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그럭- 절그럭-
철커덕-
판데믹의 본거지.
특수 마력 처리가 된 쇠사슬과 여러 겹의 마법진이 설치되어 있었고, 그 중심에서 켄타우로스가 속박당해 있었다.
딱히 저항을 하진 않았지만, 워낙 켄타우로스의 힘이 강대해 이렇게 하지 않으면 위험했기 때문이다.
"사도님, 지옥의 불길을 인간 세상에 퍼트려 주시옵소서...."
마에스트로는 켄타우로스의 앞에서 손을 모은 채 기도했다.
- 멍청한 인간들은 말이 통하질 않는구나... F급 용병패도 못 알아보다니.
그리고 그 뒤에 서 있던 레베카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미친 놈들.'
억지로 마력을 숨기고 약한 척하는 저 켄타우로스나, 다 알고 있으면서도 연기를 하는 마에스트로나.
둘 다 미친 놈인 건 확실했다.
"인간 학살, 혹은 인간 노예. 어떤 것이든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 관심 없으니 꺼져라.
"사도님, 소환 계약에 응하셨다면 인간 세상에서 원하는 게 있다는 말씀이지않습니까. 괜찮으니 말해주시옵소서."
- 하아, 난 계약 같은 거 한 적도 없고. 왜 내가 여기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마에스트로의 계속되는 구애에도 켄타우로스는 마음을 바꾸지않았다.
결국 마에스트로도 방법을 바꿔야만 했다.
이렇게 설득하는 게 베스트였지만, 아까운 마력을 쓸 수 밖에 없다.
"... 레베카. 안 되겠다."
"예. 마에스트로님."
마에스트로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마자 레베카는 마력을 끌어올렸다.
지이잉-
곧 켄타우로스의 주변으로 룬의 결계가 펼쳐졌다.
"하아, 짐승 새끼들은 말을 못 알아쳐먹으니 짐승이지."
- 마음대로 지껄여라. 어차피 난... 크흡?!
룬의 결계.
그것이 최고이자 최악이자 최흉의 결계라고 불린 이유는 단순히 쉽게 부서지지 않기 때문이 아니었다.
룬의 일족은 일평생 룬의 결계만을 갈고닦는다.
거기에 룬의 일족에서 흐르는 혈통의 힘까지 합해지면, 보통 결계와는 완전히 다른 마법이 완성된다.
그렇기에 그들의 결계는 다르다.
결계 내부를 컨트롤 할 수 있는 능력.
그 능력은 결계가 좁을수록 강해진다.
- 크흡. 크으읍....
"사도님. 제 눈을 보시죠."
결계 내부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린 공기.
거기에 강한 압력과 충격까지 주고 있지만, 켄타우로스는 아직도 멀쩡했다.
"흠, 레베카. 결계는 이대로 유지하도록 해요. 아무래도 사도님을 설득하는 데에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으니까."
"예. 마에스트로님. 저는 가보겠습니다."
- 끄으윽....
"자, 사도님. 다시 한번 말하겠습...."
철컥-
마에스트로가 켄타우로스에게 달라붙는 모습을 보며 레베카는 문을 닫고 본거지에서 빠져나왔다.
"하아, 하아... 마에스트로의 세뇌를 막는 데에는 마나가 너무 많이 들어. 하여튼 미친놈이야."
룬의 결계로 자신을 덮고 있기에 마에스트로의 세뇌도 막을 수 있는 레베카지만, 그런 그녀도 오래 눈을 마주치면 연기가 들킬 수 있다.
그만큼 위험한 게 저 놈의 능력이다.
저 켄타우로스도 반항하긴 하지만 다른 간부들처럼 곧 함락되겠지.
"고생하셨습니다. 레베카 님."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레베카의 심복이 다가왔다.
"응. 이호연의 상황은 어때?"
"병원의 자료를 확인해본 결과 곧 퇴원할 것으로 보입니다."
"오호... 알았어."
레베카는 일족의 생존자를 곧 만난다는 생각에 기쁨의 미소를 흘렸다.
*
남다희는 띵까띵까 노느라 이 쪽에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고, 남다은은 아직도 살짝 붉어진 얼굴로 다희와 놀아주고 있었다.
"지옥 출신은 또 뭐야. 저게 지옥에 있는 몬스터라고?"
"아니, 그건 몰라. 근데 저기 목에 걸린 용병패 보여?"
