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1화 (191/648)

"그러니까… 우리 둘이 이호연 하나랑 사귀는 거야?

"으응… 엣.. 치!"

사실 루시는 루미와 함께라면 뭐든 좋았다.

거기에 이호연까지 있다면, 상상이 가진 않지만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친구 관계여도 재밌었는데 연인이라면 더욱… 좋겠지.

응. 당연히.

하지만 마음 한쪽에 걱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루미의 말이 사실이라면 괜찮다.

자신이 약간의 창피를 감수하기만 하면 되니까.

그럼 모두 원래대로, 아니 그 전보다 좋게 바뀔 수 있다.

문제는 저게 진심이 아닐때다.

'만약… 억지로 저렇게 해주는 거라면 어쩌지?'

혹시 억지는 아닐까.

슬퍼하는 자신을 위해 둘이 입을 맞춰주는 건 아닐까.

이호연과 루미가 착한 사람인 걸 알기에, 루시는 최악의 상황을 생각해야 했다.

만약 자신을 배려하는 행동인 걸 나중에 알게된다면,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 같았다.

"… 루미. 일단 쉬고 있어. 나도 집에 가서 생각해볼게."

"으응. 사랑해 루시."

루미의 저 웃음.

분명 거짓말하는 웃음이 아니었다.

하지만… 루시는 계속 모텔 앞에서 봤던 둘의 모습이 눈앞을 맴돌았다.

자신이 과연 그 사이에 낄 수 있을까.

"나도 사랑해. 스마트 워치 이리 줘. 고쳐서 가져다줄게."

"응응. 알겠어."

루시는 루미의 방을 치워주고, 혼자서도 먹을 수 있도록 밥을 준비해준 뒤 루미의 기숙사를 빠져나왔다.

자신의 방에 돌아온 루시는 침대에 몸을 던졌다.

어떻게 해야 할까.

침대에서 몸을 이리저리 굴리며 고민했지만 결정할 수가 없었다.

그냥 알겠다고 하면 되는데 자존심인지 창피함인지 모를 감정들이 루시를 휘감았다.

가장 큰 문제는, 모텔 앞에서 키스하던 둘의 모습이 계속 눈앞에 아른거리는 것이다.

"둘이 모텔에서…."

남녀가 모텔에 가는 행위.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지만… 관계를 맺으러 갔다고 보는 게 합당하다.

그 둘은 모텔 앞에서 키스까지 나눴으니, 더 확실하다고 할 수 있었다.

"기분 좋을까… 당연히 좋았겠지?"

남자 경험이 없는 루시는 그런 쪽에 흥미가 많았다.

또래 친구들이 야한 얘기를 할때마다 흥미진진하게 듣는 역할이었기 때문이다.

"루미…."

루미와 이호연이 키스하고, 서로의 옷을 벗기는 상상을 할 때마다 이상한 감정이 루시의 가슴을 가득 채웠다.

동시에 자신의 몸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배 안 쪽부터 느껴지는 두근거림에 본능적으로 손을 다리 사이에 집어넣었다.

"흐으…."

이호연과 키스하는 루미. 그리고 자신.

이호연의 밑에 깔려있는 루미. 그리고 자신.

머리 스타일 빼고 모든 게 비슷한 쌍둥이기에 루미에게 자신을 투영하기도 쉬웠다.

"루, 루미… 흐읏. 이호연…."

움찔-

펠릭스에게 납치당한 이후로 처음 해보는 자위.

원래부터 잘 하지 않았기에 어색한 손가락 움직임이었지만, 어색한 자극이 음부에 닿는 것만으로도 루시는 짜릿한 절정을 느꼈다.

"… 이게 뭐 하는 짓이람."

한참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던 루시는 손을 멈추었다.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때에 성욕에 빠져버린 자신이 한심했다.

한숨을 쉬고 침대에서 일어난 루시는 책상에 올려져 있던 루미의 스마트워치를 바라보다가, 문득 옆에 서 있는 거울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확인했다.

날갯죽지까지 흘러내린 푸른색 긴 생머리.

루시의 머리는 꽤 어릴 적부터 푸른색이었다.

너무 똑같이 생긴 둘을 구분하기 위해 루시가 머리를 염색하기로 했으니까.

그 후로는 확실히 둘을 구분지을 수 있었다.

