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2화 (222/648)

레베카가 직접적으로 사람을 죽이진 않았지만, 그때 발생한 희생자도 분명 있었다.

"…."

나는 레베카의 얼굴을 확인했다.

한치에 부끄러움도 없는 얼굴이었다.

"… 레베카 씨. 따라 해보세요."

"응? 어떤 거?"

"제가 말하는 걸 그대로 따라 하면 되요. 그리고… 마음 단단히 먹어요."

"마음을 단단히? 아니 세뇌 같은 거 안 당했다니까."

그녀가 원작에서 죽기 직전.

눈물을 흘리며 과거를 후회하던 장면을 기억하고 있다.

주인공과 히로인들에게 결국 제압당한 레베카는 죽기 직전이 되서야 세뇌가 풀렸다.

- 처음부터… 그랬던 거구나. 하아… 난 어째서 이렇게 된 걸까.

외모 덕에 인기가 많았던 악역이었기에, 제작진 측에서 마무리 장면을 특별히 만들어줬다.

- 아무도 죽이고 싶지 않았어. 나는 그냥… 그냥 일족을…. 마에스트로….

그때는 게임을 플레이하는 입장이었으니 어쩔 수 없이 레베카를 죽여야 했지만, 지금은 다르다.

레베카는 조금 불만이 있는 것 같았지만 내 말에 고분고분 따라줬다.

"그대로 따라 하세요."

"그대로 따라 하세…."

"아니 그거 말고 이제부터요."

"… 분위기 좀 풀어보려고 한거야. 화내지마."

하아.

이 사람이 내 마음을 알까.

나는 천천히 원작에서 봤던 마에스트로의 세뇌어를 읊조렸다.

마에스트로가 말하면 세뇌가 시작되지만, 다른 사람이 말하면 극심한 고통이 찾아오며 세뇌당했을 때의 기억이 돌아오는 트리거가 걸려있다.

이걸 발견한 후로 판데믹의 공략이 쉬워졌었지.

"… 투 아르마 마에스트로."

"투 아르마 마에스트로."

세뇌어을 말한 레베카의 상태는 나쁘지 않아 보였다.

설마 정말 세뇌에 안 걸린 건가?

"… 괜찮아요?"

"응, 이게 뭔데? 당연히 괜… 어?"

털썩-

레베카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며 앉아있던 의자에서 굴러떨어졌다.

"레베카 씨?!"

"자, 잠시… 내, 내가 왜? 어째서… 읏, 웁. 우욱!"

"…."

속 안에 있는걸 모두 게워내는 레베카를 지켜보다가 나는 눈을 피했다.

몰아치는 기억때문에 심한 두통이 일어나고, 자신이 저질렀던 범죄까지 모두 기억나는 것이다.

저걸 지켜보는 건 실례지.

"욱, 웁… 콜록. 콜록."

"클린."

레베카의 상태가 조금 괜찮아졌을 때.

내 신호와 함께 깨끗해진 바닥을 지나 레베카에게 다가갔다.

"레베카 씨. 괜찮아요?"

"… 막았다고 생각했는데."

핏기가 사라진 얼굴로 레베카는 중얼거렸다.

"그게 마에스트로의 무서운 점이에요. 조금이라도 틈이 있으면 안 돼요. 일단은 저랑 같이 세뇌를 풀 방법을 찾아봐요."

이 트리거는 단순히 세뇌가 걸렸는지 아닌지만 알 수 있다.

세뇌를 풀기 위해선 다른 복잡한 방법이 필요하다.

"아니. 알았으니 괜찮아."

후우.

심호흡한 레베카는 눈을 감고 마력을 일으켰다.

곧 레베카의 심장 부근에서 마력이 뭉쳤다.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만큼 작은 점이었다.

아주 작은 점으로 끊임없이 모이던 마력은 어느순간 팽창하기 시작했다.

온몸을 틈도 없이 훑고 지나간 마력들은 레베카의 몸 밖에서 구로 바뀌었고, 몸을 둘러싼 마력의 구에는 검은 마력들이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저 기분나쁜 마력.

