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0화 (220/648)

왜 원작의 악역이 날 덮치려하는건데.

"괜찮아. 너는 아무것도 안 해도 돼."

"잠시만. 아니, 잠시만요. 아, 시발 진짜…."

설명은 해주고 해야될 거 아니야.

못 참고 욕지거리를 내뱉자, 그제서야 레베카는 나와 제대로 눈을 마주쳤다.

내 눈동자에 있는 당황과 짜증이라는 감정을 읽었는지, 레베카는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지… 미안. 너무 성급했어. 너에게도 설명은 해야 하는데."

"…."

나는 진정한 레베카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룬의 일족 마지막 생존자 이호연. 난 계속 너를 찾아왔어."

"… 네?"

"너는 의문의 습격으로 룬의 일족이 모두 사라졌다고 알고 있겠지만, 나는 그때 비밀리에 바깥에서 임무를 하고 있었거든. 그래서 운 좋게 살아남을 수 있었어."

"저는 룬의 일족이 아니라니까요."

"네가 사용하는 결계… 룬의 결계는 룬의 일족만 사용할 수 있는 비기잖아."

"그렇긴한데…."

"나는 룬의 일족을 부흥시키기 위해, 일족이 멸망하던 날 유일하게 도망친 남자아이 둘을 추적해왔어."

"…."

이어지는 레베카의 말을 들으며, 나는 원작에 나오지 않던 레베카의 속사정을 알게 되었다.

레베카도 당연히 마에스트로의 정신지배에 당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다.

그녀 나름의 사정이 있던 것이다.

"그래서, 너는 나와 아이를 만들어야 해."

"결과가 왜 그렇게 되는데요…."

"룬의 일족을 부흥시켜야 하니까. 룬의 일족은 순수한 혈통이어야 하거든…!"

하아.

퇴원하고 얼마 되지 않아 다가온 걸 보니 호시탐탐 날 노렸던 모양이다.

이런 뒷사정을 알았다면 룬의 결계를 그렇게 남발하고 다니진 않았을 텐데.

어쨌든, 사정을 설명한 걸 보면 레베카도 그렇게 나쁜 의도는 아닌 것 같다.

"혹시, 협회 파티장 테러에서 성녀한테 다가와 과거의 일족 어쩌고 했던 게 레베카 씨에요?"

"분명 그랬었지. 넌 그때 기절해있었거든."

과거의 일족 어쩌고 했던 게 레베카였구나.

일족이라고 했을 때 룬의 일족을 떠올리긴 했지만, 레베카가 룬의 일족을 찾는다는 배경지식이 없으니 그 둘을 연관시킬 수가 없었다.

하아.

뭐 어쩌겠어. 일단은 솔직히 말해봐야지.

"음, 레베카 씨. 정말 죄송한데… 저는 룬의 일족이 아니에요."

레베카도 이제 날 정중하게 대해주려고 하는 것 같으니, 나도 정중하게 말했다.

밝힐 건 밝혀야 하니까.

"거짓말하지 마. 지금도 룬의 결계를 피고 있잖아. 룬의 결계는 룬의 일족의 피가 흐르지 않으면 펼칠 수 없는 마법이야."

"아니, 하아…."

이걸 어떻게 설명하냐.

[룬의 일족 비서를 아카데미 창고에서 얻었는데 내 재능이 엄청나서 운 좋게 쓸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설명하면 누가 믿겠어.

애초에 룬의 결계는 룬의 일족만 쓸 수 있는 비기이고, 내가 가진 재능은 보통 사람이 가질 수 없는 재능이다.

말 그대로 특전…. 재능 그 이상의 영역이란 말이다.

그러다 보니 이런 오해가 생긴 것이다. 

나중에 룬의 일족을 만나면 어떻게 할까 생각해본 적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내 룬의 결계를 쓰다니! 이럴 수가! 으아악!' 하는 전개만 생각했지…. 이런 전개는 생각한 적이 없다.

