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상심하지 마. 내가 프랑스에 있는 길드랑 연결해줄게."
"쩝… 괜찮아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 어차피 프랑스 쪽 길드랑 관련이 있는 일이라서요."
달콤한 시럽이 첨가된 초코라떼를 마시는 임솔을 보며 난 고개를 저었다.
뭐, 심한 걸 한 것도 아니고 나도 기분 좋았으니까.
상심할 것까진 없다.
"그래도 제자 덕분에 기분이 좀 나아졌어."
"그래요? 기분이 왜 안 좋으셨는데요?"
살짝 올라간 입꼬리를 보니 확실히 기분 좋은 것 맞는 것 같네.
나는 그 틈을 타 묻고 싶었던 걸 물었다.
"… 하아."
임솔은 기분 나쁜 기억이 떠오른 듯 살짝 눈을 찌푸렸지만, 다행히 좋아진 기분 덕에 말해줄 생각인 것 같았다.
"똑같지 뭐. 음침한 마법사들이 한둘이 아니거든."
쪽쪽.
초코라떼를 물처럼 마시고 있는 임솔을 보며 나는 살짝 웃음을 지었다.
"다들 교수님이랑 수준 차이가 나서 그렇죠. 뭐."
임솔을 띄워주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녀의 마법을 칭찬하면 된다.
사실 거짓말도 아니잖아?
당장 특전이라는 사기 능력을 갖추고 있는 나도 임솔이나 레베카같은 규격 외 마법사들을 보면 오금이 떨린다.
임솔을 보는 다른 마법사들도 나와 비슷한 감정을 느낄 거고, 그 상대가 젊은 여자인 것에 열등감을 느끼는 마법사들도 많을 거다.
여자한테 밀리면 안 된다는 구식 생각을 하는 남정네들이 많으니까.
"… 아무튼, 나는 실력도 없고 자존심도 없는 마법사들이 싫어. 물론 너 같은 예외는 빼고."
아무래도 표정을 보니 우리 교수님께서 쌓인 게 많은 모양이다.
불만스러운 듯 미간을 좁히고 괜히 초코 라떼의 얼음을 빨대로 쿡쿡 찌르면서 화풀이를 하고 있었으니까.
"특히 몇 년 먼저 태어났다고 까부는 놈들하고, 나보다 약하면서 현장 경험이 있다는 이유로…."
나는 내 앞에 놓인 커피를 마시면서, 누군지도 모르는 교수들과 현장에서 활동하는 마법사들의 욕을 들어줬다.
그렇게 얼마나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을까.
내 커피도 동나고, 임솔의 초코 라떼도 텅 빈 후에야 뒷담화는 막이 내렸다.
"… 하아."
쪼옥-
임솔은 그제서야 좀 시원해진 듯 새로운 초코 라떼에 빨대를 꼽았다.
그리고 얼음 밖에 남지 않은 컵을 흔들다가, 옆으로 치운 후에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쯧. 괜히 받아주지도 못할 말을 해서 미안해. 못난 스승이네."
그래도 제자에게 화풀이한 것에 대해 살짝 반성하는 것 같았다.
임솔이 무안해하지않도록, 나는 오히려 더 헛소리를 늘어놓았다.
"아니에요. 그 새끼들이 잘못한 거겠죠. 교수님이 잘못했을 리가 없잖아요. 나쁜 새끼들."
"어허. 교수 앞에서 그 새끼가 뭐야. 그 새끼가."
피식 웃은 임솔은 새로운 초코 라떼를 마시다가, 턱을 괴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프랑스에 왜 가는지는 얘기 안 해줄 거야?"
"으음…."
그냥 넘어가 주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구나.
이걸 어떻게 해야할까.
나는 빠르게 임솔에게 말했을 때의 일을 고민했다.
사실 내가 범법행위를 하는 건 아니다. '켄타우로스를 조사하러 갑니다.'라고 한마디만 하면 될 일이다.
이유가 뭐냐고 물으면 마법 연구 핑계를 대면 된다.
'근데 그러다가 임솔이 따라오고 싶다고 하면?'
정상인이라면 그런 대답이 오지 않겠지만, 마법 연구에 미친 임솔이라면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다.
'그럼 지인을 팔아먹을까?'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지인.
릴리아나를 팔아먹으면 된다.
혹시 내 지인에 대한 조사를 하면?
그때. 어떻게 행동할까 고민하던 내 눈앞에 임솔의 손이 나타났다.
