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9화 (289/648)

EP.289 289화. 기분 좋은 엘리스 (2)

"오, 오오. 이거 봐!"

"… 좋긴 하네."

집이라고 표현하기엔 많이 큰 저택.

자연의 기운이 느껴지는 정원으로 둘러싸인 마당을 지나자 거대한 2층 저택이 보였다.

대충 봐도 기숙사의 10배. 아니 20배는 넓어 보이는데.

처음엔 200억이라길래 마냥 좋겠구나. 했다.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너무 큰 것같은데.

게다가 여기 도심 한 가운데잖아.

"스칼렛. 여기가 200억이라고 하지 않았냐?"

"맞습니다."

"전세도 아니고 내가 산거잖아."

"호연님. 계약서 확인하시지않았나요."

"… 응. 근데 의외로 싼 거 같네."

이 정도면 더 비싸야 하는 거 아닌가 싶다.

물론, 이건 빙의 전 기준이다.

게이트나 던전 같은 것들의 존재 때문에 물가 같은 것도 큰 차이가 있나 보네.

아무튼 내가 고려해야 할 부분은 아니니까 패스.

나는 축구는 못해도 농구 정도는 진지하게 할 수 있을 것 같은 1층 거실을 구경하다가, 가장 넓은 방을 차지한 릴리아나를 발견했다.

"야. 방 내놔. 내 집이잖아."

그리고 바로 장난을 걸었다.

"싫어! 이미 컴퓨터 설치하고 있거든?"

릴리아나는 어디서 가져온 건지 컴퓨터 책상 뒤 벽에 기숙사와 똑같은 벽지를 붙이고 있었다.

줄자로 컴퓨터 위치까지 체크하는 게, 방송에 진심인 것 같았다.

"…너 진짜 방송에 진심이구나."

"당연하징. 컴퓨터 안에 사람들이 있잖아."

저렇게까지 진심인 걸 보면 또 뺏기가 그렇네.

사실 무슨 방이든 다 커서 별 상관없긴 하다.

어차피 장난이었고.

"그래. 여기는 너 해라."

나는 열심히 준비하고 있는 릴리아나를 뒤로하고 1층에서 두 번째로 큰 방에 짐을 놓았다.

여기도 혼자 쓰기엔 충분히 넓다.

게다가 스칼렛이 이미 침대나 필수 가구 같은 것도 배치해놨다.

루시에게 받았던 아티팩트가 여기 있는 걸 보면 처음부터 여기가 내 방이었나보네.

대충 짐을 풀고 나와보니 남다은과 남다희도 거실에 앉아서 TV를 구경하고 있었다.

"너희는 짐 어디다 놨어?"

"우리는 2층! 언니랑 나랑 바로 옆방이야!"

"그래? 잘됐네."

남다희는 정말 기쁜듯 싱글벙글 웃었다.

괜히 나까지 기분이 좋아지는 미소였다.

역시 어린 애들은 웃어야지.

"집이 너무 좋아서 놀랐어. 고마워. 호연아."

남다은도 고맙다고 감사를 보내왔다.

이거 원래 네 돈인데.

"오빠… 근데 우리 진짜 여기서 같이 살아?"

"응. 왜 그래? 마음에 안 들어?"

"그치만… 나는 오빠한테 줄 돈이 없어서…."

나는 우물쭈물하는 남다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괜찮아. 너희 언니가 나를 많이 도와주거든."

"응. 언니가 있으니까 걱정 마. 다희야."

"언니이…."

남다희는 눈에 맺힌 눈물을 숨기며 남다은에게 안겼고, 남다은은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남다희를 쓰다듬었다.

역시 보기 좋은 자매….

쾅-!

"배고파! 밥 사줘 밥! 이사하면 짜장면 먹는다는데 나도 먹고 싶어!"

사이 좋은 자매를 보다가 소파에 앉으려는데, 방에서 튀어나온 릴리아나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그래. 사줄 테니까 소리는 지르지 마라."

"탕수육도 내놔! 에잇!"

릴리아나는 활짝 웃으며 내게 달려왔다.

"야. 사준다니까. 왜 그래."

갑자기 안겨서 깜짝 놀랐네.

나야 좋지만, 옆에 다희도 있는데 정서 교육상 안 좋잖아.

"언니… 나도 짜장면 먹고 싶어."

"괜찮아. 호연이가 사줄 거야."

남다은은 웃으며 날 바라봤다.

"그래. 다 사줄 테니까 시켜라."

언제는 내가 안 사준 줄 알겠네.

내 허락을 받자마자 바닥에 누워 신나게 메뉴를 고르는 남다희와 릴리아나를 보며 나는 고개를 저었다.

