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8화 (218/648)

*

"아읏…."

눈꺼풀 안 쪽을 비집고 들어오는 햇빛에 잠에서 깼다.

눈을 떠보니 아침햇살을 막기 위해 설치한 암막커텐이 활짝 열려 있었다.

"… 어제 열고 잤나보네."

내가 열진 않았지만… 릴리아나가 열고 잤을 가능성이 있다.

주말이다보니 아카데미에 가지 않아서 좋네.

확실히 입원했을 때는 평일 주말 구분이 없었는데, 겨우 하루 아카데미에 나갔다고 주말이 기쁘다니 사람이 참 신기하다.

"으으응…."

릴리아나는 햇빛을 피하기 위해 내 가슴에 얼굴을 파묻은 채 푹 자고 있었다.

어제는 그렇게 우울해하더니, 또 잘 자고있네.

물론 이게 우울한 것 보단 낫다.

내 옆에 누워있는 릴리아나의 가슴을 한 번 꼬집어주고, 이불을 덮어준 채 침대에서 일어났다.

시간은 오전 6시.

이렇게 이른 시간이다보니 아마 일어난 사람은 없….

아니구나.

부엌에서 잘그락잘그락 소리가 들려왔다.

기숙사에 사는 사람중에 부엌에 들어가는 사람은 단 두 명이다.

그런데 스칼렛이 여기 없으니까… 한 명 남았다.

나는 잠옷을 입은 채 부엌에 들어가서 인사를 건넸다.

"좋은 아침."

"일어났구나. 릴리아나 씨랑 잘 자고 있던데."

"… 큼."

나는 괜히 창피해져서 어색한 웃음을 흘렸지만, 남다은은 하나도 신경쓰지 않는 듯 손을 바삐 움직였다.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김밥과 계란말이 같은 간단한 요리를 만들고 있었다.

귀여운 문어 소세지와 캐릭터 어묵은 덤이었다.

"뭐 하는거야?"

"오늘 다희랑 놀러가기로 했거든."

"오… 부럽다. 나도 데려가줘."

마침 오늘 할 게 없어서 고민중이었는데 잘 됐네.

"안돼. 오늘은 둘만의 시간을 보낼거야."

아니, 이 자매는 매일같이 둘만의 시간을 보내면서 또 얼마나 시간을 보내려는거야.

그래도 기분좋은 미소를 지으며 김밥을 싸고 있는 남다은을 보니 기분이 좋긴하네.

나는 괜히 괴롭히고 싶어서 남다은의 가슴에 손을 얹고 만지기 시작했다.

"나 저거 소시지 먹여줘."

"저건 다희 거랑 내 꺼랑 똑같이 사놨는데… 계란말이 먹으면 안 돼?"

남다은은 약간 곤란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저런 표정을 보면 더 놀리고 싶어지는데.

나는 가슴을 만지는 손을 더욱 열심히 움직이며 말을 이었다.

"우리 사귀는 사이라며. 네 입으로 말해놓고 그러는거야?"

박민규의 복수를 끝낸 날.

다희와 식사할 때 남다은이 했던 말이다.

그걸 언급하자 내 생각대로 남다은의 얼굴이 서서히 빨개지기 시작했다.

"… 내 꺼 다 먹어."

"농담이야. 어떻게 내가 네 걸 뺏겠어."

"너무해."

"큭, 그러고보니 다희는?"

"곧 일어날거야. 원래 같이 일어나려고 했는데… 너랑 릴리아나 씨가 알몸으로 자고 있는 바람에 못 깨웠어."

"… 미안."

갑자기 그렇게 나오면 어떻게 해.

남다은에게 미안해진 나는 가슴을 만지던 손을 살짝 놓았다.

"혹시 저 암막 커튼 열은 게 너야?"

"응. 널 흔들어서 깨울 순 없으니까."

"… 오."

자는 남자친구 몸에 손을 안 대려고 하다니 세상에 이런 현모양처가 있나.

감동해서 남다은을 끌어안으려 했는데, 끼이익- 하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재빨리 남다은의 몸에서 손을 뗐다.

"언니… 왜 나 안 깨웠어."

"미안해. 다희야. 일어났구나?"

남다은은 나를 살짝 밀어내고 남다희에게 달려갔다.

쩝.

괜히 나만 쓰레기가 된 것 같네.

나는 거실의 소파에 몸을 맡긴 채 스마트 워치를 살폈다.

"루시랑 루미는… 뭐하는 지 물어봐야겠다. 아영 씨는 바쁠거고. 아, 수린 누나랑 밥도 먹어야하는데."

루시와 루미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수린 누나한테도 뭐하냐는 메시지를 보냈다.

