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1화 (261/648)

루미랑 이호연이 천막을 나간 후. 

루시는 뒤를 돌아봤다. 

들리던 말소리가 적어졌다 싶었는데, 역시 둘은 사라져 있었다. 

"… 변태." 

루시는 둘이 사라지자마자 기지개를 피고 인형 뽑기 기계에서 눈을 뗐다. 

이제 더 연기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아까 루미는 진심으로 애니메이션에 빠진 거였지만, 루시는 연기였다. 

자신도 이호연과 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혼자만 이호연과 시간을 보내는 건 공평하지 않다. 

'나는 언니니까.' 

동생인 루미를 챙겨야 하는 건 자신뿐이다. 

저 변태자식이 챙겨주지 않으면 나라도 챙겨줘야지. 

'30분 정도는 걸리려나.' 

이호연에게 양심이 남아있다면 금방 돌아올 거다. 

할 게 없었던 루시는 어쩔 수 없이 다시 보라색 소녀 인형을 뽑기 시작했다. 

"거기, 1학년이지? 시간 있으면 우리랑 놀래?" 

그때 혼자 있는 루시를 보며 껄렁대는 선배들이 다가왔다. 

예쁜 여자를 보면 일단 들이대고 보는 남자들이다.

"아니요." 

뾱 뾱 뾱- 

루시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기계 조작에 집중했다. 

"그러지 말고… 오빠가." 

"아오, 이거 왜 안 잡혀!" 

쾅! 쾅! 쾅! 

루시는 여러 감정을 담아 인형 뽑기 기계를 발로 찼다.

마력이 하나도 담기지않은 단순한 발차기에, 인형 기계가 구부려지기 시작했다. 

그걸 본 2학년 남자들은 눈을 깜박거리다가 서로를 바라봤다.

"… 야. 야. 가자." 

"… 응."

껄렁대던 2학년들은 그대로 뒷걸음질 치며 사라졌고, 루시는 계속 보라색 소녀에 집중했다.

"쟤는 대체 뭐야? 깜짝 놀랐네." 

릴리아나는 툴툴대며 다 식은 닭꼬치를 뜯어먹었다. 

"어, 언니. 저 언니는 눈빛이 너무 무서웠어." 

"… 괜찮아. 괜찮아." 

남다은은 남다희의 등을 쓰다듬으며 엘리스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봤다. 

엘리스는 남다은의 말을 듣자마자 눈을 찌푸리며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사람이 말을 하는데 대답도 안 하고 저렇게 가면 어떻게 해. 에이잉." 

"신경 쓰지 마세요. 릴리아나 씨." 

남다은은 오히려 엘리스가 걱정되었다.

갑자기 접근해서 저런 행동을 할 정도면 꽤 급한 걸까. 

아니면 무슨 감정인지 이해를 못하는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난 걸까? 

엘리스의 마음을 남다은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평소의 침착한 엘리스와는 확실히 다른 모습이었다. 

"음음. 그래도 마지막에 멋있었어. 역시 내 제자라니까. 한 번 문 남자는 놓치지 않아." 

릴리아나는 뿌듯한 듯 남다은의 등을 툭툭 쳤다. 

"감사합니다." 

저런 말을 들으면 남다은도 기분이 좋았다. 

릴리아나와는 같이 지내면서 꽤 친해졌으니까.

자주 보다보면 저 4차원 감성도 귀여울 때가 많다.

"역시 이호연 전용 창녀다워." 

자랑스러운 듯 말하는 그다음 말만 없었더라면, 더욱 완벽했을 거다. 

"… 그거 어감이 좀 별로에요. 릴리아나 씨." 

"구랭? 아쉽네. 네가 나랑 취향이 맞는 것 같아서 나름 준비한 칭찬이었는데." 

릴리아나는 아쉬움을 담아 다 먹은 꼬치를 쓰레기통으로 집어던졌다. 

그 여유로운 모습을 보고 있으니 남다은은 고민이 떠올랐다. 