"용병패?"
나는 눈이 빠져라 TV화면을 바라봤다.
전문가들이 나와서 어쩌고저쩌고 설명하느라 영상이 멈춰있었기에 자세히 볼 수 있었다.
"F... 라고 쓰여 있는 것 같네요."
"저 목걸이? 저게 지옥이랑 무슨 상관인데?"
디자인이 이상하긴 하지만, 별로 특이한 건 없는 목걸이였다.
원래 몬스터들은 괴상한 디자인을 좋아하니까.
"목걸이가 아니라 지옥에서 사용하는 용병패야."
"아니, 잠시만. F라고 쓰여 있잖아. 근데 그걸 왜 지옥에서 써."
영어는 인간세상의 언어잖아.
지옥에서 영어를 왜 쓰는데.
"너야말로 무슨 소리야? 용병패는 당연히 영어로 써야지."
"...."
지적하고 싶은 부분이 많지만, 그냥 넘어갔다.
애초에 나도 서큐버스랑 대화하고 있는데, 지옥에서 영어를 쓰는 게 뭐가 대수일까.
"그래서 저 켄타우로스가 누군데? 유명한 놈이야?"
저놈이 왜 여기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옥의 유명한 네임드라면 위험한 거 아닌가?
"아니. F는 최하위잖아. 용병 중에 제일 쓰레기지. 던전에서 쓰레기를 청소하는 애들이야."
"너 영상 못 봤냐? 사람이 쓰레기처럼 날아가는데?"
청소부가 저 정도면 잡일꾼이라도 오는 날엔 지구 멸망하겠어 아주.
"흐음... 그러게. 저 정도의 힘이 F급일 리가 없는데."
다행히 지옥에서도 저 정도면 강한 것 같다.
"일단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야. 그래서 저 켄타우로스가 왜 이쪽 세상에서 저러고 있는지, 짐작 가는 부분 있어?"
"몰랑. 아마 쟤도 나처럼 계약 같은 걸 하고 왔겠지."
릴리아나는 오랜만에 보는 지옥 동료가 반가운지 TV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얘는 진짜 중요할 때 쓸모가 없네.
"계약, 지옥, 몬스터, 도시 습격...."
나는 천천히 원작을 되짚어보며 저 켄타우로스로 유추할 수 있는 게 뭘까 고민했다.
처음 보는 몬스터긴 하지만, 원작에 조금이라도 힌트가 있을수 있으니까.
"지성이 있는 몬스터가 저런 식으로 치고빠지며 테러를 하면 확실히 대처하기 힘들겠네요."
"그렇지.... 잠시만, 테러?"
"네. 왜 그러세요?"
스칼렛이 우연히 던진 한 마디.
테러.
테러라고 하면 떠오르는 집단이 있었다.
마인 집단 판데믹.
그리고 원작에서 판데믹과 싸우는 스토리가 하나씩 머리에 떠올랐다.
"... 사도."
판데믹에게는 사도라는 개념이 있다.
마왕의 수하라는 컨셉인데, 그때부터 판데믹의 공격이 거세지고 원래 세상에 없는 강한 몬스터들이 등장한다.
무너진 파워 밸런스를 맞추기 위해 억지로 나오는 설정이라고 욕을 많이 했었는데... 그건 그렇다치고.
사도 중에 저런 켄타우로스는 본 적도 없다.
원작에서 나오는 첫 사도는 저런 괴물이 아니라 동그랗고 찐득한 슬라임이니까.
'어디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뒤틀렸어.'
지성이 있는 켄타우로스.
즉 말이 통한다는 뜻이다.
"한 번이라도 저 켄타우로스랑 말을 해보고 싶은데, 방법이 없을까?"
난 우리 중에서도 두뇌파인 스칼렛을 보며 말했다.
말이 통하는 놈이니까 지옥이나 마왕 혹은 릴리아나에 대한 모르던 정보를 알 수도 있다.
"음, 안 그래도 저희 아이리스 길드에서도 저 켄타우로스를 제압할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도시 한복판에서 홀연히 사라졌지만, 아직 프랑스 쪽에 위치하고 있는 것 같아서요."
"맞다. 아이리스 길드도 프랑스에 있구나."
엘리스도 힘들겠네.
그 쪽으로도 파고들어 볼까.
아이리스 길드와 힘을 합쳐서 켄타우로스를 잡는다던가...