딱- 하는 소리와 함께 튕겨진 임솔의 손가락에서 가벼운 마력이 불어왔다.
산들바람처럼 내 머리를 흔들고 지나간 마력은 괜한 고민 하지말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고개를 들고 임솔과 눈을 마주치자, 임솔은 자애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너무 무리하지 마."
"…."
"넌 아직 생도잖아. 사람들이 천재마법사라고 띄워줘도 아직 놀 때니까 놀기도 하고… 아니지. 넌 충분히 노는구나. 그러면 어려운 일 있으면 내게 얘기하고. 알았지?"
음음.
같은 감탄사를 내며 임솔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랬거든. 어느 순간 느꼈어. 남들과 나는 다르다고."
"… 교수님이요?"
예상하지 못한 진지한 분위기에 나는 임솔의 말에 집중했다.
"응. 정확히 말하면 처음 마법을 쓸 때부터였지."
예전에 연구실에서 내가 질문한 적이 있었다.
분명 그때 한참 기자들이 달라붙었었다. 이중 속성을 축제에서 처음 보여줬을 때니까.
그래서 임솔 교수에게 기자들의 질문에 대처하는 방법을 물어봤었지.
'처음 모든 속성의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고 밝혔을 때 반응이 어땠냐' 라고.
그때 임솔은 이렇게 대답했다.
[처음 마법을 쓸 때부터 모든 속성 마법을 펑펑 쏴댔어.]
[난 그게 자연스러운 건 줄 알았거든.]
그 때문에 임솔이 받았을 시기와 질투, 그리고 기대는 어땠을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말 그대로 불세출(不世出).
세상에 태어난 게 의문인 천재였을 테니까.
"그러니까, 결국 내가 하고 싶은 말은… 하아. 남들을 신경 쓰지 말고. 기죽지 말고. 힘든 일 있으면 나한테 물어보고. 알겠지?"
"네. 감사합니다."
나는 임솔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선배의 조언이니까 새겨들어야지.
"그리고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절대 나랑 비교하지 마."
"네?"
지금까지 좋은 말만 하다가 갑자기 무슨 소리야.
임솔은 음, 으음. 같은 소리를 내더니 머리를 긁으며 말을 이었다.
"내 입으로 말하기 뭐하지만… 나는 천재야. 어떤 마법이든 마법진을 보면 이해할 수 있고, 1분이면 따라 할 수 있어. 마력도 괴물처럼 많이 타고났고, 자연 마력에 대한 친화력도 높아. 그러니까… 혹시라도 나랑 비교하면서 자존감을 떨어뜨리진 마. 그런 마법사들이 한 둘이어야지. 제자까지 날 질투하면 피곤하잖아."
엄청나게 진지한 표정으로 내게 충고하던 임솔은 마지막에서야 살짝 웃었다.
임솔의 말은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자신과 비교하지 말라고.
마지막에는 조금 장난스럽게 끝냈지만, 임솔의 말 안에는 날 걱정함과 동시에 엄청난 자신감이 들어있었다.
'네가 아무리 노력해도 날 따라잡을 순 없다'라는 자신감이다.
저번에 분명 20살 때의 자신보다 내가 더 강하다고 했었다.
그런데도 저런 말을 한다는 건… 내가 발전하는 속도보다 더 빨리 발전할 수 있다는 뜻이겠지.
물론 오만이라고 할 수 없다.
그녀가 이뤄놓은 업적을 보든, 현재의 실력을 보든, 나보다 훨씬 앞서나가고 있다는 걸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황새를 따라하려다가 넘어지는 뱁새를 걱정해서 한 말이라도.
싸가지없지만 정말 날 생각해주는 말이라도.
남자 앞에서 그런 말을 하는 건 도발이잖아요. 교수님.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걱정 감사합니다. 교수님. 꼭 명심할게요."
"응응. 다행이야. 역시 내 제자는 말을 잘 들어."
임솔은 살짝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방금 자신이 한 말을 다른 사람이 들었을 때 어떻게 느낄지 아는 모양이다.
그런데도 직접적으로 얘기했다는 건 날 그만큼 믿는다는 거겠지.
임솔은 언제부턴가 날 보호해줘야 하는 존재로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래선 안 된다.
'여자한테 보호받는 남자?'
난 그런 거 못하거든.
성평등주의자의 대표를 자처하는 나지만, 남녀 관계에선 시대착오적인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
이건 수컷의 본능이니까.
자신의 암컷에게는 항상 강한 남자이고 싶은, 유전자에 각인된 본능이다.
