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릴리아나는 연기를 하고 있다는 컨셉도 까먹은 건지 내게 금방금방 말을 걸어왔다.
연기 어쩌고 한 지 겨우 5분이 지난 상태였다.
"저 사람들은 어디 가는 거야?"
릴리아나가 손으로 가리키는 곳에선 여러 생도들의 무리가 한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음, 연회? 아닌가. 뷔페라고 해야 하나? 아, 파티라고 하면 쉽겠네."
쉽게 말하면 밥 먹고 생도들끼리 떠드는 장소다.
그게 끝이다.
생도들은 맛있는 음식과 술이 무료로 무한 제공되니 놀지 않을 이유가 없다.
나는 이걸 최대한 쉽게 풀어서 릴리아나에게 설명했다.
"뭐야! 그럼 당장 가야지!"
"그럴 줄 알았다."
뭐, 어차피 저쪽으로 갈 생각이었다.
결국 생도가 제일 많이 모이는 곳은 저 파티장이다.
음식이 맛있기도 하고, 밤이 되면 노점이나 이벤트는 거의 문을 닫기 때문에 더 놀고 싶은 사람들은 파티장으로 가야 한다.
교수들과 만나서 인사하는 경우도 많고, 동성끼리 모여서 노는 경우도 많으니 진짜 아싸가 아니라면 보통 저기까지 참여한다.
사람이 제일 많은 곳인 만큼 학생회도 저쪽에 위치해 있다.
저렇게 모이기 전에 가서 학생회 사람들의 얼굴을 볼 생각이었지만, 이미 모인 걸 어쩌겠어.
"저기에 와인도 있어? 나는 30년 넘은 와인만 먹거든."
"지옥에도 와인이 있냐?"
"그건 아닌데, 내가 그렇게 정했어!"
"그래. 가서 잘 찾아봐."
릴리아나는 남다희와 손을 잡고 사람들이 가는 방향으로 향했다.
나와 남다은도 그 둘을 지켜보며 뒤따랐다.
"호연아, 너도 술 먹으려고?"
"아니. 나는 술이 약해서."
제대로 먹어본 적이 없어서 약한지 강한지는 모르지만, 솔직히 굳이 먹고 싶지가 않다.
예전에 루미와 마셨던 걸 생각해보면 엄청 약한 편은 아니었던 것 같다.
사실 능력자들은 취기도 마음만 먹으면 금방 떨쳐낼 수 있다.
마력으로 체내에 있는 알코올을 빼내는 건 의외로 쉬운 일이니까.
그래서 클리셰와는 다르게, 이 파티장에서는 술에 취해 행패를 부리는 사람이 없는 편이다.
"네, 네가… 흑, 솔이 네가 어떻게…."
"…."
홀짝-
- 교, 교수님… 이제 그만 마시는 게….
물론 세상에 절대는 없다.
아예 없지는 않고, 가끔은 있다.
근데 왜 하필 저 사람들일까.
우리는 곧 파티장에 도착했고, 나는 파티장에서 서로 마주 본 채 술을 마시고 있는 백아영과 임솔을 발견했다.
상태를 보니 영 아니다. 한 번 확인해야겠는데.
"나는 교수님한테 인사만 드리고 학생회로 가볼게."
"응. 알았어."
남다은은 웃으며 내게 인사했다.
"나는 와인 먹을 거야!"
릴리아나와 남다희는 이미 파티장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저러다가 걸리지만 않았으면 좋겠다. 제발.
"다은아. 릴리아나랑 다희 좀 잘 관리해줘. 믿을 게 너밖에 없어."
나는 남다은의 손을 꼭 잡고 부탁했다.
마음같아선 내가 24시간 감시하고 싶었지만, 해가 떨어지면 테러의 위험이 점점 커진다.
그 전에 할 일을 다 끝내야한다고.
"걱정하지 마. 이미 익숙해졌으니까 내가 챙길게."
"고마워."
그래도 믿을만한 사람이 하나 정도 있으니 안심이 된다.
"호연이는 임솔 교수님하고 양호 선생님께 가는 거야?"
"응. 인사 좀 드리려고."
저렇게 취한 걸 보니 무슨 일이 있는 게 분명하다.
가서 상황을 체크해봐야지.
"… 나보다 빠른 사람은 어쩔 수 없네."
그때 남다은이 뭐라고 중얼거렸다.
"뭐라고?"
"으응. 잘 갔다 와. 난 릴리아나 씨 좀 잡아 올게."
