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엘리스의 저택.
방 안에서 거울을 보며 머리를 만지던 엘리스는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7시.
이미 해가 거의 넘어간 시간이었다.
"… 왜 안 오지?"
아카데미 수업은 진작 끝났을 텐데.
루시루미와 대화하는 걸 엿들었을 때, 분명 학생회와 임솔 교수에게 들린다고 했었다.
'대충 인사만 하고 와야지, 얼마나 오래 있는 거야.'
엘리스는 발을 동동 구르면서 이호연을 기다렸다.
똑똑-
"응, 들어와."
엘리스의 말에 문이 열리고 세바스 찬이 방으로 들어왔다.
"아가씨. 준비는 끝냈습니다. …근데 정말 괜찮으신가요?"
"괜찮다니까. 설마 내가 사기를 당하겠어? 효과도 이미 확인했어."
마나 마사지에 대한 얘기다.
이호연이 마사지를 한다는 말에 세바스 찬도 걱정을 했었으니까.
"으음, 사기는 아니더라도… 저는 걱정이 됩니다. 아무래도 나이가 있다 보니 생각이 보수적이라서요."
"걱정하지 마. 세바스 찬이 생각하는 일은 없을 거야."
세바스 찬이 최대한 돌려 말하고 있지만, 엘리스도 무슨 말인지는 알았다.
근데 어쩌겠어.
이건 치료 과정인걸.
'치료 과정이야. 응….'
엘리스는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큼, 그러고 보니 아빠한테는 아무 말도 없어?"
"네. 아직 본부에 돌아오질 않았다고 합니다."
"… 그 켄타우로스 때문이야?"
"예. 맞습니다. 정부 차원에서 도움을 요청했다 보니, 길드장님도 전력을 다하는 모양입니다."
"아빠는 일 할 때는 연락을 안 받으니까… 알았어."
아이리스 길드장은 완벽한 일 처리를 위해 업무 때는 다른 연락을 안 받는 타입이다.
그걸 아는 엘리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기지개를 켰다.
"하아, 일단 준비한 건 내버려 둬. 오라고 말은 했어."
"예. 알겠습니다."
세바스 찬이 고개를 숙이고 방에서 나간 뒤, 엘리스는 침대에 몸을 던졌다.
"… 메시지를 보낼까."
언제 올 건지 예정 정도는 물어봐도 되지 않을까.
이건 계약이잖아.
재촉한다고 이상한 여자라고 생각하진 않을 거 아니야.
이게 적은 돈도 아니고 큰 금액인데….
"학생회에 임솔 교수…."
이호연이 만나러 간 사람들이다.
임솔 교수는 말 할 것도 없고, 학생회도 큰 목적은 문수린을 만나러 가는 거겠지.
"여자가 뭐 그리 많아."
루시루미 쌍둥이에 집에서 동거하는 이상한 여자, 백아영에 임솔, 문수린까지.
아무리 능력이 좋아도 그렇지, 아이리스 길드장인 자신의 아버지도 저 나이대에 6명이나 후리고 다니진 않았을 거다.
"다른 여자들이랑 노느라 계약도 안 지키고…."
엘리스는 기분이 나빴다.
다른 여자들이랑 노는 건 상관없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자신의 계약에 늦는 건 안 되지.
'연락이 오면 한마디 해야겠어.'
음음. 그게 좋겠다. 아주 따끔하게 해야겠어.
띠리링-
엘리스가 생각을 끝내자마자, 스마트 워치가 울렸다.
이호연 전용 알람 소리였다.
- 이호연 : 엘리스. 나 지금 가고 있어. 늦어서 미안해. 바로 갈게.
"헉, 왔어."
답장을 위해 손을 움직이려던 엘리스는 멈칫했다.
"아니야. 바로 답장을 보내면 기다리던 것 같잖아."
엘리스는 스마트 워치를 내려놓고, 벽을 바라봤다.
"스칼렛?"
"네. 아가씨."
스르륵-
엘리스가 이름을 부르자마자, 스칼렛이 천장에서 툭 떨어졌다.
"… 천장에 있었구나."
"예. 무슨 일이세요?"
"음, 곧 이호연이 오거든? 세바스 찬 좀 내보내 줘."
"어… 제가 잘 말해보겠습니다."
스칼렛한테는 대충 얘기해도 척하고 알아들어서 편했다.
"응응. 부탁해."
스칼렛이 다시 사라지고, 엘리스는 다시 스마트워치를 잡았다.
"… 지금쯤 답장하면 괜찮겠지."
- 나 : 괜찮아. 나도 업무 처리 중이었어. 천천히 와.
