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걸로 부족하다고, 개인적으로 사과를 해야겠다면서 엘리스는 이호연을 데려갔다.
"에, 엘리스...."
아이작은 골목길을 넘어 사라지고 있는 엘리스를 보며 울상을 짓고 있었다.
"...."
피곤하다.
스칼렛은 생각했다.
이 미친 인간하고 빨리 헤어지고 싶다고.
잠시 후, 엘리스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다음.
아이작은 표정을 되돌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쾌활한 미소를 지었다.
"... 쩝. 아쉽게 됐네. 결국 멋있는 모습은 하나도 못 보여줬잖아. 오랜만에 통과였는데."
"아쉽습니다."
그게 정말 멋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스칼렛은 가끔씩 남자들이 이해가 안 됐다.
"거짓말이더군."
아이작은 뜬금없이 입을 열었다.
아직도 입꼬리는 흥미로운 듯 올라가있었다.
"...."
스칼렛은 갑자기 아이작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해가 안됬기에 다음 말을 기다렸다.
"스칼렛."
"예.
"혹시 내 신상에 대한 정보가 이호연에게 흘러 들어갔을 가능성이 있나?"
"없습니다."
그건 단언할 수 있다.
이호연이 정확히 어디까지 추리했는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엘리스의 마사지에 대한 얘기만으로 밤의 황제가 습격할 거라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자신을 떨어뜨려 놓은걸 수도 있다.
하지만, 단언컨대 신상에 대한 정보는 알 길이 없다.
"흐음... 그럼 상황만으로 판단한 건가. 그것도 나쁘진않지. 어차피 능력이 워낙 좋으니 상관없어."
아이작은 스칼렛을 앞에 두고 의미심장한 말들을 중얼거리다가, 다시 스칼렛을 바라 봤다.
"스칼렛."
"예."
스칼렛은 아이작의 말을 기다리며 고개를 숙였다.
표정이 좋은 걸 보니 화가 나진 않은 것 같았다.
"저거, 네가 직접 감시해라."
"... 예?"
"이호연 말이야. 이호연."
아무것도 아닌 듯.
아이작은 담배를 꺼내서 꼬나물고 손가락 끝에 불을 일으켰다.
"엘리스와 내가 대화하는 도중에도 계속 너를 흘낏흘낏 쳐다보던데, 너한테 관심이 있는 것 같아. 아니면 그냥 금발을 좋아하는건가?"
스칼렛은 갑작스러운 아이작의 말에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그 반응을 읽은 아이작은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왜, 싫어?"
"아닙니다. 실행하겠습니다."
'다행이야.'
스칼렛은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정말 혹시나 해서 이호연이 거는 눈인사에도 반응하지 않았다.
눈앞의 사내가 괴물인 건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었으니까.
아이작과 같은 공간에 있을 때는 작은 방심도 하면 안 된다.
'다음에 꼭 호연 님에게도 말해놔야지.'
자신이 이호연의 눈인사를 받기라도 했으면 괜히 의심을 당할 뻔 했다.
"그래. 저거 괴물이야. 아무리 은신술이 뛰어난 너라도 언제든지 들킬 수 있으니까 조심하고."
"... 예. 조심하겠습니다."
늦었습니다. 길드장님.
아무리 조심해도 들켜버리거든요.
게다가 이미 들켜서 몸과 마음 모두 개조당했는데.
스칼렛은 자신의 어이없는 처지를 떠올리곤 고개를 숙였다.
본의아니게 살짝 올라간 입꼬리를 들키지 않기 위해서도.
"스칼렛. 네가 엘리스 때문에 한국에 들어와 있던 거였지?"
"예. 개인적인 조사로…."
"음, 기억났어. 세바스 찬이 직접 은신에 특화된 너를 데려가서 이호연을 조사했었지. 지금은 일이 끝나고 엘리스의 비서를 도와주고 있다고. 맞아?"
"맞습니다."
아이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담배를 떨어뜨리고 발로 꾹꾹 밟았다.
"그건 세바스 찬에게 맡기고 너는 다시 이호연을 감시해. 길드장으로서 명령이다. 세바스 찬에게는 내가 말해놓을 테니 걱정 말고."
"… 알겠습니다."
스칼렛은 표정을 관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인계를 써도 좋고… 아, 너는 그쪽이 아니었나? 아무튼."
참고로 여성 잠입 요원들은 대부분 미인계를 사용한다.
자신이 지닌 능력을 사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으니까.
그리고 미인계 요원들의 대부분은 아이작을 꼬시는 걸 목표로 삼고 있다.
"계속 너를 바라보는 게, 관심이 있다니까.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좋거든. "
"… 예."
"꼬시진 못하더라도 네가 잘 구슬려서 아이리스 길드로 스카웃을 시도해봐. 아, 이왕이면 엘리스랑 아예 떨어뜨리면 좋겠는데."
