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68 268화. 춤 추기로 했잖아 (6)
소리가 난 곳으로 달려가는 동안, 엘리스는 문수린의 상태를 살폈다.
대화의 앞부분이 아니라 중간부터 듣긴 했지만 대화의 흐름상 문수린은 마인과 혈육관계인 것 같았다.
문수린의 입에서 나오는 '아버지'라는 단어를 여러 번 들었기 때문이다.
'엄청난 정보네.'
문수린의 아버지라면 빅토리아 아카데미의 전 대표이자 현 이사장의 아들이다.
그런 사람이 마인이 되었다? 이건 가치를 잴 수 없는 귀중한 정보였다.
만약 정치적으로 이용한다고 하면 빅토리아 아카데미에게 엄청난 손해를 입히겠지.
물론 엘리스는 이런 감정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걸었다.
문수린도 엘리스를 조심스럽게 바라봤다.
다행히 지원이 빨리 오면서 잘 넘겼지만, 방금은 분명 위험한 상황이었다.
엘리스가 합류하지 않았다면 10년 만에 만난 아버지에게 정말로 납치당했을지도 몰랐다.
'감사해야해.'
문수린은 이호연과 대화하기 위해 엘리스를 내보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분명 기분 나빴을 텐데도, 엘리스는 전혀 티 내지 않고 자신을 도와줬다.
"… 엘리스."
"네. 학생회장님."
별 감정이 없어 보이는 엘리스를 보고 문수린은 침을 삼켰다.
오히려 저렇게 나오는 게 더 어색했다.
차라리 싫은 티를 낸다면 좋을 텐데.
"그… 며칠 전에는 미안했어. 그게, 내가 잠시…."
"괜찮아요. 신경안쓰니까."
엘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을 하나 했더니 사과였다.
그때는 기분이 나빴지만, 엘리스는 프로다.
잠깐 감정적이었던 소녀의 질투 정도는 넘겨줄 수 있었다.
"그, 그리고 방금 들은 건…."
문수린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자신과 마인의 관계를 발설하지 말라는 부탁이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별 관심도 없고, 어디 가서 말도 안 할게요."
"… 응. 고마워"
엘리스는 그 이후에 대답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런 정보는 알고 있는 것만으로 힘이 된다.
사실, 고개를 숙인 문수린을 보니 약간 동정심이 들기도 했다.
이미 이호연은 다른 여자와 몸을 섞었는데 혼자 저렇게 벽을 보고 싸우고 있으니까.
캉- 캉-!
섬뜩한 쇳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둘은 대화를 멈춘 채 빠르게 달렸고, 이상한 광경을 발견했다.
먼저 보인 건 입술을 깨문 채 결계에 검을 대고 있는 남다은.
팔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고, 짙은 마력이 담긴 검에서 마력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끼기기기긱-!
하지만 검은 결국 결계를 베어내지 못했다.
날카로운 검은 섬뜩한 소리를 내더니, 겉면을 따라 옆으로 흘러내렸다.
"… 말도 안 돼."
"아, 안돼! 나쁜 새끼야! 이, 이… 안 된다고!"
"루시… 그만, 제발… 너까지 다치면 나, 나…."
흘러내리는 검을 보고 허망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남다은과, 그 옆에 있는 루시와 루미.
루시는 눈물을 흘리며 주먹으로 결계를 때리고 있었는데, 까진 주먹에서 나는 피는 결계를 따라 주르륵 흐를 정도였다.
그런 루시의 허리를 잡아당기고 있는 루미도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 대체 뭐 하는 거야."
"빨리 가봐야 할 것 같아요."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행동에 가까이 다가간 둘은, 그제서야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색이 불투명한 정체불명의 결계는 안을 볼 수 있었는데,그 안에는 마인과 이호연이 싸우고 있었다.
문제는 이호연의 상태가 심각하다는 것이다.
비틀거리는 다리와 온몸에 묻어있는 피.
저런 상태로 어떻게 서 있는 지 의문일 정도였다.
"호연이가, 밀리고 있어?"
문수린은 납득할 수 없었다.
이호연의 강함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마법을 쓰지 않는 것도 이상했다.
그는 마법사인데, 마치 타격전을 하는 것처럼 자세를 잡고 있었다.