남다은은 그대로 웃으며 파티장의 구석으로 달려갔다. 어깨 너머로 훔쳐보니 와인잔을 입에 들이붓는 릴리아나가 보였다.
'잘못들은건가?'
좀 불안하긴 한데 남다은이 잘 막아주겠지.
릴리아나의 결계 수준도 꽤 높으니 고위마법사가 집중해서 보는 게 아니라면 뚫리진 않을 거다.
나는 백아영과 임솔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크흡. 솔이, 너어...."
"... 왜."
홀짝-
"어떻게 나한테에, 이래애. 으억."
"... 뭐래."
홀짝-
둘은 뭘 하는 건지 취기도 풀지 않으며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 뒤에는 임솔 교수님의 조교가 걱정하며 서있었는데, 나는 손을 휘휘 저으며 조교님에게 사인을 보냈다.
내 사인을 받아들인 조교님은 활짝 웃으며 자리를 떠났다.
오래 보고있기 힘들었나보다.
"두 분 다 뭐 하세요."
나는 자연스럽게 자리 하나를 차지하고 앉았다.
임솔은 천천히 고개를 돌리더니, 날 발견하자마자 고개를 푹 숙였다.
"하아, 너 때문이야. 다 너 때문이야. 모두 다...."
홀짝-
이 사람 왜 취해있는 거냐고 대체.
이런 이미지 아니였잖아요.
"교수님, 괜찮으세요? 빨리 해독하고 쉬러 가시는 게 나을 것 같은데."
내가 임솔의 몸을 흔들고 있을 때, 백아영도 날 발견했다.
"히끅. 어, 어? 여보다 엽...."
이상한 단어를 꺼내려는 백아영의 입을 오른손으로 재빨리 틀어막았다.
"으읍. 읍읍! 읍!"
"제발 이상한 소리 하지 마세요."
"너... 아영이 얼굴은 왜 만지는 거야. 나는 무시하는 거야?"
홀짝-
임솔은 슬픈 목소리로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온더락인걸 보니 양주 같은데 왜 저러는 거야 대체.
"교수님. 제발요. 왜 그러세요."
"나는 잘못 없어… 네가…."
"읍. 읍읍... 읍! 푸하, 여보으븝…."
이거 안 되겠다.
상태만 체크하고 즐기게 내버려 두려 했는데, 둘 다 정상이 아니다.
대체 왜 이렇게 과음을 한거야.
나는 임솔의 손 등 위에 손을 올리고, 백아영의 입을 틀어막은 채로 둘의 몸에 있는 알코올을 빼내기 시작했다.
"으, 으으…."
"…."
다행히 두 명의 마력파장은 익숙했기에 빨리할 수 있었다.
백아영과는 몸을 자주 겹쳤고, 임솔은 마법을 자주 봤으니 쉬웠다.
그리고 잠시 후.
"…."
"…."
정신이 말짱해진 둘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음에는 서로 눈을 마주치고.
그 다음에는 나를 바라본 후에, 얼굴을 붉히기 시작했다.
"… 솔아, 연구는 잘 되고 있어?"
"응. 아영이 너는?"
"나는 항상 비슷해. 양호실에 있으니까."
백아영과 임솔은 어느새 평범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둘은 경쟁자이기 전에 절친한 친구였으니,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근데 요즘 힘들어. 생도들이 점점 많이 찾아온단 말이야."
백아영은 고개를 저으며 피곤한 얼굴로 커피를 빨았다.
"다치는 사람이 그렇게 많구나."
하긴 기말고사가 다가오니까 격렬하게 훈련하는 생도가 늘어나겠지.
임솔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이유는 그게 아니었다.
"… 그런 건 상관없어. 누가 봐도 안 아파 보이는데 와서 문제지."
"안 아픈데 양호실에? 어째서?"
임솔은 마법 연구가 아닌 인간관계에 대해서는 아직도 초보자였다.
'예쁜 여자를 보기 위해 양호실까지 찾아간다'는 행위를 아예 인식하지 못했다.
"그게, 하아…. 생도들이 내 얼굴을 보러 오는 거야."
"아영이 네 얼굴?"
"남생도들이 아프다면서 찾아오거든. 심지어 벌이 꽤 큰데도 감수하면서 찾아와."
백아영이 직접적으로 말하고 나서야 임솔은 상황을 이해했다.
남자들의 성욕은 대단해서 때로는 비효율적인 일도 실행하게 만들곤 하니까.
"솔이 너는 좋겠다. 남자들의 시선을 보는 일은 없으니까."
"응, 그렇… 지?"