"노력해보겠습니다."
아이작은 아주 큰 오해를 하고 있었다.
만약 스칼렛이 이호연을 꾀는 데 성공한다 해도, 엘리스와 떨어지진 않는다는 것이다.
이호연은 여자에 미쳐있으니까.
"하지만 너무 많은 부담을 주진 않으마. 정보만 빼 와도 좋고, 친분을 쌓아놓기만 해도 좋아. 무조건 크게 될 놈이거든."
"알겠습니다."
아이작은 기분 좋게 웃었다.
솔직히 처음에 생도를 바로 제압하지 못하고 드잡이질을 하는 것에 자존심이 상했다.
하지만 처음 목표했던 1분이 지나고 5분을 버텼을 때는 당황했고, 10분이 되니까 오히려 감탄이 나왔다.
당연히 전력은 아니었다.
밤의 황제라는 이명답게, 아이작은 달이 뜨면 능력치가 두 배로 뛴다.
하지만 낮의 상태로도 강자의 반열에 오르긴 충분했다.
밤이 되면 '황제'라는 이명에 맞도록 격이 달라질 뿐이다.
'10년…? 아니 5년. 어쩌면 그 이하 일지도 모르겠어.'
아이작의 기준을 통과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데, 그 기준이 말이 안되기 때문이다.
자신보다 어리면서 과거 그 나이의 아이작 보다 강해야 한다.
대부분이 아이작보다 어느 한 분야에서 특출났기에 아이작의 인정을 받았지만, 이호연은 달랐다.
20살의 아이작과 비교하면 너무나도 강했다.
살면서 처음 마주친 차마 잴 수 없는 재능.
'저 성장곡선을 유지하기만 한다면….'
아이리스 길드를 맡기기에 너무 좋은데.
아직 은신이나 잠입 쪽의 마법은 모르는 것 같지만, 그 사기적인 결계 하나만으로 충분하다.
공격 능력은 충분했고, 마법의 창의성이나 유연함도 좋았다.
아이작 같은 상대를 처음 상대했을텐데 바로바로 유용한 마법들을 쏟아냈으니까.
'그래도 아직 내 딸은 줄 수 없어.'
아이작 자신이 정한 규칙이 있다.
자신의 딸을 가져갈 수 있는 남자의 기준.
먼저 엘리스가 진심으로 사랑해야 하는 남자여야 한다.
엘리스가 자신의 딸로 존재하는 이상, 세상 그 누구보다 행복해야 하니까.
하지만 사랑만 있다고 살 수는 없다.
자신이 죽더라도 엘리스를 지킬 수 있어야 한다.
그렇기에, 만전 상태인 자신을 이길 수 있는 남자.
"…."
아직까진 가능성을 본 적도 없었는데.
평생 데리고 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오늘 그 가능성을 봐버렸다.
'너도 이제 어른이구나. 엘리스.'
순식간에 커버린 딸을 생각하니 아이작은 살짝 침울해졌다.
지금도 그 이호연이란 놈을 데리고 갔으니까.
'….'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스칼렛은 빨리 집에 돌아가고 싶었다.
*
"… 들어와."
엘리스는 나에게 개인적으로 사과하겠다며 자신의 집으로 불렀다.
솔직히 아이작에게 직접 사과 받아서 큰 상관은 없는데… 일단은 엘리스를 따라갔다.
마사지하러 온 게 바로 며칠 전이었지만 그래도 히로인의 집에 들어오는 건 긴장되네.
엘리스의 방은 깔끔했지만, 책상은 더러웠다.
업무 중에 뛰쳐나온 건지 서류들이 널브러져 있었고 노트북으로는 무언가를 작성하고 있었다.
엘리스는 마시다 만 와인잔을 들고 몇 번 흔들었다가 자리에 앉았다.
"미안해. 우리 아빠가 정상이 아니라서… 나 때문에 고생했네."
"아니야. 나름 좋은 경험이었어."
강자랑 싸우는 건 언제든지 좋은 경험이다.
상대가 아이작이라면 날 죽일 생각도 없었을 테니 더 좋지 뭐.
"…."
하지만 엘리스는 내 말이 불만인 듯 살짝 볼을 부풀렸다.
"그러면 안 돼."
"어?"
"사과받을만한 일을 당했으면 사과를 받아야지. 그렇게 사람 좋게 넘어가는 건 안 된다고."
"…."
"그렇잖아. 왜 내가 뒤를 캐도 괜찮다고 하고. 이번엔 일면식도 없는 아빠가 찾아와서 목숨을 위협했는데 괜찮다고 하고. 착한 척 하는 거야? 아니면 호구인 거야?"
갑자기 뭐야.
엘리스는 뜬금없이 내게 훈계를 시작했다.