"이 결계가 문제 같아요. 마력이 봉인된 건가?"
"… 마력을 차단하는 결계야. 마력이 담긴 공격 자체를 차단해."
"결계?"
검을 내려놓은 남다은의 말을 듣자마자, 엘리스는 바로 원인을 찾기 시작했다.
결계의 표면에 손을 대보자 까슬까슬한 감촉이 느껴졌다.
마력으로 이루어진 게 아닌 처음 보는 소재의 결계였다.
안에서 싸우는 이호연은 밖에 사람이 이렇게 모였지만 전투에 집중하고 있었다.
위태롭게 공격을 피하는 가 싶던 이호연은 결국 한 방을 허용했다.
그 공격이 꽤나 강하게 들어왔는지 그대로 이호연의 다리가 풀렸고, 바닥에 쓰러졌다.
깜짝 놀란 문수린은 마력을 일으켜서 결계를 공격했지만 역시나 소용없었다.
남다은은 이를 악물고 주변을 살폈다.
다른 교수에게 도움을 요청할까 생각했지만, 아까 루미가 보낸 구조 요청에도 아무도 이쪽으로 오지 않았다.
그만큼 다른 곳이 더 혼란스럽다는 뜻이었다.
게다가 교수가 온다고 해서 해결할 수 있을까도 의문이다.
"… 다들 떨어져 봐.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때 엘리스가 꺼낸 말에, 여자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남다은도 결계에서 떨어졌고,눈물을 흘리던 쌍둥이도 훌쩍이며 엘리스를 바라봤다.
"엘리스. 괜찮겠어…?"
"구조를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역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문수린의 말에 대답한 엘리스는 결계에 양손을 얹고 집중했다.
다른 여자들이 이호연만 보고 있을 때 결계에 집중하던 엘리스는 결국 틈을 찾아냈다.
그녀가 가진 결계와 역산의 재능이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이건… 할 수 있어.'
결계의 내부가 아닌 외부에서, 아주 약간이지만 마력을 관측했다.
아직 판데믹의 기술이 완벽하지 않았던 탓이다.
그 작은 틈을 파고든 엘리스는 결계에 마력을 주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처음 보는 소재의 사이를 이어주는 마력을 하나하나 떼어내며 결계에 틈새를 만들었다.
주륵-
그 과정에서, 마력을 억지로 사용한 반동이 엘리스의 몸을 덮쳤다.
엘리스의 붉은 입술에서 새어 나온 피가 턱을 따라 흘러내렸다.
"에, 엘리스 양… 괜찮으세요?"
"위험한 거 아니야? 너, 너…."
쌍둥이의 걱정에 엘리스는 이를 악물었다.
뚝. 뚝.
'… 너무 무리했어.'
강한 마인 과의 전투, 그리고 처음 보는 결계의 역산과 마나 개입.
선천적 마력 장애가 있는 엘리스에게는 과도한 마나 사용이었다.
입에서 계속 피가 새어 나왔지만, 엘리스는 집중을 놓치지 않았다.
빠득- 빠드득-
다행히 곧 결계에 틈이 생기기 시작했다.
아주 작은 영역이지만, 마력을 무효로 하는 결계의 특성이 사라졌다.
엘리스는 시선을 돌려 남다은을 바라봤다.
"여기를 뚫어내야 해. 남다은."
남다은의 권능인 강한 절삭력.
그게 있다면 뚫어낼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 응."
남다은은 빠르게 마력을 담아, 엘리스가 만든 영역에 검 끝을 찔러넣었다.
빠직- 빠지직-
마치 고압 전류가 흐르는 것 같이 반발력이 생긴 결계에, 조금씩 구멍이 나기 시작했다.
그 구멍은 어느 정도 커진 후에 그 크기를 유지했다.
딱 사람 한 명이 지나갈 정도의 틈이었다.
"… 안으로 들어가세요. 회장님."
"내, 내가?"
갑자기 불린 이름에 당황한 문수린은 엘리스를 바라봤다.
"시간이 없어요. 딱 한 명만 들어갈 수 있어요. 남다은은 결계를 유지해야해요."
엘리스는 고통을 참으며 눈을 찌푸렸다.
"… 응. 갈게."
그 표정을 본 문수린은 빠르게 판단해야 했다.
언제 이 구멍이 닫힐지 몰랐으니까.