사실 창녀든 뭐든 상관없었다.

물론 사랑을 받고싶었지만, 결국 그녀의 행동은 이호연을 위함이다.

이호연에게 갚을 수 없는 은혜를 받았고, 그를 위해 살기로 했다. 

그런데 그의 여자를 질투해도 되는 걸까. 

"… 릴리아나 씨." 

"웅?" 

"질투… 가 생기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니, 제가 그런 감정을 가져도 되는 걸까요." 

남다은은 입에 가득 차도록 붕어빵을 욱여넣는 릴리아나에게 질문했다. 

저렇게 멍청, 아니 순수해보이는 릴리아나지만 분명 이호연에게 보내는 감정은 진심이다. 

그녀는 이호연을 좋아한다. 

하지만 이호연이 아무리 여자를 만나도 이호연을 질투하는 걸 본 적이 없다. 

남다은의 질문을 받은 릴리아나는 고민을 시작했다. 

어떻게 해야 이 중생에게 자신의 생각을 전달할 수 있을까. 하고.

사실 자신도 질투가 없는 게 아니다. 그냥 참을 뿐이다. 

남다은이 오기 전에는 그것때문에 징징댄 적도 여러번 있었다.

물론 차이점이 없는 건 아니다.

자신은 서큐버스기 때문에 일부다처제에 익숙하지만 이 아이들은 익숙하지 않겠지. 

"뭐,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되지 않을까? 나는 서큐버스라서 그런 복잡한 생각은 안 해. 경험상 그렇게 생각해서 잘 된 적이 없었거든." 

게임만 하면 좋은 남자를 못 만난다는 부모님의 말을 무시하고 생각없이 게임만 했는데 이호연이라는 좋은 남자를 만난게 그 증거다.

릴리아나는 말도 안되는 논리를 펼치고 있었지만, 그걸 모르는 남다은은 조용히 릴리아나의 말을 들었다. 

자신이 본 릴리아나의 모습 중에서 섹스 강의를 하던 날 다음으로 제일 진지해 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게임을 할 때도 훈수를 안 들어. 그게 아직도 내가 젊게 사는 비결이지. 후후후." 

섹시 서큐버스의 방송이 인기 있는 이유는 게임에서 진 릴리아나가 분개하는 모습이 귀엽기 때문이다. 

과연 그 사실을 이 사람은 알고 있을까. 

"아마 이호연이 신경 쓰일 텐데… 어차피 걔는 질투를 하든 말든 신경 안 쓸 거야. 정확히 말하면 신경을 안 쓰는 게 아니라 네 행복이나 찾으라고 하겠지." 

"내 행복…." 

그 말이 맞다. 

자신이 좋아하는 이호연이라면 그렇게 말하겠지. 

"그렇네요. 생각해보면 마음대로 해도 될 것 같아요." 

남다은은 릴리아나에게 감사의 의미로 고개를 숙였다. 

"고마우면 델리만쥬나 먹으러 가자." 

"네. 릴리아나 씨." 

릴리아나는 곧바로 헤헤거리며 다음 가게로 향했다.

순수한 기운을 받은 남다은도 착잡하던 표정을 버리고 평소의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이제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질투를 하든 이해해주든 내가 하고싶은대로 하면 된다는 걸 이제야 알았으니까.

남다은의 얼굴에는 아주 옅게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남다은의 말을 듣자마자 엘리스는 대답도 하지 않고 자리를 피했다. 

"…."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에 와서야, 엘리스는 발을 멈췄다. 

엘리스는 이호연이 소중한 사람이라는 남다은의 말을 듣자마자 무의식적으로 자리를 피했다.

조용한 곳에 도착해서야 당황이 사라지고 짜증이 밀려들어왔다.

답답했다. 

마치 가슴 안에 무언가 꽉 찬 것 같이 답답했다. 

"진정하자. 진정해." 

엘리스는 숨을 고르며 벤치에 앉았다.

