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1화 (221/648)

*

"아아... 수현이 말인가요."

원장실에서 천수현을 처음 거두었을 때의 상황을 물어봤다.

"혹시 같이 왔던 붉은 머리의 남자가 있었나 해서요. 아마 저랑 비슷한 또래였을 거에요."

룬의 일족이 어디에 있던 일족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저 나이의 어린아이가 직접 여기까지 찾아오진 않았을 거다.

분명 나이 많은 남자가 도와줬겠지.

"어떻게 아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있었지요. 붉은 머리의 소년. 아마 지금까지 살아있었다면 호연 생도 정도 나이겠네요."

"... 네?"

나는 원장의 말에 귀를 의심했다.

저 말은 레베카가 찾던 생존자가 죽었다는 뜻이니까.

"쓰읍... 몇 년 전이었어요. 눈이 펑펑 내리던 날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나가보니 붉은 머리의 소년이 어린 아이 한 명을 품에 안은 채 제발 하루만 재워달라고 하더군요."

"...."

원장은 그 때를 회상하듯 눈을 감은 채 말을 이었다.

"소년의 상태는 심각했어요. 온 몸에 열이 났거든요. 너무 뜨거워서 당장 병원에 보내려는데, 계속 거부하는 겁니다. 자기는 병원에 갈 수 없는 몸이라면서요. 하지만 저희가 몰래 구급차를 불러서 병원에 보냈지요."

"네."

"하지만 영양실조가 너무 심각해서 온몸이 망가져 있었습니다. 게다가 맨발로 오래 걸어서 온몸에 동상을 입은 상태였고, 체력도 많이 약해졌고요. 치료하기엔 이미 늦은 상태였어요."

"아. 그래서...."

"네. 병원에서 몇 시간 만에 사망했다는 통보를 들었습니다. 다행히 그 아이가 꼭 안고 왔던 수현이는 상태가 괜찮아서, 저희가 계속 맡아서 키우고 있고요."

"...."

이 상황을 뭐라고 해야 할까.

슬쩍 레베카를 훔쳐보자 거의 나라를 잃은 표정이었다.

하긴, 당장 룬의 일족을 부흥시켜야 하는데 유일하게 남은 생존자가 저렇게 어린 애라면 슬프겠지.

아니 일족에 대한 광기 어린 그 표정을 생각하면... 진짜 나라를 잃은 기분일 거다.

끼익-

"응? 문이 왜 혼자 열렸지? 바람인가?"

레베카는 그대로 문을 열고 터덜터덜 나가버렸다.

아직 룬의 결계를 유지하고 있었기에 원장은 갑자기 열린 문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 얘기 감사합니다. 저도 슬슬 가볼게요."

"그래요. 호연 생도. 들려줘서 고마워요."

나는 레베카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레베카는 아무도 없는 뒤 마당에서 멍하니 하늘을 보고 있었다.

슬쩍 다가가 보자, 닭똥 같은 눈물이 볼을 지나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레베카... 씨?"

처음으로 레베카의 이름을 불렀다.

레베카는 그때서야 내게 고개를 돌렸다.

뚝. 뚝.

열린 수도꼭지처럼, 레베카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아예 엉엉 울어버리면 달래기라도 하겠는데, 정말 모든 걸 포기한 사람처럼 울고 있었다.

하.

우는 여자만 보면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네 진짜.

일단은 위로를 해야겠지.

"울지 마세요. 음... 8살이면 아직 어리긴 하지만 조금만 있으면 클 거고...."

"... 의미가 없어."

"네?"

"저 아이는 제대로 된 전승 교육을 받지 못했어.... 가장 중요한 어린 나이 때 교육을 받지 못했으니, 룬의 일족이라고 하기 힘든 반 토막이야."

"아...."

"게다가 저 아이가 크고나면 늦어버려. 나도 나이를 먹으니까."

"... 몇 살인데요?"

겉으로 보기엔 임솔과 동년배인데, 혹시 마법으로 나이를 속이고 있는 건가? 

나이를 속이는 것도 마녀의 클리셰중 하나인데.

알고보니 80살인 할머니면 나도 좀....

"... 내후년이면 20대가 끝나."

"아니, 뭐야. 젊잖아요."

"... 젊을 때 최대한 아이를 낳아놔야 한단 말이야!"

킁.

코를 삼키며 우는 레베카는 진짜 불쌍해 보였다.

"방법이 있을 거예요. 제가 도와줄 테니까 천천히 찾아봐요."

레베카는 날 쳐다보며 손으로 눈물을 벅벅 닦아냈다.

"크읍. ...그냥 너랑 할래."

