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87 287화. 지옥의 망나니 소환 계약서 (2)
아카데미 상가의 뒷골목.
나는 손에 든 보라색 천을 유심히 살폈다.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지만, 분명 원작에서 본 기억이 있다.
'판데믹의 증표.'
그 중에서도 하위 멤버가 가질 수 있는 증표다.
간부들은 이런 증표를 가지고 다니는 것 자체가 특정당할 수 있으니 자제하는 편이다.
"대체 뭐야."
이건 너무… 이상하잖아.
나는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아무리 하위 멤버라고 해도 그렇지.
"으, 으으…."
이런 떨거지가 판데믹의 증표를 가지고 있다니?
누가 보면 판데믹이 동네 깡패 갱단인 줄 알겠어.
나는 엎드려 있는 남자의 옆구리를 발로 툭툭 찼다.
"야. 이거 어디서 났어."
눈 앞에 보라색 천을 휘휘 흔들면서.
"죄, 죄송합니다. 죄송… 끄그그그극-."
하지만 아직도 폭행의 트라우마가 남아있는 지 남자는 영 내 말을 듣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몸에 약한 전류를 흘리자 그제야 되풀이하던 사과를 멈췄다.
"이거 어디서 났냐고. 말 안 하면 진짜 죽인다."
"저, 저도 잘 모릅니다! 어제 어떤 놈이 주고갔는데… 뒷골목의 조직들이 그걸 보기만 하면 벌벌 떨어서 가지고 다녔을 뿐입니다!"
"그니까 그놈들이 누군데. 참 답답하게 구네."
나는 손 위에 마력을 끌어올렸다.
일반인도 볼 수 있도록 불을 활활 태웠다.
"모릅니다! 몰라요! 그냥 암시장에서 지옥 소환 계약서를 찾으라는 말만 해서…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냥 그걸로 돈이나 뜯었을 뿐입니다. 정말입니다. 그런 물건인 줄 알았다면… 크흐흑."
"암시장에서 지옥 소환 계약서…?"
판데믹이 지옥 소환 계약서를 왜 찾고 있는 거야.
지옥 소환 계약서….
지옥의 소환 계약서….
혹시, [지옥의 망나니 소환 계약서]?
당연하게도, 암시장에서 구매한 [지옥의 망나니 소환 계약서]가 떠올랐다.
"산 곳이 부티앤티크였나."
들린 지 꽤 오래 되었지만, 또렷히 기억했다.
릴리아나를 소환한 [지옥의 망나니 소환 계약서]를 구매한 곳이다.
암시장에서 유일하게 제대로 된 골동품점이라 기억하고 있다.
"… 스읍."
아, 뭔가 불안한데 이거.
사건의 냄새가 난다.
아무리 생각해도 암시장에서 지옥의 계약서라면 거기밖에 없다.
판데믹이 계약서를 찾고 있는건가? 어째서?
나는 엎드려서 흐느끼는 사내를 내버려 둔 채 암시장으로 향했다.
다행히 암시장에 들어가는 증표는 항상 휴대하고 다녔다.
기억을 더듬으며 [지옥의 망나니 소환 계약서]를 샀던 골동품점으로 향했다.
그리고 내가 마주한 건, 폐허가 된 상점의 터였다.
"… 뭔데."
난 심한 이질감을 느꼈다.
지나가다 부서진 건물을 보면, 이게 얼마나 오래 됐는지 대충은 알 수 있다.
부러진 목제 탁자의 잔가지들이 제대로 남아있었고, 돈이 될만한 물건들도 몇 개 남아있었다.
이곳은 암시장. 돈이 되는 것이라면 뭐든 가져가는 동네다.
그 말은 즉 이런 꼴을 당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
주변을 둘러보자 맞은 편에 있는 가게에서, 무료한 표정으로 부채질하는 남자 상인을 발견했다.
나는 그 쪽으로 다가갔다.
"… 뭐 좀 물어봐도 될까요?"
"어. 사고 싶은 게 있으면 얼마든지 물어봐."
사내의 가게는 비타민 같은 걸 파는 것 같았는데, 내 목적은 그게 아니었다.
"다름이 아니고, 저쪽에서 장사하던 노인이 있었는데 어디 간 지 아세요?"
"아, 저기? 어제였나. 무섭게 생긴 남자들이 몰려와서 가게를 엎어버리던데."
"… 주인장은요?"
"몰라? 죽었는지 어쨌는지. 숨긴 계약서를 내놓으라고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는데, 그 노인네도 질기더라고. 그런 물건은 모른다고 하다가 결국 끌려갔어. 사기라도 쳤나 보지."
"계약서… 혹시 지옥의 소환 계약서, 뭐 이런 단어가 나왔나요?"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됐으니까 이거나 하나 사가지? 비타민이야. 몸에 아주 좋아."
역시, 내가 사간 [지옥의 망나니 소환 계약서]가 맞는 것 같은데.
