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3화 (223/648)

*

"괜찮겠어? 따라 하기 힘들 텐데."

레베카의 아지트 안에 있는 훈련장에서 나와 레베카는 마주 섰다.

어디서 가져왔는지 보라색 수정구가 달린 지팡이를 들고 있었는데, 딱히 도움이 되는 아티팩트는 아닌 것 같았다.

"그 지팡이는 장식품이에요?"

"아, 응. 알아챘구나? 이러면 조금 더 무서워보이거든."

확실히 저러니까 진짜 마녀 같네.

"음, 역시 지금이라도 그만 두는 게…."

"왜요?"

레베카는 아까부터 저 말을 반복했다.

룬의 결계 좀 알려달라는 게 어려운 일인가?

룬의 일족을 부흥시키려고 하는 걸 보면 알려주기 싫은 건 아닐텐데.

"… 룬의 결계는 단순한 게 아니야."

"일단 해보는 거죠 뭐."

그나저나 오랜만에 훈련장에 왔더니 기분이 이상하네.

아카데미에서도 안 간 지 오래라서.

"이건 재능으로 커버되는 영역이 아니라… 룬의 일족에서 내려오는 교육을…."

왜 이렇게 걱정이 많을까.

그냥 해보면 되잖아.

"알았다니까요. 레베카 씨. 괜찮아요. 그냥 해볼게요."

나는 조금 단호하게 말했다.

"… 흥. 그래. 잘 들어. 안 된다고 상처받지 말고."

아, 내가 상처받을까 봐 저런 거구나.

그럴 필요 없는데.

스르륵-

잠시 후 레베카의 마력이 훈련장 내부를 감싸기 시작했다.

익숙한 룬의 결계다.

천천히 퍼지는 마력의 구를 관찰해봤지만, 역시 내 마법진과다른 건 없었다.

"룬의 일족은, 룬의 결계를 완전히 지배해야 해."

레베카는 조용히 읊조렸다.

지금까지 보여줬던 분위기에서 완전히 달라진 모습이다.

두근-

동시에 내 주변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엄청난 중압감이 내 어깨를 짓누르고, 전투 감각이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룬의 결계를 발동해봐."

"…."

나는 미간을 찌푸리고 압박감을 버티며 룬의 결계를 만들었다.

날 누르는 중압감을 막기 위해 내 몸을 감싸면서 발동했다.

- 파지직

하지만 내 결계는 구현되자마자 즉시 무너졌다.

레베카의 룬의 결계에서 보내지는 압박을 견디지 못했기 때문이다.

"룬의 결계는 그런 게 아니야."

내게 다가온 레베카는 살짝 웃더니 자신의 룬의 결계를 무너뜨렸다.

천천히 형태를 잃어가던 룬의 결계는, 어느 순간 정지했다.

"와…."

마법이 발동하고 있지만 동시에 발동하지 않은 상태가 된 것이다.

"아니, 이게 어떻게 가능한 거에요?"

지금까지 저딴 현상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아마 임솔에게 보여주면 놀라서 뒤로 자빠질 거다.

"룬의 일족이 배우는 마법은 평생 하나뿐이야. 그렇기에 결계 안의 공간은 룬의 것이 되는 거야."

레베카는 한쪽 손을 내밀었고, 나는 손에서 빠져나오는 마력이 결계와 이어져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이건… 계속 유지하고 있는 게 아니네요. 그냥, 처음부터 이어져 있는 듯한…."

"맞아. 내 마력은 이미 룬의 결계와 같은 구조거든. … 근데 아직 시각화를 안 했는데 어떻게 봤어?"

"그런 게 가능하다고요?"

레베카가 의문을 표시했지만 나는 놀라움에 눈을 크게 떴다.

마법과 인간이 같은 마력 구조를 가진다는 것이 도대체 어떻게 가능한데?

"그게 룬의 일족이니까. 음, 이래서 보여주지 않으려 했어. 네 의욕만 떨어질 것 같아서."

사실 의욕이 떨어지진 않았다.

오히려 오르면 올랐지.

내가 모르던 마법의 개념이 있는거니까.

"그, 그렇지만 괜찮아."

레베카는 내 열의에 가득찬 눈을 오해했는지 뭐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나는 레베카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레베카가 구현한 룬의 결계를 관찰했다.

