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8화 (208/648)

*

"…."

돌아가는 엘리스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 눈앞에는 엘리스의 상태창이 띄워져 있었다.

★ 히로인 상태창

[엘리스]

- [ 호감도 : 68 ]

- [ 성욕 : 50 ]

- [ 식욕 : 40 ]

- [ 피로도 : 55 ]

현재 상태 : 집에 가서 준비를 해야 해. 일단 세바스 찬을 내보내고….

분명 까칠했다.

호감도가 68이나 되는데도 그렇다.

1대1 결투 때와 비슷한 호감도인데도 반응이 영 그때 같지 않았다.

'이거 여자가 문제인 것 같은데.'

남자가 꽃이고 여자가 벌이라면, 엘리스는 여왕벌이다.

[능력 있는 남자에 벌이 꼬이는 건 당연하지. 다 허락할 수 있어. 하지만, 내가 여왕벌인 건 잊지 마.]

원작에서 엘리스가 주인공에게 하는 말이다.

그만큼 하렘에 관대한 히로인이지만, 중요한 건 자신이 여왕벌이어야 한다는 것.

일벌은 일을 하고, 병정벌은 싸우고, 여왕벌은 아이를 낳고… 이런 개념을 얘기하는 게 아니다.

벌 중에 왕이라는 게 중요하다.

능력이 있는 남자가 꽃이라면, 그 꽃을 차지하는 벌 중에서 자신이 최고여야 한다.

그게 엘리스의 사고방식이었다.

'역시 엘리스를 먼저 공략했어야 했나.'

그러면 더 편하긴 했겠네.

물론 후회하진 않는다. 

백아영, 남다은, 루시와 루미 모두 소중했으니까.

게다가 내가 컨트롤 할 수 없는 사건들이 많이 터져서 어쩔 수 없기도 했다.

"이번에도 어떻게든 해봐야지."

그래도 마사지라는 활로가 뚫려있으니 그쪽을 파볼 수밖에.

믿을 건 마력과 손가락밖에 없다.

강의실로 돌아오자 루시와 루미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둘은 마주본 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루미. 점심부터 떢볶이가 무슨…. 어? 왔네?"

"호연 씨. 점심은 어디가 좋으세요?"

"내가 햄버거 먹자니까 루미는 떢볶이 먹고 싶대. 이호연 네가 정해줘."

날 바라보는 초롱초롱한 두명의 눈빛을 받으며 가방을 들었다.

"국밥이나 먹으러 가자."

"에에?"

"저는 호연 씨가 좋은 곳으로 갈게요."

"뭐야 루미. 그렇게 나오면 안 되지! 내 햄버거는 엄청 반대했잖아!"

익숙한 분위기.

역시 쌍둥이들과 떠들 때가 제일 마음이 편헀다.

우리는 계속 투닥투닥 거리며 점심을 먹으러 갔다.

수업이 끝난 후. 

루시와 루미는 총총총 하며 어딘가로 사라졌다.

'동아리방 쪽으로 간 것 같은데.'

어떻게 알았냐면 나도 그 쪽으로 가고 있었거든.

학생회에 가기 위해 동아리 건물 쪽으로 방향을 잡았는데, 루시와 루미가 서로 키득거리며 내 앞에서 걷고 있었다.

루시와 루미가 잔뜩 기대하라고 말했으니 나는 마주치지 않도록 뒤에 숨어서 걸어갔다.

둘이 건물로 들어가는 걸 확인한 후, 스마트 워치로 메시지를 보냈다.

- 나 : 수린 누나. 퇴원 기념으로 학생회 한 번 들를게요.

오랜만에 학생회를 가볼 생각이다.

이래 봬도 학생회 홍보부 소속이니까.

물론 요즘 활동이 뜸하긴 했지만... 어쩔 수 없다.

홍보부 자체가 문수린이 나를 학생회로 끌어들이기 위해 만든 조직이거든.

요즘 나와 문수린 둘 다 일이 많았으니 제대로 된 활동이 있을리가.