'생각해보니 저걸 내가 어떻게 제압해.'
딱봐도 존나 강해보인다.
전투 감각이 있더라도 아예 다른 체급이랑은 상대하기 힘들다.
다른 방법이 있으면 모를까.
"예. 저도 이제 매일같이 여기 있기는 힘들지도 모릅니다."
"오케이. 알았어."
사실 여기 매일 있던 지금까지가 비정상이다.
스칼렛도 자기 직업이 있는 사람인데.
"지옥... 지옥...."
릴리아나는 우리 대화를 신경도 안 쓰고 아련한 눈으로 TV를 바라보고 있었다.
★ 히로인 상태창
[릴리아나]
- [ 호감도 : 97 ] ( +1.6 )
- [ 성욕 : 76 ]
- [ 식욕 : 42 ]
- [ 피로도 : 30 ]
현재 상태 : 엄마는 뭐하고 있을까....
"릴리아나."
"응, 응?"
"저 켄타우로스하고 대화하고 싶어?"
"... 딱히 그런 건 아닌데, 저 말인간을 볼 때마다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평소답지 않게 왜 이럴까.
"평소처럼 해. 그냥 징징대는 게 너한테 맞잖아."
"뭐래, 미쳤나 봐. 나같이 조신한 서큐버스가 어딨다고."
지옥.
별 생각 없던 곳인데 계속 스토리에서 등장하고 있었다.
판데믹, 그리고 릴리아나.
어쩌면 진짜 중요할지도 모르겠다.
*
"... 여보 이게 뭐야."
"네? 갑자기 왜요?"
병원으로 돌아와 언제나처럼 정기검진을 받는데, 내 몸에 손을 얹고 있던 백아영의 목소리가 이상하게 떨렸다.
"회로가... 아니 몸 전체가 건강해졌어. 건강해졌다기보단... 건강해지고 있는데...?"
"아...."
자연 치유력 대폭 증가를 보상으로 받았는데 그걸 보고 저러는 모양이다.
근데 저렇게 놀랄 정도인가?
"최근에 스킬을 하나 얻긴 했어요. 근데 그 정도예요?"
"너무 깔끔하고 완벽하게 자연치유되고 있어. 이 정도라면 마나 회로의 효율이 다치기 전보다 더 좋아질 거야."
오, 저렇게 놀라는 걸 보면 효율이 엄청난가 보네.
"그럼 퇴원도 좀 앞당겨질까요?"
나는 퇴원의 기대를 안고 백아영에게 물었다.
"내일... 아니, 내일 모래면 퇴원할 수 있겠어."
너무 좋은데?
안 그래도 할 일이 너무 많아서 계속 병원에 있는 건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다.
다만 백아영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아무래도 퇴원하면 만날 시간이 줄어드니까 그렇겠지.
괜히 또 미안해지네.
"그래도... 건강검진은 자주 와야겠죠?"
백아영은 내 말을 듣고 나와 눈을 마주쳤다.
"응? 아... 응. 그러면 좋지."
"계속 올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 매일 와야 해. 여보."
"알았어요."
꼬옥-
우울한 표정의 백아영을 안아주고 있는데, 내 품에 안긴 백아영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 퇴원할 때가 됐으니 말해줄 게 있어."
"음. 뭔데요?"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분위기를 잡는 거야.
나는 살짝 긴장한 채 다음 말을 기다렸다.
"몸 상태를 걱정해서 말 하지 않았는데... 테러 때 네가 기절하고 나에게 접근한 사람이 있었어."
"... 네."
처음 듣는 소리다.
백아영이 내 상태를 걱정해서 말을 하지 않았다고하니, 어쩌면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 사람은 너한테 이 말을 전해달라고 했어."
후우.
백아영은 한 번 한숨을 쉬고 그때를 떠올리는 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과거의 일족에서 찾아왔으니, 회복하면 다시 찾아가겠다."
"... 과거의 일족이요?"
"당장은 말해주지 않아도 돼. 너도 숨기고 싶은 게 있을 테니까. 하지만... 언젠간 꼭 얘기해줘. 나도 너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
백아영은 내 손을 꼭 잡은 채 절실한 눈빛을 보내왔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어떤 비밀이 있든, 다 안고 가겠다는 눈빛이었다.
물론 그런 시선을 받는 나는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아니, 과거의 일족은 또 뭔데.'
진짜 머리아프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