"나, 나도 갈게!"
"저도 갈 수 있어요!"
루시와 루미도 할 수 있다는 듯 말했지만, 엘리스는 고개를 저었다.
"너희는 안 돼. 회장님이 들어가고 나면 너희가 나 대신 결계를 유지해야 해. 틈을 유지한다면 안 쪽에도 마력이 통할 거야."
결계 안에 없던 이물질이 들어왔을 때, 모든 결계는 이물질이 들어온 구멍을 복구하려는 성질이 생긴다.
지금의 엘리스는 그 반발을 버틸 수 없었다.
즉 틈이 존재하는 동안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딱 한 명.
당연히 가장 효율적인 문수린이 들어가는 게 맞았다.
"… 고마워."
문수린은 진심으로 감사했다.
피를 흘리며 결계를 열고 있는 엘리스에게도, 절박한 표정으로 팔을 부들부들 떨며 결계에 칼을 쑤셔 넣고 있는 남다은에게도, 마력을 끌어올리고 있는 루시와 루미에게도 감사했다.
하지만 이제 고민할 시간이 없었다.
"들어갈게."
문수린은 사람 한 명이 간신히 지날 수 있는 틈에 몸을 던졌다.
파직- 파지지지지지직-!
그와 동시에 엘리스가 피를 토하며 튕겨 나갔고 그 자리를 즉시 루시와 루미가 메꿨다.
하아. 하아.
바닥에 쓰러진 엘리스는 눈을 돌려 결계를 확인했다.
결계의 틈이 유지되고 마력이 통하는 걸 확인하자마자, 엘리스는 안심한 채 누워 하늘을 바라봤다.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온몸의 마력 회로는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녀의 인생에서 이렇게 무리한 경험따위 없었다.
항상 길드의 딸로 안전하게 자라왔고, 아카데미에서도 사건에 엮인 적이 거의 없었으니까.
그런데 오늘. 그녀는 한계를 넘었다.
그 목적이 자신의 목숨이 아닌 남의 목숨을 위해서라는 점이 재밌어서, 엘리스는 어이없는 듯 웃었다.
쿠왕-! 콰과광-!
결계 안쪽에서는 마법의 잔음이 들렸고, 바로 옆에는 땀을 흘리는 남다은과 루시 루미 쌍둥이가 보였다.
"… 못 살리면 진짜 죽여버릴 거야. 학생회장."
엘리스는 그대로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그녀의 몸 상태는 당장 기절해도 이상하지 않았지만, 기절할 생각 따위 없었다.
프랑스의 희망이자 아이리스 길드의 딸.
엘리스에게 그런 행동은 품위가 떨어지니까.
*
슈욱-
쾅!
마인이 발을 박차자 땅에서 먼지구름이 솟아났다.
이미 피에 젖어 무거워진 옷을 벗어 던지고 싶었지만 그 작은 틈도 생기지 않았다.
몸 내부는 이미 진탕이 되었고 아득한 무력감이 몸 전체를 짓눌렀다.
당장 엎어져서 자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눈앞의 마인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인다.
"좀 쉬자. 이 개새끼야…."
이제 반격을 하는 게 무의미하다는 것도 깨달았다.
할 수 있는 건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 버티는 것뿐.
결계 내부에서는 외부가 보이지 않았기에 바깥 상황을 알 방법이 없었다.
'교수님하고 여보는 잘 왔겠지?'
임솔과 백아영에게 붙여놓은 마력은 결계가 쳐지자마자 끊어졌다.
당연히 스마트워치 같은 연락 수단도 막혔다.
후웅-!
생각할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 신동민은 주먹을 휘둘렀다.
온몸의 근육이 소리를 지르고 뼈가 아팠지만 움직였다.
못 피하면 죽는 건 마찬가지니까.
하지만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는 내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빠악-
마인의 주먹에 맞은 나는 그대로 다리가 풀려 바닥에 주저앉았다.
울컥.
몸 내부에서 피가 솟구쳤다. 입에서 나오는 검붉은 피를 뱉어내고, 다음 공격을 피하기 위해 다시 일어났다.
다리가 부러질 것 같았지만 간신히 참아냈다.
다행인 것은 내 자연 치유력이 높다는 것.