아무튼, 오랜만에 동아리 건물로 들어왔다.

"어색하네."

루시와 루미가 동아리 방에서 뭘 하고 있을지 궁금하긴 하지만, 대충 예상은 가니까 내버려두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동아리 건물에서도 제일 위층인 17층에 위치한 학생회실.

우우웅- 하는 소리를 내며 엘리베이터가 움직였다.

나같은 아싸가 학생회라니, 이제와서 생각해도 참 감회가 새롭네.

- 띵동. 17층입니다.

챠르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학생회실과 회장실, 휴게실 같은 시설들이 보였다.

마치 회사의 사무실 같은 분위기였다.

'어디 아는 사람 없나?'

엘리베이터를 빠져나와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고 있었는데, 홀로그램 모니터를 보며 업무를 처리하던 여자부원 한 명이 나와 눈을 마주쳤다.

"어? 후배님이다!"

"응? 무슨 소리... 엥? 진짜네."

처음 학생회에 들어왔을 때 친해진 선배 몇몇이 날 알아보고 다가왔다.

"오랜만이에요. 퇴원 기념으로 들렸습니다."

"쩝. 우리 후배가 순식간에 유명해져서 친한 척하기가 좀 그렇네."

"그치...?"

"그래도 우리는 학생회 선배인데 편하게 대해도 되지 않을까?"

"그럼 너 먼저 해봐."

"... 안할래."

선배들은 서로 마주 보더니 머리를 긁적거렸다.

하긴, 내가 그 사이에 많이 유명해지긴 했지.

'이러다간 대화 진도가 안 나가겠어.'

나는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하하... 회장님은 어디 계세요? 인사드리고 싶은데."

착한 사람들인 건 알겠어요.

근데 문수린이 더 중요하거든요. 

죄송합니다. 여러분들.

"회장님은 지금 회장실에 있지. 업무 중일 텐데, 괜찮으려나?"

"호연 후배님이 왔는데 괜찮지 않을까? 노크하고 들어가 봐."

"네네. 감사합니다."

친절한 선배들한테 꾸벅 고개를 숙였다.

선배들은 일이 많이 밀려있는지 대충 손을 흔들고 다시 자리로 돌아가 키보드를 두드렸다.

똑똑-

"회장님. 저 왔어요."

대답이 없네.

'분명 안에 있다고 했는데.'

나는 문에 귀를 딱 붙이고 마력을 집중했다.

그러자 안쪽에서 들리는 소리를 조금씩 들을 수 있었다.

사각사각-

"나쁜 새끼... 신동민 이 나쁜 새끼... 도망가버리면 일은 어떡하라는 거야."

사각사각-

안쪽에서 조용히 들리는 욕지거리에 나는 몸을 움츠렸다.

"...."

수린 누나 목소리가 너무 무서운데.

살짝 뒤를 돌아보자 선배들도 일에 집중하고 있었다.

눈이 빠지도록 모니터를 바라보며 전투적으로 키보드를 두드리는 게, 방해하기 힘든 분위기였다.

대체 왜 저러는... 아. 알겠다.

'사람이 어쩐지 많이 없다 했더니, 다 도망갔나 보네.'

얼마 전 문수린의 주도로 부회장 신동민에 대한 기사들이 족족 터졌다.

학생회 부회장이었으니 이미지 관리를 위해 아카데미에서도 빠른 손절을 진행했는데, 그에 따라 학생회에서 부회장 패거리들이 모두 사라진 것이다.

"하긴 절반 정도가 갑자기 사라지면 힘들겠지."

어쩐지 선배들 눈이 약간 죽어있더라.

'음....'

근데 아무리 바쁘더라도 계속 이러고 있을 순 없잖아.

나는 다시 한번 문을 노크했다.

똑똑-

하지만 역시 반응은 없었다.

"... 누나. 그냥 들어갈게요?"

문고리를 살며시 돌리자 문이 열렸고, 펜을 잡은 채 미간을 찌푸린 문수린의 얼굴이 보였다.

