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6화 (286/648)

EP.286 286화. 지옥의 망나니 소환 계약서

잠시 질척한 분위기가 되었는데도, 마법사 두 명이 모인 이상 대화의 주제는 다시 마법으로 통한다.

물론 나는 좀 더 야릇한 분위기를 이어가도 좋았다. 아니 원했다.

그런데 임솔 교수님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작은 여지를 준 후에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그럼 방금 대련 복기나 해볼까?"

"… 네. 좋네요."

나는 주섬주섬 옷가지를 챙겨입었다.

여기서 끝난 게 아쉽긴 하지만 동기부여는 확실하네.

임솔 교수님의 표정을 보면 내가 떼를 쓴다고 시켜줄 표정이 아니다.

정공법으로 공략할 수밖에…!

그리고 현실을 좀 깨달았다.

역시 강자들에 비하면 아직 한참 모자라구나.

물론 히로인과의 관계도 중요한데…. 적당히 중간선을 찾아야지.

"일단 초반부는 나쁘지 않았어. 중요한 건 마지막이긴 하지만."

임솔은 혼자 중얼중얼거리더니 무언가를 써 내려갔다.

슬쩍 보니 이상한 계산식 같은 걸 쓰고 있었다.

나는 저런 거 모르는데.

내 마법에 계산 같은 건 없다.

재능과 특전, 그리고 감에 의존하는 야매 법사거든.

임솔은 바둑을 복기하는 것처럼 서로 주고받은 마법들을 홀로그램 모니터에 입력했다.

솔직히 대련의 앞부분은 별 필요 없다.

날아오는 마법을 최대한 막거나 피하며 임솔의 정신 공격계 마법을 기다렸을 뿐이니까.

"교수님, 솔직히 마지막은 좋았죠? 체급 차이가 있어서 그렇지."

내가 생각해도 마지막 노림수는 좋았다.

"으음, 그렇지. 하지만 결정력이 부족했어. 나였으면 흙이 아니라 물을 끌어왔을 것 같아. 그리고 블리자드나 체인 라이트닝으로 마무리했을 거야."

"그래요? 리버스 그라운드와 컴프레션도 괜찮지 않나?"

교수님이 말한 마법들도 좋지만, 파괴력은 오히려 이쪽이 좋지 않은가 싶은데.

하지만 임솔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보다 강한 상대에게 틈을 잡았으면, 더 빠르게 공격했어야 했어. 리버스 그라운드와 컴프레션은 상대에게 시간을 너무 많이 주거든."

"아… 그렇구나."

"응. 만약 다른 방식으로 공격했다면 조금이라도 피해를 줄 가능성이 높아졌겠지."

"… 그것도 무조건 입는 건 아닌가 보네요."

"당연하지. 네 스승님인데."

임솔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무튼, 한 방에 쓰러뜨리려고 한 게 문제였네.

역시 나보다 강한 사람과 싸워야 더 성장할 수 있다.

짧은 대련 한 번으로도 실력이 늘어나는 게 실시간으로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어떻게 한 거야?"

마음속으로 대련을 되뇌고 있는데, 임솔이 모니터를 보며 물었다.

"어떤 거요?"

"나이트 메어를 통과한 거. 마력이 느껴지질 않아서 대비를 늦게 했거든. 그리고 바인드로 내 쉴드를 무력화한 것도. 그 두 개가 아니었으면 틈이 안 생겼을 텐데."

내 숨겨놓은 수를 모두 꺼낸 건데 틈이 안 생기면 그것도 문제다.

그러면 이 험난한 세상을 어떻게 버티겠어.

'근데 이거 다 말해줘도 되나?'

이번은 정말 전력을 다한 대련이었다.

비밀을 말해주면 내 숨겨놓은 수를 모두 공개하는 거다.

'괜찮겠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우리 교수님인데.

길게 고민하지 않았다. 교수님을 안 믿으면 누굴 믿겠어.

나는 바로 말을 이었다.

