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72 272화. 학생회장 문수린 (4)
"… 네. 괜찮아요. 알겠습니다."
뚝-
문수린은 병원의 복도에서 전화를 끊고, 잠시 눈을 질끈 감았다.
후우.
가슴 깊은 곳에서 내장을 찌르는 것 같은 무언가가 올라왔다.
이호연의 병실 앞에 선 문수린은 천천히 마음을 다잡았다.
마음이 찢어질 것 같았다.
그가 자신이 아닌 여자와 장난치는 것이.
그가 자신에게 보여주지 않는 모습을 남에게 보여주는 것이.
그가 다른 여자와 몸을 섞는다고 생각하면….
슬프고 슬퍼서 미칠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싫은 건 그에게 미움을 받는 것이었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사실이 그 사람에게는 상처가 될 수도 있다는 것.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호연은 인기가 많았다.
착하고 잘생기고 능력 있는 남자.
그를 원하는 여자들은 말 그대로 한 트럭에 담길 만큼 기다리고 있다.
자신은 뒤에서 이호연의 사진을 모으거나, 목소리를 녹음하는 음습한 여자일 뿐이었다.
"… 응. 기회는 나중에도 있을 거야."
여자와 남자의 관계는 갈대 같은 법.
인생은 길고 노릴 수 있는 시간은 많다.
지금은 다른 여자와 있더라도, 자신에게도 기회가 올거다.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
그는 환자다. 좋아하기 때문에 더더욱 그에게 부담을 주긴 싫었다.
자신 때문에 이호연이 괴로워하는 걸 볼 바에는 자신이 괴로운 게 낫다.
차라리….
그게 나았다.
게다가 문수린은 두려웠다.
혹시라도 좋아하는 감정을 눈치챈 이호연이 자신을 밀어낼까봐.
'누나… 미안해요. 저한테는 여자친구가 있어서….'
"읏."
문수린은 귀에서 재생되는 이호연의 목소리를 털어냈다.
저런 말을 듣는다면 정말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간신히 버티고 있는 정신줄을 놔 버릴 게 분명하다.
문수린은 깨끗한 손으로 얼굴을 한 번 쓸어내렸다.
조금은 마음의 불편함이 떨어져 나갔으면 했지만, 전혀 효과가 없었다.
여전히 가슴 한구석이 송곳에 찔리는 것처럼 따가웠다.
"후우. 후우…."
문수린은 다시 한번 심호흡을 했다.
흐트러진 감정을 숨기기 위해.
그리고 웃었다.
그에게 부담을 주긴 싫었으니까.
문을 두드렸다.
똑 똑 똑-
"호연아. 들어가도 될까?"
*
"호연아. 몸은 괜찮아?"
병실에 들어온 문수린은 의자를 툭툭 치고는 자리에 앉았다.
"네. 누나 덕분에 괜찮아요."
"크게 다친 것 같았는데…."
문수린은 조심스럽게 내 몸을 훑어봤다.
"제가 재생 관련 능력이 있어서요."
"다행이다. 걱정 많이 했어."
확실히 큰일이긴 했지.
자연 치유력이 없었으면 그대로 끝이었으니까.
문수린은 옷도 갈아입지 못했는지, 기념회에 입고 있던 크롭티와 청바지를 입은 그대로였다.
나는 살짝 몸을 일으켜 침대에 등을 대고 싱긋 웃고 있는 문수린의 손을 잡았다.
"누나, 정말 고마워요. 누나가 조금만 늦게 구하러 왔으면 진짜 죽었을 거에요."
이건 정말이다.
지금까지 아득바득 살아남았는데 엑스트라 따위한테 죽을 뻔했으니, 대위기라고 해도 부족하지 않다.
"아니야. 나보다는 엘리스나 다은이. 루시와 루미에게 감사해야지. 다들 고생한 거거든."
문수린은 나 빼고 다 중상이라며 옅게 웃고는 내 손등을 쓰다듬었다.
"대단하네요. 누나는."
문수린은 다른 사람들에게 차례를 양보한 뒤에 가장 마지막에 검사를 받았다고 한다.
직접 싸우느라 고생했을 텐데도 배려심이 대단하다.