'아니 내가 정상이잖아. 이렇게 나오는 게 비정상 아니야?'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룬의 일족을 부흥시키기 위해 남은 일족인 우리 둘이 아이를 낳아야 한다.]

이걸 어떻게 예상하냐고.

"괜찮아… 그럴 줄 알고 미리 묶어놨으니까. 남자는 원하지 않아도 사정할 수 있다면서?"

"…."

아무래도 날 배려하긴 하지만, 룬의 일족을 부흥시켜야 하는 게 최우선 과제인 것 같다.

단단하게 묶인 내 몸이 그걸 증명하고 있었다. 

설득은 안 된다.

'어떻게 이 상황을 벗어나야 하지?'

나는 최대한 침착하게 상황을 파악했다.

룬의 일족의 생존자를 찾는 레베카와 이 상황을 벗어나야 하는 나.

가장 좋은 해답은 룬의 일족 생존자를 찾아주는 거지만… 힌트가 있을 리가 없잖아.

레베카는 내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적발보다 흑발이 어울리는 것 같아. 얼굴도 내 취향이고…."

"… 원래 룬의 일족은 적발이에요?"

"모르는 척 하지 마. 머리카락 정도는 염색할 수 있잖아."

"…."

힌트 하나가 더 생겼다.

내게 있는 힌트는 3가지.

적발.

남자아이.

그리고 룬의 결계.

힌트가 너무 적었다.

겨우 이딴 걸로 생존자를 특정할 수가 없….

'어?'

빠르게 내 기억을 훑다 보니, 저 조건에 부합하는 아이 한 명을 찾아냈다.

백아영과 봉사활동을 했던 햇빛 보육원.

그 곳의 화장실에서 백아영과 몰래 섹스를 할 때 내 룬의 결계를 눈치챘던 남자 아이.

그때는 마력 감응이 좋구나~ 하고 넘어갔지만, 사실 잘 생각해보면 말이 안 된다.

룬의 결계는 감응이 좋다고 눈치챌 수 있는 결계가 아니니까.

그리고 우연히 그 아이의 머리색도 붉은 적색이었다.

"왜, 혹시 주도적으로 할 마음이 생겼어? 그렇다면 나도 허락해줄 수 있어. 우리는 같은 룬의 일족이…."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저는 룬의 일족 후계자가 아니에요. 하지만 진짜 생존자가 누군지는 알 것 같아요."

"네가 생존자라니까?"

"… 아니 나 생존자 아니라고. 하아, 일단 이것 좀 풀어봐요."

"굳이?"

"일단 저랑 사람 한 명만 만나고, 그 다음에 해도 안 늦잖아요. … 어차피 잡으려면 잡을 수 있고."

"흐음, 그렇긴 하지. 그럼 일단 만나러 가볼까?"

레베카는 고민하며 내 몸을 묶던 마력을 없앴다.

"…."

'내가 생각하는 게 맞겠지.'

가능성이 100%는 아니지만, 아마 맞을거다.

"...."

나는 뒤를 주의하며 햇빛 보육원을 향해 걸어갔다.

정작 내 뒤에 있는 레베카는 나를 별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언제 도망쳐도 잡을 수 있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틈이 없어.'

여유롭게 주변을 바라보며 걷고 있는 레베카지만, 틈이 없었다.

내 주변을 가득 채운 마력은 내가 도망치는 순간 날 잡는 밧줄이 되겠지.

"하아."

"왜 한숨이야. 이호연."

"... 아닙니다."

저렇게 친근하게 다가오는 것도 좀 어색하고.

이거 미치겠네 진짜.

사실 레베카 정도면 아름다운 편이다. 원작에서도 꽤 자주 등장하는 악역이기 때문이다.

원래 악의 여간부는 예뻐야 되거든.