"음. 그건 그냥 제 필살기 같은 거예요. 정신계 마법을 조건 없이 무시하는 스킬이 있거든요. 그리고 바인드는… 마법을 재구성한 거에요."

"재구성…? 혹시 마법을 역산했다가 다시 발현한 거야? 그렇다기엔 속도가 너무 빨랐는데."

임솔 교수님은 내 말을 듣고 눈을 찌푸렸다.

그야 당연하지. 그게 아니니까.

"스읍. 비슷하긴 한데요. 그렇게 하면 너무 느려서 실전성이 없잖아요?"

"그렇지."

"그래서 마법의 구조 자체를… 변환시키는 거예요. 마법진을 역산하는 것과 비슷한데…."

나는 손에 마법진 하나를 만들어냈다.

아주 단순한 파이어볼 마법진.

하지만 그 마법진은 곧 가장자리부터 천천히 변화하기 시작했다.

[전투 감각]도 발동하지 않았고, [개안], [블러드 비트] 같은 도핑스킬이 하나도 없어서 속도는 꽤 느렸지만 임솔 교수가 변화를 인지하기엔 충분했다.

어느새 라이트닝 볼트로 변한 마법진을 보며 임솔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 응?"

꿈벅. 꿈벅.

가만히 눈을 꿈벅거리던 임솔은 곧 내 팔을 잡아왔다.

"뭐야. 다시 보여줘. 다시!"

"얼마든지 보여드릴게요. 진정하세요."

나는 웃으며 다시 마력을 움직였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마법진의 변화를 보고 나서야 교수님은 만족한 듯 내게서 떨어졌다.

그리곤 손으로 입을 가리며 중얼거렸다.

"… 이해를 못 하겠어."

"그래요?"

만족해서 떨어진 줄 알았는데 도저히 알 수 없어서 포기한 거였구나.

하긴, 내가 지금 한 행동은 맨손으로 곡괭이를 구부려 검을 만드는 것과 같은 행동이다.

내 필살기니까.

"교수님도 그거나 알려주면 안 돼요? 몸 뒤에 나오는 큰 마법진."

저번 테러 때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렇고 그 거대한 마법진이 나타나는 순간 임솔에게서 느껴지는 위엄 자체가 달라진다.

"그건… 내 고유 마법이야. 마법진에서 나오는 마력으로 주변 영역을 압박하는 거지. 나중에 알려줄게."

"쓸 수 있을지는 모르겠는데… 저야 좋죠."

저건 임솔의 압도적인 마력량이 있기에 가능한 마법이다.

내가 배운다고 잘 쓸 수 있을지는 모르겠네.

"으음… 신기하네. 마법을 바꾸는 건 어떻게 한 거지."

난 아직도 내 마법진 재구축을 신경 쓰는 임솔을 보며 말을 걸었다.

약간 텐션이 떨어진 것 같았다. 괜히 미안하네.

"교수님은 마력 차단 결계 같은 거 안 두려우세요?"

계속 궁금했던 거다.

나도 그렇지만, 마법이 모든 전투 수단인 임솔도 분명 불안할 텐데 이 사람은 참 태평하단 말이야.

"글쎄. 지금까지 살면서 마법으로 극복하지 못한 게 없어서. 몇 번이나 그런 경고를 들었지만 그 경고가 들어맞은 적이 없어."

"… 그러다가 한 번 훅 가면 큰일 나잖아요. 교수님 진짜 큰일 날 수도 있어요."

나는 원작에서의 기억을 되짚었다.

임솔이 원작에서 비중이 적다보니 등장 자체는 거의 없지만, 스쳐 지나가며 언급은 자주 되었다.

특히 배드엔딩.

주인공이 죽거나 히로인이 죽는 루트.

그 중 몇 개는 분명 임솔이 죽는 루트도 있었다.

예쁜 캐릭터이기도 했고, 세계관 상 가장 강한 마법사가 죽어서 커뮤니티에서도 언급되었던 기억이 있다.

물론 절대 배드엔딩을 낼 생각은 없지만, 임솔 교수님이 죽을 가능성이 0%는 아니란거다.