"그런데요 교수님."
"응?"
의아한 표정을 짓는 임솔 교수에게, 나도 최대한 진지한 톤으로 말했다.
"언제나 제 앞에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저도 진심을 다할 거니까요."
임솔의 재능은 인정한다.
그 노력도 인정한다.
하지만 하늘 위에는 하늘이 있는 법.
아무리 임솔이 뛰어나도 잡을 자신이 있었다.
"크흡."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친 임솔은, 활짝 웃었다.
"너는 방금 그 말 때문에 더 넘기 힘들어졌어."
"... 정말요?"
"응. 그래도 노력해봐. 혹시 알아? 진짜 넘으면 내가 소원이라도 하나 들어줄지."
임솔은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귀여운 제자의 재롱을 보는 것 같은 미소였다.
"어? 그 말 후회 안하시죠? 소원 들어주기?"
"응. 당연하지."
날 보는 임솔의 눈에는 애정이 묻어 있었다.
확실히, 우리는 박람회에 오기 전보다 더 친해졌다.
★ 히로인 상태창
[임솔]
- [ 호감도 : 75 ]
- [ 성욕 : 45 ]
- [ 식욕 : 20 ]
- [ 피로도 : 40 ]
현재 상태 : 우리 제자는 어떻게 이렇게 보기 좋을까.
역시.
호감도가 꽤 올랐다.
초코 라떼를 마시며 혼자 만족하고 있는 임솔을 보니 왠지 나도 뿌듯하다.
"슬슬 다시 박람회나 보러 갈까요?"
"좋은 제안이야."
우리는 기분 좋게 카페를 나섰다.
*
나와 임솔은 박람회장을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구경했다.
"이건 마법진의 컨트롤이 힘들겠네. 아, 물론 별로지만 사용할만해."
사실 데이트가 목적이었는데, 그냥 야외에서 진행하는 개인 수업같았다.
'뭐, 좋아하면 됐지.'
임솔 교수가 즐거워 보였으니 어떻게 보면 데이트라고 할 수 있을 거다.
그렇게 엄청나게 걸어 다닌 후.
"힘들어."
"… 저도요."
나와 임솔은 중앙 분수대에 앉아 휴식을 취했다.
시간은 이미 정오를 지나 1시를 향해가고 있었다.
원래 계획은 오전 수업만 빼려고 했는데, 더 시간을 끌었다간 오후 수업까지 뺄 기세였다.
슬슬 갈 준비를 해야겠지.
나는 마법으로 주변의 온도를 낮추고 있는 임솔에게 말을 걸었다.
"오길 잘했죠?"
"… 응. 잘했네. 정말로."
임솔의 시원한 미소.
지금까지 봤던 미소 중에 제일 순수한 웃음이었다.
"네 덕에 스트레스가 다 날아간 것 같아. 왜 우리 제자랑 있으면 마음이 편해질까?"
"다 교수님 덕이죠. 잘난 제자와 잘난 교수님의 콜라보. 저도 엄청 즐거웠어요."
정말이다.
미녀와 돌아다니는 것만으로도 좋은데, 박람회에서는 나름 재밌는 내용도 많았으니까.
"그, 그러면 말이야."
"네?"
임솔은 갑자기 내 눈을 피하며 허공을 바라봤다.
자신만만한 교수님이 보이지 않던 자세다.
심지어 볼에 은은하게 홍조가 감도는 게, 평소와는 정말 달랐다.
"어차피 오늘은… 체험학습이라고 해놨으니까. 억지는 아니고 네가 괜찮다면. 응. 할 일이 없다면 말이야…. 그 오후에도…."
임솔의 말에 빨려 들어가며, 천천히 움직이는 선홍빛 입술을 보고 있던 그때.
쾅! 콰과광! 쿵-!
박람회장 곳곳에서 무언가 터져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 꺄아아악!
- 그, 그마안!
"뭐, 뭐야!"
순간 당황한 나는 분수대에서 일어나 주변을 살폈다.
박람회장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연기와 비명소리.
수많은 사람들이 비명을 내지르며 폭발로부터 도망치고 있었고, 박람회장 안에는 혼란이 점점 퍼지고 있었다.
- 습격이다! 습격이야!
- 마인이 위장하고 있어! 서로를 경계해야 해!
"이런 씨…."
조금 더 집중했어야 했는데.
히로인의 목숨이 위험한 테러 이벤트가 아니라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아까 느꼈던 악의 기운.