"…."

그때 루시의 머리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사람들은 루시와 루미를 머리색으로 구분한다.

그렇다면, 머리를 자르고 흑발로 염색한 자신을 이호연이 알아볼 수 있을까?

"절대… 못 알아볼 거야."

이호연이라는 사람을 만난 지 약 두 달이 흘렀다.

물론 짧은 시간이라고 해서 그를 향한 마음이 부족하다는 건 아니다.

그저 만나는 횟수 자체가 부족하다는 말이다.

10년 이상 본 친구들도 머리색이 아니면 루시와 루미를 알아볼 수 없다.

그런데 이호연이 알아보기는 정말 힘들 거다.

"직접 물어보면 되잖아."

바보같이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루미처럼 꾸민 뒤, 직접 이호연에게 물어보면 된다.

그러면 둘의 진심을 알 수 있을 테니까.

*

일요일 오전.

루미의 상태를 확인한 뒤, 이호연의 일은 아직 고민 중이라고 대답한 루시는 기숙사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아카데미 상가의 예약한 미용실로 들어갔다.

"손님, 너무 예뻐요."

"가, 감사합니다…."

머리 손질이 끝난 뒤, 루시는 미용실의 거울로 자신의 얼굴을 확인했다.

긴 머리카락은 바닥에 떨어져 있었고, 푸른색의 독특한 머리색은 흑발이 되어 있었다.

'… 루미의 얼굴.'

직접 보는데도 믿기지 않을 정도로 루미의 얼굴이었다.

미용실을 빠져나온 루시는 거리를 걸었다.

어깨를 때리던 머리가 사라져서 어색한 기분이었지만 곧 익숙해지겠지.

병원으로 가는 길.

아카데미 주변 상가에는 빅토리아 아카데미의 생도들이 많이 돌아다녔다.

그때 루시가 걸어가는 길 저편에서 루시의 친구들이 걸어오기 시작했다.

"어! 얘들…."

이게 아니지.

지금 자신은 루시가 아니라 루미였다.

루시는 고개를 휘휘 저은 후에 목청을 가다듬었다.

목소리도 비슷한 쌍둥이였기에 조금만 신경 쓰면 루미의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그니까~ 저쪽에… 응? 저기 루미아니야?"

"어, 루미? 어디 가는 길?"

마침 저쪽에서 먼저 루시를 알아봤기에, 루시도 입을 열었다.

"크흠… 아, 안녕하세요."

꾸벅.

루시는 루미처럼 고개를 숙이며 다소곳이 인사했다.

"루시는 어디있고 혼자야?"

"루, 루시는 기숙사에 있어요. 저는 장을 보러…."

루시는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며 조금씩 감을 잡았다.

그리고 완벽해졌다고 생각했을 때 즈음 대화를 끊었다.

"저, 저는 이제 가볼게요. 시간이 늦어서…."

"아하. 알겠어. 다음에 보자~."

"네. 안녕히 가세요."

꾸벅.

고개를 숙인 루시는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자신을 몇 년이나 봐온 친구들인데도 알아보지 못했다.

그러니 이호연도 알아보지 못 할 거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두근거리는 이 심장이지만, 루시는 그걸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루시는 열려있는 공방을 찾아 루미의 스마트워치를 맡긴 뒤, 병원으로 향했다.

*

일요일 오전.

어김없이 스마트 워치를 보며 여론을 확인하고 있는데, 뜬금없이 눈앞에 시스템 창이 나타났다.

[서브 퀘스트가 전송되었습니다!]

"응?"

갑자기 퀘스트라니?

오랜만에 나오기도 했고, 너무 뜬금없잖아.

----------------------

[하렘을 위한 험난한 길]

하렘을 위해선 히로인들을 완벽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히로인 상태창에만 의지하진 않았나요?

한 번쯤은 자신의 힘으로 풀어나가는 것도 큰 성장의 발판이 될거에요!

 - 목표 : ???

 - 보상 : 신체의 자연치유력 대폭 증가

 - 제한 : 24시간 동안 히로인 상태창 봉인

----------------------

"… 이게 무슨 퀘스트야."

물론 시스템이 하는 말이 틀린 건 아닌데… 이렇게 갑자기 나오니까 좀 당황스럽다.

게다가 목표는 정체불명.