임솔과 마찬가지로 마법에 빠진 연구자상이지만, 임솔은 건전한 편이라면 이 사람은 좀 퇴폐적인 마법사 상이다.

루비를 녹인 듯이 아름다운 붉은 머리칼과 보석같이 빛나는 붉은 눈동자.

굳이 따지자면 마녀같다고 할 수 있겠다.

"많이 멀어?"

"금방이에요."

사실 주면 절하고 받아먹어야 하는 수준의 미인인 것도 맞다.

저런 타입의 여자는 처음 보기도 하고. 진짜 예쁘긴 하거든.

근데....

'여자가 많아도 너무 많아.'

안 그래도 히로인들이 많아지는데, 히로인도 아닌 악의 간부를 꼬실 수는 없다.

하지만 내 생각에 반박하듯 내 눈앞에 무언가 떠올랐다.

[현재 공략 가능성이 높은 여성 : 임솔(95),  레베카 (85점), 릴리아나 (83점), 스칼렛 (43점)… ]

"...."

그렇네.

생각해보니 레베카 정도의 악역이면 영향력이 낮을 리가 없잖아.

원작에서 아예 적으로 나오는 포지션이다 보니 히로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못 했다.

쩝.

갑자기 후회되네.

'그냥 내가 룬의 일족이라고 할 걸 그랬나?'

아니야.

그건 오히려 역효과일 수도 있다.

잠깐 공략하는 게 쉽더라도, 나중에 밝혀지기라도 하면 공략하던 게 다 날아갈 테니까.

차라리 처음에 밝히고 후에 공략하는 게 낫겠지.

물론 공략을 할 지 안 할지는 아직 미정이다.

"그냥 나랑 아이 만들기를 하면 될 텐데."

"... 그러고 보니 남자아이 두 명이라고 했죠?"

"응, 한 명은 너고, 한 명은 더 어린아이야."

"얼마나요?"

"지금쯤 초등학생 정도 일걸?"

초등학생이라.

나 정도 또래의 남자는 몰라도 보육원에 있는 아이는 초등학생 정도 같은데.

내 생각이 맞을 가능성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햇빛 보육원이라는 곳이 저기야?"

"네. 저기에요."

잠시 후 우리는 햇빛 보육원에 도착했다.

"흐음...."

레베카는 내 뒤를 따라 햇빛 보육원의 안으로 들어왔다.

당연히 룬의 결계로 감싼 상태였기에 일반인 들은 보지 못했다.

분명 나와 같은 룬의 결계인데도, 나보다 훨씬 견고하고 안정적이었다.

'아예 마력 구조가 다른 느낌인데.'

그게 아니라면 설명할 방법이 없다.

레베카와 똑같은 마법진을 구현해도 마법의 출력이 다르게 나왔으니까.

[룬의 일족 시너지]

대충 이렇게 표현할 수 있겠네.

마당으로 들어가자, 꽃들에게 물을 주고 있는 풍채 좋은 아저씨를 발견할 수 있었다.

햇빛 보육원의 보육원장이다.

나는 오랜만에 보는 보육원장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원장님."

"응? 엇, 호연 생도! 이야, 이제 유명인이 돼서 못 올 줄 알았는데요."

"에이, 제가 뭐 이미지 관리한다고 오는 건 아니잖아요. 유명해진다고 달라질 게 뭐가 있나요. 어제 퇴원해서 원장님 얼굴도 뵐 겸 들렸어요."

사실 마지막으로 온 지 한 달 정도 됐으니, 꽤 오래되긴 했네.

백아영을 공략하려고 왔던 거니까... 이제 올 필요가 없긴 하지.

그래도 나중에 백아영이랑 한 번 와야겠다.

"아아, 그렇네요. 저도 뉴스를 봤었는데, 깜박했습니다."

허허. 하고 웃는 원장을 보며 나는 다음 말을 이었다.

"괜찮아요. 그나저나 아이들을 좀 보고 싶은데 아이들은 뭐 하고 있나요?"

