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6화 (266/648)

EP.266 266화. 춤 추기로 했잖아 (4)

문수린은 떨리는 심장을 간신히 조절하며 정면을 바라봤다.

로브에서 튀어나온 남자는 그녀의 마지막 기억보다 수염이 늘었고, 주름이 자글자글해졌다.

얼굴 곳곳에 마기가 뿜어져 나오는 보라색 반점이 생겼고 피부가 늘어졌지만 분명히 알아볼 수 있었다.

그가 자신의 아버지라는 것을.

"수린아. 오랜만이구나."

"... 아버지. 정말 아버지예요?"

"아빠라 부르며 내 바지를 잡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미 이렇게 어엿한 숙녀가 되었어."

문수린은 몰려오는 두통을 참기 위해 이마에 손을 얹고 눈을 질끈 감았다.

머리가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다.

혹시 환술같은 마법에 걸린 건 아닐까.

하지만 자신이 이렇게 빈틈을 보이는데도 눈앞의 남자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눈앞의 사내는 공격할 의도가 없다는 듯 손을 내리고 있었다.

"... 아빠."

"이제야 나타나서 미안하다. 수린아."

머쓱한 듯 웃으며 사과하는 아버지.

10년이 지났지만, 저 미소를 본 순간 눈앞의 사내가 아버지인 걸 깨달았다.

"아, 아...."

계속 미웠다.

자신을 혼자 내버려 두고 간 아버지가 너무 원망스러웠다.

그런데도 보고 싶었다.

빅토리아 아카데미에 애정을 가지고 지키던 것도 그 이유였다.

언제라도 아버지가 돌아왔을 때 맞이할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서.

문수린의 일에 대한 강박은 거기서부터 비롯되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어릴 때처럼 품에 안기고 싶었다.

"지금까지 고생했다. 이제 나와 함께 가자."

하지만 그 감정을 끊어내는 문성민의 말에 문수린은 무의식적으로 다가가던 몸을 멈췄다.

"... 네?"

"네 힘이 필요해. 나를 도와다오. ...엄마의 복수를 위해서."

"...."

아버지 문성민의 말을 들은 문수린의 머리가 빠르게 식기 시작했다.

엄마의 복수.

당연히 문수린도 하고 싶었다.

지금이 10년 전이었다면, 정말 목숨을 걸었을 지도 모른다.

그때는 세상 모든 걸 잃은 기분이었다.

24시간이 공허했고 삶의 목적을 잃은 것 같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감정은 마모되고 엷어진다.

지금 자신에게는 책임져야 할 것이 많이 있다.

정말 보고 싶었고 사랑하는 아버지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을 듣고 문수린이 한 생각은 단순했다.

'당신이, 이제 와서?'

어리고, 연약했고, 여렸던 여자아이는 10년을 혼자서 버텼다.

모든 상처를 잊고 새로운 인연을 만났다.

그런데 이제야 나타나서 하는 말이 따라오라는 말이라니.

설마 오랜만에 밥이나 한 끼 하자고 따라오라는 건 아니겠지.

평생 어딘가에서 연구라도 하는 거면 다행이다. 어쩌면 마인이 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말은 즉 10년간 외롭게 쌓아왔던 기반을, 자신의 손으로 무너뜨려야 한다는 말이다.

문수린은 그 기반의 중심에 있는 한 남자가 떠올랐다.

"어서 가자. 시간이...."

"가, 가까이 오지 마세요."

"... 수린아?"

문성민은 설마 이럴 줄은 몰랐다는 듯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을 본 문수린은 점점 반가움과 기쁨의 감정이 사라졌다.

자신의 말을 듣지 않자 놀라는 아버지.

아직도 자신을 8살 어린아이로 보는 것 같았다.

"... 저도 할 일이 있어요. 아버지가 맡겨놓고 간 아카데미. 그리고 제 사람들을 지켜야 해요."

자신 하나만을 믿고 따라오는 학생회.

못 미더운 할아버지.

그리고 이호연까지.

문수린이 떠나지 않아야 할 이유는 충분했다.

"수린아... 네 힘이 필요해. 부탁이다...."

하지만 아버지라는 사람은 계속 같은 말을 반복했다.

"...."

자신의 힘이 필요하다는 저 말.

처음에는 별 생각 없이 받아들였지만, 어째선지 10년 전 아버지의 마지막 말이 문수린의 뇌에 스쳐 지나갔다.

- 더 강해지거라. 꼭 강해지거라.