하지만 임솔은 내 마음도 모르고 그저 웃으며 내 손등을 쓰다듬었다.

"너야말로 위험한 거 아니야? 방금 대련에서 쓴 게 필살기였다면서. 나한테 말해줘도 돼? 내가 배신하면 어쩌려고."

저 소악마같은 웃음을 보면 당연히 장난이겠지만, 나도 당연히 생각해놓은 바가 있다.

"교수님이 배신하면 죽어야죠. 뭐 어쩌겠어요."

죽어야지.

장난이 아니다. 진짜 죽어야한다.

임솔 교수를 이렇게 믿는 데는 이유가 있다.

호감도가 92나 되고, 원작에서도 한 번도 배신행위를 하지 않은 캐릭터다

임솔이 배신한다면, 내가 아는 정보가 다 쓸모없다는 소리다.

그럼 죽어야지 뭐. 어쩌겠어.

물론, 내가 지금까지 봐온 임솔 교수님 자체를 믿는 마음도 매우 크다.

"…."

"아무튼. 조심하세요. 교수님. 세상이 워낙 흉흉하잖아요. 특히 예쁜 교수님은 더 위험해요.

난 진지하게 말하며 눈을 마주쳤는데, 임솔 교수님의 얼굴은 아까 내 마법을 봤을 때 보다 상기되어있었다.

"… 하여튼 말은 잘해요. 하아."

임솔은 내 몸을 쓰다듬으며 웃더니, 말을 이었다.

"그럼 네가 구해줘. 알겠지?"

"… 당연하죠."

내가 있는 한 절대 교수님이 죽을 일은 없을 거다.

*

"슬슬 가볼게요."

"응. 다음에 연락해. 마법을 좀 더 봐야겠어."

우리는 점심 식사까지 같이 하고 작별 인사를 했다.

뭔가 내 마법이 교수님의 열정을 더 불태운 것 같다.

"아, 방학에는 시간 비워놔?"

인사도 했으니 나가려 했는데, 임솔의 말이 날 붙잡았다.

"네?"

방학.

기말고사가 끝나면 2학기가 되기 전에 방학에 들어간다.

딱히 일정이 없어서 편히 쉬다가 마법 연구도 좀 하고 히로인들하고 놀려고 했는데….

"연구 끝났다고 했잖아."

"아, 그러셨죠."

"그럼 발표해야지."

"… 어디서요?"

"미국. 마법사 협회로."

프랑스 다음엔 미국이구나. 스케일 참 크네.

*

연구실을 나와 바깥을 걸었다.

"일정이 뭐 이렇게 많아."

대체 왜 이렇게 바쁜 거지?

마법사 협회는 또 뭐야. 그거 설정에나 있는 거잖아.

나도 평범하게 여자랑 꽁냥거리면서 살 순 없을까.

빙의한 소설을 보면 다 그러던데. 나만 맨날 구르는 것 같다.

'이제 뭐 할까.'

일정이 많긴 하지만, 정작 오늘은 할 일이 없었다.

엘리스에게 가기까지 시간이 꽤 남아있었다.

'기숙사에 가 있어야하나.'

왔다 갔다 하는 게 귀찮아서 웬만하면 바깥에 있고 싶었는데, 영 할 게 없다.

주말이라 만날 사람도 애매하고.

집 가기 전에 먹을 거나 사서 가야겠다.

치킨이라도 사가면 좋아하겠지.

나는 아카데미 상가를 걸어가며 주변을 살폈다.

'분명 이쪽에 치킨집이 있었는데. 망했나?'

기억이 틀린 건 아닐 테니 주변 지리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골목 안쪽까지 확인하며 걷고 있는데, 내 귀에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퍽. 퍽.

딱딱한 주먹이 피부를 때리는 기분 나쁜 소리.

조금 물기도 느껴지는 게, 맞는 사람은 피를 흘리는 것 같았다.

- 사, 살려주세요. 제발….

- 야 이 개새끼야. 내가 몇 번이나 말해 돈을 내라고! 돈을…!