집이 넓어지니까 이제 컨트롤하기도 힘들겠구나.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소파에 몸을 맡겼다.

그때 남다은이 내게 다가왔다.

"내가 이런 곳에 살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어."

남다은은 남다희를 흐뭇한 미소로 바라보며 내 옆에 살포시 앉았다.

"… 이거 다 네가 있던 길드에서 뺏은 돈이야."

"… 그 지옥에서 빼준 게 너잖아. 호연아."

꼬옥-

남다은은 내 손등을 잡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죽을 수 없어서 살았거든."

"…."

따뜻한 체온을 공유하면서 우리는 눈을 마주 봤다.

가끔씩 이렇게 직설적으로 말해오면… 내가 다 부끄러워진다.

결국 내가 먼저 눈을 돌리자, 남다은은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왔다.

"오늘 밤에 늦게 올 거지?"

"… 아마도?"

엘리스를 만나러 가야 하니 일찍 오진 않겠지.

가서 얼마나 걸릴 지도 모르고.

"당장 다음 주부터는 일주일이나 못 보잖아."

"… 응."

내가 아이리스 길드에 갈 때, 남다은은 철혈 길드로 실습을 하러 간다고 했다.

1학년에서 최상위권이니까 당연한 결과겠지.

루시와 루미도 철혈 길드라고 했던 것 같은데.

최상위권은 다 데려가는 모양이다.

"… 오늘 밤에 들려. 다희는 금방 재울 거니까."

"…."

남다은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어디로 가야 하는 지 묻는 눈치 없는 짓은 하지 않았다.

그저 손을 꼭 잡았을 뿐.

"집주인! 이거 괜찮아? 탕수육이랑 짜장 세트!"

그 분위기를 깬 건 릴리아나였다.

내심 고맙긴했다. 계속 있었다간 얼굴이 터질 것 같았으니까.

"… 상관없긴한데, 집주인은 또 뭐야."

이름으로 부르든가 주인님이라고 하든가.

하나만 정하지 좀.

그리고 난 짜장면보다 짬뽕이 좋다.

"야. 난 짬뽕 먹을래."

"안돼. 메뉴 통일해야 빨리 배달 와!"

… 저럴 거면 왜 물어본 거야.

집주인이라면서 대우도 안 해주네.

"서큐버스가 집주인 먹고 싶은 것도 안 사주냐? 아니, 그 전에 내가 사주는 거잖아."

"난 몰라! 짜장 먹어! 짬뽕 먹으면 몸에 안 좋아!"

"뭔 소리야!"

나는 소파에서 일어나 누워있는 릴리아나의 배를 꼬집었다.

"꺄악! 다희야! 다은아! 살려줘!"

"릴리아나 언니… 그냥 짬뽕시켜주면 안 되요?"

의문인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남다희와 신경 쓰지 말라며 주문을 시작한 남다은.

그 옆에서 뒹굴면서 서로를 장난스럽게 깨물고 있는 나와 릴리아나.

뒤에서 조용히 웃고 있는 스칼렛.

새집에서도, 지금까지와 같이 평범하다면 평범한 하루였다.

*

"…."

똑- 딱- 똑- 딱-

엘리스는 병실에 걸린 아날로그 시계를 보며 손장난을 했다.

오후 9시.

바깥은 이미 어두웠다.

역시 밤은 해가 완전히 져야 밤이라고 할 수 있지.

그는 바람둥이답게 밀당을 할 때에도 인내심이 뛰어난 것 같다.

그래도 어제 이호연이 들려준 덕에 움직일 때 고통이 많이 줄었다.

전까지 아예 몸을 움직이기 힘들 정도였다면 이제는 간신히 참을 수 있는 정도.

이호연의 마사지 효과를 다시 한번 체감하는 날이었다.

부끄럽긴 하지만 효과 하나는 확실했다.

"… 근데 왜 안 와."

아무도 없는 방에서 흐흣거리며 웃는 것도 3시간이나 하면 피곤한 법이다.

엘리스는 결국 다시 스마트워치로 눈을 돌렸다.

도착한 메시지가 없는 걸 확인한 그녀는 뉴스를 보기 시작했다.

이호연에게 먼저 메시지를 보낼 순 없었다.

밀당은 자존심 싸움이다.

'자신은 절대 남자에게 끌려가지 않는다.' 라고 엘리스는 생각했다.

*

저녁을 먹고 잠깐 놀다가 기숙사를 나와서 시간을 보니 오후 9시 30분이었다.

'생각보다 늦었네.'

밤이라기에 딱 좋긴 하지만, 사실 더 일찍 갈 생각이었는데 집에 오래 잡혀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저녁을 시키고 남은 짐을 풀다가 맛있게 밥을 먹었다.

