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2화 (192/648)

"...."

"아, 이거... 드세요."

루미, 아니 루시는 직접 사 온 음료수를 내밀었다.

음료수를 받으며 루시의 얼굴을 관찰했다.

한 번 루시라고 생각하고 나니 머리로는 이해가 가지만, 아무리 봐도 루시로 보이진 않았다.

가슴의 크기부터 눈매, 콧대, 입술, 귓불까지 모든 부분이 똑같았다.

'게임이라고 해도 이렇게 똑같을 수가 있구나.'

[기억보완능력]을 가지고 있는 내가 봐도 속을 정도니 말 다했지.

물론 게임 세계니까 일어날 수 있는 일이겠지만, 지금 내게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지금 중요한 건 왜 루시가 이러고 있는지, 그리고 이 기회를 어떻게 활용해야 할 지다.

나는 천천히 루시를 훑었다.

어쩌면 애매하게 멈춰버린 루시의 공략을 진행할 기회가 될 수도 있으니까.

슬쩍 시계를 보자 11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병실은 누가 올지도 모르고 여러모로 불안하니까, 밖으로 나가는 게 좋겠지.

"음... 슬슬 밥 때인데 우리 저녁 대신 점심이나 먹을까?"

"네, 네? 어... 좋긴 한데, 그 루시 얘기를...."

"밥 먹으면서 해도 되잖아. 어차피 우리 둘이 할 얘기가 루시 얘기 빼고 뭐가 있어."

"... 으응. 알겠어요."

루시는 내 말에 흥미가 생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루시 얘기만 하는 건 아니지만, 루미 주도하에 최소 2시간은 루시 칭찬을 하니까 거짓말은 아니다.

"그럼 나가자."

"네엣."

나는 바로 외출증을 끊고 병원 밖으로 빠져나왔다.

철혈 병원이 워낙 크고 유동인구가 많다보니 주변에 식사할만한 식당도 많았다.

그중에서도 룸이 나뉘어져있어 조용한 식당을 찾기 위해 거리를 좀 걸었다.

"저기 저번에 루시랑 갔던 카페네."

"기억나요. 맛있었는데...."

걸음이 느린 루시와 발걸음을 맞추며 거리를 걷다보니 조용한 분위기의 식당을 찾을 수 있었다.

식당에 들어온 나는 루시를 데리고 조용한 룸으로 들어갔다.

주문한 식사가 나온 뒤 우리는 식사를 하며 입을 열었다.

"음, 진짜 맛있다. 그렇지?"

"네. 정말이네요...."

옴뇸뇸.

천천히 스프를 떠먹는 루시를 관찰했다.

"루시 몸이 괜찮아지면 다음에 같이 오자."

"... 그럴까요?"

"응. 항상 그랬잖아. 좋은 곳에 오면 루시 생각이 난다고."

"아하하...."

루시는 자기 이름이 나오자 멋쩍은 듯 숟가락을 입에 물었다.

식사 분위기는 당연히 좋았다. 

사실 안 좋을 이유가 없긴 하지.

루시와 내 사이는 쭉 좋았으니까.

그래서 더 문제다.

사이가 나빠진 것도 아닌데 왜 루미처럼 꾸미고 왔는지.

그걸 알 수가 없다.

상태창이 없으니 루시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떤 고민때문에 이런 방식을 취했는지 도통 감이 안 온다.

'진짜 내 능력이 부족한 걸지도 모르겠어.'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상태창이 갑자기 없어져 버리면 하렘이고 뭐고 유지할 수 있을까 의문이다.

잘 생각하자.

이건 시련이자 기회다.

루시가 왜 루미의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난 이유.

자신의 입으로 꺼낼 리는 없으니, 내 능력으로 유도해야 한다.

"루시가 좋아할 맛이다. 이거."

"... 네. 맞아요."

식사 후에 나온 달달한 디저트를 먹으며 우리는 대화를 이어갔다.

의도적으로 루시의 얘기를 많이 꺼냈는데,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루시의 이름이 나올 때마다 또? 라는 반응이 살짝씩 엿보였으니까.

만약 루미였다면 저런 반응은 보이지 않는다.

이 정도면 평소에도 루시 얘기를 많이 한다는 생각은 충분히 심어줬겠지.

"이 아이스크림 어릴 때 많이 먹던 맛인데."

"맞아요. 저도 어릴 때 좋아했어요."

"... 루미는 어릴 때 어땠어? 항상 루시 덕분에 지금의 루미가 있다고 했잖아."

당연히 루미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없다.

원작 게임을 플레이한 나는 대충 둘의 배경을 알고 있기에 던진 말이다.

"아... 음, 맞아요. 루시가... 많이 노력해줬어요."

"어떤 노력?"