나는 바로 그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설마 그게…."

"마에스트로의 마력이야. 언제 내 몸 안에 파고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알아챈 이상 룬의 결계로 빼낼 수 있어."

검은색 마력들을 허공에서 모은 레베카는 꽈드득- 꾸득- 하는 소리를 내며 마력을 압축시켰다.

퐁당-

그리고 옆에 놓여있던 비커에 집어넣자, 마력은 스르륵 사라졌다.

"…하아. 호언장담을 했는데 추한 꼴만 보였네. 애기엄마가 이런 사람이라 미안해."

"아니에요."

어느새 애기엄마가 되어버렸네.

"그, 그리고… 사실이 아니었어.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는 거. 거짓말해서 미안해."

"… 괜찮아요."

사실 도덕적으로, 아니 법적으로도 문제가 있는 일이지만… 나도 똑바로 살고 있는게 아니라서.

내가 히로인들을 공략해야 하는 것처럼 레베카도 룬의 일족을 찾아야 했다.

그녀에겐 그게 목숨처럼 소중한 일이었던 거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이 세뇌를 미리 끊어냈다는 거다.

원작 후반부에서 레베카는 사람을 거리낌 없이 죽여대는 무서운 악역이거든.

아직 그렇게 깊게 세뇌되기 전에 풀어낸 건 확실히 고무적인 일이다.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레베카 씨 탓이 아니니까요."

"하지만… 하아. 어떻게 해야 하지."

레베카는 자신이 한 짓이 아직도 믿기지 않는 것 같다.

'역시 마음은 착한 사람인데.'

내가 룬의 일족이 아닌 걸 알자마자 강제로 하려고 하지 않는 것도 그렇고… 착한 사람인 건 맞는 것 같다.

'차라리 빨리 만나서 다행이네.'

더 심한 일을 하고 나서 만났으면, 자신의 한 일에 대한 죄책감에서 회복이 불가능했을지도 모르겠다.

"나중에 봉사활동이라도 같이 가요. 아니면 좋은 상담사라도 소개해줄게요. 중요한 건 룬의 일족의 부흥이잖아요. 안 그래요?"

"… 응."

생긴 건 퇴폐적인 마녀처럼 생겼지만 속은 순한 레베카가 판데믹이라는 악의 단체에 들어간 원인.

룬의 일족의 부흥이다.

레베카는 내 입으로 룬의 일족의 부흥이라는 단어를 꺼낸 게 놀라웠는지 눈을 크게 떴다.

"그럼… 바로 할 거야? 확인도 했으니까?"

"그것도 좋지만… 저는 룬의 일족의 제대로 된 부흥을 원해요. 레베카도 그렇죠?"

"당연하지. 내 인생을 걸 수 있어."

"그러면 저한테 룬의 결계 좀 알려주세요."

"룬의 결계? 그게 무슨 상관이야?"

"왜냐니요. 제 룬의 결계 수준이 높아질수록 자식도 그 재능을 타고나지 않겠어요?"

물론 될 지 안 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안 하는 것 보단 낫겠지.

게다가 내 룬의 결계 실력이 늘어나는 것도 좋은 일이니까.

"… 그런가? 그렇지만 한 명이라도 빨리 낳는 게…."

"안 돼요. 그러다가 제대로 룬의 결계를 못 쓰는 아이가 나오면 어떻게해요. 저는 그런 상황이 발생하길 원하지 않아요."

"그건… 하아. 알았어, 네 말대로 할게."

레베카는 마음에 들지 않아 했지만, 내 시선을 보고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정자 제공은 나니까 뭐… 어쩌겠어.

토요일 낮. 철혈병원.

"고생하셨어요. 성녀님."

"고마워요. 저는 먼저 가볼게요."

자신이 할 일을 끝낸 백아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넵! 고생하셨습니다!"

- 고생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

백아영이 퇴근할 때는 병원에 있는 모든 사람이 인사를 해준다. 심지어 환자까지도.

한 명 한 명 눈을 마주치며 인사를 끝낸 백아영은 밖으로 빠져나왔다.

