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8화 (238/648)

'클린.'

확실히 옷을 벗지 않았더니 정리가 빨랐다.

클린 한 번이면 땀이나 다른 부산물들이 사라져버리거든.

우리는 옷가지를 다듬으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이제 갈게요. 아영 씨."

"으응… 가요."

짧지만 깊은 관계를 끝냈으니 이제 다시 돌아갈 시간이다.

점심시간이 2분도 안 남았기 때문이다.

가속까지 쓰면서 달려가야 할 판이다.

그래도 질내사정까지 확실히 끝냈으니 후회는 없다.

'이 정도면 알차게 보냈네.'

아마 아카데미에 있는 모든 생도 중에 제일 알찼을거다.

양호실에서 양호 선생님과 섹스하는 것 보다 알찬 시간이 어딨어?

아무튼 이제 강의실로 돌아가야 하는데….

"… 아영 씨."

"…."

백아영은 내 손가락 하나를 잡고 주인을 떠나보내는 강아지같은 눈빛을 보냈다.

아마 자기도 보내야 하는 걸 알겠지.

그냥 투정이다. 

나와 더 오래 있고 싶다는 투정.

애타게 바라보는 저 눈빛을 외면하기 힘들었지만….

어쩔 수 없다.

수업은 들어야지.

루시랑 루미도 기다리고 있을 거다.

나는 백아영의 손가락을 떼어내고 부드럽게 안아줬다.

"갈게요. 여보."

"… 응. 다음에 또 와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백아영과 헤어지고 양호실을 빠져나왔다.

밖에는 점심시간이 끝나자마자 치료를 받기 위해 대기하는 생도들이 많이 있었다.

- 성녀님 보고 싶다.

- 너 솔직히 양호 선생님 보려고 오는 거지. 그게 아니면 어떻게 매일 다치냐?

- … 그냥 열심히 하는 거야. 

쯧쯧.

나는 고개를 저으며 강의실로 향했다.

어차피 저런 놈들이 한둘도 아니고.

신경 쓸 필요도 없다.

'아영 씨를 어떻게 덮쳐야하지.'

강의실로 달려가는 길.

어떻게 그 때 그 감성대로 강간 플레이를 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사실 지금은 협박... 같은 게 통할리가 없다.

서로 신뢰가 쌓여있으니까.

억지로 범하는 것도 말이 안된다.

'아닌가? 그건 좋아할 지도 모르겠네.'

그래도 저렇게 겉으로 싫은 티를 내는데 억지로 하는 건 좀 별로겠지.

여자는 마음도 중요한 법이니까.

"쯧. 릴리아나한테 물어볼까?"

그래도 서큐버스인데 지식이 있지않을까?

잠시 후 강의실로 들어가자 저쪽에서 루시와 루미가 서로 속삭이는 게 보였다.

수업 시작하기 직전인데도 저러고 있는 걸 보니 뭔가 중요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나는 쌍둥이가 이쪽을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슬쩍 주변을 둘러봤다.

강의실 안에는 엘리스와 남다은의 모습도 보였다.

사실 저 둘이랑 아카데미에서 아는 척을 하진 않았다.

엘리스는 아무래도 아가씨 느낌이라 접근하기 힘들고… 남다은이랑은 친해진 지 얼마 안 됐거든.

남다은은 스마트워치를 두드리며 미소짓고 있었다.

아마 남다희와 메시지라도 하고 있겠지.

'그러고보니 남다은은 누구랑 밥을 먹을까?'

나는 매일 루시 루미와 먹는다.

엘리스는 자기 혼자 알아서 먹을 거다. 어차피 남이 보든 말든 별 신경도 안 쓰겠지.

어쩌면 고급 식당 같은 곳으로 나갈지도 모르고.

그러면 남다은은?

'집에 가서 물어봐야겠다.'

같이 먹을 친구가 있을리가 없으니... 혼자 먹을텐데.

그건 좀… 그렇잖아.

다은이도 이제 내 여자친구나 마찬가지인데.

그런 생각을 하며 남다은을 바라보고 있으니, 남다은도 내 시선을 눈치채고 이 쪽을 바라봤다.

싱긋.

날 보며 살짝 웃음을 짓는 게, 참 신기했다.