설마 이걸로 혼내진 않겠지...?

문수린은 문이 열린 것도 모른 채 업무에 몰두하고 있었고, 나는 살며시 그 뒤로 다가갔다.

찰랑거리는 백금발이 가리고 있는 정수리가 보였다.

단정한 생도복을 빠져나오려는 육감적인 몸매가 내 시선을 이끌었다.

문수린의 바로 뒤까지 도착했다.

서로의 숨소리가 느껴지는 거리지만, 아직도 문수린의 눈은 서류에 꽂혀있었다.

이쯤 되면 눈치챌 만도 한데... 아직 눈치채지 못한 걸 보니 스트레스가 많이 심한가 보네.

"신동민 개새끼... 나쁜 새끼... 이 씨ㅂ...."

"누나. 저 왔어요."

"끼야아악!"

계속 내버려두면 더 심한 욕이 나올 것 같아서, 빨리 끊었다.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을 걸자 문수린은 이상한 목소리를 내며 몸을 움츠렸다.

동시에 책상에 있던 서류들이 염동력으로 띄워지기 시작했다.

이러다가 큰일 나겠네.

"어... 누나. 저예요. 이호연."

"끼야아... 어? 호, 호연아. 언제 왔어?"

"노크해도 대답이 없으셔서... 그냥 들어왔어요. 많이 놀라셨으면 죄송해요."

"아니야. 응. 전혀 안 놀랐어."

하늘에 둥둥 떠 있던 서류들이 '원래 이렇게 정리하려고 했다.'라고 말하듯 착착 정리되어 책상 위로 떨어지고, 문수린은 머리를 넘기며 나와 눈을 마주쳤다.

"퇴원했다고 온 거구나. 미리 연락을 주지 그랬어."

"메시지도 남겼는데 답장이 없었어요."

"... 미안. 너무 바빴어."

눈 밑에 내려온 다크서클을 보니 확실히 그런 것 같네.

"에이. 괜찮아요. 누나는 잘 지냈어요?"

"응. 너 퇴원하는 날만 기다렸지. 풍미당 예약도 해놨어."

"아하하... 저야 언제든지 오케이죠."

문수린과 잡담을 나누면서 안부를 물었다.

오늘은 자연스러운 대화 도중에 공략에 대해 힌트를 얻어야 한다.

"요즘은 힘든 점 없어요?"

"어떤 거?"

"음...."

스토킹 사건의 범인은 사라졌지만, 문수린의 심리는 그대로일지도 모른다.

분명 예전에 말로 스토킹에 대한 거부감을 표출한 적이 있거든.

물론 그걸 부정하는 듯한 말도 했지만... 일단 찔러볼 만 하다.

"저는 요즘 기자들 때문에 스트레스를 엄청나게 받거든요. 뭐만 하면 기자들이 몰려들어서... 퇴원하는데도 숨어있더라고요. 누나는 어떤가해서요."

"... 글쎄. 나는 적응했어. 유명인이니까."

"...."

미안한 말이지만, 적응하면 안 되는데.

스토커 사건으로 공략되는 히로인이 거기 적응해버리면 어떡해.

"... 그 사람들의 느낌이 대충은 이해가 가거든. 팬심이라던가."

"네?"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리 봐도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데.

★ 히로인 상태창

[문수린]

- [ 호감도 : 88 ]

- [ 성욕 : 50 ]

- [ 식욕 : 40 ]

- [ 피로도 : 73 ]

현재 상태 : 미안해 호연아....

'아니 대체 뭐야.'

나한테 왜 미안해요. 누나.

그리고 호감도는 왜 자꾸 오르는 거야.

저렇게 혼자 공략되버리면 나는 뭐 하라고.

나는 답답한 마음으로 문수린을 바라봤지만, 문수린은 내 시선을 피하며 입을 열었다.

"큼... 어쨌든 나는 괜찮아. 걱정하지 마."

말을 잇는 문수린의 옆 얼굴은 뭐랄까.

나한테 사과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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