 보고 소리를 빼액 질렀다.

"그럼 어떻게 해!"

"뭘 어떻게 해. 네가 양보해야지. 너 나랑 프랑스 가잖아."

"으으으…."

릴리아나는 내 말에 분한 듯 주먹을 쥐었다.

그 모습에 너무 진심이 녹아있어서,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렇지만 남다은의 편을 들어줄 수 밖에 없잖아. 이제 못보는 시간이 기니까.

"… 릴리아나 씨. 그럼 같이해요."

"뭐?"

이번엔 내가 의문을 표시했다.

남다은은 말을 마치자마자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쪽-

짧은 입맞춤.

입술과 입술이 가벼운 터치를 하고나서, 남다은은 살짝 붉어진 얼굴로 말했다.

"… 스승님한테 배운 지도 오래됐으니까요. 생각해보니 오랜만에 배우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요."

"흥. 나도 나랑 안 하겠다는 남자를 붙잡지 않을 거야. 하지만 다은이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조금 도와주기는 할 수 있어."

나와 남다은이 눈을 마주치고 있을 때, 뒤에서 다가온 릴리아나는 날 끌어안고는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야. 야…."

나는 순식간에 벌어지는 상황에 일단 말리려고 했다.

"호연아."

그러나 남다은이 내 말을 끊었다.

남다은은 날 보며 살짝 웃고 있었다.

그 표정을 보니, 다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 그래. 다은아."

"고마워."

"… 하아. 내가 더 고맙다. 릴리아나랑 안 싸워줘서."

아까 남다은과 릴리아나의 투닥거림은 다 기억하고 있다.

릴리아나는 이상하게 방송에 자부심이 강하다.

방송으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는 말. 예전이면 몰라도 지금은 아니다. 남다은이 있던 바이어 길드를 털면서 돈은 충분해졌다.

남다은은 모든 걸 알기에 반박할 수 있지만, 결국 반박하지 않았다.

그 배려심이 나는 고마웠다.

"고마우면 행동으로 보여줘… 으음. 츕."

난 남다은의 목덜미에 손을 얹었다.

내 맨살에 닿아오는 릴리아나의 얇은 손가락을 느끼며, 남다은과 키스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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