됐어.
전혀 기대 안 한 것 같이 자연스럽게 넘어갔다.
엘리스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이호연이 오기를 대비해 몸에 향수를 뿌렸다.
"하아…. 노인네들은 진짜 설득하기 힘들어."
스칼렛은 엘리스가 마사지 받는 동안 문밖에서 기다리겠다는 세바스 찬을 설득하느라 진땀을 흘렸다.
엘리스의 신음이 문 밖으로 흘러나올텐데, 그걸 설명할 방법이 없으니까.
룬의 결계를 쳐서 방음을 한다고 해도, 세바스 찬의 수준이라면 결계의 유무 정도는 감지할 수 있다.
그래서 다른 변명을 해야했는데… 도저히 생각이 나질 않았다.
물론 무조건 통하는 변명이 있었다.
엘리스를 팔아먹는 것이다.
그래도 '아가씨가 세바스 찬이 가까이 오는 걸 원하지 않는다' 라는 변명은 최후의 보루로 남겨두고 싶었다.
혹시라도 엘리스 아가씨와 이호연이 의심당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바스 찬의 강경한 태도를 꺾을 수 있는 방법이 그것밖에 없어서, 스칼렛은 결국 비밀 병기를 사용해버렸다.
- 실은… 엘리스 아가씨가 세바스 찬 님이 가까이 있는걸 원하지 않으셔서요.
- 아, 아가씨가…?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스칼렛이 직접 감시해….
- … 네. 알겠습니다.
터덜터덜 걸어가는 세바스 찬의 뒷모습은 좋아하는 딸에게 '아빠 싫어!' 라는 말을 들은 아버지 같았다.
'이미 이호연에게 갈아탔으니, 어쩔 수 없어.'
세바스 찬 성격상 엘리스에게 티 내진 않을 거다.
그래도 서운한 마음은 남아있겠지.
스칼렛은 약간 미안했지만, 이미 이호연에게 계약서로 묶이기도 했고… 아이리스 길드보다 이호연에게 받는 대우가 더 좋았다.
돈을 받진 않지만 '사내 복지'가 매우 뛰어난 편이니까.
'미리미리 갈아탈 준비를 해야지.'
어쨌든, 세바스 찬을 설득하는 데 성공한 스칼렛은 저택을 빠져나왔다.
'이쯤에 있을… 아, 저기 있네.'
멀리서 봐도 눈에 띄도록 잘생긴 남자.
그리고 살짝 걸려있는 인식저해결계.
자신 정도의 실력자라면 뚫을 수 있지만, 일반인들은 평범한 남자로 보이겠지.
스칼렛은 이호연에게 다가갔다.
만약 스칼렛이 아이리스 길드를 떠나더라도, 이호연이 좋은거지 엘리스가 싫은 건 아니었다.
'우리 아가씨 연애도 좀 도와줘야해.'
스칼렛이 보기에 엘리스도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바람둥이 길드장을 만나서 고생하는 어머니를 보면서 자랐는데, 자기도 바람둥이 남자에 빠지다니.
그래도 스칼렛은 엘리스를 응원했다.
이왕이면 이호연과 엘리스가 이어지는 게 스칼렛에게 좋으니까.
운이 좋으면 아이리스 길드와 이호연 둘 다 잡을 수도 있거든.
사사삭-
스칼렛은 벽에 몸을 숨긴 채 이호연에게 다가갔다.
"스칼렛?"
하지만 그런 노력을 무시하듯 이호연은 바로 알아챘다.
"호연 님. 안녕하세요."
"오랜만이네."
이호연은 갑작스럽게 나타난 스칼렛의 목소리에 당황하지 않고 걸음을 유지했다.
스칼렛의 마나를 느껴서 다가오는 걸 알아챘기 때문에 놀라지 않고 차분하게 맞이할 수 있었다.
"퇴원한 지 하루 밖에 안 됐는데, 마나 감지하는 실력이 벌써 돌아오셨네요."
"이 정도 되니까 돌아다니지. 내가 적이 워낙 많잖아."
"하긴. 지은 죄가 많으시니까요."
"…."
*
"너무 늦은 건 아니겠지."
거의 8시가 돼버렸네.
임솔 교수의 연구실을 빠져나온 나는 클린 마법으로 몸을 깨끗이 하고 엘리스의 집으로 향했다.
엘리스의 집이 있는 동네는 큰 집이 주루룩 세워져있었다.
"나도 이런 곳으로 이사 올까. 기숙사는 너무 좁긴한데."
그 중 한 집을 보며 나는 진지하게 이사를 고민했다.