루시를 공략하면서 얻었던 게 도움이 많이 되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도 곧 한계가 도달했다.
눈앞이 점점 흐려졌으니까.
치유되는 속도보다 체력이 줄어드는 속도가 빨랐다.
"이제 포기해라. 네 놈을 구하러 올 사람 따위 없다…."
"… 좆까."
마음 같아선 더 쌍욕을 날려주고 싶었지만, 체력이 아까웠다.
공세는 계속 이어졌다.
신동민은 정신없이 주먹질하며 날 몰아붙였다.
한 방 한 방이 무거운 주먹과 맞는 순간 몸이 분쇄될 것 같은 발길질.
내 전투 감각이 활성화되어있지 않았다면 진작 생을 마감했을 거다.
탁-
'이런!'
피하기 힘든 각도에서 날아오는 주먹의 궤도를 바꾸기 위해 빠르게 상대의 손목을 때렸다.
그것이 계산 착오였다.
내 몸에 쌓여있던 부담은 주먹에 힘을 싣지 못했고, 손의 궤도를 바꾸지 못했다.
"크읍…."
신동민의 손에 잡힌 나는 공중으로 떠올랐다.
"죽여… 주마."
최대한 몸을 버둥거리며 반항했지만 내 목을 잡은 손의 힘은 더욱 강해졌다.
이대로 머리와 몸의 연결을 끊어낼 생각이겠지.
삶이 끝나기 직전. 나는 약간이지만 마음이 편해졌다.
이 정도면 운이 좋았지. 방구석 백수 주제에 여자도 후려보고, 섹스도 원없이 했다.
이 정도면 방구석 백수로 삶을 마감하는 것보다 보람찬 삶이었다.
어쩔 수 없지 뭐.
"숨통을…그 다음은 문수린까지… 최대한 고통스럽게…."
"…씨이발."
하지만 곧 이어지는 신동민의 말에 나는 정신을 차렸다.
개소리하지말라고 해.
살고 싶다. 섹스도 더 하고싶고, 여자랑도 더 놀고싶다.
엘리스, 문수린, 루시, 루미, 릴리아나, 남다은, 백아영, 임솔, 스칼렛, 레베카까지.
나와 인연을 나눈 여자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대로 포기하기엔 이 세계에 미련이 너무 남아버렸다.
눈 앞이 흐려지고, 내 목을 누르는 힘은 더욱 강해졌다.
그리고 흐려진 시야의 구석에서, 밝은 빛이 보였다.
내 목을 붙잡은 신동민의 손이 떼어졌다.
혹시 머리와 목이 분리된걸까. 나는 버르장머리 없는 몸통에 날아가서 붙는 능력따위 없는데.
그대로 공중에서 떨어질 각오를 했지만, 내 몸은 붕 뜨는 감각과 함께 깃털처럼 바닥에 떨어졌다.
콰아앙-!
동시에 신동민의 몸은 포탄처럼 날아가 결계에 박혔다.
"…?"
진짜 죽은건가해서 손으로 얼굴을 만져봤는데 다행히 몸에 제대로 붙어있었다.
내가 아직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을 때.
사뿐사뿐.
가벼운 발걸음이 들려왔다.
"호연아."
익숙한 목소리였다.
내가 아는 생도 중에서는 제일 강하고, 정상인 여자다.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자연스럽게 몸에 긴장이 풀리는 것 같았다.
"구하러 온 거에요?"
신동민과 내 사이를 막아서듯 선 문수린은 슬쩍 고개를 돌려 날 바라봤다.
눈에 눈물이 맺혀있는 걸로 봐선 날 많이 걱정한 모양인데, 그럼에도 수린 누나는 안심하라는 듯 밝게 웃었다.
"춤, 추기로 했잖아."
나는 장난스럽게 말하는 문수린을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그 전에 죽을 생각하지 마."
이어지는 말은 좀 무서웠지만.
"… 네."
이 누나. 진짜 독하네.
하지만 그렇기에 더 안심이었다. 어떻게든 살려주겠지.
문수린이 들어온 방향에서 비추는 한 줄기 빛에서는 작지만 마력이 느껴졌다.
마력이 있다면 수린 누나가 지진 않을거다.
나는 날 보호하는 수린 누나의 뒷모습을 눈에 담으며 간신히 버티고 있던 정신을 놔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