아마 마인의 것이었겠지.
나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이렇게 큰 규모의 마인 테러는 분명 판데믹이다.
아마 원작에 나오지 않는 수많은 테러 중 하나겠지.
히로인과 관련된 일은 아니지만, 이 자리에 있다면 막는 게 도리였다.
'이 상황을 빨리 막아낼 방법….'
나는 곧 내 옆에 앉아있던 임솔 교수에게 생각이 닿았다.
"교수님! 지금 테러가…!"
하지만 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
부들부들 떠는 임솔의 주먹이 보였으니까.
"… 교수님?"
"이 새끼들이…."
처음 듣는 임솔의 차가운 목소리.
옆에 있는 내게 정체불명의 한기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화아악-
임솔의 몸에서 마력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양이 엄청나서 몸 밖으로 아지랑이처럼 새어나오는 푸른색 마력에 감탄하며, 나는 우리 교수님을 바라봤다.
임솔.
20대라는 젊은 나이에 빅토리아 아카데미의 마법사 초청 교수직을 맡고 있는 설정상 세계관 최고 재능의 천재 마법사.
하지만 실제로 그녀의 '진심'을 본 적은 없다.
나는 옆에서 연구를 도왔을 뿐이고, 임솔도 현장에서 물러나 연구를 위주로 하고 있었으니까.
저번 천상제 테러에 휘말렸을 때도 임솔의 마력을 제대로 느끼지 못했다.
아마 진심을 다하지 않은 거겠지.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그녀의 몸에서 느껴지는 기세는… 아이작과 레베카 그 이상이었다.
딱-
마력을 완전히 끌어올린 임솔은 손가락을 튕겼다.
동시에 임솔의 발끝부터 퍼져나간 마력이 순식간에 박람회장을 뒤덮었고,
지이잉-
찬란하게 빛나는 거대한 마법진들이 허공에 떠올랐다.
임솔 교수.
사실 처음은 좋지 않은 인연이었다.
생각해보면 내가 사과를 받는 쪽이었지.
단순한 사고였다. 실습에 사용할 마법 도구에 임솔 교수의 물품이 섞여 들어온 것이다. 그 덕분에 나는 크게 다칠 뻔했었다. 다행히 내게 [마력 감응] 이 있어서 다치진 않았던 기억이 난다.
지금 그런 사고가 일어났다면 이사장부터 불러서 난리를 쳤겠지만, 그때는 아직 이 세계에 적응하기 전이었다. 그래서 화가 나더라도 일을 크게 벌이고 싶지 않았다.
그때 임솔 교수가 직접 사과했었다. 물론 화가 풀리진 않았지만, 솔직히 교수님이 너무 예뻐서 넘어간 것도 있었다.
그 인연으로 우리는 교류를 이어갔다.
물론 세계 마법의 발전에 기여하는 건전한 교류... 뿐만은 아니었다. 내 마법을 연구한답시고 내게 야한 짓을 해주는, 교수와 제자 사이에 이뤄지기엔 지극히 비정상적인 교류였다.
지금은 어쩌다 보니 교수님이 더 좋아하지만… 아무튼 그랬다.
항상 무난하게 관계를 유지했고, 요즘은 더욱 사이가 좋아졌다.
임솔 교수는 어느샌가부터 나를 제자. 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처음엔 분명 이호연, 혹은 호연아. 라고 불렀는데 말이다.
나는 임솔 교수 나름대로의 거리 유지라고 생각했다.
교수와 제자 간의 거리 유지.
너무 친해졌다가는 논란이 될 수도 있고 임솔 교수님의 입장에서 어색해질 수 있으니까.
그래서 나도 스승님. 스승님. 하며 맞춰준 거였다.
그런데….
하늘에서 차가운 눈빛으로 마인들을 쳐다보는 임솔을 보니, 그 생각이 달라졌다.
*
하늘 위로 펼쳐진 거대한 마법진들은, 넓은 박람회장을 굽어살피는 신처럼 웅장했다.
그리고 그 마법진의 주인인 임솔의 몸이 천천히 뜨기 시작했다.
"… 뭐야."
나도 모르게 혼잣말이 튀어나왔다.
천사? 혹은 정령?
푸른색 마력에 뒤덮인 임솔은 하늘로 떠올랐다. 그 모습은 마치 세상에 존재하면 안 되는, 유니콘이나 드래곤 같은 허구의 존재 같았다.
쿵- 쿠궁-
박람회장 일대가 떨리고 있었다.