마력과 인간의 융합.

'저게 나도 가능할까?'

아니. 절대 안 된다.

저건 아직 몸이 발달중인 시기에 오랜 시간을 들여야 가능한 현상이다.

나는 이미 늦었다. 설령 가능하다고 해도 나는 룬의 결계 뿐만아니라 다른 마법도 필요하다.

그렇다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하는데….

"네 재능은 충분하니까… 재능이 있는 아이를 낳기만 하면 내가 어릴 적부터 육성해서…."

"아."

레베카가 무슨 말을 하고 있지만, 나는 듣지 못했다.

내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일어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마력 감응]을 가지고 있는 나도 모르던 새로운 개념을 알게 되었을 때, 그걸 이해하자마자 내 재능은 강제로 몸을 진화시켰다.

이건 하나의 각성이었다.

마치 처음 마나를 느꼈을 때처럼.

마치 처음 전투 감각을 사용했을 때처럼.

마치 새로운 스킬을 만들어낼 때처럼.

릴리아나와 섹스 중 각성했을 때처럼.

어쩌면 그 이상으로 어떤 진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레베카처럼 아예 몸의 마력 회로를 바꿀 순 없다.

그녀의 몸은 룬의 결계만을 위한 것이니까.

레베카는 마력의 성질 자체가 룬의 결계와 똑같이 바뀌었다.

그렇기에 룬의 결계를 설치할 때마다 자신의 몸과 이어진다.

직접 컨트롤하는 것과는 다르게 아예 결계와 한 몸이 되기 때문에 더욱 강한 것이다.

보통의 마법과는 다른 현상이다.

따라 할 수도 없고, 따라 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몸은 가능하다.

'이어지지 않는다면, 붙잡고 있으면 돼.'

안되면 억지로. 거기에 내 방식을 더해서.

"… 룬의 결계."

나는 다시 룬의 결계를 펼쳤다.

내 몸에서 나온 마력의 실들은 순식간에 마법진을 그려나갔고, 마지막에 구성되는 핵심 술식에서 합쳐졌다.

전체를 잡고 있을 순 없으니, 핵심 술식만 붙잡는 거다.

이 상태에서 핵심 술식을 변화시킨다. 

'내 몸과 같은 마력 성질로.'

그러면 이렇게….

까드득-

내 몸을 중심으로 구 형태의 룬의 결계가 만들어졌고, 동시에 압박감이 사라졌다.

레베카의 결계안에 내 영역을 만든 것이다.

"하아… 된 것 같은데요? 어때요. 레베카 씨."

나는 뿌듯한 미소를 보내며 레베카를 바라봤다.

마법 실력이 늘어나는 이 감각.

언제 느껴도 기분 좋았으니까.

레베카는 입을 벌린 채 날 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 우리 애기 아빠는 진짜 좋은 유전자네."

*

신영 길드의 장남인 신동민이 마인과 접촉했다는 기사.

처음엔 불같이 타올랐던 대중들도 하나둘 씩 다른 씹을 거리를 찾아 떠났다.

신동민이 실종되었다는 기사에도 처음에만 관심을 가지다가 점점 조용해졌다.

그렇게 신영 길드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조금씩 적어졌고, 조용히 복귀할 타이밍이 왔는데도 신동민은 본가로 돌아가지 않았다.

어차피 집에 돌아가봤자 받을 대우는 뻔했다.

어딘가 저택에 갇혀서 평생 감시당하며 나오지 못할 거다.

왜냐면 자신은 마인이니까.

'죽이지 않고 자신의 관리에 둔다.'

아들이 마인이어도 버리지 않는다.

자신의 아버지는 그런 사람이다.

어쩌면 날 추적하기 위해 헌터들을 고용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살 바에는… 차라리 당한 만큼 돌려주는 게 낫겠지.

자신이 이렇게 된 원인.

이호연과 문수린이다.

꿀렁-

온몸에 튀어나온 혈관. 

원래 모습이 희미한 흉악한 얼굴과 뿔.

완전히 마인이 되어버린 신동민은 집을 뛰쳐나와 판데믹과 접촉했다.

집에서 나오면서 비자금을 많이 챙겨왔기에 판데믹의 마인들을 고용할 수 있었다.