학생회장이라는 자리에 누구보다 어울리는 여자였다.
"그러고 보니, 뭐 하고 있었어?"
"어… 그냥 쉬고 있었어요."
사실 이사장과 대화를 하고 있었지만… 알리기 싫은 것 같았으니까.
"그래?"
후후. 하며 웃은 문수린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사뿐사뿐 한 쪽이 열려있는 창문을 향해 걸어가더니, 마력으로 무언가를 떠올렸다.
자세히 보이진 않았는데 얇은 먼지 같았다.
"그럼 이 머리카락은 뭘까?"
"… 그게 뭐에요?"
"이건 우리 할아버지의 머리카락인데."
"…."
"의자에도 있었고, 창문으로 가는 길에도 있었고, 창문에도 머리카락이 있네. 우리 할아버지 머리카락이 왜 여기 있을까? 흐으음."
하아.
나는 눈을 감고 고개를 저었다.
진짜 저 노인네 도움 안 되네.
겉으로는 젊어 보이면서 탈모는 못 막은 거냐고.
마력으로 결계라도 치고 다니든가.
문수린은 곧 자리로 돌아와 앉아서 머리카락을 돌돌 말아 쓰레기통에 넣었다.
"이사장님이 왔다 갔구나. 그렇지?"
"… 네. 맞아요. 누나가 오기 직전에 나가셨어요."
어차피 거짓말해 봤자 들킬 거다.
딱 봐도 이미 이사장이 다녀갔다는 걸 확정 짓고 말을 꺼내는 것 같았다.
"으흠, 그랬구나. 둘이 무슨 대화 했어?
"…… 수린 누나의 사정을 들었어요."
솔직하게 말하기로 한 거, 끝까지 솔직해지기로 했다.
수린 누나의 표정을 보니 대충 사정은 아는 것 같았다.
이사장이 급히 도망간 것도, 문수린에게 언질을 들었기 때문이겠지.
나한테는 말하지 말라… 뭐 그런 얘기 아니었을까.
그런데도 굳이 와서 들키다니, 그 양반도 대단한 양반이다.
"우리 아버지가 마인이라는 거?"
"… 네."
"표정을 보니 내가 불안해한다는 것도 들었나 보네."
"네. 다 들었어요."
"혹시 나를 돌봐달라느니 그런 말도 했어?"
"… 아니요. 그런 말은 안 했어요."
나도 최소한의 눈치는 있다. 여기선 부정해야한다.
"하아. 정말로…! 그런 얘기 하지 말라니까. 그 노인네는 내가 어떻게든 할 테니까 할아버지가 한 말은 신경 쓰지 마."
"…."
문수린은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리곤 별거 아니라는 듯 웃었다.
마치 가벼운 장난으로 넘기려는 것 처럼.
"그나저나 엘리스도 엄청 다쳤어."
"그래요?"
"다은이는 봤어? 손이 엄청…."
문수린은 그 이후로도, 다른 히로인들에 대해서 말을 늘어놨다.
루시와 루미가 엉엉 울면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부터, 남다은이 엄청 슬퍼한 일과 엘리스가 쓰러진 일.
겉으로는 즐거워 보였지만 뭐랄까….
평소와는 달라 보였다.
지금까지 문수린은 이런 식으로 다른 여자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
물론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굳이 이런 식으로 남들을 칭찬해주진 않았다.
'이상해.'
상식적으로, 호감이 있는 이성 앞에서 동성을 칭찬하는 건 이상한 일이다.
그것도 히로인인 문수린이 그러는 건 더더욱 이상하다.
★ 히로인 상태창
[문수린]
- [ 호감도 : 89 ]
- [ 성욕 : 65 ]
- [ 식욕 : 50 ]
- [ 피로도 : 75 ]
현재 상태 : 호연이는 다른 여자들이 있으니까…. 나는 빠져줘야 해.
"…."
상태창을 읽고서야 직감했다.
아무래도, 뭔가 잘못된 것 같다.
분명 무언가 잘못됐다.
문수린이 나와 다른 여자의 관계를 알고 있다.
왜?
아니, 어떻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어떻게 알았는지는 그다음이다.
일단은 눈앞의 문수린에게 집중해야한다.
