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71 271화. 학생회장 문수린 (3)
오늘은 정말 낯선 천장이었다.
아카데미 의료시설에 입원한 건 처음이었으니까.
뭐, 사실 말이 입원이지 이미 자연 치유를 통해 몸은 다 나았다.
하루 정도만 경과를 지켜본다고 하니까 편히 쉬면 되겠지.
병실에 자주 들락날락거리니 여기 생활도 나름 익숙하다.
아까는 루시와 루미도 놀러왔었는데 나름 재밌게 시간을 보냈다.
루시가 결계를 때리느라 주먹에 피가 난 걸 보니 너무 가슴이 아파서 셋이 얼마나 난리를 쳤는지.
쌍둥이가 가고는 새로운 손님들이 왔다.
"흐으윽… 흑. 자면 안 됐는데. 미안해. 이제 다신 술 안 마실 거야. 이제 다시는…. 흑."
"… 그만 우세요. 좀."
나는 환자 침대에 얼굴을 박은 채 서럽게 울고 있는 백아영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백아영과 임솔은 술에 취해 쓰러진 탓에 뒤늦게 전투에 합류했다고 한다.
그 때문에 내가 다쳤다고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모양이다.
그 미친 결계 때문에 임솔 교수님이면 몰라도 어차피 백아영은 와도 도움이 안 됐을 텐데.
"크흡. 난 그 쪽으로 가고 싶었는데. 솔이가 억지로 데려갔어. 흑."
"… 너 그렇게 내 탓 하는 거야?"
옆에 있던 임솔은 어이없다는 듯 백아영을 쳐다봤고, 나는 어느새 내 다리에 얼굴을 묻은 백아영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도 이미 듣긴 했다.
임솔 교수님과 백아영이 오기 전에 루시와 루미도 왔었으니까.
그때 대충 주변 사정을 들었다.
임솔이 전투를 지원하기 위해서 백아영을 데리고 갔다는 것도 루시가 말해줬다.
"… 내가 가자고 했지만, 어쩔 수 없었어. 그쪽에 부상자가 훨씬 많은 건 당연했으니까."
"네. 저도 현명한 판단이었다고 생각해요."
당연히 좋은 판단이다.
교수로서도, 헌터로서도, 그게 맞는 판단이다.
그 때는 실제 테러 상황이었다.
의미불명의 소리가 들리는 곳과 확실한 전투가 일어나고 있는 곳 중에 고르라면 당연히 후자를 골라야겠지.
그녀들은 히로인이기 전에 아카데미에 소속된 교직원이다.
하지만 살짝 장난기가 드는 건 내 잘못이 아닐거다.
"근데요. 임솔 교수님."
"응?"
"제가 있는 걸 알았어도 그쪽으로 가셨을 거에요?"
"… 하."
장난기 있는 얼굴로 웃으며 얘기하자, 임솔은 내 머리에 꿀밤을 날렸다.
"아앗. 저 환자인데요. 교수님."
"시끄러. 아프지도 않은 게."
임솔은 상체를 숙여 내 어깨에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서로의 열기가 느껴질 정도로 얼굴을 가까이 댄 뒤에 내 귀에 속삭였다.
"… 너인 걸 알았다면, 바로 달려갔겠지."
"…."
이렇게 들으니까 약간 창피한데.
나는 살짝 붉어진 볼을 느끼며 교수님의 시선을 피했다.
"만족해?"
"네네. 덕분에 가슴이 따뜻해지네요."
임솔은 싱긋 미소짓다가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회장이 처리했던 마인의 품에서 이게 나왔다고 해."
"어떤거요?"
임솔은 불투명한 구슬 하나를 내밀었다.
"네가 말했던 마력이 통하지 않는 결계와 연관이 있지 않을까 해서. 내가 잠깐 봤을 때는 아무것도 없는 돌로 보이긴 하는데… 혹시 모르니까 너한테도 보여주려고."
"오오, 이제 저는 인정해주시는 거예요?"
원래 임솔이었다면, 자신이 봐서 모르는 건 남도 모른다는 생각이었을 텐데.
인정받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다.
"그런 거 아니니까 정신 차려. 그냥 여러 시선을 보고 싶은 거뿐이야."
"넵. 알겠습니다!"
나는 불투명한 구슬을 손에서 이리저리 굴렸다.
느낌은 딱 바닷가에서 주운 매끄러운 돌인데…
그런 걸 신동민이 아무 이유 없이 가지고 있을 리는 또 없단 말이야.
"일단 몸 좀 괜찮아지면 조사해볼게요."
"응. 다시 돌려줄 필요는 없으니까 천천히 봐."
"흑흑흑… 크흥."
"… 아영 씨. 그만 울어요."
이 뒤로도 백아영은 임솔이 억지로 끌고 갈 때 까지 내 침대를 적시다 사라졌다.
*
촤악- 촤악-
나는 멍한 얼굴로 화장실에 서서 얼굴에 물을 묻혔다.