백아영은 새침한 표정으로 커피를 쪽쪽 빨고 있었다.
마치 '내가 더 예뻐서 남자들이 네가 아니라 날 보러 온다.'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착각일거야.'
일하는 환경의 차이를 말하고 싶은게 분명하다.
"… 아무래도 양호실보단 연구실이 더 접근성이 떨어지니까."
"그렇긴 해도 뭐. 아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
백아영은 말을 하다가 중간에 끊어버렸고, 임솔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건 뭐 하자는 거지.
임솔은 어이가 없는 듯 백아영을 바라봤다.
저 표정만봐도 백아영의 생각을 알 수 있었다.
되지도 않는 견제였다.
암묵적이지만 화해하기로 해놓고 저렇게 먼저 공격을 하다니.
임솔은 초코라떼로 입을 적시며 말을 이었다.
"하긴, 너는 약간 어린 애 같은 면이 있으니까 생도들한테 인기가 많을 수도 있겠다."
"… 어린애?"
"응. 키도 작은데 하는 짓도 애, 아니 젊어 보이잖아."
"아닌데?"
백아영은 바로 반론했지만, 임솔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맞아."
"전혀 아니거든? 오히려 하는 행동은 솔이 네가 더 애 같거든? 나는 사회생활도 오래 했는데?"
"사회생활을 뭘 했다는 거야. 아영이 너 술은 마실 수 있어?"
"당연하지. 내가 회식을 얼마나 많이 했는데?"
"… 안 되겠네."
임솔은 말싸움을 멈추고 백아영을 바라봤다.
이대로 의미 없는 말싸움을 이어가는 건 비생산적이다.
깔끔하게 누가 위 인지 가려야한다.
"술 대결이야."
전투력이 없는 친구와 대련을 할 수도 없으니, 다른 거로 승부를 봐야 한다.
"… 너는 마법사니까 해독이 더 빠르잖아.
백아영은 임솔을 의심했지만, 임솔은 당당하게 이야기했다.
"내 자존심을 걸고 그러지 않을 거야."
"… 정말이지?"
"당연하지."
임솔이 자존심을 걸었으니, 백아영도 믿을 수 있었다.
그녀의 강한 자존심은 잘 알고 있었으니까.
여기까지가 지금 일어나는 사건의 전말이었다.
*
나는 술이 깬 두 명의 교직원들을 뚫어지라 쳐다봤다.
"… 히끅."
백아영은 고개를 테이블에 박은 채 딸꾹질을 시작했고.
"…."
임솔은 자연스럽게 다리를 꼬며 얼굴을 피했다.
"생도들 다 있는 곳에서 뭐 하세요. 두 분 교수예요."
- 난 교수 아닌데에….
백아영은 고개를 박은 상태에서도 중얼중얼거렸다.
이 사람들은 뭘 하고 있는 걸까.
아니, 둘 다 애주가 이미지는 아니잖아.
대체 왜 이러고 있는 거야.
나는 조금 더 정상처럼 보이는 임솔을 바라봤다.
"교수님. 원래 술 드셨어요?"
"몰라."
"…."
기분이 나빠 보인다.
다음 타자인 백아영은 아직도 고개를 테이블에 박고 있었다.
"… 아영 씨?"
"… 흑. 머리가, 아파…."
나는 백아영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상태를 보니 술이 덜 깬 것 같아서, 체내에 남아있는 알코올을 모두 없애기 위해서다.
'아무것도 없는데.'
이게 그 플라시보 효과라는 건가.
백아영은 몸에 알코올이 하나도 없는데 아파하고 있었다.
"아무튼 두 분 다 일어나세요. 여기 사람들도 많은데."
다행히 임솔과 백아영에게 직접 다가오는 사람은 없었지만, 힐끗힐끗 쳐다보는 사람은 꽤 많았다.
"알았어."
"으, 으응…."
주변 눈치를 보고 일어나긴 했지만, 임솔과 백아영은 둘 다 컨디션이 안 좋아 보였다.
해독한다고 해서 몸에 쌓인 피로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이거 진짜 위험한데.'
오늘 테러가 일어나는 건 확정이다.
근데 임솔이 이러고 있으면….
'괜찮나?'
사실, 냉정하게 내 입장만 본다면 상관없긴 하다.
테러가 일어난다 해도 언젠가는 막을 테고, 그사이에 일어난 희생이 있더라도 그게 히로인일 가능성은 적다.
오히려 임솔과 백아영이 위험해지지 않는 편이 좋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건 너무 매정하지.'
