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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후식으로 나온 아이스크림을 깨끗이 비운 후 의자에 몸을 기댔다.
"여긴 언제 먹어도 맛있네요."
"맛있게 먹었다니 다행이야."
끌레르 로즈 라떼를 홀짝이던 문수린은 내 말에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누나는 힘든 거 없어요?"
"응? 난 없는데. 요즘 왜 자꾸 나한테 힘드냐고 물어보는 거야?"
"… 그냥. 그냥요. 힘들면 슬프잖아요. 하하…."
쩝.
너무 유도심문을 하는 것도 안 좋은 습관이네.
괜히 텅 빈 아이스크림 그릇을 벅벅 긁고 있는데, 문수린의 시선이 느껴졌다.
무언가 할 말이 있어 보이는 눈이었다.
"누나, 할 말 있으세요?"
"음. 호연아. 그, 혹시… 파파라치들이 너무 힘들게 하면 말해. 내가 다 처리해줄게."
"… 네?"
"저번에 그랬잖아. 많이 힘들다고."
뜬금없이 나온 파파라치라는 키워드에 나는 살짝 의문을 가졌다가, 곧 기억을 떠올렸다.
저번에 만났을 때 분명 변명을 댄답시고 힘들다고 했었지.
'이게 무슨 어이없는 상황이야.'
내가 저렇게 문수린을 꼬셔야 하는데.
반대로 문수린이 날 저렇게 꼬시고 있다니.
일단… 괜한 데에 힘을 빼게 할 순 없다.
솔직히 남자라서 그런지 관심받는 것도 나쁘지 않거든.
"뭐, 괜찮아요. 그때는 여러모로 힘든 일들이 많아서 그랬어요. 지금은 신경 안 써요."
"그, 그래…?"
내가 말을 이어감에 따라 문수린의 입꼬리가 살짝살짝 올라갔다.
"네. 사실 모르는 사람이 제 사진을 저장하는 게 좀 그렇긴 한데… 적응해야죠. 유명인이니까."
생각해보면 연예인들 사진을 배경화면으로 해놓는 사람들도 많은데, 그 사람들이 모두 허락을 맡은 건 아닐 거 아니야.
나도 그런 느낌으로 접근해야지.
"호, 혹시 아는 사람이면?"
문수린은 내게 얼굴을 조금 더 들이밀었다.
"네?"
"아는 사람이 저장해도 좀 그래…?"
"?"
바로 이해하지 못한 내가 눈을 살짝 찌푸리자, 그제서야 눈을 크게 뜬 문수린은 자리로 돌아가 손을 마구 휘저었다.
"아, 아니. 미안. 그게 문제가 아닌데. 잘못 말했네. 큼. 큼!"
문수린은 갑자기 헛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저게 무슨 소리지?'
"크흠! 큽! 자, 밥 다먹었으면 이제 일어날까?"
… 잠시만.
내 야수의 감각이 말하고 있다.
지금 여기서 그냥 넘기면 안 된다고.
지금까지 몇 번이나 당해왔잖아.
히로인들이 하는 말을 함부로 넘겼다가 큰일 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잖아.
자기를 강간해주길 바라는 히로인이 있질 않나, 일주일 자리를 비웠더니 돌아오자마자 강간당한 적도 있고, 연구를 도와주는 대가랍시고 착정하는 교수도 있잖아.
쌍둥이는 둘이서 같이 하자고 붙어오고, 잘사는 아가씨는 관음증이 있고, 동생이 인질로 잡힌 미소녀는 날 위해 살겠다고 매달리는 이런 상황에서.
문수린이 이상한 길로 안 빠졌다고 생각하는 게 순수한, 아니 멍청한 거다.
★ 히로인 상태창
[문수린]
- [ 호감도 : 88 ]
- [ 성욕 : 45 ]
- [ 식욕 : 50 ]
- [ 피로도 : 43 ]
현재 상태 : 이, 이런 바보같이 멍청하게 말하면 어떻게 해. 아악… 의심하면 어떡하지?
반응을 보니 맞는 것 같은데.
