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9화 (269/648)

EP.269 269화. 학생회장 문수린

이호연이 정신을 잃은 후.

문수린은 무릎을 꿇은 채 이호연의 상태를 살폈다.

'다행이야.'

어째서인지 몰라도 겉으로 보이는 외상에 비해 내상은 거의 없었다.

타고난 전투 센스 덕에 피해를 최소화한 걸까?

호흡도 일정했고 안색도 좋았다.

문수린은 그제서야 안심할 수 있었다.

투둑- 툭-

그때, 땅에 처박힌 마인도 어깨를 털며 일어났다.

아까보다도 훨씬 강대해진 기세. 아마 자신이 들어온 구멍에서 마나를 많이 흡수한 것 같았다.

어차피 가벼운 견제였다. 문수린도 그걸로 쓰러트릴 생각은 아니었다.

문수린은 이호연의 몸에 얇은 방어막을 치고 마인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몸을 일으킨 마인을 보며 눈을 찌푸렸다.

"… 너였구나?"

마인의 얼굴이 식별되는 거리가 되서야, 마인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 겉모습이 엄청나게 변했다.

한때 학생회에서 같이 일했던 빅토리아 아카데미의 부회장.

신동민이었다.

실종된 이후로 마약에라도 빠진 줄 알았는데… 설마 마인이 되었을 줄이야.

'저러니까 못 찾았던 거였어.'

수사가 난항을 겪던 이유가 있었다.

사실을 알게 된 문수린은 다른 의문이 들었다.

대체 왜?

잘 나가는 길드의 자식이자 자기 자신의 재능도 나쁘지 않은 신동민이 어쩌다가 저렇게 타락한 걸까.

의문은 곧 풀렸다.

눈앞의 신동민이 입을 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문수린…."

"친한 척 부르지 마."

문수린은 마력을 끌어올렸다.

이미 마인과 엮이며 이호연과 적대했을 때부터, 신동민은 문수린의 마음속에서 적이었다.

문수린은 슬쩍 시선을 돌렸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이호연. 자신이 조금만 늦었더라도 목숨이 위험했을 거다.

이호연을 저렇게 만든 이상 타협의 여지는 없다.

문수린은 걱정스럽게 이호연을 바라봤고, 그 시선을 본 신동민은 화가 난 듯 으르렁거렸다.

"너, 너는 어째서 그 녀석을 보는 거지?"

"… 뭐?"

분노로 발을 구른 신동민은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소리를 질렀다.

"왜! 너는 나를 선택하지 않은 거냐! 왜!"

"…?"

문수린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신동민의 얼굴을 바라봤다.

"너에게 모든 걸 해줄 수 있었다. 그런데 왜 저런 새끼한테!!!!"

다음 말을 듣고나서야, 문수린은 상황을 이해했다.

"…겨우 그딴 이유였어?"

계획을 짜서 이호연을 견제하고, 공격하고, 마인과 접촉한 뒤에 마인화까지 한 이유가 겨우 저런거라니.

문수린은 몸에서 힘이 빠지는 것 같았다.

"그, 그딴 이유라니. 너희 둘에게 받은 굴욕을 나는 계속 잊지 못했다…!"

분노한 신동민에게서 검은 마력의 아우라가 일렁거렸다.

육안으로 볼 수 있을 정도로 짙고 끈적한 마기.

S급 마인의 특징이었다.

하지만 문수린은 그걸 보고도 차가운 시선을 보냈다.

겨우 그딴 이유때문에 이런 일을 벌인 걸까.

문수린은 쓰러져있는 이호연의 몸을 훑었다.

얼마나 많이 흘렸는지 옷에 굳어있는 피. 목에는 피멍이 남아있었고, 뼈가 부러졌다가 붙은 건지 이상하게 꺾여있는 관절도 보였다.

이호연이 자신 때문에 다쳤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결계를 어떻게 뚫은 건지 모르겠지만… 그건 네 실수일 거다."

신동민의 등에서 촉수가 자라났다.

이호연이 하나하나 잘라냈던 그 촉수들이, 결계의 구멍을 통해 들어온 마력으로 회복되고 있었다.

"이렇게 된 이상, 너도 죽이고 네 뒤에 놈도 죽여버리겠다…!"