그 무표정하던 애가 말이야.

기분이 좋아져서 살짝 눈인사를 받아주고 고개를 돌렸다.

아카데미에서 아는 척 하는 걸 원하진 않아보였으니까.

그때, 몰래 나를 바라보던 엘리스와 눈이 마주쳤다.

"…."

날 바라보던 엘리스는 눈을 질끈 감고 살짝 고개를 젓더니 다시 스마트워치로 눈이 돌아갔다.

"…?"

쟤는 또 왜 저래.

약발이 떨어졌나?

아닐 텐데. 그거 꽤 오래갈 텐데.

'마사지 때문인가?'

어제 마사지 해달라는 걸 거절했으니까.

엘리스는 어차피 켄타우로스 건으로 곧 볼 일이 있을거다. 

혹시 마사지를 원하면 그 때 해주지 뭐.

나는 아직도 속삭이고 있는 루시와 루미에게 다가갔다.

"루시, 루미. 뭐해?"

"으, 아, 이호연? 아무것도 아니야."

"헤헤. 오셨어요?"

딱 붙어서 시시덕거리던 루시와 루미는 내가 오자마자 후다닥 떨어졌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 왜 그래?"

궁금하긴했지만 프라이버시를 지켜주기로 했다.

얘들은 참 노는 것만 봐도 신기하다니까.

나는 쌍둥이의 사이에 앉아 수업을 준비했다.

둘 다 단발이었지만, 서로 구분하기 위해 루시만 다시 하늘색으로 머리를 염색했다.

"호연 씨. 오늘 끝나고 꼭 오셔야 해요."

"응? 아, 동아리방? 알지. 같이 가기로 했잖아."

"네. '꼭'이에요. 무조건! 루시도 기대하고 있어요."

"루, 루미…! 이상한 얘기 하지 마! 그리고 나보다 네가 더 기대하잖아!"

"아니야. 루시도 좋아서 같이…."

"…."

좀 조용히 하자. 다른 애들이 쳐다보잖아.

라는 말이 입에 맴돌았지만, 굳이 꺼내지 않았다.

어차피 곧 조용해질 테니까.

"미안해 루미… 큰 소리 내서."

"아니야 루시. 내가 놀려서 미안해."

루시와 루미는 히이잉 하며 눈을 마주치더니 서로 부둥켜안았다.

그리곤 각자의 온도를 느끼듯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잠깐 다투다가 저렇게 끌어안고 애정을 느끼는 행위가 한 두 번이 아니라 나도 익숙해졌다.

귀엽기도 하고.

싸울 때마다 돈독해지는 게, 마치 동네 꼬마들을 보는 것 같다.

드르륵-

"안녕하세요-! 던전연구학 교수 강효린입니다!"

다행히 교수가 들어오면서 쌍둥이들은 떨어졌고, 오후 수업이 시작되었다.

*

"…."

"왜 그러십니까. 레베카 님?"

"아무것도 아니야. 오늘따라 머리가 아프네."

레베카는 자신의 은신처에서 두통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이 세뇌에 당하고 있는 사실을 알아내고, 이호연과 헤어진 레베카는 부하들을 모두 소집했다.

그리고 부하들이 모두 마에스트로의 세뇌에 걸린 걸 알아차렸다.

한 번 그 마력의 성질을 알아채자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모두의 심장에 그 마력이 자리잡고있었다.

'언제 이렇게 깊숙이 들어온 거야….'

심지어 마에스트로와 마주친 적 없는 레베카의 오른팔이자 심복도 세뇌에 걸려있었다.

언제 접촉한걸까.

설마 이렇게 완벽한 사내였다니.

"알겠습니다.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응. 가서 쉬어."

하지만 레베카는 부하들의 세뇌를 풀지 않았다.

부하들은 자신이 계속 케어하지도 못할뿐더러, 연기도 제대로 못 할 테니까.

차라리 저렇게 내버려 두는 편이 낫다.

'내 정보를 빼가고 있던 건가.'

다행히 판데믹을 배신하는 계획을 짰다거나 한 적은 없었다.

애초부터 서로 이용하는 관계라는 건 알고 있었으니까.

다만 레베카가 생각했던 것보다 추악한 임무에 자신도 모르게 들어갔을 뿐이다.

