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0화 (270/648)

EP.270 270화. 학생회장 문수린 (2)

낯선 천장이다.

눈을 떴을 때 내 시야에 보이는 건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아주 작은 창문 하나에서 비치는 빛으로 이곳이 지하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니구나.'

조금 더 정신을 차리고 피부의 촉감을 느껴보니 그냥 굳은 피가 눈꺼풀을 가리고 있는 거였다.

하지만 아직도 몸이 욱신욱신 한 게 움직이기는 힘들었다.

정말 한 줌의 힘도 남지 않았다는 게 이런 걸까. 정신은 있지만 가위에 눌린 것 처럼 아예 움직일 수가 없다.

마지막에 수린 누나가 구하러 오기 직전에는 정말 정신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아마 원인은 특전인 [뚜렷한 정신력].

그리고 높은 자연 치유력.

이 두 가지가 없었다면 진짜로 죽었을 거다. 수린 누나가 오기 전까지 절대 못 버텼을 테니까.

그래도 안심인 점은 밝은 빛이 보인다는 거다.

그 불투명하고 정신 나간 설정파괴 결계에서 벗어난 것만으로도 만족이었다.

누가 그런 걸 개발한 거냐고 대체. 원작에 없던 요소였으니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한다.

서서히 몸이 각성하고, 몸의 감각이 돌아왔다.

그러자 가까이에서 우는 소리가 들리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 흑, 히이잉…

- 우, 울지마. 루시… 흑.

'… 뭐야.'

제일 먼저 들린 건 루시루미 쌍둥이들의 목소리였다.

아니, 목소리라기엔 흐느끼는 울음소리.

내가 다쳐서 슬퍼해 주는 거겠지.

달래주고 싶었지만, 생각해보니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나는 빠르게 내 몸의 상태를 점검했다.

전신에 쌓인 피로와 부담은 아직 여전했지만 결계를 나오면서 자연스럽게 흡수한 마력은 꽤 남아있었다.

그것들을 이용해 마나 회로를 순환시켰다.

이걸로 조금이지만 회복에 도움이 될 거다.

- 이, 일단 빨리 의료팀을 부를게요.

- 마, 맞아. 빨리!"

쌍둥이들이 의료팀을 불렀다.

의료팀.

의료팀을 부르면 백아영도 오겠지.

빨리 왔으면 좋겠다. 온몸이 아프거든.

나름 마나 회로를 돌리며 응급조치를 하고 있는데, 청각을 집중하니 다른 목소리도 들려왔다.

"호연이를 구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아, 아니야. 고개 들어 다은아."

남다은과 문수린의 목소리.

왜 여기 같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날 구해준 게 수린 누나만의 도움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닙니다. 엘리스, 너도 정말 고마워. 혹시 아까 내 말이 기분 나빴다면 사과할게."

"… 그래."

게다가 엘리스의 목소리까지.

어쩌다 이렇게 많은 히로인들이 모인 거지?

무려 5명이다.

두 세 명도 아니고 5명이나 모인 적은 처음이었다.

당장 몸을 일으켜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보고 싶었지만 아직도 내 몸이 말을 듣질 않았다.

"다, 다은아. 이제 고개 들어. 너도 고생했잖아."

문수린은 남다은의 감사에 놀란 목소리를 냈다.

서로 감사하고 이해해주는 광경.

보이지는 않지만 참 아름답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히로인들끼리 마찰은 없다는 점이다.

캣파이트라든가, 그런 건 질색이거든.

이쪽은 하렘에 목숨이 걸렸다.

제일 좋은 건 자연스럽게 히로인들이 친해지면서….

"다은아. 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그때. 엘리스의 목소리가 내 귓가를 때렸다.

아주 상냥한… 영업용 아가씨 말투였다.

"… 응."

"호연이랑, 진도는 어디까지 나갔어?"

엘리스의 말을 들은 내 가슴이 철렁했다. 장난이 아니라 내 체온이 1도 정도는 내려갔을거다.

잠시만.

쟤 왜 저래.

뭐가 불만이야. 기다려봐.

내가 마사지 안 해줬다고 삐진 건가?

지금까지 대화의 흐름에서 나올 말이 아니잖아. 분명 너희 서로 감사하고 있었잖아!

'진정하자.'

괜찮다.