"절 위해 아르바이트도 하고, 괴롭히는 친구들한테서 지켜주기도 하고...."

루미, 아니 루시의 얼굴이 조금씩 빨개진다.

자기 입으로 자기 미담을 말하고 있으니 창피하겠지.

더 말하기 힘들어 하길래 루시의 말을 끊고 들어갔다. 

"그럼 루미는 루시를 엄청 믿겠네?"

"네. 맞아요."

"반대로 루시도 루미를 그렇게 생각하겠지?"

"당연하죠. 무조건. 무조건 신뢰에요."

끄덕끄덕.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는 루시를 보며 웃음이 나올 뻔했다.

방금은 좀 티가 났거든.

나는 평정을 유지하며 아쉬운 표정을 연기했다.

"근데 왜 잘 안 풀렸을까...? 역시 내가 문제인가?"

"네?"

"우리 셋이 같이 만나는 거 말이야. 너랑 루시는 일심동체라서 무조건 설득할 수 있다고 했잖아. 절대 네 말을 거절할 리가 없다고. 근데도 잘 안 풀린 걸 보면 역시 내가 문제겠지?"

내 말을 듣자마자, 루시의 동공이 떨리기 시작했다.

"어, 그런 건. 그런 건 아닐 거에요. 호연 씨 문제일리는 없어요. 아마 제가...."

"루미 네 문제라고?"

"아니, 어... 루시가... 문제일 거에요."

반응이 귀엽네.

루시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다.

하긴 그런 걸 유도한 질문이니까 그렇게 반응해줘야지.

"루시? 루시 문제는 절대 없다고 하지 않았어? 뭐가 문제인데?"

"어... 음, 그게...."

당황하는 루시를 보며 생각했다.

새삼스럽지만 루시의 연기는 거의 완벽했다.

겉으로 보기에 똑같이 생겼는데 당연하지 않냐 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외모는 그렇다 쳐도 말투는 바꾸기 힘들다.

그런데 식사 내내 대화를 했는데도 말투가 그대로였다.

루시는 지금보다 목소리 톤이 높고 말수가 많으며 내게 반말을 사용한다.

그런데 정반대인 루미의 말투로 계속 대화를 이어갔는데도 그 과정에서 단 한 번도 실수하지 않았다.

아무리 서로 잘 아는 쌍둥이라고 해도, 이런 것까지 가능할까?

사람은 각자 자신의 말버릇이 있기 마련이다.

그걸 숨기기는 정말 쉽지 않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어쩌면 루시의 원래 성격이 이런 느낌일지도 모른다.

쌍둥이들의 과거가 원작에서 자세히 나오진 않는다.

하지만 어릴 적부터 힘들었고, 그 과정에서 루시가 언니로서 루미를 많이 챙긴다는 건 알 수 있다.

그 과정에서 루시의 성격에 변화가 생긴 건 아닐까?

일단 이 생각을 가슴 한편에 넣어두고, 나는 미안한 표정을 연기했다.

"미안해. 너희 탓을 하고 싶은 건 아니었어. 그렇게 들었다면 미안."

"아니, 아니에요. 절대 그럴 일 없어요!"

루시는 머리와 손을 휘휘 저었다.

뭐, 만족스럽진 않지만 그래도 알아낸 점은 있다.

루시가 나와 루미를 싫어하는 건 아니란 거다.

좋아한다.

여전히 좋아하지만, 무슨 이유가 있어서 저러고 있는 거다.

그 이유가 뭘까 알아내려면, 강한 처방이 필요할 것 같다.

"그럼 이제 갈까?"

"네. 병원까지 같이 가요."

"아니, 모텔로 가야지."

"... 네?"

"약속했잖아. 저녁 먹고 모텔까지. 혹시 잊어버린 거야?"

"그, 그건 아닌데요... 호연 씨 몸이 걱정돼서요. 아무리 그래도 환자인데...."

"에이, 나야 팔팔하지."

내가 건강함을 과시하며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자 루시의 표정에 당혹이 깃들었다.

"어, 그래도... 안정을 취하는 게...?"

"루미, 이번에는 무조건 약속 지킨다고 그랬잖아. 오늘도 약속 안 지키는 거야?"

약속 따위 한 적 없지만, 일단 몰아붙였다.

거기에 약간 실망한 표정까지 덧붙였다.

루미를 좋아하는 루시가 절대 거절할 수 없도록.

"...... 갈게요."

*

두근- 두근-

루시는 처음 겪는 경험에 머리가 구름으로 가득 찬 것 같았다.

좁다면 좁고 넓다면 넓은 방.

커다란 TV가 놓여져있고 수건이 곱게 개어져있었다.

고급진 시설이라 그런지 클린 마법진도 설치되어 있는 모텔.

