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후우, 아니 화장실 간 사람이 왜 안 와?"
"오빠 혼자서 우리랑 놀면 되잖아요. 자, 한 잔 더 받아요."
"잠시만잠시만. 언니, 실장 좀 불러줘."
여자를 끼고 술을 마시던 박민규는 한 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는 이호연에게 이상함을 느꼈다.
인터폰으로 실장을 부르자, 곧 실장이 방에 들어왔다.
"네, 부르셨습니까?"
"김 실장. 화장실 간 내 일행이 오질 않아. 한 번 확인해줘."
"일행분은 아까 밖으로 나가셨는데요…?"
"뭐?"
박민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기껏 여기까지 와놓고 도망가다니?
'정말 처음이라 긴장돼서 그런 건가?'
처음 오는 남자들이 그러는 경우가 더러 있지만, 박민규가 본 남자들은 술이 들어가면 다들 웃으며 놀기 바빴다.
띠링띠링-
박민규가 눈을 찌푸리고 있을 때, 스마트워치가 울렸다.
바이어 길드 실장의 전화였다.
"지금 접대 중이라니까 왜 전화질이야."
접대받는 사람이 도망가버렸지만, 업무 중에는 전화를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해놨었다.
자신의 말을 무시한 실장에게 기분나쁜 감정을 느끼며 전화를 받았다.
- 기, 길드장님. 큰일입니다. 뉴스, 뉴스가 떴어요!
"뉴스?"
실장의 목소리는 엄청나게 다급하게 들렸다.
박민규는 통화를 유지하며 스마트워치로 인터넷에 접속했다.
검색어 최상단에는 [바이어 길드] [박민규 마약] [바이어 길드 마약 유통] 같은 키워드들이 노출되고 있었다.
"... 이게 뭐야. 마약이라니?"
"저희가 예전에 관계를 갖던 마약 유통범들이 폭로를 해버렸습니다! 자기들도 자수하면서 자료를 다 제출하는 바람에 손쓸 방법이 없습니다!"
"이런 씨발…."
박민규는 이를 악물었다.
"오빠, 무슨 일이야?"
"닥쳐. 실장한테 나중에 온다고 전해."
"오빠, 계산은? 오빠!"
박민규는 달리듯이 건물을 빠져나와 바이어 길드로 향했다.
'아직 괜찮아. 꼬리 자르기로 빠져나갈 수 있어.'
마약 유통에 관여했던 길드원을 몇 명 골라서 꼬리를 잘라버리면 된다.
지금까지 쌓아온 이미지가 있으니, 눈물을 흘리며 대국민 사과를 하면 어느 정도 상쇄할 수 있을 거다.
적어도 나락으로 떨어지진 않는다.
"절대 이대로 쓰러지지 않아…."
이제 막 양지로 올라오기 시작했는데, 끝낼 수는 없다.
박민규는 이후 계획을 생각하며 바이어 길드 건물에 뛰어들어갔다.
*
또각또각.
어두운 건물 안에 구두소리가 울려 퍼졌다.
"응? 뭐야. 대장이 아가씨 불렀어?"
"아가씨를 왜 불…"
안쪽에서 작업을 진행 중이던 몇십 명의 남자들은 작업장에 들어온 의문의 금발 여성을 보고 의문을 표했다.
"아가씨. 길을 잘못 들었나 봐. 차라도 한 잔 줄까?"
"물론 마시면 못 일어나는 차지만."
푸하하하하!
남자들은 작업을 이어가며 성희롱을 이어갔다.
그리고 구석에서 기다리던 거대한 덩치의 남자가 스칼렛에게 다가갔다.
"마력도 안 느껴지는데... 진짜 아가씨인 것 같습니다."
"덕구야. 제압해서 약까지 먹여놔라. 일 끝나고 따먹으러 갈 테니까."
"예. 알겠습니다."
"... 제 얼굴도 모르는 놈들이 마약을 팔고 있다니, 이 나라의 치안이 심히 걱정되네요."
쯧.
고개를 저은 스칼렛은 은밀하게 마력을 움직였다.
저급 마약상들이 파악할 수 있는 마력이 아니었다.
"뭐라는 거야 이 미친년이...!"
덕구라고 불린 사내가 주먹을 들어 올림과 동시에, 작업장에 있는 사람들의 그림자에서 검은 손아귀가 흐물거리며 빠져나왔다.