쯧.

내 편이 하나도 없네.

레베카는 오랜만에 쓸쓸함을 느꼈다.

적어도 자기 부하들은 자신의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모두 마에스트로에게 세뇌당해있었다니.

"… 아니지."

내 편이라면 생겼잖아.

이호연.

생각해보니 연락처도 교환을 못 했다.

자신의 제자 겸 유전자 공급처.

호칭은 애기 아빠.

"… 우리 애기 아빠. 그냥 찾아가도 되겠지?"

연락할 방법이 없으니 직접 가는 수 밖에.

레베카는 몸을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슬슬 아카데미가 끝날 시간이다.

애기 아빠와 지내던 여자들이 자신을 무서워하는 것 같으니, 아카데미에서 바로 만날 계획이었다.

*

오후 수업이 끝난 후.

루시와 루미가 계속 노래를 부르던 동아리방으로 향했다.

'진짜 오랜만이네.'

사실 시험이나 입원 때문에 오랜 시간이 끌리다 보니 동아리에 대한 생각 자체를 안 했다.

루시와 루미는 따로 잘 만났으니까.

솔직히 굳이 동아리까지 올 필요는 없잖아.

"깔끔하지? 나랑 루미가 계속 관리했거든."

"맞아요. 루시랑 노력했어요."

"오… 그렇네. 깔끔하네… 어? 근데 저건 뭐야?"

안 쪽으로 들어가자 동아리 방에 있으면 안 될 물건이 보였다.

그런데 루시와 루미는 하나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테이블에 앉았다.

"여기 앉으세요. 제가 커피라도 가져올게요."

"나는 카페라떼로 줘 루미!"

"나는 아메리카노… 아니, 저건 뭐냐고."

내 시선 끝에 보이는 건.

쌍둥이의 취향이 다분히 반영된… 핑크색 침대였다.

그것도 엄청나게 큰 사이즈였다.

킹사이즈보다 큰 것 같은데. 저런걸 뭐라 하더라? 라지킹?

"커피 타올게요."

"아니 루미…."

"이호연, 이거 봤어? 프랑스에 나타난 켄타우로스래."

루시는 싱글벙글 웃으며 내게 스마트 워치를 내밀었다.

"… 응 봤어."

얘네들 대답해줄 생각이 없구나.

억지로 내 말을 무시하고 있다.

그래. 맞춰주자.

기다리다 보면 말해주겠지.

루시와 잡담을 이어가다 보니 루미가 커피를 내왔다.

그 이후로 얼마나 대화를 했을까.

오랜만에 친구들과 노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긴 했다.

"그래도 좀 들리지 그랬어. 우리 이 동아리 만들려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나 퇴원한 지 며칠 안 됐잖아. 만날 사람이 많았거든."

"아, 맞다 맞다. 까먹을 뻔 "

"루시. 호연 씨도 사정이 있었을 거야."

나는 아이스초코를 쪽쪽 빨고 있는 루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이제 말해줘. 저 침대는 뭔데?"

사실 감이 안 오는 건 아니다.

저렇게 해놨는데 무슨 의도인지 모르면 바보겠지.

그냥 루시와 루미의 입으로 직접 듣고 싶을 뿐이다.

"… 우리의 무기?"

"호연 씨가 저희에게 빠질 곳이에요."

"…."

루시는 살짝 눈을 피했고, 루미는 오히려 내 팔을 잡아 왔다.

"사실 고민을 많이 했는데… 역시 방법은 이거밖에 없어요. 저희는 둘이니까."

"… 루미가 그렇다고 하니까. 나도…. 아, 싫다는 말은 아니야. 그냥 그, 으으…."

루미와 루시는 말을 한 번씩 주고받으면서 내게 다가왔다.

확실히 이런 경험은 없었으니까.

나도 처음인 영역이다.

"아, 아무튼. 빨리 벗어. 설명하기 싫어."

"옷은 제가 치워놓을게요."

쌍둥이들은 어느새 내 양팔을 잡고 있었다.

쩝, 그래. 

솔직히 처음 침대를 봤을 때부터 예상했잖아.

나는 둘에게 몸을 맡긴 채 침대로 질질 끌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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