"… 작전은?"

"예. 이호연과 문수린의 기숙사로 이미 출발했습니다."

타다닥-

신동민의 눈앞의 모니터에선 익숙한 해골가면을 쓴 사내 둘이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 제대로 구한 거겠지?"

"예. 직접 지원한 S급 마인들입니다."

"S급 마인들 중에선 정신이 이상한 놈들이 많다던데. 비싼 돈 주고 산 놈들인데 제대로 처리해야해."

"그렇긴 하지만… 일 처리에는 문제없을 겁니다."

"… 그래."

이게 마지막이다.

S급 마인 둘을 구한 것만으로 가져온 돈은 모두 써버렸고, 돌아갈 곳도 없다.

"…."

신동민은 모니터에서 사라진 마인을 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임솔 교수의 연구실.

"이렇게… 하면."

촤르륵-

임솔이 마력을 쏟아냄과 동시에 연구실이 마법 진으로 가득 찼다.

"완성이네."

이호연이 도와준 덕에 바로 완성할 수 있었다.

손에서 나오는 마력을 자유자재로 바꾸며 임솔은 자리에 앉았다.

"흐흐흣."

완성된 서류를 보는 임솔의 입에서 실소가 새어 나왔다.

새로운 마법의 연구가 끝났을 때.

자신의 실력이 한 걸음 더 나아갔다는 걸 깨닫는 순간 찾아오는 성취감.

'마법사 임솔' 으로서의 기쁨.

이게 임솔이 마법에 미치는 이유였다.

"후우… 우?"

하지만 뭘까.

몇 달이나 걸려서 완성한 연구인데도 황홀함이 찾아 오지 않는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좋긴 좋은데, 뭐랄까…

"…?"

지금까지 어떻게 이 정도의 성취감으로 만족했을까 싶은 감정이었다.

이 프로 부족한, 아니 그 이상 부족했다.

가슴 한 구석이 아직 채워지지 않았다.

분명 지금까지는 충분했는데 어째서 이렇게 된 걸까.

임솔은 눈을 찌푸리며 원인을 분석했다.

하지만 생각이 날 리가 없었다. 평생 마법을 연구했고, 그게 삶의 원동력이었으니까.

홀짝.

책상에 있는 믹스 커피를 마시던 임솔은 문득 떠올렸다.

"… 원래 이렇게 밍밍했나."

괜찮다.

초코 쿠키도 항상 구비해놨으니까.

냠.

"…."

임솔은 깨달았다.

커피를 마실 때마다 답답함이 풀리던 시원함과 쿠키를 먹을 때마다 느껴지는 달콤한 기운이 사라졌다.

"… 쩝."

임솔은 입맛을 다셨다.

적어도 이건 바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호연.

그의 정액이 맛있었으니까.

믹스커피보다도, 초코쿠키보다도.

마법 연구… 보다도 달았다.

"푸흡…."

설마 마법 연구를 끝내자마자 남자의 정액 맛이 생각나는 때가 오다니.

나도 많이 바뀌었구나.

아니, 어쩌면 정액 때문이 아닐지도 모른다.

이호연이니까.

그와 마법을 연구하는 게 재밌었으니까.

같이 마법에 관해 토론을 할 때도, 보답이라면서 정액을 빼줄 때도.

즐거웠다.

마법 연구와는 다른….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즐거움이었다.

"…좋은 제자네."

스승한테 이렇게 기쁨도 주고.

후후.

답답한 마음의 원인을 알아챘으니 됐다.

임솔은 믹스 커피에 각설탕을 두 개 더 집어넣고 휘휘 저었다.

이러면 조금 더 달콤해지겠지.

그리곤 다음 주에 있을 마법 박람회를 생각했다.

"… 재밌으려나?"

사실 그렇게 흥미는 없었다.

제자가 가자고 해서 따라가 주는 것뿐이었다.

시험 만점을 받은 제자를 칭찬해주는 느낌으로.

어차피 임솔과 이호연. 

이 두 명보다 높은 수준의 마법은 없을 테니까.

하지만… 제자와 함께 즐긴다면, 아니 함께 있는 것만으로… 마법 박람회를 기대해도 될 것 같다.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