거울에는 이미 익숙해진 얼굴이 보였다.
뚜렷한 이목구비. 굳이 표현하자면 기생오라비 같이 생겼다고 해야 할까.
동시에 훤칠하기도 하고, 훈남 같기도 한….
"아무튼 잘생겼네."
내 입으로 말하긴 그렇지만, 내가 봐도 잘 생기긴 했다.
언젠가부터 나오지 않는 상태창 때문에 정확한 수치를 확인할 순 없지만, 처음 빙의했을 때랑 비교하면 전투력도 엄청나게 성장했다.
이 정도면 내가 진짜 주인공… 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사실 원작 주인공도 이것보단 못할거다.
갑작스럽게 빙의되어놓고 이렇게까지 잘 해내다니, 나 좀 대단하지않나?
물론 몇 가지 문제는 있었다.
원작과 달라진 전개들이다.
갑자기 나타난 판데믹과 지옥의 관계.
어디서 나비효과가 일어난 건지 모르겠지만, 지옥에 대한 정보가 내게는 아예 없었다.
실제로 원작에 묘사되지 않은 이벤트들도 있었고 나오지 않은 인물도 현실이 되고 나서는 많이 등장했다.
해보지 않은 하렘 루트 공략도 문제였다.
한 명 한 명과의 관계는 아주 좋다고 할 수 있었지만, 하렘으로 이어지면 반발이 있을 히로인들이 있었다.
루시루미 쌍둥이, 엘리스나 문수린, 백아영이나 임솔…. 불안한 히로인 들이 꽤 있었지만, 그중 대표는 엘리스와 문수린이다.
엘리스는 그녀의 어떤 관계든 중심에 있고 싶어 하는 성격이 문제다.
남다은에게 했던 말을 생각해보더라도 이 하렘을 싫어하는 게 분명했다.
"… 복잡하네."
물론 엘리스의 탓을 할 순 없다.
원작에서는 다른 여자와 하룻밤 불장난도 가볍게 용인해주는 너그러운 여자니까.
아마 이런 꼬인 인간 관계 때문에 엘리스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거다.
심지어, 이번 테러 때는 엘리스가 입은 부상이 나보다 심하다.
선천적 마력 장애를 가지고 너무 무리한 거다.
루시와 루미의 말로는 날 구하기 위해 엘리스가 제일 고생했다고 하니까, 이따 한 번 찾아가 봐야겠다.
가까이 있는 병실에 입원 중이니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다.
다음은 수린 누나.
이 쪽도 쌍둥이에게 듣기로는, 표정이 안 좋다고 했다.
확신은 아니지만, 어딘가 불안해 보였다는데… 괜히 저런 말을 들으니까 나도 신경 쓰인다.
사실 이번 테러 자체가 애매한 구석이 많다.
정면에는 마인들의 습격이 있었다고 하는데, 교수진들이 등장하자마자 허무하게 막혀버렸다.
결국 아카데미가 입은 피해는 극소했다. 아무리 판데믹이라지만 그런 멍청한 작전을 실행한 게 약간은 미심쩍다.
신동민이 직접 나를 덮친 것도 그렇고, 이번은 여러모로 의문이 많은 테러였다.
똑- 똑- 똑-
그때, 누군가 병실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세요."
문 앞에 서 있던 사람은 내 예상과 다른 사람이었다.
"… 이사장님?"
간호사, 아니면 면회 온 히로인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사람이 또 여기는 왜 온 거야?
"들어가도 되겠나."
"네. 당연하죠."
"쉬는데 미안하네."
이사장은 주변을 살피며 침대 옆 의자에 앉았다.
빅토리아 아카데미의 이사장 문재철.
손녀까지 있는 노인이지만 세월을 무빙으로 피한 건지 노화를 무시한 사람이다. 그만큼 강한 헌터라서 그런 거겠지.
깔끔한 인상에 털털해 보이는 중년 남자의 인상.
사람 자체가 나빠 보이진 않는 사람이다.
이사장으로서 의식도 있는 사람이기도 하고.
다만 왜 왔냐 이거지.
저번에 날 이용하려고 하고, 수린 누나와 헤어지라고 했던 사람이다 보니 걱정하게 된다.
물론 수린 누나의 말대로라면 지금은 좋게 생각하는 거 같지만….
'왜 이렇게 근엄하고 엄격한 표정인데.'
저 진지한 표정이 좀 무섭다.
왜 저런 눈으로 날 보고 있는 거야.
"몸 상태는 어떤가."
"… 음. 좋습니다. 당장이라도 일어날 수 있어요. 혹시 모르니 안정을 취하는 거니까요."
혹시 환자한테 덤비진 않겠지?
나는 살짝이지만 긴장을 놓지 않았다.
"너무 경계하지 말게. 그런 의도로 찾아온 건 아니니까."
경계하는 내 모습을 본 이사장은 미안한 듯 웃었다.
그래도 원인 제공을 자신이 했다는 건 아는 모양이다.