문수린은 나중에야 그 말을 이해했다.

부모의 사랑 없이 자라는 것은 어린 아이에게 힘든 짐이었다.

절대 무너지지 말고, 부러지지 말고 강해지라는 뜻이다.

그 말을 평생 가슴에 담고 살아왔다.

하지만 지금 저 모습.

10년이 지났는데도 복수에 미쳐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본 문수린은, 다른 가정을 떠올렸다.

혹시나. 정말 말 그대로인 게 아닐까.

단순히 '강해진' 내가 필요했던 건 아닐까.

최근 자신은 마인의 습격으로 각성했다.

그 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해졌고, 그런 자신의 앞에 아버지가 나타났다.

자신은 강해지라는 말을 지켰고10년이나 사라졌던 사람은 갑자기 나타났다. 공교롭게도 타이밍이 너무 잘 맞아떨어졌다.

그래도 문수린은 아직 희망을 품고 있었다.

혈육의 정은 쉽게 끊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아버지. 그냥 돌아와 주세요. 할아버지도 지금까지 걱정하세요. 예전처럼... 함께 있으면 되잖아요...."

"수린아... 제발 부탁이다. 제발...."

하지만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 같은 문성민의 눈을 보고, 문수린은 결국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저는... 못가요."

지키고 싶은 사람이 있고, 같이 있고 싶은 사람이 있다.

이제야 찾은 꿈을 버릴 순 없었다.

"... 수린아."

문수린을 보며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던 문성민은 유감스러운 듯 고개를 저었다.

"네가 그렇게 나오면... 어쩔 수 없다."

그리고는, 거대한 마기를 일으켰다.

*

혼비백산이 된 빅토리아 아카데미의 기말고사 기념회.

대부분의 생도는 파티장을 뛰쳐나갔고, 준비해놓은 음식과 파티는 이미 망가진 지 오래였다.

그 망가진 공간에서, 금발의 아가씨 한 명이 걷고 있었다.

"... 여긴 또 어디야?"

복잡한 파티장에서 길을 잃은 엘리스는 기분이 영 좋지 않았다.

남다은과 대화를 나눈 후에 바로 집으로 돌아가려 했는데, 나가는 길을 못 찾았다.

결국 뱅뱅 돌다가 배고파져서 일단 식사를 하고 세바스 찬에게 집에 갈 생각이니 데리러 오라는 연락을 보냈다.

원래 엘리스의 성격이었다면 기분이 나빠지자마자 집으로 돌아갔겠지만, 오늘은 좀 달랐다.

친구들과 우애를 다지고 좋은 시간 보내라는 세바스 찬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마치 실업자가 된 걸 집에 밝히지 못하는 가장처럼 엘리스는 파티장에서 조금 시간을 보냈다.

다행히 귀찮게 하는 남자는 없어서 편했지만, 지금은 그 선택을 후회하고 있었다.

- 도망가아아아아악!

- 보안 요원들이 뚫린다는데?!

"... 쯧."

최대한 빨리 집에 갔으면 이런 일에 엮이지도 않았을텐데.

엘리스는 도망치는 생도들의 비명을 들으며 파티장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사실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니다.

물론 아카데미에 저런 테러가 일어나는 것 자체가 문제지만, 판데믹은 전 세계에 손을 뻗고 있으니 거의 자연재해로 봐야 한다.

게다가 저 테러가 막히는 건 시간문제다.

아카데미의 교수들이 전투에 참여하는 순간 전세는 기울 테니까.

하지만 그래서 더더욱 이해가 가질 않았다.

'왜 저렇게 멍청한 행동을 하는 거야?'

판데믹이 멍청한 놈들인 건 맞지만, 전력을 낭비하는 놈들은 아니다.

명색이 전 세계가 두려워하는 테러 집단이다. 막 나가지는 않는다.

그래서 정면으로 뚫고 들어왔다는 소리를 들었을 땐 엘리스도 꽤 긴장했다.

엄청난 전력이라도 데려온 줄 알았기 때문이다.

'... 알아서 하겠지.'

사실 어떻게 되든 엘리스와는 관련 없는 일이다.

그녀는 그저 빨리 쉬고 싶었다.

이 개 같은 파티장에서 빠져나가고 싶었다.

그렇게 걸어가던 도중, 그녀는 발견했다.

마인과 대치하고 있는 백금발의 청순한 미녀.

학생회장 문수린이었다.

"... 하아."

또 마인인가.

사실 문수린과는 별로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저 이상한 여자는 자신과 이호연 사이를 견제하는 게 분명했다.