다행히, 저 말을 꺼낸 상대가 남다은이다.

나를 위해 모든 걸 다 해줄 수 있는 남다은….

"…? 엘리스. 그게 무슨 소리야? 다은이는 호연이랑…."

"그게 왜 궁금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궁금하다면 말해줄 수 있어."

"어?"

문수린은 남다은의 말에 당혹스러운 듯 어리둥절한 반응을 보였다.

'아니, 거기서 왜 그렇게 대답하는 건데…!'

네가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니야? 날 위해서 살겠다고 했잖아. 다은아…!

훌쩍이든 루시와 루미의 목소리도 사라졌다.

아마 둘의 대화에 집중하는 거겠지.

'이거 내버려 두면 진짜 좆된다.'

내 본능이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아니 경고를 안 보내도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지금이 위험한 상황이라는 걸 알겠지.

나에게 호감이 있는 여자 5명이 모여있다.

심지어 그녀들은 연약한 여자들이 아니다. 강한 힘이 있는 여자들이다. 진짜 칼부림이 날 수도 있는 상황이다.

나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저 대화를 막을 수 있는 수단을 무조건생각해내야한다.

다행히 내 뇌에 바로 실행할 수 있는 방법이 떠올랐고, 나는 검토과정을 거치지 않고 바로 실행으로 옮겼다.

"커헉…!"

마나를 조종해 목젖 뒤에 있는 신경을 자극하는 것이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헛구역질이 나왔고, 입에 모여있던 피가 가벼운 기침과 함께 볼을 따라 옆으로 흘러내렸다.

마치 환자가 기침하며 정신을 차리는 것 같은 리액션이었다.

"괘, 괜찮아?!"

"호연 씨!"

"호연아!"

다행히 내 목적대로 시선을 분산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몸이 더럽게 아프긴 한데, 괜찮다.

어차피 하루 이틀 아프면 낫겠지.

*

"…."

중요한 말을 하고 있는데, 타이밍 맞게 이호연이 정신을 차렸다.

마치 노린 것처럼 진행되는 상황에 엘리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호연이 깨어났는데 이 얘기를 계속할 수도 없었다.

루시루미 쌍둥이와 문수린은 바로 이호연에게 달려갔고, 남다은은 다음 말을 해보라는 듯 엘리스를 무표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아무 감정 없는 것 같은 얼굴이 약간은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엘리스는 남다은에게 눈을 돌린 후 문수린을 바라봤다.

"회장님."

"응. 으응?"

- 의료팀입니다!

"… 하아."

엘리스는 세상이 자신을 방해하는 것 같았다.

타이밍이 안 좋아도 너무 안 좋았다.

아까 봤던 성녀님도 의료팀과 같이 뛰어오고 있었다.

이호연이 다쳤다는 말을 들어서 그런 걸까? 아까보다 여유가 없어 보였다.

결국 엘리스는 문수린을 보며 조용히 한마디만 더했다.

"… 신중히 생각하세요."

머리가 산발이 되도록 뛰어온 백아영은 그대로 이호연의 가슴에 따뜻한 빛을 내보냈다.

"아, 아… 아. 다행이다. 다행이다. 여ㅂ… 흡."

백아영은 눈을 질끈 감고 가슴에 손을 얹었다.

이호연이 다쳤다는 말에 놀란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서였다.

다행히 직접 검사해보니 생명에 지장은 없었다.

겉으로 봐서는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지만 안쪽은 정상이었다.

엄청난 피로가 누적되었으니 하루 정도는 푹 쉬어야 하겠지만.

백아영은 이호연의 안위를 살피고 나서야 주변을 둘러봤다.

루시와 루미. 문수린. 남다은. 엘리스.

이제보니 다른 생도들의 상태도 영 좋지만은 않았다.

모두 마력을 많이 사용했기 때문이다.

"의료팀. 일단 한 명씩 검사해주세요. 그리고, 어? 에, 엘리스 양. 몸 상태가 왜 그래요?!"

익숙하게 현장을 지휘한 백아영은 엘리스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네? 무슨 말씀이세요."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걸까.

살짝 머리가 아프고 몸이 욱신거리긴 해도 그 정도는 아닌데.

털썩-

"… 아."

발을 한 발짝 내디디고, 그대로 다리가 풀리며 자리에 주저앉고 나서야 엘리스는 자신의 몸 상태를 파악했다.

