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4화 (284/648)

EP.284 284화. 마법사로서의 길

생각해보면 훈련장에 가는 것도 진짜 오랜만이다.

한참 아카데미 생활을 열심히 할 때는 자주 다녔었는데.

"그때는 참 하루하루가 치열했었지."

딱히 시간이 많이 흐른 건 아니지만, 주변 환경이 너무 빠르게 변해서 벌써 그 시절이 추억이 되어버렸다.

'잠시만.'

나는 훈련장을 향해 가던 발을 멈췄다.

근데 굳이 훈련장에 갈 필요가 있나?

훈련장보다 훨씬 시설이 좋은 곳이 있잖아.

좋은 생각이 나서 스마트 워치를 꺼내 메시지를 보냈다.

- 나 : 교수님. 저 퇴원했어요. 연구실로 찾아가도 되죠?

- 임솔 교수 : 응. 편하게 와~.

"역시 쿨해서 좋다니까."

내가 갈 곳은 바로 임솔 교수의 연구실이다.

2층 전체에 전세를 낸 교수님의 연구실에는 개인 훈련장도 있는데, 거기 시설이 엄청 좋거든.

교수님 얼굴도 볼 겸 가면 좋겠지.

천재 마법사인 우리 임솔 교수님에게 전투 마법도 좀 배울 수 있고.

원래 예쁜 여자랑 있으면 공부도 더 잘되는 법이다.

좋은 점뿐이네.

"아닌가?"

생각해보니 오랜만에 여자들과 노닥거리는 대신 자기 개발 시간을 가지기로 한 거 아니었나?

그렇게 마음먹어놓고 임솔 교수님한테 찾아가는 게 맞는 행동일까.

"가서 딴 짓 안하고 마법 얘기만 하면 되잖아."

고민은 짧았다.

임솔 교수님이랑은 몸을 섞는 사이도 아니니까 다른 걸 하더라도 시간 낭비는 적다.

해봤자 착정 조금 당하겠지. 뭐.

돈 주고도 못 배우는 임솔 교수님의 마법인데, 당보충정도야 얼마든지 해줄 수 있다.

나는 교수님의 연구실이 있는 마도관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저번 테러 때 마력 차단 결계에서 신동민과 버티면서 느낀 게 있다.

내가 의외로 육탄전이 된다는 것.

특전인 [전투 감각] 덕분이다.

───――「 전투 감각 」───――

▶ 고유 권능

▶'전투'라고 판단되는 모든 행위에 보정을 받는다.

'전투'의 위험도가 높을수록 그 효과가 늘어난다.

───――───――───――───――

'전투'에 들어가는 순간, 말 그대로 모든 행위에 보정을 받는다.

마력, 공격, 수비, 반응 속도, 심지어 운까지.

게다가 시력을 강화해 마나가 깃든 존재와 형상을 인식하는 능력을 극대화하는 [개안].

사실 검사로서 조건도 충분하다 못해 넘친다.

마법사를 시작한 계기 자체가 안전하게 싸우고 싶어서인데, 막상 살아보니 안전하긴 개뿔 검사든 마법사든 다 위험했다.

이럴거면 몸을 지킬 수단을 늘리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다은이한테 검술도 좀 배워볼까.'

가까운 곳에 좋은 스승도 있으니 시도는 해봐야지. 손해보는 것도 없다.

여러 잡생각을 하면서 걷다 보니 어느새 눈앞에 마도관이 보였다.

근접 전투에 대한 생각은 잠시 구석에 미뤄두자.

일단은 하던 마법부터 잘해야겠지.

'생각해보니 교수님도 내가 모든 속성을 쓰는 거 모르는구나.'

목적 중 하나가 전투 마법에 대해서 배우는건데, 정작 속성을 공개하지 않았다.

아직도 교수님은 날 이중 속성으로 알고 있겠지.

진짜 열심히 꼭꼭 숨겨놨으니 당연한 일이다.

'교수님한테는 공개해도 되지 않을까?'

교수님이 비밀을 유출할 걱정은 당연히 없다.

지금까지 임솔을 지켜본 결과 그럴 사람은 아니니까.