신동민의 등 뒤에서 촉수가 자라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문수린은 신동민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녀는 이호연을 보며 지난 날을 반성했다.

자신의 잘못이었다.

나름 대형 길드의 자식이라서 까불어도 어느정도는 대우해줬는데, 그게 실수였다.

차라리 처음부터 밟아놓을걸.

"끝까지 무시하는 거냐? 그래, 그놈과 같이 죽어라!"

빠득- 꾸드드득-

신동민의 등 뒤에서 자라난 크고 작은 수십 개의 촉수가 문수린에게 쇄도했다.

날아오는 촉수를 보며, 문수린은 여유롭게 생각했다.

확실하게 '겸손'을 심어줬어야 했다고.

화난 사람을 고분고분하게 만드는 일은 의외로 쉽다.

압도적인 힘.

그 누구든 폭력 앞에서는 전의를 상실한다.

말이 안 통하는 상대에게는 폭력을 써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탁-

문수린은 왼발로 가볍게 바닥을 내리찍었다.

그걸로 끝이었다.

모든 걸 부수고 문수린과 이호연까지 삼킬 기세로 다가오던 촉수들은, 허공에 멈췄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그녀의 가벼운 발걸음 하나에 모든 것이 멈췄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동민의 표정은 썩어들어가고 있었다.

"으, 으윽…!"

아무리 힘을 줘도 촉수가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밀리고 있었다.

촉수들을 강하게 짓누르는 무형의 압력.

일대를 조종하는 문수린의 마력에 신동민이 할 수 있는 건 몸을 움찔거리는 것밖에 없었다.

"어, 어째서…."

이어지는 광경에 신동민은 눈을 의심했다.

자신의 촉수가, 천천히 방향을 바꾸고 있었다.

분명 저 촉수들은 마인으로 변하면서 얻은 육체의 일부다.

자신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제3의 팔이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그 촉수들이 지금은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마, 말도 안 돼. 이건 말도 안 된다고…!"

뚜둑- 뚜두둑-

억지로 방향이 꺾인 촉수의 근육들은 망가졌고, 신동민의 힘도 점점 부족해지고 있었다.

"이, 이게… 말도 안되는…."

"네가 선택받지 않은 이유가 아직도 궁금해?"

신동민은 넋이 나간 듯 문수린을 쳐다봤다.

지금 벌어지는 상황을 그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모든 걸 포기하고 마인이 되었다.

그저 복수만을 바라봤으며, 성공의 직전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너는 애초에 선택 대상이 아니었거든."

쾅-! 콰과과곽-!

마력을 머금은 촉수들이 마인에게로 돌아갔다.

몸에서 나온 촉수들이 꺾여서 본체를 공격하는 그 모습은 마치 피기 전의 꽃망울 같았다.

조금 그로테스크하긴 했지만.

마력 반응이 사라진 걸 확인한 문수린은 다시 이호연에게 다가갔다.

'어떻게 들어야 하지? … 공주님 안기로 안아도 괜찮을까?'

이호연을 어떻게 데리고 나갈지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 사이에, 문수린은 주변 환경의 변화를 깨달았다.

불투명해진 결계가 위에서부터 녹아내리고 있었다.

파란 하늘이 보였고 부서진 파티장도 보였다.

그리고 밖에서 결계의 틈을 유지하던 여자들도 이쪽을 발견했다.

"이, 이호연!!!"

"호연 씨…!"

먼저 쌍둥이들이 달려와서는 이호연을 붙잡고 엉엉 울기 시작했다.

그 뒤로 남다은이 다가와 조용히 이호연이 살아있는 걸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겉으로 보기에 심각한 상처가 있었지만, 생명에 지장은 없었다.

엘리스도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그녀도 이호연의 상태를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 흑흑- 다, 다행이야. 흑. 끄흡.

- 루, 루시…. 나 너무 슬펐어.

무릎 꿇고 이호연의 가슴에 안긴 채 엉엉 울고 있는 쌍둥이를 내버려 두고.

남은 세 여자는 서로를 마주 봤다.

"…."

"…."

"…."

어색한 분위기.

말을 꺼내지 않아도 이해하고 있었다.