"오늘 찾아온 건 다름이 아니고… 부탁을 위해서라네."
"부탁이요?"
이사장이 나한테 부탁할 만한 게 있나?
의문을 담아 바라보고 있는데, 이사장 문재철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내게 고개를 숙였다.
"우리 수린이를… 부탁하네."
"… 네?"
갑자기요?
"수린이를 세울 수 있는 건 자네밖에 없어.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꼬울 수도 있겠지만… 정말 진심일세."
문재철은 고개를 숙이는 거로도 모자라 무릎을 꿇으려 했다.
한쪽 무릎이 바닥에 닿는 걸 보고, 나는 깜짝 놀라 문재철의 어깨를 잡아당겼다.
"아니, 아니. 왜 그러세요. 갑자기. 네?"
이게 문제다.
장유유서가 있는 유교 국가에서 자란 폐해라고 해야 할까.
나이 많은 사람이 내게 예의 바르게 굴면 너무 마음이 약해진다고.
마치 여자가 우는 것과 비슷하다. 도대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
예의없는 아저씨면 몰라도 이렇게 예의바르게 나오면 더더욱 그렇다.
"… 그렇구먼. 자네는 아직 모르겠지."
나는 무릎 꿇으려던 이사장을 강제로 의자에 앉히고 이사장의 말을 듣기 시작했다.
*
"그 아이가 눈물을 흘리더구나. 아카데미에 들어온 이후로 그렇게 약한 모습을 보인 적은 처음이야."
"… 네."
이사장의 하는 말은 놀라웠다.
문수린의 아버지가 나타났다는 거다.
'또 달라졌어.'
내가 무슨 나비효과를 일으켰는지 감도 안 오지만, 원작에서 한참 나중에 등장했어야 할 문수린의 아버지가 벌써 나타났다.
또 웃긴 건, 나온 시기는 다르면서 하는 행동은 똑같다는 거다.
그때도 갑자기 등장해서는 문수린을 데려가려고 했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납치를 시도했다고 한다.
'공통점이 있나?'
원작의 문수린과 지금의 문수린의 공통점.
어쩌면 내가 아니라 문수린의 행동이 트리거일 수도 있다.
'각성.'
빠르게 정보를 체크하던 나는 공통점 하나를 발견했다.
원작에서도, 문수린이 각성하고 나서 아버지 이벤트가 시작된다.
지금도 똑같다. 얼마 전에 문수린은 해골 가면의 습격을 받으며 각성했다.
'강해지는 게 트리거야. 수린 누나의 힘이 필요해서… 그때 나타나는 거였어.'
마인을 제거하겠다는 그 목적에 맞게… 문수린을 데려가는 거였다.
"그 아이를 도와줄 수 있는 건 자네뿐이야."
나는 이사장을 바라보며 생각을 멈췄다.
일단 이건 나중에 생각하고, 지금은 대화를 마쳐야 한다.
"… 일단 이런 이야기를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하지만 제가… 수린 누나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요?"
"옆에 있어 주게."
"옆에요?"
"그래. 다른 여자가 있든 없든 중요한 게 아니야. 그 아이가 원하는 건 딱 하나일세. 자신이 옆에 있을 때 옆을 따뜻하게 지켜주는 것… 지금보다 더 따뜻하게 말이야."
"… 그래도 될까요. 솔직히 저는 자신이 없어요."
약간은 겁이 났다.
지금까지 나는 원작의 정보를 기반으로 히로인들에게 행동했다.
물론 원작의 정보를 활용했더라도 히로인과 쌓아온 관계를 부정하는 건 아니다.
다만 불안할 뿐이다.
히로인들이 원하는 말을 해주고, 호감도를 높이고, 원작에 나오는 걱정거리를 해결해주는 그 과정.
문수린과는 그런 과정이 부족했다.
대화도 했고 호감도도 높아졌지만, 확실한 이유가 없었다.
나와 히로인들의 관계는 '하하, 실수였네.' 로 넘어갈 수 있는 게 아니다.
자칫 잘못하면 내 목숨이 날아갈 수도 있다.
그렇기에 더 조심스러운거다.
내 걱정스러운 표정을 본 이사장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괜찮네. 자네 생각보다 그 아이는…."
똑 똑 똑-
- 호연아. 들어가도 될까?
그때, 바깥에서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수린 누나가 바로 등장하셨다.
그리고 그 목소리를 들은 이사장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자, 잠시만. 어. 어…."
"이사장 님. 왜 그러세요?"
"나는 이만 가보겠네. 그럼!"
"네? 그냥 수린 누나한테 인사하고 문으로…."
이사장은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창문을 열고 병실에서 뛰어내렸다.
"… 뭔데."
혹시 몰래 온 건가?
좋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역시 이상한 노인네가 맞는 것 같다.
"누나. 들어오세요!"
나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문수린에게 말했다.
드르륵-
"호연아, 몸은 괜찮아?"
그리고 익숙한 차림의 문수린이 병실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