하지만 중요할 때 사용하려고 미루고 미루다보니, 어느새 서로 믿음이 형성된 후에도 말하기 애매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뜬금없이 '나 전 속성 마법 사용 가능해요! 대단하죠?!' 이럴 수도 없잖아.

다른 히로인들에게 말하지 않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말할 상황이 없다.

띵동-

어느새 엘리베이터가 2층에 도착했다.

일단은 교수님을 보고 생각하자.

익숙한 구조의 연구실을 지나 안쪽으로 들어가니 임솔 교수의 모습이 보였다.

언제나처럼 편한 연구용 복장을 하고 있는 교수님은 비커와 시약 같은 거로 실험을 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응, 웬 일이야? 퇴원하자마자 찾아오고."

임솔은 눈을 비커에 고정한 채 날 맞이했다. 실험에 집중할 때는 항상 저런 모습이다.

"제가 뭐 일이 있어야만 오는 건 아니잖아요."

"그건 아니지만, 일이 있을 때만 왔잖아. 오늘은 아니야?"

"… 고민이 있어서 오긴 했는데요."

이 사람 눈치가 왜 이렇게 빠르지.

나는 그럴 줄 알았다는 임솔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최근에 엮였던 사건들과 느낀 점.

마법에 대한 성과.

마법사의 전투에 대한 감상.

딱히 정해진 주제 없이 생각나는 대로 말했는데, 교수님은 지루하다는 티도 안내고 끝까지 경청해줬다.

내 말이 끝나고서 임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강해지고 싶다는 거네?"

"어, 네. 맞아요. 강해지고 싶습니다. 스승님!"

사실 그것말고도 여러 문제가 있지만… 결국강해지면 해결되는 문제긴 하다.

임솔은 마법사답게 내 말의 중요한 부분을 바로 캐치해줬다.

"지금도 네 나이에 비해 충분히 강하지 않아?"

"음, 이게, '나는 아직 배고프다.' 같은 느낌이거든요. 요즘 테러도 자주 일어나니까 부담도 되고…. 이번에 마력 차단 결계같은 걸 생각해보면 불안하기도 하고요."

"마력 차단 결계… 그렇네. 너는 그럴 수 있겠다."

마력 차단 결계.

생각만해도 열받네.

대체 그 말도 안 되는 설정은 어디서 튀어나온 건지 모르겠다.

원작에 그딴 게 나왔으면 욕이란 욕은 다 먹었을 텐데.

내 말을 들은 임솔은 알겠다는 제스처를 취하더니 팔짱을 끼면서 실험 도구들을 내려놨다.

"좋은 게 있어. 사실 혹시라도 네가 자만심에 빠지면 억지로 하려고 했는데… 그렇게 말한다면 어쩔 수 없지. 따라와."

임솔은 그대로 연구실을 나갔고, 나는 그 뒤를 따랐다.

얼마 걷지 않아 도착한 곳은 마법 훈련장.

임솔의 개인 훈련장이다.

역시 잘나가는 교수답게 훈련장도 혼자 쓰기엔 엄청나게 넓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데, 역시 직접 보여주시는 건가요?"

마법사의 전투 방식.

저번에 한 번 본 적이 있지만 직접 가르쳐주는 것과 보는 건 천지차이다.

임솔의 전투를 배울 수 있다면 그거야말로….

"아니, 대련이야."

쿠우웅-

대련장 주변의 땅이 울리기 시작했다.

교수님에게서 새어 나오는 마나가 주변에 퍼지면서 일어난 현상이었다.

나는 뜬금없이 마력을 일으키는 교수님을 보며 당황했다.

"… 갑자기요?"

"응. 마법사의 전투 방식은 서로 공유하기 힘들어. 특히 나랑 너 같은 천재는 다른 사람의 방식을 배우는 것보다 네가 만들어나가는 게 나아. 나는 그 버릇을 고치느라 시간을 많이 썼거든"

"그것참 감사한 말이긴 한데요…. 아까 제가 자만심에 빠질 때 대련한다고 한 거 아니었어요?"

말은 참 청산유수인데, 그냥 나 패고 싶어서 저러는 건 아니겠지?