설마 수린 누나가 내 사진을 모으거나 하는 건가?
"…."
"… 호연아. 안 일어나?"
'근데 사실, 그 정도면 괜찮은데?'
다른 히로인들에 비하면 너무나도 정상적인 취향이잖아.
내 알몸 사진을 모으는 건 아닐거아니야.
평범한 사진은 그냥 연예인 팬클럽 같은 느낌으로 받아줄 수 있다.
나는 고민하는 척 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글쎄요. 아는 사람이면 괜찮으려나?"
"… 정말?"
"네네. 아는 사람이면 제 얼굴을 다 알 테니까요. 그냥 사진을 달라고 해도 줄 수 있죠."
"… 그럼, 아, 아니야."
문수린은 무언가 말을 하려다가 고개를 휘휘 저었다.
무슨 말이었을지 대충 예상이 가지만… 내가 먼저 말을 꺼내진 않았다.
지금도 약간 수상한데, 더 나아가면 진짜 일부러 말하는 것 같거든.
"누나. 이제 나갈까요?"
"그, 그럴까?!"
문수린은 움찔거리는 입꼬리를 붙잡으며 앞장서서 방 밖으로 나갔다.
웃음을 참고 있는게 뻔히 보인다.
"… 뭐, 그래. 저 정도면 선녀지."
사진을 모으는 정도야 얼마든지 해 줄 수 있다.
이상한 취향도 아니고.
"잘 가요 누나."
"응. 다음에 또 보자."
"당연하죠. 집 가서 잘 들어왔다고 꼭 연락하고요."
"후훗, 알겠어."
나는 열심히 수린 누나에게 손을 흔들며 배웅했다.
문수린도 기분 좋은 미소를 지어줬다.
'저 누나도 참 귀여워.'
배웅을 끝낸 뒤엔 기숙사로 향했다.
점심인데도 사람이 별로 없는 거리는 한산했다.
'저 누나랑은 계속 보다 보면 연인 같은 관계가 될 것 같긴 한데.'
뭐랄까.
수린 누나랑은 썸 같은 분위기가 난다.
하지만 그렇게 만나서는 하렘이 힘들잖아.
"흐음…."
어떻게 하면 좋으려나.
저벅저벅.
내가 걸으며 내는 발소리가 길거리로 울려 퍼졌다.
저벅저벅.
여러 생각을 하면서 걷다보니 꽤 오래 걸어왔다.
얼마나 걸었을까?
나는 조금씩 이상함을 눈치챘다.
"…."
항상 걷던 길인데도 무언가 어색함이 느껴졌다.
말로 설명하기 힘든 고요함.
그리고 나는 곧 그 부자연스러움을 알아챘다.
"아무도 없어…."
주변에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큰길을 지나고 나서 작은 길에 들어서자마자 인기척이 아예 사라졌다.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뿐만이 아니다.
멀리서 들려오는 말소리나 가게의 음악 소리, 지나다니는 차의 배기음 같은 자연스러운 소리도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그 이상함을 감지함과 동시에, 내 몸 주변에 무언가 느껴졌다.
'마력?'
마력이라기엔 조금 이질적이지만, 확실히 마력이었다.
내 몸을 압박하는 누군가의 마력에 대응하기 위해 즉시 몸에 마력을 끌어올렸다.
'습격…? 아니, 그렇다기엔 전투 감각이 움직이지 않았어.'
마력을 일으키자 사방에서 몰아치던 압박감이 조금 줄었다.
하지만 여전히 주변에 마력이 잔존해있었다.
"… 퇴원하자마자 난리네."
왜 이렇게 인기가 많은 건지 모르겠어.
히로인한테만 인기가 있으면 좋을텐데.
나는 찾아올 사람에 대비해 몸 주위로 룬의 결계를 둘렀다.
다행인 점은 수린 누나가 말려들지 않았다는 걸까.
그리고 결계를 침과 동시에 느꼈다.
"이거 룬의 결계잖아."
내 몸을 감싸고 있던 마력은 룬의 결계였다.