"…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혀를 차는 남자를 뒤로하고 암시장을 빠져나왔다.
바깥에 나와서 시원한 공기를 맡으며 깡패와 상인의 말을 되새겼다.
"지옥의 망나니 소환 계약서…."
그놈들이 찾던 건 내가 사간 계약서가 분명해보였다. 내가 몇 달전에 와서 살폈을 때 쓸만할 물건은 그것밖에 없었으니까.
내가 보지 못한 몇 달 사이에 엄청난 물건이 들어왔고, 하필이면 그 물건이 판데믹이 노리는 물건이라는 가정보다는 이 쪽이 훨씬 가능성이 높겠지.
나 때문에 노인이 끌려간 건 정말 슬픈 일이지만… 일단 그렇게 된 이유가 중요하다.
일단 정보를 정리해보면, 지옥과 판데믹은 분명 관련이 있다.
어째선지 몰라도 지옥의 계약서를 가지고 있는 판데믹의 간부가 있었고, 판데믹이 소환한 사도는 지옥 출신이라고 했으니 빼도박도 못한다.
그런데, 판데믹에서 그 계약서는 왜 찾는 걸까.
애초에 이런 정보는 어디서 얻은 걸까.
골동품이라면 이리저리 돌아다녀서 루트를 추적하기도 어려웠을거다.
특히 저 골동품점까지 추적했다면 정말 엄청난 노력을 했다는 말이다.
그게 그만큼의 가치가 있다고?
"… 아무것도 확실하지가 않아."
나는 스마트 워치로 릴리아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 나 : 릴리아나. 너 집에 있냐?
- 릴리아나 : 응. 스카웃이랑 다희는 다은이 데리러 갔어. 저녁 먹고 온대서 나는 방송하려고. 왜?
- 나 : 거기 가만히 기다리고 있어.
하나 장담할 수 있는건, 판데믹에서 찾고 있던게 정말 [지옥의 망나니 소환 계약서]라면.
분명히 뭔가 있었다.
… 릴리아나에게.
*
나는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가슴속에 이상한 불안함이 가득 찼다.
릴리아나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그녀는 판데믹에게 중요한 요소일 가능성이 있다.
기숙사로 돌아왔다.
띠링-
안으로 들어가자, 방송한다고 했던 릴리아나는 콧노래를 부르며 짐을 챙기고 있었다.
"왔구나?"
릴리아나는 날 보며 언제나처럼 반겨줬다.
"방송은?"
"생각해보니 주말이라서 쉬려구! 그리고 이사 준비해야 하거든!"
"… 그래."
나는 싱글벙글 웃고 있는 릴리아나의 옆 소파에 앉아 마음을 정리했다.
릴리아나에겐 잘못이… 없겠지.
아마 그렇다고 생각한다.
알고 보니 릴리아나가 마왕의 흑막.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나진 않을 거다.
하지만 릴리아나를 소환했던 [지옥의 망나니 소환 계약서]에는 분명히 뭔가 있단 말이야.
나는 조심스럽게 가방에 과자를 쑤셔넣고 있는 릴리아나에게 말을 걸었다.
"릴리아나. 너 나랑 계약했을 때 있잖아."
"응? 아, 소환 계약 말하는 거야?"
"그래. 그거. 그때 혹시 어떻게 계약해서 지구에 온 건지 기억해?"
"계약? 글쎄. 집에서 게임하다가 갑자기 끌려온 건뎅."
릴리아나는 별 생각 없는 듯 하품하며 대답했다.
"… 계약하기 전에는 뭐 했다고 했었지?"
"게임했다니까."
"계속 게임만 하진 않았을 거 아니야. 게임을 안 할 때는?"
"으음… 잘 기억이 안 나는데."
릴리아나는 평소처럼 대답했다.
기억이 잘 안난다.
그래. 이 기억이 안난다는 거.
내가 사적인 질문을 하면 항상 이렇게 대답했다.
사실 추궁하지않아서 그렇지, 더럽게 수상했다.
릴리아나니까.
상대가 그 순수한 릴리아나라서 가만히 있었을 뿐이다.
지금은 그렇게 넘어갈 상황이 아니지.
나는 아무 일도 아닌 듯 연기하며 말을 이었다.
"지옥에 학교는 있지?"
"당연하지. 여기도 의무교육이 있어. 너무 무시하지 말라구."
"그럼, 네 어린 시절이나 학교 다니던 때. 기억 안 나?"
"몰랑. 기억 안 난다니까."
릴리아나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마치 이 주제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아 보였다.
"…."
아니, 이상하잖아.
어떻게 그걸 기억 못 해.
몇 년이나 히키코모리 생활을 했다 해도 그건 너무 이상했다.
내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릴리아나가 말했던 지옥의 모습과 릴리아나의 행동을 보면 사실 지옥이나 지구나 생활 양식에 있어서 큰 차이가 없었다.