"아니, 잠시만요. 왜 그렇게 되는데요."

"세상에 룬의 결계를 쓸 수 있는 수컷은 너뿐이니까."

"그렇긴 해도...."

"그리고 너는 잘 생겼어. 내 취향이야. 만약 생존자가 못생긴 돼지가 되더라도 참고 50명은 채우려 했거든? 너라면 죽을 때까지 낳아줄 수도 있어."

"...."

레베카는 사심이 듬뿍 들어간 눈으로 내 옷깃을 꾹 잡았다.

솔직히 나야 좋다.

미녀랑 섹스만 하면 알아서 공략되는 히로인이 늘어나는 거잖아.

거절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많다.

일단 룬의 일족의 부흥이다.

이 몸에 들어 있는 재능은 특전이라는 신의 권능으로 받은 재능이다.

과연 이게 내 자식에게도 전달이 될까?

물론 되면 좋겠지. 하지만 안 될 수도 있잖아.

"... 도와줘."

"... 레베카 씨."

"준비, 준비도 다 끝내놨어. 돈이 필요하면 돈도 줄게. 아, 아이도 내가 키울 거고... 네가 신경 쓸 부분은 하나도 없게 만들 거야. 너는 그냥... 나한테 씨만 뿌려주면 돼. 제발...."

레베카의 자세는 말을 하면서 점점 무너졌다.

마지막에는 바닥에 거의 무릎을 꿇은 채 내 옷을 잡고 흔들었다.

처음에 강압적으로 날 잡던 모습과는 180도 다른 자세였다.

아마 그때는 나도 룬의 일족이라고 생각했으니 그랬겠지.

레베카가 일족의 부흥에 목숨을 거는 것.

그리고 천수현을 보육원에 데려온 남자가 자신보다 어린 천수현을 어떻게든 보호하려 했던 것.

그런 것들을 바탕으로 생각해봤을 때 룬의 일족 자체에서 어릴적부터 교육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어떻게 해서든 멸족을 막아야 한다거나, 핏줄이 이어지는 것에 대한 중요성을 반복적으로 교육받았겠지.

그러니 당연히 룬의 일족인 나도 일족의 부흥을 받아줄거라는 생각이 있던 거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다르다.

룬의 일족이 아니라서 일족을 이어가야하는 의무는 없지만, 억지로 취할 수도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내가 죽어버릴 수도 있으니까.

강압적으로 하는 방법도 있지만, 솔직히 아예 저항도 못 할 수준은 아니거든.

마음먹고 저항하면 죽을 틈 정도는 만들기 쉽다.

'물론 절대 안 죽을거지만... 레베카는 그걸 몰라.'

어찌 보면 나는 레베카가 컨트롤 할 수 없지만, 마지막 희망이 되어 버린거다.

"뭐든지, 다 해줄 테니까 제발...."

머리를 바닥에 박으려는 레베카의 어깨를 잡아 일으켰다.

"... 일어나세요. 저는 그런 관계는 하기 싫어요."

퇴폐미가 매력적인 사람이 저렇게 무너지면 안 되지.

저런 사람은 자신만만해야 더 예쁘거든.

"그럼 나 임신시켜줄거야? 아이만들기 하는거야?"

레베카는 내 말에 기대감이 가득 찬 눈으로 내 얼굴을 바라봤다.

"... 노력은 해줄 수 있죠. 대신 조건이 있어요. 제 말을 그대로 따라해주세요."

"연습은 충분히 했어. 어떤 것도 소화할 수 있어."

내 말을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 레베카는 결의를 다졌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레베카를 바로 받아줄 수 없는 진짜 큰 문제가 있거든.

일단 그걸 해결해야한다.

일단 우리는 보육원을 빠져나왔다.

보육원에서 일을 진행할 순 없으니까.

"한적한 장소가 필요한데, 혹시 아세요?"

"따라와. 내 한국지부 아지트가 있어."

나는 레베카의 룬의 결계로 둘러싸인 채 교외로 빠져나왔다.

가는 길에 룬의 결계를 계속 관찰했지만, 여전히 내 결계는 똑같았다.

'왜 봐도 분석이 안 되지?'

다른 마법과 다르게 레베카의 룬의 결계는 분석이 안 됐다.

정확히 말하면 분석하고 그대로 실행해도 똑같은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고 해야겠지.

무슨 원리인지는 몰라도 엄청난 무언가가 있는 것 같은데 말이야.

"그러고 보니 수현이는 어떻게 할 거예요?"

룬의 일족 생존자.

햇빛 보육원에 있는 천수현은 이대로 내버려두면 일반인의 삶을 살아갈거다.