검은 손아귀들은 물고기를 물어 채는 독수리처럼, 남자들의 목을 동시에 꿰뚫었다.
콰드득- 퓨숙-
순식간에 피바다가 된 작업장에서, 스칼렛이 판단하기에 높아 보이는 사람 몇 명만이 살아남았다.
"으. 아… 으아…."
사장님. 이라고 불린 사내는 선 채로 피를 뿜고 있는 덕구를 보며 입을 벌렸다.
순식간에 몇 십명의 사람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으니 당황할만 하다.
스칼렛은 익숙한 듯 마력을 갈무리하며 사장에게 질문했다.
"정하세요. 경찰에 자수하든지, 아니면…"
"자수, 자수하겠습니다. 제발 목숨만은 살려주십시오…"
쿵- 쿵-
어떻게든 살기 위해 바닥에 머리를 찍는 사내의 이마에서 피가 줄줄 흘렀지만, 스칼렛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일을 하다보면 이 정도는 익숙한 광경이었기 때문이다.
"바이어 길드… 예전에 같이 일한 적 있죠?"
"네, 네. 하지만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냥 약간 거래를 했을 뿐입니다. 정말입니다…"
"그건 궁금하지 않아요. 지금 당장 바이어 길드와 거래한 모든 자료를 가지고 가서 경찰에 자수하세요. 최대한 빨리."
"알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스칼렛은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며 건물 밖으로 나왔다.
"후우. 나 같은 인재가 어디 있어."
돈도 안주는 사장을 위해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어디 있나.
일 하나를 마친 스칼렛은 가뿐한 마음으로 이호연에게 돌아갔다.
10분 후, 근처 지구대에 마약 사범들이 단체로 자수했다는 속보가 인터넷을 가득 채웠다.
철혈 병원의 병실.
나는 스칼렛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진짜로 그게 맞아?"
"예. 제가 잘 편집하면 됩니다. 오히려 호연님이 먼저 얘기하는 게 의심당할 확률이 더 높아집니다."
박민규와 룸에 갔던 영상.
당연히 내가 먼저 언론에 고백하려고 했는데 스칼렛이 반대했다.
"... 그런가?"
"차라리 박민규가 데려갔던 룸의 실장이 직접 고발하게 만들면 됩니다. 박민규가 단골이었던 것 같으니, 다른 손님들을 폭로하면서 호연님은 유일하게 청렴했다... 이런 식으로 스토리를 짜면 더 좋겠네요."
"그래도 살짝 불안해서 그래. 나도 똑같은 놈으로 오해받으면 어떡해."
터지기 전에 내가 먼저 결백을 주장하면 적어도 그럴 일은 없을 테니까.
"비슷한 놈 맞지 않나요?"
"...."
스칼렛이랑 친해지니까 내 일을 많이 도와줘서 좋긴 한데, 가끔 이렇게 비수를 찔러온다.
뭐, 장난은 괜찮은데 솔직히 난 아직도 불안하다.
내 불안한 표정을 읽었는지, 스칼렛이 한숨을 푹 쉬었다.
"하아, 지금 호연님은 큰 착각을 하고 계십니다."
"착각?"
"사람들은 한 번 박힌 인식이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겁니다. 좋은 이미지가 박혔으면 뭘 해도 최대한 긍정적으로 보이고, 나쁜 이미지가 박혔으면 뭘 해도 부정적으로 보입니다."
"음. 그렇긴 하지."
하긴 지금까지 이미지 작업을 열심히 해왔으니, 이제 보답을 받을 때도 됐나?
내가 나 자신을 너무 과소평가 하는 것 같기도 하다.
나 이호연.
테러도 막고, 아카데미 수석에, 천재 마법사인데.
뭐 못 하는 게 없는 사람이잖아.
"그리고...."
"응."
또 중요한 게 있나?
나는 스칼렛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호연님이 그냥 울면서 사과하면 설령 호스트 바 에이스 출신이었어도 다들 봐줄 겁니다. 그 정도 얼굴이 있잖아요. 호연 님은 얼굴을 여자 꼬시는 데만 써서 문제에요. 언론전에 있어서 잘생긴 얼굴은 엄청난 축복인데."
"... 알았어. 네 의견대로 하자."
슬쩍 옆에 있던 거울을 바라봤다.
내가 봐도 잘생긴 얼굴.