사람이 4명이나 있는데, 기숙사에서 지내고 있잖아.
다행히 릴리아나의 방송을 위해 내가 거실에 침대를 구비해놓은 덕에 지내는 데 무리는 없었지만, 그래도 좁긴 좁으니까.
언젠간 늘려야지.
다시 엘리스의 집을 향해 걸고 있던 때에 나는 익숙한 마나의 흐름을 느꼈다.
금발의 이중 스파이 스칼렛의 마나 흐름이었다.
"스칼렛?"
"호연님. 안녕하세요."
"오랜만이네."
스칼렛의 마력은 조심스럽게 내 그림자에 파고들어 갔다.
아마 모습을 보여주기 싫은 거겠지.
아직 다른 사람의 시선을 조심하는 모양이었다.
일반인들은 몰라도, 강효린 박사 같은 고수가 언제 나타날지 모르니까.
"퇴원한 지 하루 밖에 안 됐는데, 마나 감지하는 실력이 벌써 돌아오셨네요."
"이 정도 되니까 돌아다니지. 내가 적이 워낙 많잖아."
"하긴. 지은 죄가 많으니까요."
"…."
'짜증 나는데 반박할 수가 없네.'
며칠 만에 본 스칼렛이지만 우리는 익숙하게 대화할 수 있었다.
쌓아온 친분이 있었으니까.
"엘리스 아가씨가 엄청나게 기다리고 있는데, 왜 이리 늦으셨어요."
"그래? 나한테는 무슨 업무 처리 중이라고 하던데."
"아니에요. 두 시간쯤 전부터 언제 오나 하고 침대에서 동동거리는 걸 보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요."
"너도 참 고생이 많구나."
스칼렛은 내 그림자에 숨어 날 따라오고 있었다.
얼굴이 보이지 않더라도 스칼렛 특유의 귀찮아 보이는 표정이 눈에 선했다.
'생각해보면 진짜 많이 친해졌네."
처음 봤을 때는 엄청 차가웠는데. 지금은 다 추억이다.
"그래서 왜 온 거야? 어차피 지금 엘리스 집으로 가는 길이잖아."
"그냥 인사도 할 겸… 잘 하시라고요."
"잘?"
"다른 여자랑 놀다가 이제 오는 거잖아요. 저희 아가씨도 잘 해주셔야죠. 호연 님한테 아주 푹 빠진 것 같은데."
"…."
엘리스가 그 정도였나?
마사지를 열심히 하긴 했지만, 아직 그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지.'
사실 말이 마사지인 거지, 남이 보면 연인 간의 스킨십이라고 해도 믿을 거다.
그 정도 스킨십하면서 호감도가 부족하다고 생각한 것도 잘못이다.
'야겜 히로인들이라 감을 잡기가 힘드네.'
특히 엘리스는 더 어렵다.
분명 내 여자관계를 견제하는 것 같았는데.
높은 호감도인데도 나를 까칠하게 대했으니까.
뒤로는 내 섹스 영상을 보면서 자위하는 주제에, 앞에서는 그렇게 행동하니까 영 상태를 파악 할 수가 없다.
"그냥 냅다 들이박아야 하나…."
살짝 실수하더라도 괜찮지않을까.
호감도도 꽤 높여놨는데.
"… 아무리 그래도 바로 자지를 들이박는 건 너무 이른 거 아닌가요?"
"이상한 소리하지 마라."
"네."
헛소리를 응징하기위해 그림자를 발로 쿡쿡 밟았지만 역시 반응은 없었다.
"참나… 맞다. 릴리아나랑 다희가 보고 싶어 하니까 기숙사에도 한 번 들려."
"당분간은 좀… 그렇네요. 그리고 저도 릴리아나 님은 보고 싶습니다."
"그래그래."
스칼렛이 릴리아나를 좋아하는 건 나도 잘 알고 있다.
기숙사에 들어올 때 마다 기분 좋은 신음을 너무 많이 들었거든.
여러 얘기를 하다 보니, 벌써 엘리스의 집 앞에 도착했다.
"다 왔네. 너도 슬슬 가봐."
"네. 어차피 저도 방 안에 숨어서 기다릴 거예요. 아무튼, 저희 아가씨 잘 부탁드립니다."
"왜 그래. 오늘 사랑의 큐피드 컨셉이야?"
"비슷해요. 두 분이 사귀면 저도 좋거든요."
"노력은 해볼게."
스칼렛이 사라진 뒤, 나는 벨을 눌렀다.
띵동- 띵동-
이렇게 큰 집도 벨 소리는 평범하네.
찰칵-
잠시 후, 대문이 살짝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