겉으로 보기엔 웃고있었지만,내가 문수린이라면 기분이 어떨까.
10년간 찾았던 아버지는 마인이 되었고.
좋아하는 남자는 다른 여자와 만나고 있었다.
'그건 좀… 비참한 기분일 것 같은데.'
사실 처음에는 스토커 사건을 계기로 문수린의 버팀목이 되는 게 목표였다.
하지만 그 루트는 망가져 버렸다.
그리고 결국 문수린에게는 공략다운 걸 하지 못했다.
루시루미 쌍둥이는 마인에 엮이거나 쌍둥이들 사이에서 사건이 있었다.
남다은은 바이어 길드에서 빼내며 구해줬고, 백아영은 나만이 할 수 있는 성욕을 만족시켜줬다.
엘리스는 선천적 마력 장애를 해결해줬다.
하지만 문수린만이 유일하게, 원작에 나오는 히로인인데도 공략을 하지 못했다.
그게 내 마음속의 불안이었다.
"그러고 보니 호연이 너…."
나는 아직도 미소를 지은 채 말을 이어가는 문수린의 눈을 바라봤다.
"수린 누나."
"응?"
눈동자 안에 보이는 미약한 떨림과 불안함.
저 미소가 괴로워 보이는 건 내 착각이 아니겠지.
"이따가 밥 먹으러 갈래요? 배고픈데."
별거 아닌 일처럼 말을 던졌다.
우리가 만날 때마다 하는 말이다.
실제로 단둘이 밥을 먹은 적도 많다.
당연히 오케이라는 대답이 와야 한다.
"으응? 음. 그러면 나야 고맙긴 한데…."
하지만 문수린은 고민했다.
자신이 이 제안을 받아도 되는 건지 아닌지.
★ 히로인 상태창
[문수린]
- [ 호감도 : 89 ]
- [ 성욕 : 65 ]
- [ 식욕 : 50 ]
- [ 피로도 : 75 ]
현재 상태 : 나, 나를 챙겨주려고 저런 말을 하는 거겠지. 하지만 그러면 다른 여자애들이….
"… 쓰읍."
큰일 났네.
분명 내게 호감은 남아있는데, 다른 여자와의 관계 때문에 고민하고 있는 거다.
거기에 미친 노인네가 들키는 바람에 동정표라는 생각까지 하고 있다.
"수린 누나."
"응… 어?"
나는 문수린의 손을 꽉 잡고, 잡아당겼다.
그녀가 내 품에 가까이오도록.
사실 이번 일이 나로서는 꽤 도박이었다.
나는 문수린의 고민을 해결해주지도 못했고, 스토커를 잡지도 못했다.
원작처럼 마인이 된 아버지를 찾아내 부녀간 감동의 재회를 시켜주지도 못했고, 할아버지인 이사장의 지병을 고쳐주지도 못했다.
수린 누나를 단순히 게임의 히로인으로 본다면, 이건 완전히 망한 게임이다.
새로 시작을 하는 게 나을 정도다.
하지만, 히로인 문수린의 공략은 실패했더라도인간 문수린의 버팀목이 되어주는 건 할 수 있었다.
그딴건 공략이랑 상관없다.
내가 지탱하는 여자가 여러 명이라는 아주 사소한 문제도 있지만 그것도 괜찮다.
어차피 처음부터 모든 여자를 안고갈 생각이었다.
"호, 호연아."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뜬 문수린을 보며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남은 손으로는 문수린의 허리를 둘렀다.
"가… 갑자기 왜 그래. 응?"
"항상 얘기했잖아요. 저만 믿으라고."
"응응. 그랬지. 근데…."
문수린은 너무 가까워진 얼굴에 당황한 듯 눈동자를 마구 굴렸다.
마치 빠져나갈 곳을 찾는 고양이같았다.
'빨리 이렇게 해볼 걸 그랬나.'
사실 호감도 자체는 진작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내게 확신이 없었을 뿐이다.
하지만 이제야 알았다.
내게 아무리 여자가 많더라도, 문수린은 이 쪽이 더 행복할거다.
"좋아해요. 수린 누나."
"너, 너… 호연아…?"
이어지는 내 말에, 문수린은 경악하며 숨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