여기까진 좋았는데….

넓은 집이 생겨서 텐션이 높아진 릴리아나가 식후땡이라며 내 물건을 빨려고 했다. 그걸 벗어나느라 시간이 좀 걸렸다.

스칼렛도 이사를 하고 나서는 자기 방을 만들었다.

사실 스칼렛은 원래 집이 있겠지만… 방 하나 정도 내주는 건 큰일이 아니니까.

이미 친하지만, 같이 살다 보면 더 친해지고 좋지 뭐.

집에 예쁜 여자가 많아서 손해 볼 일은 없다.

게다가 내심 좋아보였고.

아무튼 여러 일을 거치며 병원에 도착한 게 10시였다.

곧 간다는 메시지를 기숙사에서 나오자마자 보냈으니, 엘리스도 준비를 끝냈을 거다.

나는 로비에서 병문안 절차를 밟고 병실로 찾아갔다.

늦은 시간이지만 환자의 허락이 있으면 이 시간도 상관없는 것 같았다.

똑똑똑-

"엘리스. 나 왔어."

"응. 들어와."

병실을 노크하자 안에서 엘리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침대에 누워있는 엘리스의 모습이 보였다.

언제나처럼 루비같이 붉은 눈동자와 어깨 아래로 흘러내린 금발이 매력적이다.

"이제 왔구나? 늦었네."

"어, 응."

"천천히 해도 괜찮으니까 거기 앉아."

"… 알겠어."

병실에 준비된 간이침대에 앉은 나는, 엘리스와의 짧은 대화에서 심한 부자연스러움을 느꼈다.

'뭐지?'

정확히 말할 수는 없지만, 이상하게 어색한 느낌. 너무 말투가 부드럽다.

★ 히로인 상태창

[엘리스]

- [ 호감도 : 83 ]

- [ 성욕 : 85 ]

- [ 식욕 : 40 ]

- [ 피로도 : 65 ]

현재 상태 : 여유로운 척 하는 거. 나름 귀엽네.

"……?"

히로인 상태창을 열어본 나는 의문을 가졌다.

대체 왜?

내가 어디가 귀엽다는 거지? 잘생긴 것도 아니고.

평소의 엘리스와는 말투가 달랐다.

굳이 비교하자면 선천적 마력 장애 때문에 오해했을 때, 호감도가 높아졌던 엘리스의 모습과 비슷했다.

마치 나를 챙겨주려는 것 같았다.

'여유로운 척….'

그래도 히로인 상태창을 보고 나니 알았다.

엘리스에게 느껴졌던 이상한 이질감의 정체.

바로 '여유로운 척'이다.

여유로운 척을 하는 건 내가 아니라 엘리스였다.

그 이유를 생각해보려던 찰나, 엘리스가 입을 열었다.

"이사한 새집은 어때. 좋았어?"

"… 새집? 아."

엘리스는 입꼬리를 올린 채 날 바라보고 있었다.

새집이라는 건, 당연히 내가 이사한 집을 말하는 거겠지.

병실에 있어서 좀 늦게 알아차릴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정보를 들은 모양이다.

… 근데 왜 네가 자신만만한 거야.

네 옆집이라도 내 돈 주고 내가 산 건데?

"위치는 마음에 들어? 그 부근이 전망이 좋거든."

"전망… 응. 좋더라. 그러고보니 네 집이랑 가깝더라. 놀랐어."

"그러게. 나도 정말정말 놀랐는데."

엘리스는 여전히 미소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상하게 오늘은 미소도 많이 보여줬다.

'잠시만.'

내가 말 한 적도 없는데 새집에 대한 이야기를 엘리스가 먼저 꺼냈다.

아마 집사인 세바스 찬에게 정보를 받았겠지. 엘리스는 하루종일 병실에 있었으니까.

문제는 저 여유로운 표정과 올라가 있는 입꼬리.

그리고 계속해서 내 집과 자신의 집을 언급하는 것….

다시, 내가 엘리스라고 생각해보자.

이사를 한다고 꾸준히 언급하던 남자가 이사를 했는데 알고보니 바로 옆 집이었다.

그 남자는 우리 집에 몇 번이나 왔었다.

계약할 때 이사하는 곳의 옆 집을 봤을텐데도 아무 언급이 없었다….

만약 나라면 어떻게 생각할까.

'당연히 일부러 숨긴거라고 생각하겠지.'

생각을 끝내고 엘리스의 눈치를 살폈다.

엘리스는 아직도 느긋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얘 이상한 착각 하는 거 같은데.'

아무래도… 내가 옆 집에 이사한 걸 보고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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