나는 마력을 조금 떼어낸 후에 임솔과 백아영의 등에 몰래 붙였다.
임솔도 평소라면 알아챘을 텐데, 창피해서 내게 집중하고 있지 않았기에 성공했다.
이제 테러가 일어나면 바로 신호를 보낼 수 있을 거다.
임솔과 백아영의 힘이 필요하다면 불러야 하니까.
아무리 그래도 사람을 살릴 수 있는데 무시하는 건 좀 그렇지.
"자자, 가서 좀 쉬세요."
"난 원래 안 취했어."
"알았어요. 교수님."
임솔은 붉어진 얼굴을 식히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백아영도 일으키려 했는데, 그녀는 머리에 손을 얹고 한숨을 쉬었다.
"나, 나 머리가 아픈데… 부축해줄 수 있어?"
"알코올 다 빠졌잖아요. 아영 씨."
"칫."
"칫이 뭐에요. 칫이."
너무 솔직하잖아.
나는 임솔과 백아영을 데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서, 술은 왜 마신 거에요?"
"…."
"…."
임솔과 백아영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나는 슬쩍 상태창을 확인했다.
★ 히로인 상태창
[백아영]
- [ 호감도 : 100 ] (+ 2.1 )
- [ 성욕 : 85 ]
- [ 식욕 : 40 ]
- [ 피로도 : 75 ]
현재 상태 : 차, 창피해. 머리 아파.
★ 히로인 상태창
[임솔]
- [ 호감도 : 89 ]
- [ 성욕 : 55 ]
- [ 식욕 : 30 ]
- [ 피로도 : 70 ]
현재 상태 : 그래도 내가 이겼어.
… 감이 안오는데.
이 사람들 대체 뭘 한 걸까.
*
임솔과 백아영은 다행히 제 발로 잘 걸어갔다.
내가 붙여놓은 마력도 둘의 몸에 딱 달라붙었다.
이제 언제든지 신호를 줄 수 있다.
'학생회나 빨리 가야겠다.'
메시지 답장이 안 온 걸 보니 진짜 많이 바쁜 모양이네.
"어?"
그때 내 정면에서 웬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색한 데 익숙한 목소리였다.
"응?"
"이야, 오랜만이다."
"살아있었냐?"
김영한.
이쪽 세계에서 내 하나밖에 없는, 성별이 남자인 친구다.
찰랑거리는 금빛 머리는 왠지 모르게 기분 나빴다.
"당연히 살아있었지. 애초에 너랑 같은 수업 들었잖아."
"너도 오랜만이라길래 나도 모르는 척 좀 해봤어."
예전에는 말을 많이 했었는데, 요즘은 교류가 없었다.
사실 내가 피하긴 했지.
정확히 말하자면 피하기보다 김영한한테 시간을 할애하지 않았다.
여자가 많아지다 보니 만날 시간이 없었거든.
"역시 유명인이네. 여자한테 인기 많은 유명인."
"이상한 소리 하지 마라."
"부정해봤자 사실은 변하지 않아."
실실 웃고 있는 녀석을 보니 짜증이 났지만, 그 전에 묻고 싶은 게 생겼다.
"… 야."
"왜?"
"내가 여자 많다고 유명하냐?"
나름대로 조심했는데?
아니, 장난이 아니고 정말 조심했다.
사람이 많은 곳에선 결계를 자주 사용했고 데이트도 몰래 하곤 했다.
섹스도 단둘의 공간에서 한 게 대부분이다.
집에 여자를 끼고 사는 것도 비밀이다.
그런데 유명할 정도인가?
"음, 그건 내 시점에서? 아니면 객관적으로?"
"당연히 객관적이지."
"솔직히 말하면 아직 그 정도는 아니야."
"… 그래?"
다행이다.
솔직히 궁금했거든.
이런 걸 여자한테 물어볼 순 없으니까.
"근데… 음. 언제 터질지도 몰라. 항상 조심해."
그거야 알고 있다.
당장 내 기숙사만 들켜도 난 사회적 매장이다.
"고맙다. 이제 뭐 하러 가?"
"좀 있으면 춤추는 시간이니까, 파트너 찾으러 간다. 아까 루시랑 루미가 무슨 카페에 있다던데."
"그래그래. 루시랑 루미 건들면 죽일 거니까 건들지 말고."
나는 손을 휘휘 저으며 김영한에게 인사했고, 김영한도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가던 길로 뛰어갔다.
역시 남자랑은 대충 인사해도 되니까 편하네.
학생회나 가야지.
나도 학생회로 가던 걸음을 재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