띠링-

"오. 빨라."

내가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답장이 도착했다.

- 수린 누나 : 오늘은 약속이 없어서 쉬려고 했지. 누나랑 놀고 싶어?

- 나 : 네. 퇴원 기념으로 점심이나 드실래요?

- 수린 누나 : 나야 좋지.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 법.

오늘은 우리 수린누나를 만나야겠다.

"… 그래서, 아빠가 사라졌다고?"

"예. 조금 전에 길드를 떠나셨다고 합니다."

엘리스는 세바스 찬의 말을 들은 뒤 스마트 워치를 확인했다.

시계는 이미 밤이라고 해도 늦지 않은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지금쯤 원래 일하는 시간이잖아. 그게 왜?"

남들과 다르게 자신의 아버지는 지금부터가 일하는 시간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급하게 보고한거지?

"길드를 떠나기 전에… 부길드장님에게 엘리스 아가씨를 만나러 간다는 말을 하셔서…."

"… 나를?"

엘리스는 살짝 눈을 찌푸렸다.

"예. 그런데 방문 의도가 이호연 생도 때문은 아닐지 걱정이 됩니다."

"음…."

딸이 마사지를 받는데 그게 남자 마사지사다.

- 대체 누구길래 우리 딸을 마사지하는거냐. 얼굴이나 보자.

아빠라면 충분히 그렇게 말할 가능성이 있다.

자기는 여러 여자를 건드리고 다니지만, 자신의 딸이 남자를 만나는 건 이르다면서 막는 내로남불의 선두주자니까.

"한국에 오면 다신 안 볼 거라고 말했어?"

"네. 전달하긴 했습니다만…."

'길드장님이 워낙 일을 대충해서 서류를 제대로 읽는지는….'

세바스 찬은 뒷 말을 삼켰다.

엘리스의 앞에서 그녀의 아버지를 욕되게 할 순 없으니까.

"음. 그러면 괜찮아. 아마 내 핑계를 대고 여자 만나러 갔겠지."

"그런가요…?"

세바스 찬은 길드장이 부길드장과 엘리스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기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내 말을 들었다면 안 오겠지."

엘리스는 아빠가 자신을 끔찍하게 아끼는 걸 알지만, 그만큼 자신의 말을 잘 들어주는 것도 안다.

그렇기에 엘리스는 아버지인 아이작을 믿었다.

아이작이 한국으로 올 준비를 하고 있는 것도 모른 채.

*

남다은 자매가 소풍인지 뭔지를 나가고, 릴리아나는 방에서 방송을 시작했다.

사실 이제 방송은 안 해도 괜찮다.

나도 꽤 여유로워 졌거든.

하지만 집에서 할 일이 없으면 삶의 의욕이 사라지니까 그냥 계속하라고 시키고 있다.

자기도 나름 사람들과 떠드는 걸 즐기는 것 같고.

-아, 오랜만입니다. 여러분들~ 네? 착한 척 하지말라고요? 그럼 쳐나가든가.

"흐음…."

어떻게 저런 방송이 잘 나갈 수 있는걸까.

신기하네.

나는 릴리아나의 목소리를 배경음삼아 문수린을 만날 준비를 했다.

준비라고 해봤자 대충 씻고 머리를 좀 넘기는 것뿐이지만… 이 정도만 해도 충분하더라.

피부든 머리카락이든 타고나면 다 예쁘게 나온다.

띠링-

기숙사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약속 장소는 언제나처럼 풍미당이라는 한식집이다.

풍미당까지 걸어가며 문수린과 무슨 대화를 할지 생각했다.

'홍보부 얘기도 좀 하고… 스토킹 얘기도 해야지.'

저번에 스토킹에 대해 얘기를 했는데 반응이 이상했었다.

공략의 열쇠였던 스토킹이 막혀서 약간 답답하지만, 어떻게든 풀어나갈 수 있을 거다.

"공략…."

사실 엘리스를 공략하면서 호감도의 힘을 알았다.

남들에게 차가운 엘리스가 나한테는 그만큼 차갑게 대하지 못했으니까.

내 얼굴 덕도 있겠지만, 호감도도 무시할 수 없겠지.

그러다 보니, 자동으로 호감도가 올라가는 문수린의 공략도 어쩌면 쉽게 풀릴지도 모른다.

결국 연인 사이는 더 좋아하는 사람이 지는 거거든.

물론 나는 연인이 한 명이 아니라서 문제지만.

'방금은 좀 쓰레기 같은 생각이었어.'

내 쓰레기력이 점점 늘고 있다. 이건 주의를 해야하는데.

잡생각을 하며 걷다보니 풍미당에 도착했다.