"지금은 점심 식사 후에 자유시간이에요. 다들 하고 싶은 걸 하고 있을 겁니다. 아마 호연 생도가 왔다고 하면 금방 모일걸요?"

"음, 오늘은 좀 보고 싶은 아이가 있어서요. 보육원에 빨간 머리 남자아이가 한 명 있지 않았나요?"

내 옆에서 지루한 듯 대화를 지켜보던 레베카는 붉은 머리 남자 아이라는 키워드가 나오자 그제서야 이쪽에 집중했다.

"빨간 머리...? 아, 수현이 말이죠?"

"네. 그 말썽 잘 피우게 생긴 꼬마애요."

"저쪽에 있을 겁니다. 같이 가보시겠어요?"

"부탁드립니다. 개인적으로 할 말이 있거든요."

잠시 후, 나는 천수현 이라는 아이와 독대하게 되었다.

내가 유명하기도 하고, 봉사도 몇 번 오면서 아이들과 친해지다보니 원장님도 독대를 흔쾌히 허락해줬다. 

"형아. 오랜만이야. 근데 나랑 무슨 할 얘기가 있어?"

"몇 가지 질문을 할 건데, 거기 대답만 해주면 돼. 괜찮지?"

"응. 당연히 괜찮지!"

빨간 머리 아이. 천수현은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었다.

내가 알기로 이제 막 8살일 거다.

딱 귀여운 나이대다.

- 얘야?

끄덕.

난 뒤에서 천수현을 지긋이 바라보는 레베카에게 고개를 끄덕여줬다.

스르륵-

내 뒤에서 레베카의 마력이 느껴졌다.

아주 옅은 마력의 웨이브가 내 몸을 지나 천수현의 몸을 위에서부터 훑기 시작했다.

- ... 얘랑 얘기해봐도 돼?

"어, 괜찮을 거에요. 수현아. 놀라지 마. 너를 만나고 싶어 하는 누나가 있어서 데려왔거든. 괜찮지?"

"네. 괜찮아요."

끼익-

문이 열리고, 자연스럽게 레베카가 안으로 들어왔다.

물론 룬의 결계를 이용한 눈속임이었는데, 어떻게 저런 게 가능한 거지?

"안녕. 네가 천수현이니?"

"안녕하세요. 누나."

고개를 꾸벅 숙인 천수현을 보며 레베카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 잠깐 손 좀 줘볼래?"

"네."

천수현의 손목을 잡고 마력을 내보내던 레베카는, 얼마 후에 입을 열었다.

"... 맞아."

"맞아요?!"

"응. 룬의 일족이 확실하네. 비교해 보니 알겠어. 너랑은 마력 회로부터 달라."

"오... 이제 믿어주는 거죠?"

"... 그래. 믿을게."

레베카는 굉장히 아쉬워 보이는 눈치였지만, 나로선 오해를 풀어서 다행이다.

이런 건 빨리 푸는 게 낫다.

다행이다.

납치당해서 강제 착정 당할 일은 없겠구나.

"꼬마야.... 혹시 이 보육원에 오기 전 기억이 있니?"

레베카는 다른 생존자에 대한 정보를 물었다.

"으음... 모르겠어요. 어릴 때는 잘 기억이 안 나요."

"... 하아."

찾았다고 생각했던 일족의 생존자를 놓쳐서 그런 걸까.

레베카는 상심한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고마워. 수현아. 이제 가서 친구들이랑 놀아도 돼. 아, 이거는 형이 사 온 과자니까 같이 나눠 먹어."

"감사합니다! 형아! 나중에 봐!"

천수현의 손에 과자를 쥐어주고 방에서 내보냈다.

와다다다- 하면서 나가는 천수현을 보면서 나는 레베카에게 말을 걸었다.

"일단 원장님한테 여쭤보죠. 그분이라면 뭘 알 거예요."

"... 응."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