또각또각.

오늘의 업무를 모두 끝냈으니 집에 돌아가서 쉴 생각이다.

'이제 이틀 남았네.'

아카데미로 돌아가면 다시 양호 선생님으로 일해야겠지.

양호 선생님이라는 자리는 백아영을 받기 위해 아카데미에서 급조한 것이었으니 솔직히 바쁜 자리는 아니었다.

'오랜만에 환자들과 부대끼는 것도 나쁘지 않네.'

협회에서 일 할 때는 매일 느끼던 치열한 감정.

사람들을 도와주고 감사받는 일.

백아영에게는 그게 힐링이었다.

"아영~ 끝났어?"

건물을 빠져나오자마자 높은 톤의 목소리가 백아영의 귀를 때렸다.

"… 예지야?"

"오랜만에 보고싶어서 왔어~."

고양이상의 미인인 민예지.

백아영의 지인이다.

철혈 길드의 팀장이고, 백아영이 이호연이 입원한 철혈 병원에 바로 들어온 것도 민예지 덕분이었다.

"일 때문에 바쁘다면서 웬일이야?"

"마침 이 쪽에 들릴 일이 있어. 조사할 게 있거든."

"조사?"

"응. 유명 길드 자식 하나가 마인이 된 것 같다고 하더라고."

"아하."

헌터가 마인이 되는 일.

드물지만 그렇다고 일어나지 않는 건 아니다.

민예지와 백아영은 둘 다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겸사겸사 우리 아영이가 일 열심히 하나 보려고 왔지. 내가 꽂아준 사람이 놀고먹으면 안 되잖아~."

"후훗. 고마워. 그래도 네가 편의를 봐줘서 다행이야."

"아니야. 성녀가 잠깐이지만 철혈 병원에 있는 게 얼마나 큰 도움인데. 그러고 보니 호연 생도랑은 좋은 병원 생활 보냈어?"

"… 응."

이호연과 보냈던 입원 생활.

겨우 일주일 정도였지만 행복한 시간이었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기도 하고, 확실한 관계를 만들기도 했으니까.

특히 서로 고백했을 때… 그때는 정말 좋았다.

그날 밤을 생각한 백아영의 얼굴이 살짝 붉어지고, 민예지는 그걸 보며 백아영에게 팔짱을 꼈다.

"와, 진짜 좋았나 보네. 우리 아영이 표정 봐. 그렇게 순수했던 애가."

"… 그럴 수도 있지 뭘."

백아영은 민예지를 밀어내며 표정을 관리했다.

입꼬리가 눈치없이 올라가려고 했으니까.

"알았어. 철혈 병원 일 끝나면 다시 모이자. 솔이도 껴서 세 명이 술 어때?"

"잘 먹진 못하지만… 좋아. 그러고 보니 솔이는 아직도 연구 중이야?"

"응. 근데 거의 마무리 단계래. 다음 주에는 마법 박람회니, 뭐니 할거라는데."

"마법 박람회?"

"그렇다는데 나도 뭐 하는 건진 모르겠네."

민예지는 팔을 들며 모른다는 제스처를 취했지만, 백아영은 임솔에게 들은 기억이 있다.

'분명 호연이랑 같이간다고 했는데.'

임솔과 이호연.

스승과 제자지만 방심하면 안 된다.

"그거 호연이랑 같이하는 거 아니야?"

"아… 그랬나?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

"에이, 걱정하지 마. 솔이는 남자한테 신경 안 쓰잖아. 내가 놀리는 건 어디까지나 놀리는 거고."

"… 응. 나도 알아."

하지만 백아영은 전에 느꼈던 그 감정을 아직 기억하고 있다.

임솔이 이호연에 대해서 말할 때.

아직 큰 호감까진 아닌 것 같지만… 분명 호감은 있었다.

'언제든지 경쟁자가 될 수 있어.'

지금은 자신이 앞서가더라도 절대 방심하면 안 된다.

이호연은 그 정도의 남자니까.

백아영은 결의를 다지며 주먹을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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