"데려와야지. 교육을 못 받았더라도 룬의 일족이니까. 천천히 친분을 만든 후에 내가 입양할거야. 그리고… 룬의 일족으로 만들고 싶어."

레베카의 말에선 룬의 일족에 대한 진짜 애정이 느껴졌다.

나는 교육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걸렸다.

"그 교육이란 게 뭔데요? 룬의 일족만의 특별한 교육이에요?"

아마 저 특별한 룬의 결계도 그 교육의 일부인 것 같은데.

"음, 쉽게 말하면 어릴 때부터 룬의 결계 안에서 지내는 거야. 자신의 마력 성질을 룬의 결계와 억지로 동일하게 만드는 룬의 일족의 특별한 교육법이 있어."

"오…."

"몇 년간 계속해서 룬의 결계에 집중하면 아예 마력 회로가 변해. 그러면 그때부터 진정한 룬의 일족이 되는 거야."

그럼 내가 쓰던 룬의 결계는 반쪽짜리였네.

어쩐지 쉽게 뚫리더라.

"안쪽으로 들어와."

레베카는 도시 구석에 있는 스산한 건물로 들어갔다.

박쥐라도 나올 것 같은 어두운 통로를 지나자 꽤 밝은 주거공간이 나타났다.

"이 방에 침대랑 욕실이 있어. 따라와."

레베카는 겉옷을 벗으며 방으로 들어가려 했다.

지금부터라도 바로 할 생각이다.

"잠시만요. 레베카 씨. 잠시만."

"… 아이 만들기 도와주는 거 아니었어?"

레베카는 겉옷을 붙잡은 내게 실망스러운 눈빛을 보내왔다.

"그 전에 확인해야 할 게 있어서요. 일단 방으로 들어가요."

눈을 찌푸리는 레베카는 살짝 무서웠지만 어떻게든 방 안쪽으로 데려갔다.

마녀의 연구실같이 생긴 방의 테이블에 레베카를 앉히고, 그 맞은 편에 나도 자리 잡았다.

"음… 일단 레베카 씨가 판데믹에 소속되어 있었잖아요? 그것 때문에 좀 확인해야 할 게 있어요."

"… 그래도 나는 사람을 죽이진 않았어."

레베카는 약간 긴장한 듯했다.

사람을 죽였는지 물을 생각은 없었는데.

"그런 거 아니에요. 판데믹의 보스인 마에스트로한테는 세뇌 마법이 있어요. 혹시 레베카 씨도 세뇌에 걸린 건 아닌지 확인해봐야 하거든요."

내가 레베카를 바로 받아들이지 않았던 이유가 이것이다.

마에스트로의 정신지배.

확실하게 내 편이 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면 신뢰할 수 없다.

내 말을 들은 레베카는 안심한 듯 웃음을 흘렸다.

"아하, 난 또 뭐라고. 걱정하지 마. 마에스트로의 정신지배는 나도 알고 있어."

"네? 정말요?"

정신 지배를 알고 있다고?

"응. 마에스트로를 만날 때마다 룬의 결계를 발동 시켜. 그니까 그건 문제없어."

"… 마에스트로의 마법은 꽤 강해요. 레베카 씨도 혹시 모르잖아요."

"내 룬의 결계도 강해. 완벽하게 막아낼 수 있어. 마에스트로도 내가 세뇌에 걸리지 않은 걸 눈치채지 못할 정도야."

"…."

자신만만해하는 레베카의 모습을 보며 나는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아는 사실이랑 달랐기 때문이다.

'분명 레베카는 세뇌가 강하게 걸렸을 텐데.'

원작에서 레베카는 분명 마에스트로의 정신지배에 걸린다.

왜냐면 죽기 직전에 세뇌가 풀리는 장면이 나오거든.

당연히 지금의 레베카는 그 사실을 모를 테니 돌려서 말한 거다.

그런데 저렇게 자신만만하니 좀 헷갈리네.

'아직 세뇌에 걸리기 전인가?'

마에스트로는 첫 만남에 세뇌를 거는 게 일반적이라서 그럴 가능성은 적긴 한데.

그때, 나는 방금 레베카가 한 말을 되새겼다.

'사람을 죽인 적이 없다.'

"레베카 씨. 사람을 죽이는 임무에 들어간 적은 없으시다고요?"

"응. 당연하지. 나는 최소한의 도움만 주는 거야. 판데믹이 룬의 일족의 뒤를 캐는 걸 도와주는 대가로 말이야."

"…."

레베카는 저렇게 말했지만….

'아니.'

그럴 리가 없다.

왜냐면 협회의 친목 파티 테러에서 레베카의 룬의 결계가 분명히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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