내가 자만심에 빠지면 대련으로 참교육하겠다는 거잖아.

"완전히 진심으로 가진 않을 거니까, 마음 편히 할 수 있는 대로 해봐."

임솔은 허공을 손가락으로 건드리더니 대련의 설정을 마쳤다.

동시에 내 몸에 얇은 마나의 막이 쳐졌다.

아마 생명 보호 시스템 같은 거겠지.

"…."

어쩌다 보니 대련이 되어버렸네.

물론 이런 경험은 당연히 좋지만… 이러면 진짜 말해야겠는데.

솔직히 내가 전력을 다한다고 해서 교수님을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은 안 든다.

아직 교수님의 허리도 못 따라간 느낌이 들거든.

하지만 이기지 못하더라도 전력을 다해야 제대로 된 조언을 받을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선 내 비밀부터 털어놔야겠지.

내가 솔직히 말하겠다고 마음먹은 순간.

교수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이래도 안 말할 거야?"

"네?"

"아까부터 계속 고민하고 있었잖아. 슬슬 말할 때가 된 거 아니야?"

"… 눈치는 참 빠르시네요."

씨익 웃으며 눈을 빛내는 교수님을 보니 내 마음 속이 다 들킨 기분이다.

"당연하지. 눈칫밥을 얼마나 먹었는데."

쩝.

나는 고민을 멈췄다.

마침 이렇게 판이 깔렸으니 말하긴 좋네.

임솔 교수님이라면 믿고 말할 수 있으니 이번 기회에 말하자.

"놀라시면 안 돼요?"

"마법에 관련된 거야?"

"네."

"흐음… 뭐 엄청난 수식이라도 알아 왔어?"

"… 그런 건 아니고요. 사실 지금까지 교수님한테 거짓말을 하고 있었거든요…."

이게 참 뭐랄까….

좀 미안한 느낌이다.

그래도 교수와 제자라고 꽤 오래 관계를 맺었는데, 이제야 비밀을 고백하는 거니까.

"이중 속성에 관련된 일인가보네?"

"어?"

나는 순간 떨리는 눈동자를 감추지 못했다.

뭐야. 이 사람 어떻게 알아.

내 놀란 시선을 받은 임솔은 살짝 웃으며 나와 눈을 마주쳤다.

"이제야 고백해주는구나. 사실 알고 있었어."

"허어…."

이게 천재 마법사 임솔이구나.

말하지도 않았는데 속성까지 알고 있다니….

나는 머릿속에서 이미 최상위였던 임솔의 평가를 한 단계 더 높였다.

임솔은 어벙벙한 표정의 나와 눈을 마주치더니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리곤 조용히 속삭였다.

"호연이 너… 삼중 속성이잖아."

"……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저번 축제 테러에서 명예관을 무너뜨렸을 때, 사실 봤거든. 본 사람은 나랑 예지밖에 없으니까 걱정 안 해도 돼. 철혈 길드의 민예지 알지?"

???

나는 허무한 표정으로 임솔을 바라봤다.

엄청 자애로운 미소를 짓고서, '이제라도 말해줘서 고맙다. 제자야. 아주 큰 결심이었겠구나…' 뭐 이런 표정이었다.

전혀 그런 거 아닌데요. 완전 잘못 짚으셨는데.

나는 다시 임솔의 단계를 낮췄다.

'축제라고?'

생각해보니 아카데미의 명예관에 있는 아티팩트를 이용한 테러를 막은 적이 있었지.

거대한 건물에 있는 아티팩트를 모두 갈아버리기 위해 스파이럴에 바람 속성을 부여했었다.

아무도 못 본 줄 알았는데, 들켰구나.

"음, 교수님. 사실은 그게 아니에요."

아직도 귀여운 제자를 보는 눈으로 날 보는 임솔의 손을 잡고, 내 어깨에서 떼어놨다.

그래도 지금까지 내 비밀을 지켜준 걸 보니 교수님에 대한 믿음이 더 커졌다.

"응?"

나는 임솔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그저 양 손에 마력을 끌어올렸다.

그냥 보여주는 게 낫겠지.