사과하면 '아니야. 나도 미안했어.'가 자동으로 나올 얼굴이다.
...논리를 이길 수가 없네.
나는 박민규가 발표한 사과 인터뷰를 보며 입을 열었다.
- 이 사건으로 인해 피해를 보신 여러분들과 물의를 일으킨....
"근데 사과를 잘하긴 한다."
물론 내게 있는 증거들을 생각하면 아무 의미 없는 것들이긴 하지만, 저 사과만 봐서는 나도 믿을 것 같다.
"추한 발악일 뿐입니다. 저희에게 무기가 너무 많아요."
"음. 스칼렛, 다은이한테 의견을 물어보는 건 어때?"
"다은 양이요?"
"응. 어차피 우리가 영상을 퍼트리는 순간 박민규는 사회적으로 끝이잖아. 다은이 의사도 중요한 것 같은데."
애초에 박민규를 이렇게 몰아붙이는 이유가 남다은인데, 복수의 시작은 같이하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
"... 일리가 있네요. 제가 물어보겠습니다."
*
"안 돼요."
"네?"
남다은의 의사를 물으러 간 스칼렛은, 의외의 대답에 눈을 크게 떴다.
스칼렛이 남다은을 만난 이후로 이렇게 단호하게 자신의 의사를 표현한 건 처음이기 때문이다.
"죄송합니다...."
남다은도 순간 튀어나온 단답에 당황한 듯 사과해왔다.
"음, 괜찮아요. 다은 양. 호연님이 최대한 남다은 양에게 맞추라고 했으니까요. 뭐든 편하게 말해보세요."
남다은은 이 말을 해도 될까 고민했다.
하지만 처음 복수를 생각한 때부터 생각하던 것이었기에, 결국 입을 열었다.
"민규 아저씨와 대화.... 대화를 해보고 싶어요. 왜 그랬는지, 어째서 저랑 다희한테 그런 짓을 했는지.... 그걸 알아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아요."
"...."
박민규와 대화를 한다.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귀찮아질 뿐이다.
특히나 스칼렛이 귀찮아진다.
원래는 박민규를 천천히 협박하며 궁지에 몰아붙이려고 했다.
그리고나서 박민규를 남다은이 보는 곳에서 직접 처리한다. 혹은 남다은에게 처리를 맡긴다.
이게 이호연과 짠 새로운 계획이었다.
궁지에 몰린 사람은 마음이 급해진다.
침착한 판단이 불가능해지며 쉽게 흥분한다.
그렇기에 더욱 컨트롤하기 쉽고, 일이 편해진다.
하지만 남다은이 원하는 걸 들어주려면 일이 복잡해진다.
이미 모든 정보를 공개해 나락으로 떨어진 후라면 제대로 된 대화가 진행될 리가 없다.
어차피 박민규의 인생은 끝났으니까.
그렇다고 정보를 공개하기 전에 남다은과 대화를 시키자니, 아직 박민규가 대비할 여력이 남아있게 된다.
스칼렛의 입장에서 굉장히 귀찮아지는 것이다.
"... 안될까요?"
"아니요. 호연 님에게 전달하겠습니다."
하아.
스칼렛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마음 같아선 그냥 박민규를 죽여버리고 싶지만, 눈 앞에 서있는 남다은의 떨리는 눈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너무 마음이 약해졌어.'
스칼렛은 요즘 따라 자신이 너무 순해진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제대로 된 상태의 박민규와 대화. 자리를 마련해보겠습니다."
"... 감사합니다."
꾸벅.
남다은은 감사의 마음을 담아 고개를 숙였다.
자신이 얼마나 힘들고 귀찮은 부탁을 했는 지 알기 때문이다.
고개를 숙인 남다은의 뒤통수를 보며, 스칼렛은 입을 열었다.
"감사는 호연 님한테 하세요. 저는 그냥 시키는 대로 하는 거예요."
"호연이.... 네. 꼭 전할게요."
남다은은 진심으로 이호연에게 감사를 느꼈다.
이 모든 일이 이호연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스칼렛이 사라지고, 혼자 남은 남다은은 주먹을 꽉 쥐었다.
"... 민규 아저씨."
박민규를 용서하고자 하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처음 만났을 때의 따뜻함을 아직 기억하기에.
그 인자한 미소가 아직 가슴에 남아있기에.
남다은은 박민규를 확실하게 끊어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