그런데도 기억이 안 난다고 하는 거다.
"릴리아나."
난 다시 릴리아나를 불렀다.
릴리아나는 계속되는 이상한 질문에 귀찮은 듯 대답했다.
"나 짐 싸야 해. 이제 말 걸지 마! 바쁘다구."
"… 이제부터 내가 하는 말에 무조건 거짓말 없이 대답해."
오랜만에, 말에 마력을 담았다. 계약서의 명령을 사용할 시간이다.
릴리아나는 내가 하는 말에 절대 거역할 수 없다.
계약서는 당연하게도 작동중이었다.
[제 1 조. 계약자는 소환수에게 약한 명령을 내릴 수 있으며, 소환수는 그에 따라야 한다. 다만, 소환수와의 유대가 깊어 질수록 더 강한 명령권을 가진다.]
나와 릴리아나는 이 정도의 제약을 쉽게 걸 정도로 유대 관계를 만들었다.
그렇기에 약간은 가슴이 아팠다.
억지로 이런 방법을 써야한다는 사실이.
"윽…?"
릴리아나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아무래도 지금까지 했던 제약 중에 제일 강했던 제약이긴 하지.
당황한 듯 날 바라보는 릴리아나는,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란 것 같았다.
"왜, 왜 그래. 나, 나는 그냥 짐을 싸려고…."
"내가 묻는 말에만 대답해. 릴리아나, 네 어린 시절 기억에 대해 물으면 왜 대답을 피하는 거야?"
이번에는 꼭 대답을 들어야겠다.
언제까지 도망만 다닐 수는 없으니까.
"기억. 기억이… 안 난다니까. 아, 아…."
"릴리아나…?"
릴리아나는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머리카락을 쥐어잡았다.
아무리 제약을 걸었다고 해도, 너무 거센 반응이었다.
게다가 거짓말하지 말라고 했는데도 기억이 안 난다는 말을 반복했다.
반발 작용도 없었으니, 정말로 거짓말이 아니라는 뜻이다.
"진짜, 진짜로. 기억이 안나… 미, 미안…."
털썩-
입술을 덜덜거리던 릴리아나는, 말을 더듬다가 그대로 혼절하며 바닥에 쓰러졌다.
마치 인형의 실이 끊어지듯 툭- 하며 쓰러졌다.
"릴리아나, 릴리아나?!"
연기는 아니었다.
내가 옆에서 확실히 지켜보고 있었으니까.
릴리아나의 맥박을 재보니 다행히 기절한 것뿐이었다. 목숨에 지장은 없었다.
"… 어째서?"
하지만 내 의문은 전혀 풀리지 않았다.
릴리아나는 왜 어린 시절을 기억하지 못하는 걸까.
무슨 이유 때문에 혼절한 걸까.
강한 트라우마?
만약 그런 트라우마가 있었더라도 솔직하게 말하는 게 내 명령이었다.
어쩌면 너무 강한 트라우마 때문에 기억을 스스로 닫았을 가능성도 조금은 있지만… 내 감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있었다.
나는 고통스러운 듯 눈을 찌푸린 릴리아나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그렇다면 왜 이런 반응이… 어?"
내가 의문을 품고 있던 그때, 릴리아나의 머리에서 아주 약한 마력 반응이 느껴졌다.
아니, 마력이 아니었다.
지옥의 마력.
극소량이었지만… 분명히 혼절한 릴리아나의 머리에서 지옥의 마력이 느껴졌다.
그리고 내가 그 흔적을 인지하자마자 순식간에 흩어졌다.
마치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릴리아나는 다시 평온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
나는 눈을 감은 채 색색 자고있는 릴리아나를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이 상황을 해결하려면 결국 지옥과 연결되야할 것 같았다.
처음 릴리아나를 만났던 [지옥의 망나니 소환 계약서]에 있던 선택지들. 나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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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옥의 망나니 소환 계약서 ]
지옥의 망나니들을 불러낸 자가 당신인가?
4마리의 망나니 중 하나를 골라라.
1. 인육에 미친 정육점 사장 악마 루시퍼
2. 지옥 아카데미 아다폭격기 금태양 인큐버스
3. 20년 째 F급 용병. 백전백패 노장의 저력 켄타우로스
4. 50살째 노처녀 거미줄치기 장인 서큐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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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번째 선택지인 '20년 째 F급 용병. 백전 백패의 노장의 저력 켄타우로스.'
아마 저 녀석이, 프랑스에 나타난 켄타우로스겠지.
그렇다면 판데믹에서 [지옥의 망나니 소환 계약서]를 찾는 것도 납득할 수 있다.
릴리아나와 연관이 없는 지옥과의 연결구.
"역시 켄타우로스… 밖에 없나."
켄타우로스를 만난다면, 이 답답한 감정이 조금은 풀릴 것 같았다.
그런 느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