파지직-

왼손에는 내 손가락을 따라 전격 마법이 생겨났고, 오른손에는 손바닥 위에 작은 물보라가 휘몰아쳤다.

"……… 히끅."

동시에, 숨을 들이키는 소리와 함께 임솔의 웃는 표정이 사라졌다.

대신 입을 벌리고 눈을 크게 뜨는, 한 번도 보지 못한 표정으로 변했다.

"… 괜찮으시죠?"

임솔은 내 말에도 대답하지 않고 눈동자를 굴리며 내 손을 바라봤다.

하긴 지금까지 삼중 속성인 줄 알고 제자의 비밀을 지켜주기 위해 마음속에 담아놨던 교수님의 입장에서 얼마나 당황스러울까.

삼중 속성도 엄청난 비밀인데, 전 속성 사용가능이라니.

나는 임솔을 이해하며 말을 이었다.

"사실 너무 많은 관심을 받는 게 두려워서 거짓말하고 있었어요. 그래도 지금 교수님한테 제일 먼저 말 한 거니까 봐주실꺼죠?"

역시 대답은 없었다.

어지간히 놀라긴 했나 보네.

나는 손을 털어내며 마법을 지웠고,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임솔은 나와 눈을 마주쳤다.

"교수님. 정신 차리세요."

"어, 어…. 응. 미안. …… 혹시 언제부터 모든 속성의 마법을 사용했어?"

임솔의 얼굴은 약간 상기되어 있었다.

창피하다기보단… 오히려 흥분한 것 같았다.

"처음부터죠. 마법을 쓸 수 있을 때부터 가능했어요."

세계에 유일한 전 속성 마법사인 임솔.

그녀가 처음부터 가능했으니, 나도 그렇다고 말해야 옳다.

"하, 하아…."

임솔은 손을 부르르 떨더니 내 양팔을 꽉 잡았다.

"역시 내가 틀리지 않았어."

"교수님?"

"기억해? 처음 만났을 때… 내가 엄청나게 달라붙었잖아."

"확실히, 그랬었죠."

생각해보면 조금 이상하긴 했다.

내가 지금까지 본 임솔 교수님의 성격과는 조금 달랐으니까.

마법에 있어서는 누구보다 앞서고 있다고 생각하는 교수님이 마법때문에 나한테 매달리다니….이상하잖아.

"그때부터였던 거야. 너한테 끌렸던 게!"

"저한테요…?"

임솔의 눈이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분명 다른 히로인들은 저런 눈으로 변하면 이상한 집착이 생기던데….

★ 히로인 상태창

[임솔]

- [ 호감도 : 92 ]

- [ 성욕 : 55 ]

- [ 식욕 : 30 ]

- [ 피로도 : 70 ]

현재 상태 : 내 운명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던 거였어.

'…?'

나는 갑작스럽게 90대로 훌쩍 뛰어버린 호감도를 보고 눈을 찌푸렸다.

아니, 대체 왜?

웅- 웅- 웅-

정면에서 느껴지는 거대한 압박감에 고개를 들자, 임솔 주변의 공간이 왜곡되고 있었다.

엄청난 양의 마력이 흘러나오면서 공간 자체를 지배하는 거다.

임솔의 입꼬리는 올라가있었다.

내가 거짓말을 한 건 신경도 안쓰는 모양이다.

"취소. 봐주지 않을 테니까, 전력을 다해."

"네?"

"날 이길 수 있도록… 알겠지?"

"아니, 제가 교수님을 어떻게 이겨요!"

"이길 때까지 하면 되잖아."

갑자기 왜 저러는 거야.

처음으로 만난 같은 속성의 마법사가 그렇게 반가웠나?

근데 그거랑 대련이랑 무슨 상관인데?

'… 아, 몰라 죽진 않겠지.'

몸을 두르고 있는 얇은 막은 아직도 건재했다. 죽을 위험이 생기면 알아서 대련장이 멈춰줄거다.

교수님이 저렇게 원하시는데, 제자로서 어울려줘야지.

나는 즐거운 듯 웃고 있는 임솔 교수님을 보며 마력을 끌어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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