아무것도 아니다. 

남다은이 이호연과 무슨 관계든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다. 

이호연과 자신은 계약관계일 뿐이다. 

마사지 때문에 호감 같은 게 생길 이유도 없고 그래서도 안된다. 

"…." 

엘리스는 여왕벌이다.

어릴때부터 다른 사람과 달랐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만약 이호연에게 호감이 생기더라도, 꽃을 따라가는 벌이 아니라 여왕벌이 되고 싶었다. 

평범한 벌이 되어서는 결국 꽃을 쟁취할 수 없다. 

자신의 어머니를 봐도 그렇다. 

아버지에게 아무리 벌들이 다가와도 신경 쓰지 않는다. 

어차피 돌아올 걸 알기 때문이다. 

"하아." 

엘리스는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이건 애초에 기분 나쁠 일이 아니다. 

아직 이호연과 자신은 아무 사이도 아니니까.

"… 맞아. 맞아. 남다은은 왜 갑자기 이상한 소리를 하는거야." 

이제야 좀 가슴이 괜찮아졌다. 

마사지사가 커플이라고 해서 실력이 녹스는 건 아니다. 

엘리스는 고개를 휘휘 젓고 다시 앞으로 걸어갔다. 

"… 이제 뭐 하지." 

왜 이딴 기념회를 나오겠다고 했을까. 

처음부터 집에서 일을 했어야 했는데. 

이게 다 이호연... 아니지.

이호연이랑은 상관없이 나온 거니까.

"…?" 

그때 엘리스의 시야에 무언가 보였다. 

- 이, 이거 해보자! 

- 인형 뽑기? 알았어. 

- 저도 상관없어요. 

루시에게 이끌려 인형 뽑기 기계가 있는 천막으로 들어가는 이호연과 루미의 모습이었다. 

"… 발정 난 새끼." 

볼 때마다 다른 여자랑 있는 게 신기할 정도다. 

쯧. 

'진정하자. 진정.'

엘리스는 간신히 다잡은 마음이 다시 복잡해지는 걸 느끼며 휘청휘청 걸어갔다. 

해가 중천으로 향하고 있는 시간. 

아카데미 중앙에서 기념회가 한창일 때. 

천재 마법 교수와 양호 선생님이라는 미녀 두 명의 조합은 시선을 이끌기 충분했다. 

기념회에 교수를 위한 놀거리는 거의 없었지만, 음식이나 음료 정도는 즐길 수 있었다. 

보통 교수들은 오후에 나와서 담소 정도만 나누는데, 오늘 둘은 일찍 모였다. 

둘이 향하는 곳은 카페였다.

사실 젊은 여자 둘이 대화를 나누기에 카페만큼 편한 곳은 없었다. 

주문한 초코 라떼 하나를 쪽쪽 빨고 있던 임솔은 앞에서 가슴에 손을 얹고 있는 백아영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오늘 만남의 주도자이기 때문이다. 

"… 솔아." 

"응." 

심호흡을 하며 할 말을 정리하던 백아영은 떨리는 눈으로 임솔을 바라봤다. 

콩- 

테이블을 양 손으로 내려친 백아영은 벌떡 일어났다. 

"너 호연이랑… 무슨 관계야…!" 

백아영의 용기를 낸 발언. 

상상도 못한 곳에서 경쟁자가 나왔기에, 백아영은 진실을 확인해야했다.

쪼옥-

임솔은 음료를 빨며 백아영을 위아래로 관찰했다. 

긴장했는지 부들부들 떨리는 몸과 억울한 것 같은 눈빛. 

그러면서도 이호연에 대한 신뢰는 사라지지 않은 목소리. 

딱 봐도 '이호연은 잘못이 없는데 달라붙은 네가 잘못' 이라는 눈빛이다. 

"하아." 

임솔은 고개를 젓고 이 순수한 여자를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해야 했다. 누가 보면 이호연이 자기건 줄 알겠어. 