어차피 포위망을 빠져나온 마인 조무래기는 문수린이 혼자 처리할 수 있을 테니, 엘리스는 조용히 자리를 피하려 했다.

'... 어?'

하지만 곧 느껴지는 마인의 마기에 엘리스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멀리서 풍기는 마기만으로 자신을 소름 돋게 만들었다.

측정해보지 않아도 뻔하다.

저 상대는 문수린이 절대 감당할 수 없다.

심지어 자신이 참전해서 두 명이 힘을 합쳐도 이기지 못할 수준이다.

그 정도로 위험한 상대였다.

"... 하."

엘리스는 이런 상황에서도 머릿속으로 수지타산을 생각하는 자신이 어이없었지만, 이미 계산은 끝났다.

테러가 발생한 지 이미 시간이 꽤 지났다. 곧 교수들이 도착할 거다.

그사이에 버티는 것 정도는 가능하다.

자신의 판단으로는 길어봤자 10분.

10분을 버티는 것으로 빅토리아 아카데미의 학생회장에게 목숨 빚을 지게 할 수 있다.

리스크도 크지만, 그것보다도 리턴이 컸다.

"쯧."

엘리스는 마력을 일으키며 문수린에게 다가갔다.

내키지 않았지만, 엘리스는 사사로운 감정에 신경 쓰지 않았다.

"아버지...!"

'...?!'

달려가던 엘리스는 문수린의 말을 듣고 귀를 의심했다.

아버지?

마인한테 아버지라니?

마력을 일으키는 문수린과 등에서 무언갈 소환하기 시작한 마인.

둘은 살벌하게 마력을 흩날리면서도 대화를 이어갔다.

"제발, 이러지 마세요. 아버지. 이런 분이 아니었잖아요. 제가 기억하는 아빠는 이러지 않았어요."

"수린아. 아빠를 믿으렴. 모두 너를 위한 일이란다."

"아버지...."

문수린은 애처로운 표정과 필사적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하는 행동이 원망스럽더라도, 아버지와 싸우고 싶지는 않았다. 무려 10년만에 보는 데, 이런 싸움으로 시간을 보내 고싶지 않았다. 여유롭게 이야기도 나누고 싶고, 이제 복수보다 할아버지와 자신을 챙겨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자신에게 마력을 일으켰다.

정말로 쓰러뜨린 후에 납치라도 할 생각인 것 같았다.

'어째서, 어째서 이렇게 된 걸까.'

언제부터 잘못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문수린은 어쩔 수 없이 방어태세를 취해야 했다.

그리고 그걸 보던 엘리스는 생각했다.

'내가 끼어도 되는 거야?'

모르는 사람이 보면 마인과 애정관계라도 되는 줄 알 거다.

하지만 마인이 강하게 마력을 일으키는 걸 보고, 엘리스는 고민을 멈췄다.

"일단은... 도와줘야겠지."

재빨리 거리를 좁힌 엘리스는 아직도 입을 우물거리고 있는 문수린의 옆에 섰다.

얼마나 긴장했는지 자신이 옆에 도착한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회장님. 도움이 필요하십니까?"

"에, 엘리스?"

문수린은 엘리스가 말을 걸고나서야 깜짝 놀라며 옆을 바라봤다.

"둘이 무슨 사이인지는 모르겠지만... 눈앞의 사내는 마인으로 보입니다."

엘리스는 지금까지의 대화를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정면에 검을 거눴다.

잡생각은 그만두고 눈앞의 상대에 집중하라는 뜻이었다.

"도움이 필요하십니까? 그것만 말하세요."

다시 이어지는 엘리스의 말에 문수린도 정신을 차렸다.

지금 아버지는 대화가 통하는 상태가 아니다.

감정에 휩쓸리지 말고 현실을 봐야 한다.

우드드득-

눈앞의 아버지... 에게서 나오는 마력이 땅을 울리고 있었다.

느껴지는 기세는 자신의 약 두배.

힘의 차이는 확연하지만, 반항이라도 해봐야겠지.

곧 지원군이 올 거라는 건 문수린도 알고 있었다.

문수린은 쓰라린 마음을 안고서 엘리스의 옆에 섰다.

"... 부탁해. 엘리스."

"네. 알겠습니다. ... 최대한 버텨봐요."

"응. 고마워."

자신이 경쟁자라고 생각하며 밀어냈던 사람이 먼저 손을 내민 것에 감사하며, 문수린은 정면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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