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88 288화. 기분 좋은 엘리스
나는 혼절한 릴리아나를 무릎에 올려놓고 소파에 앉았다.
쓰담쓰담.
부드러운 머리카락. 쓰다듬기 좋은 살결.
불건전하면서도 우아한 외모. 여리여리하면서도 보는 사람을 몽롱하게 만드는 육감적인 몸매의 곡선.
이 모든 게 단순히 서큐버스라 그런 걸까. 모든 서큐버스가 이 정도라면 지옥에서 서큐버스가 살아 있을 리가 없는데.
고위 마족들한테 다 납치당했을 거 아니야.
집에 틀어박혀 있던 히키코모리가 이렇게 예쁜 것도 좀 이상하고.
"… 쯧."
모르겠다.
의문점이 한 두개가 아니다.
릴리아나의 기억도 그렇고 [지옥의 망나니 소환 계약서]도 그렇고 판데믹도 그렇고 의문투성이였다.
하지만 판데믹의 목표는 똑같을 거다.
마왕을 소환하고 인간을 멸종시키는 것.
난 그것만 막으면 된다.
"으응… 냠."
자고 있는 릴리아나는 입을 쩝쩝대며 잠꼬대를 했다.
그 모습이 웃겨서 손가락을 댔더니, 기다렸다는 듯 쪽쪽 빨아왔다.
"… 에휴."
영락없는 서큐버스 다운 행동이다.
나는 그대로 눈을 감고 소파에 몸을 맡겼다.
'이러고 있으면 되겠네.'
어차피 할 것도 없다.
요즘 쉬는 시간이 없기도 했지.
가끔은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앉아있는 것도 도움이 된다.
"흐응…."
꾸욱-
물론 자고 있는 릴리아나의 가슴을 만지는 것도 잊지 않았다.
손에 가득 차는 부드러운 감촉.
이러면 휴식 효과가 두 배가 된다.
한 손으로 릴리아나를 만지면서, 거실을 둘러봤다.
거실에는 상자들이 널려있었다.
아마 이사 준비를 하는 거겠지. 내가 안 보는 사이에 준비를 많이 해놨구나.
"정작 나는 이사를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데."
집 주인이 이사갈 곳을 모르다니.
뭐…. 그만큼 열심히 산 증거겠지!
가장은 가정에 소홀할 때도 있는 법이다. 이제부터라도 잘 하면 된다.
'시간도 남아도는데 오늘 이사까지 해버릴까.'
월요일 하루 등교하고 화요일부터 프랑스 행이니, 지금이 딱 좋은 타이밍이긴 하다.
물론 릴리아나가 일어나야 하겠지만.
"으으음…."
한 시간 정도 지났을까.
심심해서 스마트워치를 보고 있었는데, 내 무릎에 있던 릴리아나가 몸을 뒤척이기 시작했다.
나는 스마트 워치를 끄고 입을 열었다.
"릴리아나. 이제 일어나."
톡. 톡.
푹신한 볼에 손가락을 찔렀다.
아무리 가벼운 릴리아나라지만 이제 슬슬 무릎이 저려오거든.
"으, 으으… 엉?"
다행히 릴리아나는 금방 눈을 떴다.
잠시 상황 파악이 안 된다는 듯 눈을 끔벅거리다가, 나와 눈을 마주치고는 화색을 지었다.
그 모습이 주인을 발견한 강아지 같아서 나는 살짝 웃었다.
"머야? 나 왜 자고 있었지?"
"… 갑자기 내 품에 안겨서 잠들었어. 피곤했나 봐."
기억 못 하는구나.
처음 눈을 떴을 때 반응부터 그럴 거 같긴 했다.
"구런가? 하긴. 게임을 열심히 하긴 했어. 그리고 미녀는 잠꾸러기니까!"
파닥파닥 거리며 내 무릎에서 일어난 릴리아나는 크게 하품하더니 주섬주섬 짐을 챙겼다.
"바로 짐 싸려고?"
"응. 곧 이사할 거잖아."
태평해보이는 릴리아나를 보니, 마음이 편해졌다.
역시 릴리아나는 저런 모습이 제일 어울린다.
"그래. 같이 짐이나 챙기자. 맞다. 너 이사할 곳 가봤어?"
"아니? 너랑 같이 가야지. 스카웃이 혼자 구한거잖앙."
이거 혹시 스칼렛이 내 돈 가지고 튄 건 아니겠지.
왜 아무도 모르냐?
"어디에 구했길래 너희도 모르는 거야?"
그때, 창문으로 마력이 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스윽-
고개를 돌리자, 차분한 금발이 보였다.
"마침 다 모였으니, 지금 가시면 될 것 같습니다."
"… 스칼렛?"
띠링-
곧 현관문으로 귀여운 남 씨 자매도 들어왔다.
"응? 오빠!"
"호연아?"
뭐야. 순식간에 다 모였네.