"아영아.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아직 그런 거 아니야." 

"아, 아직…? 왜, 왜... 분명 호연이한테 마음 없다고 했잖아." 

세상을 잃은 것 같은 표정인 백아영을 보며 임솔은 헛웃음을 지었다. 

"그럼 너는?" 

"으, 으응?" 

"너는 왜 그렇게 생도한테 못 죽어서 안달이야." 

"그, 그게…." 

임솔이야말로 어이가 없었다. 

성녀라고 불리며 남자랑 엮인 적이 단 한 번도 없던 백아영이 정말 뜬금없이 생도 한 명에게 빠져버렸으니까. 

임솔과 백아영이 동시에 스캔들이 터진다면 대부분의 관심은 백아영에게 쏠릴거다.

그 정도로 백아영의 연애는 이슈였다.

저번에도 백아영의 말실수 한 번이 잠잠해지기 까지 꽤 시간이 걸렸으니까.

"으, 으으…." 

백아영은 답답함에 몸을 배배 꼬았다. 

그렇다고 여기서 임솔에게 모든 걸 설명할 수도 없다. 

강간당하는 게 너무 좋고 그걸 받아주는 사람이 이호연 밖에 없다는 걸 차마 말할 수 없었다. 

그 모습을 보는 임솔은 속으로 웃고 있었다. 

억울해서 배배 꼬는 모습이 귀여웠기 때문이다.

이미 자신은 키스에 펠라까지 끝낸 사이다. 

거기에 제자와 교수라는 끈끈한 유대감까지 존재한다.

겨우 양호실에 박혀있는 백아영이 느끼지 못하는 감정이다. 

"… 아무튼. 아직 정해진 건 없으니까 너무 열내지마." 

임솔은 아무것도 아닌 듯, 웃어넘겼다. 

어차피 앞서있는 건 자신이니까. 

저 정도 귀여운 행동은 여유롭게 넘길 수 있다.

이호연이 백아영과 친한 건 알지만, 다른 여자도 아니고 설마 백아영의 몸을 건드리진 않았겠지.

성녀의 이름은 그렇게 가벼운 게 아니다.

마법 연구에 미쳐서 사람을 제대로 만나지 않았던 자신과 다르게 백아영은 하루에 몇 백 명씩 남자를 만나는데도 순결을 지켜왔다.

백아영에게는 그만큼 남자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오오라같은 게 풍겼다.

"… 알았어. 미안해." 

한 편 임솔의 말을 들은 백아영도 마음을 가라앉혔다. 

'맞아. 이렇게 화 낼 필요가 없어.'

잠시 흥분했지만 괜찮다. 

자신과 여보는 끊어내려야 끊어낼 수 없는 붉은 실로 이어져있다. 

실을 붙잡고 다가가는 동안 다른 여자가 있든 말든 상관없다. 

그의 마음을 채워줄 수 있는 여자는 자신밖에 없다. 

천재 마법사와 성녀는 서로를 동정하고 마음을 숨기며 웃음을 지었다. 

'어차피 마지막에 남는 게 진짜야.'

임솔은 너그러운 편이다.

생도들과의 불장난 정도는 웃어넘길 수 있다.

하지만 백아영에게만큼은 지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여보는 이미 내 꺼야.'

백아영은 그저 여보만을 생각했다.

제일 첫 번째는 자신이다. 그것만으로 좋았다.

이호연의 공략이 진행될수록 여자들도 서로를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모든 원인인 이호연은 기념회가 진행되는 광장에서 조금 떨어진 수풀 속 결계에 들어가 있었다. 

결계 안에는 남녀의 신음소리가 울려퍼졌는데.

루미는 벽에 손을 댄 채 허리를 숙이고 있었고, 엉덩이에 딱 붙어있는 이호연의 허리가 움직일 때마다 신음을 흘렸다. 

"여기 괜찮아?" 

"네, 네에엣… 조아요…." 