익숙한 입구를 열고 들어가자 항상 보던 종업원분이 계셨다.

"어서 오세요."

"예약했어요. 이름은 문수린."

"이 쪽으로 올라오세요."

2층에 있는 여러 룸을 지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방 앞에서 종업원은 허리를 숙였다.

"안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네, 고맙습니다."

드르륵-

문을 열자 앉아서 스마트 워치를 보고 있던 문수린의 얼굴이 보였다.

"누나. 저 왔어요."

"응응. 왔구나."

여기서 보는 것도 꽤 오랜만이네.

입원하기 전에 본 게 마지막이니까.

스마트워치를 집어넣은 문수린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 히로인 상태창

[문수린]

- [ 호감도 : 88 ]

- [ 성욕 : 45 ]

- [ 식욕 : 50 ]

- [ 피로도 : 43 ]

현재 상태 : 오늘은 무슨 대화를 해야 할까…?

'딱히 이상한 건 없네.'

호감도도 여전히 높고, 다른 특이사항도 없다.

언제나처럼 든든한 문수린이었다.

문수린의 얼굴엔 웃음꽃이 피어있었다.

엄청나게 반가워하면서도 적당히 숨기는 게 귀여운 누나다.

"배고프지? 얘기는 점심 먹으면서 하자."

"네. 좋죠."

문수린이 벨을 누르자마자 음식이 서빙되기 시작했고, 우리는 식사를 시작했다.

얌냠냠.

천천히 에피타이저를 먹는 문수린을 뻔히 바라보고 있으니, 문수린도 내 시선을 눈치챘다.

"왜, 왜 그래? 뭐 묻었어?"

눈을 크게 뜨고 냅킨을 입으로 가져간 문수린은 입술 주변을 두드렸다.

"아니에요. 그냥 누나 보고 있으니까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라서요."

"처음 만났을 때…?"

"네. 그때 엄청나게 놀랐잖아요. 학생회장님인지도 모르고 그런 실수를 하다니."

첫 만남 때 커피를 쏟으며 접근했던 건 지금 생각하면 참 웃기다.

물론 그때는 아직 세상에 적응도 제대로 못 했던 때니까… 그 정도면 임기응변으로 잘 한 걸 거다. 음. 아마도?

"나도 깜짝 놀랐었어. 그래도 일 때문에 스트레스가 극심할 때라, 리프레쉬되는 느낌이었어. 친한 후배도 생겼고."

"저야말로 귀여운 누나가 생겼잖아요."

"어허, 누나한테 귀엽다는 말이 맞나?"

빨대를 쪼옥 빨면서 살짝 미소를 지은 문수린은 내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에이. 그만큼 좋아한다는 거죠. 그러고 보니 홍보부 일은 더 없어요? 활동 안 한 지 꽤 됐는데."

"… 사실 예산이 안 내려와. 너랑 엘리스 첫 활동 때 찍은 사진을 아직 다 쓰지도 못했거든…."

"…."

모델이 워낙 좋다 보니 이런 일도 일어나는구나.

"누나. 그러고 보니 부회장은 정확히 어떻게 된 거에요?"

"… 신동민 말이지?"

"네."

저번에 학생회에 갔을 때 그 침침한 분위기와 죽어있는 표정들이 아직도 생생하다.

문수린은 의자에 몸을 기대고 한숨을 한 번 쉬고는 입을 열었다.

"하아, 사실 특이한 건 없어. 어느 날부터 학생회에 안 나오기 시작하다가 그대로 실종되어 버렸거든."

"부회장 패거리들도 어느 순간부터 안 나오기 시작했겠네요."

"응. 결국 일은 다 우리가 처리하고 있어. 사람을 더 뽑긴 해야 하는데… 제적하려면 절차가 좀 복잡해."

"빅토리아 아카데미 학생회니까요."

빅토리아 아카데미 학생회 임원 출신이면 나중에 엄청난 스펙이다.

그러다 보니 들어가는 거나 나가는 거나 더럽게 까다롭다.

그나저나 신동민 그 새끼는 어디로 숨은거지?

원작에서도 더럽게 끈질긴 놈이라 이렇게 포기하진 않을텐데….

그때 문수린이 책상을 톡톡 건드렸따.

"호연이 네가 대신해보는 건 어때? 부회장 자리 줄게. 너 정도면 다른 애들도 불만도 없을 거야."

"어, 제가 좀 바빠서…."

"나중에 취업할 때도 엄청 좋은 스펙일걸? 아니면 그냥 아카데미에 취직시켜줄 수도 있고… 정 아니면 내 밑에서 일 해도… 되고?."

"…."

나는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변명을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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