방금까지 릴리아나와 둘 만 있던 기숙사가 북적거렸다.
"다은아. 몸은 괜찮아?"
내게 달려오는 다희를 안아주며 남다은을 바라봤다.
어제 꽤 아파 보였는데 오늘은 괜찮아 보이네.
"응. 하루 푹 잤더니 나았어."
"다행이다. 스칼렛. 지금 바로 새집에 갈 수 있어?"
이사도 해결할 수 있을 때 해결해야지, 안 그러면 밑도 끝도 없다.
게다가 새 집이 궁금하기도 하고.
"호연 님이 원하신다면 안내할게요. 아예 오늘 이사를 해버리죠?"
스칼렛은 후후 웃었는데, 이상하게 그 웃음이 불안했다.
*
이호연이 나간 뒤.
임솔은 빈 연구실에 앉아 다리를 꼰 채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녀가 마법사로서의 한계를 느꼈던 3년 전을 떠올렸다.
그날. 그녀는 '인간의 태생적 한계'가 있다는 걸 알아냈다.
개미가 아무리 근력을 키워도 사람을 밀어낼 수 없듯, 인간이 아무리 마법을 갈고닦아도 어느 수준 이상으로 갈 수 없다는 걸 직감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임솔은 겨우 25살이라는 나이에, 과거에 아무도 도달하지 못했던 경지.
즉 인간의 한계에 도달했다고 생각했다.
그때부터는 마법을 갈고닦는 게 아닌 다양화시키는 연구를 시작했다.
하지만 그를 만나고 모든 생각을 고쳐먹었다.
천외천(天外天).
하늘 위에 하늘이 있듯이.
한계에 도달했다고 생각한 자신의 위에 있던 남자.
이호연.
첫 만남 때 느꼈던 아찔함을 그녀는 아직도 기억한다.
그는 마력의 질 자체가 달랐다.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야 할 수 있을 것 같은 마력의 움직임.
너무나도 순수하고 푸른 투명한 마력.
그는 재능만으로 자신이 생각했던 한계를 넘고 있었다.
한 번도 재능이 부족하다고 느낀 적 없었던 임솔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자 새로운 발견이었다.
자신이 마주한 것이 한계가 아니라 높은 벽이란 걸 알았으니까.
그녀의 열정이 다시 타오르기에 충분한 연료였다.
물론 그곳엔 임솔이 모르는 속사정이 있었다.
그녀는 이호연의 마법이 오로지 재능과 노력의 산물인 줄 알겠지만, 재능뿐만이 아니었다.
임솔이 모르는 신적인 존재의 개입인 [특전]
특전이 없는 임솔은 아무리 노력해도 이호연이 할 수 있는 마법을 구사할 수 없다.
꼬리가 없는 인간이 꼬리를 흔들겠다고 엉덩이를 흔들어봤자 될 리가 없으니까.
하지만, 천재 마법사 임솔의 재능은 퇴화한 꼬리뼈에서도 꼬리를 돋아나게 할 수 있었다.
"마법의 재구성…. 마법으로 변한 마력. 아니, 다시 생각해보자. 마법과 마력의 관계. 마법이라는 학문이 처음부터 잘못되었을 수도 있어. 아예 처음부터 뜯어고쳐야 해."
직감적으로 움직이는 이호연의 마법 스타일을 토대로, 임솔은 조용한 연구실에서 다시 연구를 시작했다.
"마법사 학회에 가기 전까지… 준비할 수 있을까."
방학까지 남은 기간은 약 2주.
2주면 336시간. 하루에 2시간씩 잔다고 가정하면 300시간 넘게 연구할 수 있는 긴 시간이었다.
임솔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마치 처음 마법을 접했을 때처럼… 그녀는 자신의 마음에 불이 붙은 걸 느꼈다.
*
우리는 순식간에 준비를 끝냈다.
짐정리를 같이 도와주려고 했는데,내가 모르는 새에 다들 이사 준비를 끝낸 모양이다.
어느새 내 물건들도 박스에 가지런히 포장되어있었으니까.
아마 남다은의 작품이겠지.
우리는 스칼렛이 가지고 있는 아티팩트의 도움을 받았다.
검문에 들키지 않고 무거운 물건을 숨겨 들어갈 수 있는 고급품이라는데, 이걸 이사에 쓰는 건 처음이라고 하더라.
스칼렛의 안내를 따라 익숙한 거리를 걷다보니, 커다란 저택에 도착했다.
"와아. 이거 뭐야. 지옥의 저택보다 훨씬 커."
"어, 언니. 우리 이런 곳에서 살아도 되는 거야? 돈 내야 하는 거 아니야?"
"… 아마 괜찮을 거야. 난방비랑 수도세라도 아껴서 내자."
"으, 으응. 물은 꼭 잠글게."
릴리아나는 제일 좋은 방을 쓸 거라면서 달려갔고, 남다은과 남다희는 넓은 마당에 살짝 겁먹었는지 조심스럽게 들어갔다.