찔걱- 찔걱- 

몸을 부들부들 떨던 루미는 곧 한 번 몸을 크게 떨었다.

자신은 곧 힘이 빠질 것 같았지만, 아직도 이호연은 부족한 것 같았다.

"따, 딱 30분 만이에요." 

"응. 걱정하지 마." 

"흐, 으읍. 하앙...."

이번에는 시간을 넘길 생각이 없었다. 

루미와 다르게 루시는 언제 집중이 끝날지 모르니까 빨리 가봐야한다.

루미와 비밀스러운 밀회를 마치고, 우리는 다시 루시에게로 돌아왔다.

그다음부터는 금방이었다.

세 명이 이리저리 쏘다니다 보니 몇 시간이 금방 지났고, 점심때가 되어 같이 식당으로 향했다.

"오후에는 학생회에 가봐야 할 것 같아."

"에에. 진짜?"

"알겠어요…."

밥을 먹은 후에는 학생회 일을 도와줘야 한다는 핑계로 빠져나오기 작전까지 시행했다.

"완벽했어."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카데미를 가로질러 걸었다.

루시와 루미는 이제 둘이 놀 거라면서 의외로 별말 없이 날 보내줬다.

역시 감정의 교류가 충분한 덕분일 거다.

섹스도 했으니 서로의 마음을 이해한 거겠지. 

역시 나와 시간을 오래 보낸 쌍둥이들다웠다.

그래도 오전 내내 열심히 놀았으니 남자친구로서 본분은 다 한 거 아닐까?

한창때인 여자 둘이랑 노는 건 보기보다 힘든 일이다.

몸이 두 개여도 부족하다.

'수린 누나한테 미리 연락해야겠다.'

점심이 지나긴 했지만 아직 일이 많을지도 모른다.

가기전에 메시지 정도는 보내놓는 게 예의겠지.

- 나 : 수린 누나. 학생회 쪽으로 한 번 놀러 갈게요!

띠링-

메시지가 전송된 후 기념회를 관리하는 학생회 천막으로 향하는데, 내 눈에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얕은 결계로 얼굴을 가린 릴리아나와 남다은 자매였다.

"어, 오빠!"

그리고 주변을 열심히 둘러보던 남다희가 날 발견했다.

곧 남다은도 날 바라봤고, 결계로 얼굴을 가리던 릴리아나도 이쪽을 바라봤다.

'저 쪽에도 인사하러 갈까.'

나는 슬쩍 스마트워치를 확인했다.

수린 누나에게 답장은 아직 오지 않은 상태였다.

'아직 일도 안 끝난 것 같으니까 괜찮겠지?'

답장이 안 왔다면 문수린의 성격상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았다는 뜻이다.

루시루미랑도 오전에 놀아줬으니 여기에서 시간을 좀 보내지 뭐.

나는 내 주변에 인지 저하 결계를 걸고 릴리아나와 남다은 자매에게 다가갔다. 릴리아나 때문에 결계는 꼭 필요했다.

"재밌게 놀고 있었어?"

"오빠! 호연 오빠! 붕어빵 먹을래?"

"응. 고마워."

신난 남다희를 보니 열심히 놀고 있었나 보네.

기운이 넘치는 게 나까지 기분이 좋아진다.

"안녕. 호연아."

"응. …응?"

남다은은 평소와 같은 옅은 미소로 내게 인사했다. 

거기까진 이상한 게 아니다. 근데 뭐라고 해야 하지.

시원한 느낌? 답답함이 없어진 느낌?

표정은 평소와 같아보이지만, 꽤 오래 본 사람이라면 눈치챌 거다. 

남다은은 분명 평소보다 기분이 좋았다.

"기분 좋아 보이네? 맛있는 거라도 먹었어?"

"아니. 평소랑 비슷해."

싱긋.

이상하다.

아무리 봐도 기분이 좋아 보인단 말이야.

하지만 남다은은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날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야."

남다은은 계속 미소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왜 웃냐고 물어보긴 좀 그렇다.