임솔이 지배하는 마력 때문이다.
아무리 임솔이라지만, 이런 거대한 마법을 혼자서 사용할 수 있는 건가? 그것도 이렇게 짧은 시간에?
주변은 아직도 소란스러웠다.
공중에서 박람회장을 내려다보고 있는 임솔을 눈치채지 못한 사람들, 그리고 마인들.
박람회장 여기저기서 폭발이 터지고, 사람들은 도망 다녔고, 마인들은 그 뒤를 쫓았다.
마인들은 마법 도구를 약탈하고, 마법진을 박살 냈다.
저들이 원하는 건 혼란과 공포. 거기서 나오는 악의 감정.
마왕이라는 정체불명의 무언가를 소환하기 위한 판데믹의 목적이다.
하지만 그 침략자들도 이 짙은 마력을 계속 무시할 순 없었다.
지이잉-
하늘에 떠 있는 수십 개의 거대한 마법진.
그것들이 천천히 돌아가면서 빛을 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땅에 있던 마인들도 하나둘씩 이상함을 눈치챘다.
당장 하늘에 저런 게 떠 있다면 누구든지 놀라기 마련이니까.
- 저, 저건 뭐야. 방해! 방해야!
- 끄륵, 막아. 마, 막아.
이성을 유지하고 있는 마인들과 이성을 잃은 마인들이 우왕좌왕하고 있던 그 찰나에.
쾅! 쾅! 쾅! 쾅!
임솔의 주변에 4개의 거대한 빛기둥이 떨어졌고, 그 중심에서 눈을 뜬 임솔의 자태는….
악을 처단하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라고 표현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이윽고 돌아가던 마법진에서 천천히 빛이 생성되기 시작했고.
"죽어버려."
새하얀 빛이 박람회장 곳곳에 강림했다.
천재 마법사 임솔.
그녀가 진심을 다하는 순간이었다.
무차별적으로 꽂히는 것 같은 그 빛들은 정확하게 마인들만을 노렸다. 대부분의 수준 낮은 마인들은 처음 빛기둥에 쓸려나갔고, 일부 수준 높은 마인들이 저항을 해보려 했지만 무용지물이었다.
당장 내 룬의 결계도 버틸 수 있을지 의문인 위력이었으니까.
- 이, 이런 씨발년이…!
그중 이 테러의 리더격인 마인이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마력을 끌어올렸다.
중년 남자의 모습을 가진 마인이었다.
임솔이 내뿜는 빛을 막으면서 동시에 마력을 구사하는 것만 봐도, 가진 무력이 약하진 않았다.
내가 진심으로 싸워도 승패를 장담하지 못할 정도였다.
마법사들이 많은 곳인 만큼 변수를 대비해 거물을 파견한 모양이다.
중년의 마인은 탁한 빛의 마력구를 뽑아내어 임솔에게 집어던졌고, 주변의 빛을 빨아들이면서 점점 가속한 마력구는 일직선으로 임솔에게 돌진했다.
"교수님!"
저것도 단시간에 만들어낸 것 치고 엄청난 위력의 마법이었다.
하지만 내 걱정과 다르게, 임솔은 너무나도 차분했다.
그대로 한 손을 들어, 가벼운 캐치볼을 하듯이 마력구를 잡아냈기 때문이다.
콰드득-!
멀리 있는 사람은 몰라도, 나는 확실히 볼 수 있었다.
임솔이 이를 악무는 모습을.
그리고 조용히 읊조리는 말들을.
"짜증나."
콰직!
손에 쥔 마력구를 그대로 역산해버린 임솔은 마인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짜증나. 짜증나. 짜증나. 짜증나. 짜증나. 짜증나. 짜증나. 짜증나…! 짜증난다고. 쓰레기들. 쓰레기들 주제에. 내 발끝도 못 따라오는 불가사리들이. 마법을? 왜? 어째서? 무슨 이유로? 죽어. 죽어. 쓰레기들이. 죽어…. 뒤져버려."
자신의 전력을 담은 마력구가 한 손에 막혀버린 걸 보고 전의를 상실한 중년의 마인은 멍한 표정으로 임솔을 바라보다가 그대로 빛에 삼켜져 사라졌다.
쿵! 쾅! 쿠구궁!
- 끄악!
- 끄륵, 끄르르!
리더 마인이 죽고도 하늘에서 떨어지는 빛들은 멈추지 않았다.
박람회장 내에 숨어있는 마인을 모두 사라질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