남자와 단둘이 이런 곳을 오는 경험은 처음이었으니까.

심지어 상대 남자는 자신을 동생인 루미라고 생각하고 있다.

쏴아아-

이호연이 샤워를 하는 동안, 루시는 침대에 걸터앉아 머리를 잡고 고민했다.

'역시, 사실대로 말해야 해. 근데... 지금 말해도 될까? 어쩌지?'

사실 너무 늦었다.

분위기에 휩쓸려 여기까지 온 자신의 잘못도 있겠지만 대화의 흐름이 이미 거절할 수 있는 흐름이 아니었다.

이호연이 루미와 무슨 약속을 했는지도 모르고, 제안을 받자마자 '사실 나 루시였어!'하고 고백하는 것도 말이 안 되니까.

루시는 루미와 이호연이 그런 관계인 걸 알았는데도 이런 걸 예상 못 한 자신을 자책했다.

물론 모든 건 이호연의 계획이었지만.

루시가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을 계속하던 그때, 샤워를 마친 이호연이 방으로 돌아왔다.

"루미, 준비 다 했구나?"

수건으로 중요부위만 가린 이호연은 침대에 앉아있는 루시를 바라봤다.

루시는 모텔에서 제공하는 가운을 입은 채 몸을 돌돌 감싸고 있었다.

그럼에도 튀어나온 가슴은 자신의 존재를 과시했다.

'역시 여기선 티가 나네.'

루시를 바라보는 이호연은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어색하게 방의 구조를 살피는 건 누가 봐도 모텔에 처음 온 여자였다.

"네, 네. 클린 마법이 있어서...."

루시는 수건으로 중요부위만 가린 자신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눈을 슬쩍슬쩍 흘기며 조심스럽게 이호연을 바라봤다.

"응응. 이리 와."

샤워하면서 계획을 세운 이호연은 루시의 손을 잡고 자신의 가슴팍으로 루시의 몸을 잡아당겼다.

포옥-

가운이 사이에 있었지만, 부드러운 살결이 느껴지는 건 달라지지 않았다.

"아. 아...."

그리고 천천히 루시의 몸에 손을 가져갔다.

너무 빠른 진도에 얼굴이 불처럼 뜨거워진 루시는 긴장감에 주먹을 꽉 쥐었다.

수건으로 중요 부위만 가리고 있는 이호연의 상체가 다 보였기 때문이다.

경험이 없는 루시에겐 너무 심한 자극이었다.

이호연의 손이 루시의 가슴과 배에 닿을때마다 온몸에 전기가 통하는 것 같은 느낌을 느꼈다.

참지 못한 루시는 이호연의 팔을 꽉 잡았다.

"저기, 호연 씨. 주, 준비라던가. 좀... 그런 게 필요하지 않을까요? 자, 잠시...."

"아, 응. 알았어."

루시의 긴장감은 옆에 있는 이호연에게까지 전달되었다.

후우- 후우- 하며 심호흡을 하는 게 누가봐도  뻔했으니까.

잠시 손을 뗀 이호연은 루시를 보며 고민했다.

'이제 어떻게 나올까?'

루시의 입장에서도 이제 와서 자신의 정체를 고백하기엔 많이 늦은 상황이다.

이대로 섹스를 하기에도 애매하고, 거절하기도 애매하단 뜻이다.

유일한 방법은 내가 직접 그만두고 나가는 건데... 그럴 필요가 없었다.

루시에게 부족한 건 호감도를 100까지 올릴 마지막 한 방이다.

어쩌면 섹스가 부족한 한 방이 될 수도 있을 거다.

그렇기에 섹스를 하는 건 맞다. 

판이 이렇게 깔리기도 했고, 피할 이유는 없다.

'그래도 루시인걸 밝히고 하는 게 맞지.'

루미인 상태로 섹스를 하는 건 루시를 공략하는 데에 있어서 아무 의미가 없다.

결국 사실을 밝히긴 해야 하는데, 이왕이면 극적인 상황을 연출하는 게 좋겠지.

이호연은 슬쩍 눈을 돌렸다. 

루시는 아직 심호흡을 하며 눈을 감고 있었다.

"루미, 언제까지 준비할 거야?"

"어, 아. 그...."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깜짝 놀라 눈을 뜬 루시는 초식동물처럼 떨고 있었다.

"준비가 다 됐으면 평소처럼 해줄래?"

본래 루미와 섹스였다면 펠라부터 시작하는 게 제대로 된 준비지만, 이호연도 긴장한 루시에게 펠라를 시킬 생각은 없었다.

대신 다른 걸 시킬 생각이다.

"평소처럼요...?"

"응. 자지 박아달라고 조르기 해줘."

"그, 아. 네...?"

내 말을 들은 루시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지기 시작했다.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