아니라는데 캐묻는 건 이상하잖아.

뭐, 동생이랑 나왔으니 즐겁겠지.

이번엔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있는 릴리아나를 바라봤다.

릴리아나만의 특이한 연보랏빛 눈동자는 평범한 검정색으로 바뀌어 있었고, 얼굴도 어디서나 있을 만한 흔한 여자의 얼굴로 바뀌어 있었다.

물론 나는 결계를 꿰뚫어 볼 수 있었으니 다 보였다.

"릴리아나. 뭐해?"

릴리아나는 내가 가까이 온 이후부터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조용히 붕어빵만 입에 넣고 있었다.

"아는 척 하지 말아줘. 완벽한 연기를 위해서니까 이해해주길 바래."

옴뇸뇸-

꽤 진지한 얼굴로 붕어빵을 먹고 있는 서큐버스를 보니 약간 기운이 빠지는 것 같았다.

"… 나도 결계 걸어서 괜찮아."

"연기의 연 자도 모르면 가만히 있어. 원래 연기는 사소한 것부터 시작이니까."

"아니, 맞는 말이긴 한데… 네가 연기를 언제부터 했다고."

또 시작이다.

저 잘난 것 같은 표정.

지옥에선 사람을 열 받게 하는 강의가 있는 게 아닐까?

릴리아나는 귀여우니까 살아남겠지만 못생긴 놈들이 하면 주먹이 먼저 나갈 것 같은데.

"난 연기도 잘해. 엄마가 칭찬해줬단 말이야."

"… 넌 대체 못 하는 게 뭐냐."

"음, 좋은 질문이야. …사실 내가 못 하는 걸 아직 못 찾았거든!"

"… 그래."

미친 서큐버스 같으니라고.

나는 가슴을 내밀고 있는 릴리아나에게 고개를 저으며 남다은과 대화를 나눴다.

"오전에는 먹을 것만 먹으러 다닌 거야?"

"응. 간식을 너무 먹어서 점심도 안 먹었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몇 시간 내내 먹기만 하면 어떡해."

그러다가 살찔 텐데.

이런 곳에서 파는 음식은 조금만 먹어도 살이 금방 늘어난다.

"아니야. 우리 어떤 금발 언니랑 얘기도 했어."

"금발 언니?"

그때 남다희가 우리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웅. 누구였더라. 오빠 이름을 얘기했었는데…."

"다희야."

"왜, 언니?"

"릴리아나 씨 따라가 봐. 저쪽에 과자가 많이 있대."

"과, 과자!"

타다닥-

남다희는 남다은의 말을 듣자마자 하던 말을 멈추고 릴리아나의 뒤로 달려갔다.

"… 뭐야."

"으응, 아무것도."

"…."

너무 수상한데.

남다희의 대화를 끊으려는 고의성이 다분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싱긋 웃는 남다은의 눈은 내게 무언의 압박을 보내고 있었다.

그 이상을 알려하지말라는 압박이었다.

나는 몰래 상태창을 열었다.

★ 히로인 상태창

[남다은]

- [ 호감도 : 100 ] ( + 0.4 )

- [ 성욕 : 90 ]

- [ 식욕 : 35 ]

- [ 피로도 : 40 ]

현재 상태 : 막진 않겠지만, 도와주지도 않을 거야. 경쟁자니까.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는데.'

하지만 금발 언니라고 하면 둘밖에 없다.

엘리스와 문수린.

다른 금발 여자들이 남다은에게 말을 걸어올 일은 거의 없으니까.

그나마 가능성 있는 건 히로인인 두 명이겠지.

근데 문수린은 아직 일 중일 테니까… 엘리스인가?

"음, 어. 우리도 저거 먹으러 갈까?"

일단은 나를 지긋이 바라보는 남다은을 데리고 릴리아나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응. 그러자."

혹시 엘리스를 견제하는 건 아니겠지?

'에이 설마.'

우리 다은이가 얼마나 착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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