"이 개 같은 새끼들 또 지랄…."

똑똑.

오랜만에 시작된 부조리에 반항하려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정기검진을 올 시간은 아닌데, 병문안인가보다.

"네. 들어오세요."

문이 열리고 제일 먼저 보인 얼굴은, 루미였다.

루미는 익숙한 생도복을 입고 병실에 들어왔다.

어제 감기때문에 상태가 안좋아보였는데,

"호연 씨…."

"루미? 몸은 괜찮아졌어?"

"네, 네엣…."

몸을 움츠리며 들어온 루미는 의자에 앉았고, 나는 상태창을 읽어보려 했다.

'상태창'

하지만 평소와는 다르게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흐음…."

"왜 그러세요?"

"아무것도 아니야."

진짜 안 나오다니 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네.

"그러고보니 루시 상태는 어때? 많이 아픈지 내 연락은 계속 안 받네."

"아, 아… 괜찮아요. 아마 자고 있을 거예요."

"그럼 다행이고."

루미는 다소곳한 자세로 입을 우물쭈물했다.

아마 하고 싶은 얘기가 있는 것 같은데.

"뭐 할 말 있어?"

"… 그, 루시한테 그 얘기를 해봤어요. 같이 사귀는 일에 대해서…."

"아, 응응."

드디어 했구나.

좀 잘 풀렸으면 좋겠는데.

"그, 근데… 루시가 약간 부정적인 것 같아서요. 좀… 저희가 속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뭐… 그런 오해를 할만하긴 하지."

나라도 바로 믿긴 힘들 거다.

그래도 루미가 잘 설득할 줄 알았는데 잘 안 풀렸나 보네.

"그럼 어쩌지? 나도 직접 설득해봐야 하나?"

"…."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면서 고개를 돌렸는데, 루미는 내 얼굴을 뻔히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어떤 반응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왜 그래?"

"호연 씨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루시가 그렇게 반응한 거에 대해서요."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 우리가 어떻게 설득하냐가 중요하겠지."

한 명인데도 둘을 차지하려고 하는 쓰레기 입장에선 할 말이 없다.

"그, 그래도. 저희 말을 안 믿어주니까 배신감이라던가… 그럴 줄 알았다든가 하는 건…."

"그런 건 전혀 없는데. 루미 너 오늘 좀 이상하다. 감기가 덜 나았나?"

루미는 뭔가 루시를 까내리고 싶어 하는 말투였다.

평소의 루미라면 병문안을 와서 루시 칭찬 2시간 코스가 기본인데, 오늘은 이상했다.

어색하고 설명하기 힘든 위화감이 들었다.

"…."

'상태창'

역시 상태창은 켜지지 않았다.

그리고, 내 마음에 한 가지 가설이 생각났다.

혹시… 퀘스트에서 말하던 게 이 상황은 아닐까.

나는 떠보기 위해 슬쩍 질문을 던졌다.

"그러고 보니… 오늘같이 저녁 먹으러 가기로 한 거 기억하지?"

"네, 네. 당연히 기억하죠."

"흐음. 그렇구나."

당연히 저런 약속은 한 적이 없다.

어제 찾아온 루미는 감기 때문에 컨디션이 좋지 않았으니까.

저녁 약속을 할 리가 없지.

그런데도 기억한다고 하는 이유는 뭘까.

내 눈앞에 있는 건 루미가 아니기 때문이다.

"…."

나는 살짝 긴장했다가도, 천천히 뇌를 굴렸다.

만약 루미로 변장한 적이었다면 전투 감각이 신호를 보냈을 거다.

하지만 전투 감각은 미동도 없었다.

[마력 감응]도 마찬가지다.

마법으로 모습을 숨긴 거였다면 내가 파악할 수 있었을 거다.

따끔-

고통을 참으며 짜낸 마력으로 집중해서 [마력 감응]을 해봤지만, 역시 신호가 없었다.

그렇다는 건, 내 눈앞에 상대는 마법이나 아티팩트로 위장한 게 아닌 본래의 모습이라는 뜻이다.

"…."

"왜, 왜 그러세요?"

"아무것도 아니야. 루미."

그리고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단 하나 뿐이다.

세계관 보증 똑같이 생긴 쌍둥이.

이유는 모르겠지만, 내 눈앞에 있는 건 루시인 것 같았다.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