서로 같은 남자를 좋아한다는 것을, 이 여자들은 이해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보여준 서로의 말과 행동은 그 증거로 부족하지 않았다.

"호연아… 흑…."

"이, 일단 빨리 의료팀을 부를게요."

"마, 맞아. 빨리!"

루시와 루미가 의료팀에 연락하는 동안, 남다은과 엘리스, 문수린은 조용히 서로를 관측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먼저 입을 연 건 남다은이었다.

그녀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둘에게 감사를 전했다.

"호연이를 구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아, 아니야. 고개 들어 다은아."

"아닙니다. 엘리스, 너도 정말 고마워. 혹시 아까 내 말이 기분 나빴다면 사과할게."

"… 그래."

문수린은 남다은의 사과에 당황한 것 같았지만, 엘리스는 왠지 모르게 기분이 나빴다.

마치 '자신의 남자'를 구해줬으니 당연히 고개 숙여 감사해야 한다…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아니, 아마 그 생각이 맞겠지.

'도저히 이해가 안 돼.'

엘리스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호연같은 남자에게 여자가 꼬이는 건 이해할 수 있다. 능력도 있고, 그에 걸맞는 외모까지 있으니까.

하지만 그런 여자들은, 보통 자신의 주제를 알고 있다.

하룻밤 불장난이더라도 저런 남자와 관계를 가져보고 싶은 마음.

여자들도 그 사실을 알고 있고, 바람둥이 남자들도 그걸 알고 있다.

서로가 서로를 추억으로 넘기는 그런 사이.

자신의 아버지도 똑같다.

여러 여자들을 지나도 결국 도착하는 곳은 어머니.

그것은 새로운 사랑을 늘리는 게 아니다. 그저 '여자'라는 새로운 경험을 할 뿐이다.

마치 새로 나온 게임을 하듯, 다른 여자를 맛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호연은 달랐다.

이 미친 바람둥이는, 정말로 '사랑'을 늘려가고 있었다.

밑에서 울고 있는 쌍둥이도,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남다은도, 그걸 부담스러워하는 문수린도.

이호연을 사랑하고 있었다.

물론 바람둥이에게 사랑을 느끼는 여자가 있는 게 이상한 건 아니다. 바람둥이의 단순한 하룻밤의 장난이 그녀에게는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엘리스가 보기엔, 이호연도 그녀들에게 진심이었다.

그렇기에 이해할 수 없는 관계.

엘리스는 그제서야 남다은이 마음에 안 들었던 이유을 알아냈다.

이호연의 특이하고 납득할 수 없는 여자관계.

그 별난 관계를 자신보다 먼저 알고 있던 사람.

바로 남다은이었다.

그렇기에 남다은에게서 기묘한 불쾌감을 느꼈던 것이다.

"… 하."

그녀의 상식으로는 공감할 수 없었다.

저런 잘난 여자들이 모여서 하렘이 되어가는 것.

그곳에서… 후발주자인 그녀가 중심이 되기는 너무 힘들어 보였다.

"다, 다은아. 이제 고개 들어. 너도 고생했잖아."

문수린은 남다은의 사과에 부담을 느끼며 엘리스에게 눈을 돌렸다.

마치 이것 좀 어떻게 해보라는 듯.

그 꼴을 보고 있으니, 괜히 엘리스는 심술을 부리고 싶었다.

몸을 던지며 이호연을 살리고 진심으로 안도하는 이 여자. 문수린.

문수린은 아직도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마치 예전의 자신을 보는 것 같았다.

그리고 도와주고 싶었다.

이 순수한 여자가 바람둥이에게서 떨어지기를.

아니, 어쩌면 경쟁자 하나가 이호연에게서 떨어지기를 바랬을지도 모른다.

무슨 의도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개고생을 해서 살려줬는데, 이 정도는 괜찮잖아.'

엘리스는 고개를 숙인 남다은에게 다가갔다.

그녀가 누구보다 자신있는 영업용 미소를 지으면서, 친근한 목소리와 함께.

"다은아. 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 응."

문수린은 갑작스러운 엘리스의 말에 눈을 깜박거렸고 남다은도 마찬가지였다.

"호연이랑, 진도는 어디까지 나갔어?"

그리고 이어지는 말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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