긴장이 풀림과 동시에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멀미와 매스꺼움.

온몸에서 마력을 내놓으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여기! 여기 응급환자예요!"

"성녀님! 문수린 생도도 상태가…."

"이 쪽도!"

"성녀님!"

"… 그냥 다 이송해요!"

*

"… 으으응."

이호연과 엘리스는 들것에 실려갔다.

남다은과 루시루미 쌍둥이는 부축을 받으며 걸어갔다.

뒤에서 모든 걸 지켜본 문수린은 머리를 긁적였다.

저 결계를 유지하는 게 의외로 엄청나게 힘들었던 모양이다.

"모두 건강하길."

아이러니하게도 직접 전투에 나선 자신이 제일 상태가 좋았다.

물론 백아영은 혹시 모르니 검사를 받아보라고 권유했지만, 문수린은 자신 때문에 다른 사람의 순서가 하나 밀리는 걸 용납하지 못했다.

"…."

그렇게 모두 사라지고, 침묵이 찾아오고 나서야 문수린에게 현실감이 찾아왔다.

마치 영화의 한 컷 촬영이 끝난 것 같았다.

뒤로 밀어놨던 감정들이 한꺼번에 그녀에게 몰아쳤다.

그녀는 오늘 10년 만에 마인이 된 아버지를 만났고, 아버지와 싸웠다.

좋아하는 남자가 죽기 직전이 되도록 맞는 걸 보다가 간신히 구해냈다.

게다가 그 뒤에 들은 의미심장한 말은 계속 문수린의 귀에 맴돌았다.

'호연이랑, 진도는 어디까지 나갔어?'

어째서 엘리스는 남다은에게 그런 걸 물어본 걸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엘리스였다.

정보 길드인 아이리스 길드의 딸.

그런 그녀의 말이라면 신빙성이 없는 것도 아니다.

남다은과 이호연은 모종의 썸씽이 있을지도 모른다.

기숙사를 같이 퇴거한 우연도 존재했으니, 그 의심은 문수린의 안에서 더욱 커졌다.

그리고 마지막에 엘리스가 말한 신중하게 생각하라는 말까지.

문수린의 머릿속은 점점 복잡해졌다.

저벅저벅.

그때. 문수린의 생각을 끊어내는 발소리가 들렸다.

"… 수린아."

무게가 담겨있는 중년의 걸음걸이와 중후한 목소리.

손녀에 대한 걱정이 듬뿍 담긴 이사장의 목소리였다.

평소에는 듣기 싫었던 할아버지의 목소리지만, 왠지 지금의 문수린은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 같았다.

"할아버지."

"몸은 괜찮… 수린아?"

이사장은 손녀의 모습을 보고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항상 당당하던 그녀의 눈이 빨갛게 충혈되었기 때문이다.

철이 든 이후로 한 번도 약한 모습을 보인 적 없는 문수린이었기에 그는 더욱 놀랐다.

"할아버지…. 나, 아빠를 봤어."

문수린은 복받쳐오는 감정을 견딜 수 없었다.

볼을 따라 흐르는 눈물이 느껴졌지만, 서러운 감정이 창피함을 압도했다.

"뭐, 뭐? 무슨 소리냐. 아빠라니, 수린아. 수린아?!"

"나, 나… 나는…."

그녀에게 쌓여있던 모든 것들이 한 번에 터진 것 같았다.

스트레스와 서운함. 외로움. 그녀의 부정적인 감정들이 모두 폭발했다.

"… 수린아, 이리 오거라. 아가…. 천천히 말해보려무나."

아빠라는 단어에 흥분해서 문수린을 다그치려던 이사장 문재철은 문수린의 모습을 보고 감정을 가라앉혔다.

부숴지기 직전의 연약한 아이.

'어쩌다 이렇게 된걸까.'

문재철은 천천히 손녀의 등을 토닥였다.

어린 아이를 달래듯이 아주 느릿느릿.

"아, 아빠. 아빠가… 나를 공격했어. 납치하려고 했어…. 흐윽…."

"… 그래. 아가. 편하게 이야기하거라."

문재철은 손녀의 약한 모습을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기 위해 마력을 짜내어 결계를 쳤다.

흐느끼는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건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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