소리가 들리는 골목의 안쪽을 자세히 들여다보자 누워있는 남자에게 발길질하는 남자가 있었다.

"허…."

아니 겨우 저 정도 골목에서 돈을 뜯고 있다고?

큰길과 얼마 차이도 안 나잖아.

쩝.

나는 골목으로 들어갔다.

아래에서 맞고 있는 남자와는 일면식도 없지만, 내 눈에 들어왔는데 그냥 버리고 가기엔 내 심성이 너무 착했다.

'신기하네.'

조금밖에 걷지 않았는데, 공기부터 달랐다.

사람들의 활기가 느껴지던 큰길과는 다르게 뒷골목에서는 칙칙한 분위기가 맴돌았다.

이게 뒷골목의 삶인가.

퍽- 퍽-

기분 나쁜 소리에 점점 가까워지자, 제대로 얼굴이 보였다.

머리를 빡빡 밀은 대머리가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볼이 홀쭉한 남자를 발로 밟고 있었다.

내가 가까이 와도 멈추지 않길래, 귀찮지만 말을 걸었다.

"저기요. 그만 하세요. 사람 죽겠네."

"뭐야? 어린 새끼가…."

퉷-

대머리는 내 앞을 향해 침을 뱉었다.

"하아."

그래. 다 예상했잖아.

말로 해서 안 될 줄 알았어.

나는 천천히 남자들에게 다가갔다.

내가 마법사인 걸 모르는 걸 봐서, 마력을 쓸 필요 없는 떨거지다.

굳이 마력을 끌어올릴 필요는 없겠지.

빠악 -

그리고 순식간에 사내의 배에 주먹을 꽂았다.

아무리 마법사라고 해도, 아카데미 생도가 동네 양아치한테 밀리진 않는다.

"크, 크헉! 히익. 히이이익!"

그리고 배에 주먹 한 대를 맞은 남자는 그대로 허둥지둥 도망쳤다.

"… 뭐야 저 새끼."

난 허무함에 헛웃음을 지었다.

양아치라 그런가 근성이 없네.

"아저씨. 괜찮아요? 빚이라도 졌…."

스윽-

뒤를 돌아보려는데, 내 목에서 스산한 감각이 느껴졌다.

"크크크. 이래서 순진한 생도 애새끼들은 해 먹기가 쉽다니까."

"…."

"어이. 몸 굳은 건 알겠는데, 배에 구멍 나기 싫으면 골목 안으로 들어가자고. 목숨은 살려줄 테니까."

툭- 툭-

거적때기를 뒤집어쓰고 있던 남자는 어느새 내 뒤에 서서 목에 칼을 겨누고 있었다. 그 상태로 종아리를 발로 차며 내 몸을 밀었다.

아마 앞으로 가라는 뜻 같았다.

"… 진짜 별일에 다 휘말리네."

2인조 깡패인가?

하다 하다 이런 새끼들까지 덤비는구나.

"이봐. 내 말이 말 같지가 않아? 당장…."

딱-

나는 귀찮은 표정으로 손가락을 튕겼다.

*

피를 뚝뚝 흘리는 남자는 내 앞에 무릎을 꿇은 채 엎드려있었고, 나는 그 꼴을 내려다봤다.

"커흡… 커흑… 죄, 죄송합니다…."

"앞으로 그렇게 살면 안 된다. 알겠지?"

"죄, 죄송…."

"에휴."

동네 양아치들한테 이렇게까지 심하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생각해보니 칼을 들고 있었잖아.

내가 애매하게 강했으면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좀 많이 때렸다.

"야, 대체 뭔 깡으로 아카데미 상가에서 이러고 있는 거야?"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남자는 내 말에 대답하지도 않고 엎드린 채 연신 허리를 숙여댔다.

아프긴 했나 보네.

툭-

그때, 사내의 품에서 무언가 떨어졌다.

어딘가 익숙한 보라색 천…

"어?"

별 생각없이 시선을 내린 나는, 천을 보고 깜짝 놀라 허리를 숙여 물건을 주웠다.

"야. 이걸 너 같은 새끼가 왜 가지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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