★ 히로인 상태창
[엘리스]
- [ 호감도 : 79 ]
- [ 성욕 : 88 ]
- [ 식욕 : 30 ]
- [ 피로도 : 59 ]
현재 상태 : 저렇게 물렁한 남자로는 안돼. 단단함이 부족해.
"음…."
나름대로 단단함에는 자신이 있었는데.
생각해보니 그렇긴 하네.
나는 히로인들을 공략해야 하는 입장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져줘야 하는 부분이 많다.
그리고… 사실 화가 별로 안 난다.
내가 주인공으로 바뀌면서 성격이 이상해진 건지는 모르겠다.
근데 화가 안 나는 걸 어떡하라고.
"화가 안 나는 걸 어떡해."
"… 왜? 학생회에서 너한테 막말을 할 때도 그렇고, 부회장이랑 싸울 때도 그렇고. 화를 낼 때는 내잖아."
엘리스는 아무래도 내가 이해가 안 되는 모양이다.
자기가 호감을 가질만한 남자인지 확인하는 과정인가?
"음…."
확실히 그럴 때도 있긴 했지.
화를 못 내는 건 아니다.
'아.'
나는 그때와 지금의 차이점을 드디어 알았다.
예쁜 여자는 뭔 짓을 해도 예쁘다는 사실을 알아챈 것이다.
그러다 보니 릴리아나가 아무리 까불어도 화가 나진 않는다.
그냥 귀여울 뿐이지.
아이작이 날 덮친것도 마찬가지다.
엘리스와 관련이 있는 걸 알고나니 화가 나지 않게 된 것이다.
"걔네들은 매력이 없다고 해야 하나? 화를 유발하잖아."
"너 그게 무슨…. 하아, 그래. 확실히 아빠랑 닮은 구석이 있네."
뭔 소리야 저건.
엘리스는 살짝 붉어진 볼에 손바닥을 가져갔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그 켄타우로스에는 왜 그렇게 관심이 많은 거야? 나는 더 큰 보상도 해 줄 생각이었는데."
켄타우로스에 집착하는 것도 궁금한가보네.
다른 사람이 보기엔 웃기겠지.
사서 도와준다고 나서는 모양이니까.
다행히 이건 준비해놓은 변명이 있다.
"켄타우로스는 그냥 뭐… 개인적인 궁금증이야. 마법 연구랑 관련 있는."
"역시 천재 마법사님은 다르네."
엘리스는 살짝 웃으며 와인에 손을 가져갔다.
내 앞에 있는 잔에 따라주려는 생각인 것 같다.
와인을 따르는 엘리스를 멍하니 바라보는데, 이제 보니 손이나 얼굴이나 혈색이 엄청 좋다.
저번에 받은 마사지가 그렇게 좋았나?
"맞다. 마나 마사지 효과는 어땠어? 저번에는 꽤 열심히 했는데."
진짜 열심히 애무했었지.
섹스까지 못 해서 아쉬웠지만, 생각해보면 그때 섹스까지 했다면 오늘 엘리스가 날 구하러 왔을까.
구하러 왔을지도 모르지만, 아닐 가능성도 있다.
엘리스는 내 말을 듣고 와인을 따르던 손을 순간 멈칫했다가, 마저 와인을 따른 후에 손을 내렸다.
"… 좋았어. 효과가 확실히 엄청나더라. 큼, 맞아. 이왕 여기 온 김에 마사지나 하고 갈래? 그럴 생각은 없었지만, 그냥 온 김에 하면 편하니까."
"…."
이거 왜 자기 집으로 불렀나 했더니 혹시 마사지 때문이었나?
엘리스는 내 눈치를 봤다.
이제보니 침대 뒤에 마사지 배드도 펼쳐져 있었다.
준비까지 끝내놨구나.
하지만 지금 하기엔 좀 그런데.
"나는 상관없는데… 혹시 저번에 한 마사지 효과가 벌써 떨어졌어?"
"어?"
엘리스는 내 말에 살짝 당황한 듯 말을 멈췄다.
"아니. 그렇진 않아… 아직도 마나가 잘 돌아가."
당연하지.
그때 추가 서비스를 얼마나 열심히 했는데.
벌써 풀릴 리가 없잖아.
"너무 자주 하는 건 안 좋아. 조금 몸이 진정되면 불러."
"응… 알겠어."
아쉬워하는 엘리스를 보니 당장이라도 덮쳐버리고 싶지만….
방금 아이작을 만나고 왔는데 그러는 건 너무 무섭잖아.
혹시나 보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벌써 죽고 싶진 않다.
조금 더 안전할 때 해도 늦지 않다.
우리는 와인을 마시며 마사지에 대한 얘기 말고, 오랜만에 제대로 된 잡담을 나눴다.
엘리스의 취향은 파악하고 있으니 서로 즐거운 대화를 하기엔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