맨 뒤에 있던 나는, 넓은 집을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자연 풍경이 그대로 담긴것 같은 정원과 저택의 벽을 타고 올라가는 담쟁의 덩쿨.
작은 수영장부터 텃밭과 다양한 색의 관상용 꽃들.
딱 봐도 비싼 것 같은 집이다.
그래. 다 좋아. 200억쓴 것도 그렇다쳐.
근데 왜 엘리스의 집이 옆에 있냐고.
나는 다른 여자들에게 들리지 않도록, 조용히 속삭였다.
"야."
"네. 호연 님."
"이래서 안 알려준 거야?"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스칼렛은 무표정하게 내 뒤에 서있었는데, 자기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그 표정이 너무 얄미웠다.
"하아…."
나는 넓은 마당에서 고개를 돌렸다.
멀리도 아니다.
마당을 막고 있는 울타리를 넘으면, 바로 엘리스의 저택이었다.
어쩐지 집이 더럽게 비싸더라.
"아니, 왜 여기로 구한 거야? 진짜 궁금해서 그래."
솔직히 뭐 별 상관은 없다.
예전이면 몰라도… 지금은 오히려 좋을지도 모르지.
엘리스와 관계도 꽤 좋아졌으니까.
"전 상사에 대한 예우입니다."
가지런히 손을 가슴에 대고 허리를 숙이는, 쓸데없이 멋있는 예법을 취하는 스칼렛을 보며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 너도 정상이 아니구나."
하긴. 내 옆에 있는 여자들 중에 정상이 어딨어.
"그래도 제가 호연 님 물품도 챙겨드렸는데, 너무하시네요."
스칼렛은 서운한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 연기겠지만… 내 짐을 챙겨준 게 너였구나.
"네가 한거였어?"
당연히 다은이가 한 줄 알았네.
"다은 양이 입원한 틈에 빠르게 끝냈습니다."
"... 그래. 고맙다."
나는 차곡차곡 개어져있던 옷가지들을 떠올렸다.
스칼렛은 항상 시키지도 않은 일을 이렇게 처리한다.
예쁘지라도 말든가. 미워할 수 없게 만든다.
나는 한숨을 쉬며 캐리어를 돌돌돌 끌고 집으로 들어갔다.
*
이호연이 한참 여자들과 새집에서 뒹굴고 있던 시간, 오후 6시.
아직도 해는 밝게 떠 있었다.
엘리스는 건조한 입술을 혀로 핥으며 창문 밖을 바라봤다.
"… 밤이라고 했었지. 분명."
밤의 기준은 몇 시일까.
태양이 진 상태를 밤이라고 해야 할까.
만약 지금이 겨울이었다면 밤이 되기 직전일 텐데, 그렇다면 지금도 밤이라고 볼 수는 없을까.
엘리스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눈을 찌푸렸다.
정확한 시간으로 약속을 잡았어야 했는데. 그랬다면 이렇게 기다릴 필요도 없었을거다.
'메시지라도 보내자.'
기다리기 힘들어서가 아니다.
확실하게 시간을 정해야 일정에 맞추기 편했기 때문이다.
물론 오늘 그녀의 일정은 하루종일 누워있기였지만.
엘리스가 메시지를 보내려고 스마트워치를 들었을 때.
띠링-
먼저 메시지가 도착했다.
발신자는 '세바스 찬'
"세바스 찬…?"
웬만한 일은 모두 서면이나 말로 전달하는 세바스 찬이 메시지를 보내다니 무슨 일이지?
엘리스는 의문을 가진 채 메시지를 확인했다.
- 세바스 찬 : 아가씨. 며칠 전에 집을 비웠던 옆집에 방금…
"응?"
메시지를 읽던 엘리스는 미간을 좁혔다가,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호연이 옆 집으로 이사했다는 너무 뜬금없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세바스 찬이 거짓말을 할 리는 없으니 사실이겠지.
그가 이사한다는 말을 했던 기억도 난다.
그렇다면 왜 이호연은 자신의 옆집으로 이사한 걸까.
엘리스의 고민은 짧았다. 그녀는 작게 미소지었다.
"어차피 이렇게 할 거면서."
스마트 워치를 끈 엘리스는 주먹을 쥐고 이불을 덮었다.
아무 생각을 안하려해도, 입꼬리가 알아서 올라갔다.
엘리스는 올라가는 입꼬리를 붙잡으며 생각했다.
'그래.바람둥이가 하는 밀당 치고는 나쁘지 않았어.'
결국은 포기하는구나.
엘리스는 이호연에게 보내려던 메시지를 취소했다.
이미 자신보다 그 쪽이 더 흥분한 것 같았으니까.
지금까지 했던 게 밀당이라고 생각하면… 귀엽게 봐 줄 수 있지. 응.
"후후, 훗. 흐흣…."
조용히 키득거리며, 엘리스는 이불을 꽉 끌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