내가 사용하는 방식과 마력 배치가 다르긴 했지만, 분명 핵심 술식은 룬의 결계였다.
협회 파티장 테러에서 느꼈던 느낌과 똑같았다.
'룬의 일족…?'
룬의 결계를 사용하는 판데믹 소속 핵심 간부.
언젠가 마주칠 거라 생각했지만, 이런 곳에서 단둘이 만나고 싶진 않았는데.
예상치 않은 적의 등장에 긴장하며 마나 감지로 주변을 살피고 있던 그때.
"하아, 드디어 만나네."
또각. 또각.
어디선가 나타난 붉은 적색의 여성이 정면에서 걸어왔다.
"…."
느껴지는 기세는 S급 마인 그 이상.
원작에서도 후반부에 들어서야 잡을 수 있는 룬의 일족 마법사인 레베카.
지금의 나는 범접할 수 없는 기량의 마법사였다.
빠지직-
까드드득-
적색의 여인. 레베카가 내게 다가올수록 내 룬의 결계가 무너져갔다.
조그만 반항도 할 수 없이, 지나가다가 밟히는 개미처럼 자연스럽게 상대의 마력에 먹혀들어 갔다.
'이게 무슨….'
같은 마법을 사용한다면 절대 밀리지 않는다.
그게 [마나 감응]을 가진 나의 마력 운용이다.
하지만 그래봤자 같은 인간끼리의 비교였다.
파직- 파지직-
임솔이나 레베카같이 규격 외 마법사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레베카는 점점 내게 다가왔고, 나는 긴장하며 침을 삼켰다.
하지만 그럴수록 더욱 의문을 느꼈다.
내 심장이 아직도 평온했기 때문이다.
특전인 '전투 감각'이 발동되지 않았다.
그 말은 즉 레베카에게 적의가 없다는 뜻이었다.
"갑자기 나타나서 미안해. 당황했지?"
"…?"
하지만, 적의가 없다고 해도 우리가 이런 사이는 아니잖아.
나는 미안한 표정으로 친근한 말투를 내뱉는 레베카를 눈을 찌푸리며 바라봤다.
"지금까지 많이 힘들었지? 이제 숨기지 않아도 돼. 나도 너와 같은 룬의 일족이니까."
"네?"
이건 또 무슨 급전개야.
나는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갑자기 판데믹의 간부가 내게 헛소리를 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내가 룬의 일족라니?
"지금까지 계속 찾아왔어. 룬의 일족의 부흥을 위해…!"
레베카는 적색 머리를 뒤로 넘기며 감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무슨 개소리야…."
내가 기억하는 레베카는 저런 표정을 짓는 여자가 아니다.
테러 때마다 나타나 룬의 결계로 히로인들을 구하기 힘들게 만드는 굉장히 귀찮은 악역인데, 왜 저런 눈으로 날 보고 있는 거지?
"… 숨기려 하지 마. 네 몸에 흐르는 피는 진짜니까."
꽈악-
레베카가 다가올수록 내 몸에 가해지는 압박감이 심해졌다.
단순히 마력 운용으로 극복할 수 없을 만큼의 차이가 있었기에 천천히 내 몸을 옥죄오는 마력에 반항할 수 없었다.
"아니, 내 몸에 흐르는 피가 뭐냐고…!"
혹시 자주 있는 고아원 출신 주인공 클리셰인가?
'… 아닌데.'
이호연은 그냥 평범한 고아다.
절대 숨겨진 설정 같은 게 없다고.
레베카는 마력 밧줄에 묶인 나에게 점점 다가왔다.
"10년 뒤면 10명까지 늘릴 수 있어. 20년 뒤면 20명. 50년이면 예전 룬의 마을을 복구하는 것도 꿈이 아니야."
"잠시만. 잠시만. 뭐야 이거. 왜 이렇게 흘러가는 건데?"
나는 이 상황을 어떻게 빠져나가야 할지 계속 고민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레베카의 행동에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스윽-
레베카가 내 윗옷을 벗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대체 왜 내 옷을 벗기고 있는 거지?
지금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너무 갑작스럽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