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원 4일 차.
목요일.
역시나 병실에 누워있었다.
내 침대 주변엔 화사한 꽃다발들이 놓여있었다.
남다은이 사 온 꽃들이다.
면회를 허락받은 날부터 매일같이 찾아오는 거로 모자라 오늘은 꽃을 한 움큼 사 왔다.
"이게 제일 싸고 꽃이 많이 들어있었어."
그리고 내게 내민 꽃다발은 안개꽃다발.
"… 어, 고맙다."
이렇게까지 가성비를 챙기진 않아도 될 텐데.
덕분에 내 병실이 화사해지긴 했다.
장미꽃 바구니와 안개 꽃다발들이 엄청나게 많이 있었거든.
"어디서 이렇게 돈이 많이 생겼어?"
남다은은 돈이 많지도 않을텐데, 꽃을 많이도 사왔다.
"스칼렛 씨가 주셨어. 괜찮다는 데도 계속 주셔서 어쩔 수 없었어."
"음…."
뭐, 돈도 없는 애가 꽃을 사 간다고 하니까 그랬겠지.
하여튼 스칼렛도 착하다니까.
"아무튼 고마워. 덕분에 병실이 확 밝아졌네."
어차피 이따가 또 외출할 거지만, 그래도 선물을 받으니 기분이 좋다.
"그럼 가볼게. 잘 있어."
남다은은 병문안을 왔다가도 내 상태를 보고 괜찮다 싶으면 항상 금방 돌아갔다.
물론 나야 오는 것만으로도 고맙다.
"이런 거 좋아하는구나."
남다은이 주고 간 장미 바구니와 안개꽃다발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화사한 이미지는 아닌데, 꽃을 좋아하다니 참 특이하네.
나는 꽃을 보다가 스마트 워치를 확인했다.
- 엘리스 : 내일 찾아갈게. 계약 관련 할 말이 있어서.
어젯밤 엘리스에게 온 메시지다.
하긴 슬슬 올 때가 됐지.
마나 마사지 계약도 했는데 정작 마사지는 한 번밖에 못 했으니까.
계약 자체가 엘리스가 부를 때 오는 계약이었으니 내가 잘못한 게 아니긴 하다.
똑똑.
"이호연 환자님. 엘리스라는 분이 찾아왔습니다."
"네. 올라오라고 해주세요."
남다은이 떠나길 무섭게 엘리스가 찾아왔다.
드디어 왔네.
무슨 얘기를 하려나.
나는 몸을 풀며 엘리스가 올라오길 기다렸다.
*
"… 결국 왔어."
엘리스는 이호연의 병실 앞에서 심호흡을 했다.
살면서 남에게 먼저 찾아가 본 적이 없는 엘리스가 직접 병문안을 온 것이다.
심지어 남자의 병문안을 온 거다.
"계약 때문에 온 거니까. 응. 계약."
이호연과 맺은 마사지 계약.
업계 최고 마사지사들과 같은 대우를 해줬으니 계약금만으로도 꽤 큰 비용이 나갔다.
그런데 세바스 찬이 24시간 자신의 움직임을 파악하다 보니, 이호연을 만날 틈이 나오지 않았다.
세바스 찬이 휴가를 간 지금 마사지를 받아야 하는데 하필이면 입원 중이라 그것도 힘들었다.
'그냥 아빠한테 말 해야 하나.'
젊은 남자에게 맨몸을 맡기는 마나 마사지.
엘리스의 아버지가 알게 되면 길드가 뒤집어질 것 같아서 말 안 하고 있었는데… 계속 이렇게 되면 말해야 할 수도 있다.
어쨌든 제 1 목표는 치료니까.
치료보다 중요한 건 없다.
'일단 조금 더 생각해봐야지.'
엘리스는 고개를 젓고 잡생각을 지운 뒤, 병실에 노크를 했다.
똑똑.
"네. 들어오세요."
문을 열자, 화사한 꽃들이 놓인 침대가 보였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이호연이 보였다.
"… 오랜만이네."
꽃들에 둘러싸인 이호연은 마치 다른 세상에서 날아온 천사 같았다.
오랜만에 봐서 그런지 영 적응되지 않는 얼굴이다.
"응. 병문안 와줘서 고마워."
"아니야. 나도 계약 때문에 온 거라서. 입원 중인데 일 얘기를 해서 미안."
엘리스는 선물로 사 온 과일들을 탁자에 올려놓고 의자에 앉았다.
이호연이 누워있는 침대.
처음 보지만 익숙했다.
스칼렛의 영상에서 자주 봤기 때문이다.
꿀꺽.
엘리스는 침을 삼켰다.
항상 밤에 자위하면서 지켜본 침대를 직접 보니, 왠지 몸이 뜨거워지는 것만 같았다.
"다음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나도 지금 상황이 이래서…."
이호연은 팔을 살짝 들어 올렸다.
힘없이 들리는 환자복이 이호연의 상태를 말해주고 있었다.
"아예 마나를 못 쓰는 상태라던데, 맞아?"
"응. 마사지도 힘들 것 같아."
"회복 예상 기간은?"
"어… 글쎄? 아마 일주일 전후면 될 것 같은데."
이호연은 자신의 팔을 바라봤다.
분명 첫날보단 몸의 컨디션이 좋아졌다.
이 기세라면 완전 회복까진 일주일 정도를 예상했다.
"일주일…."
하지만 엘리스에게 주어진 시간 역시 일주일.
그 안에 이호연이 회복되지 않는다면 또 기약 없는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그럴 순 없어.'
대화를 해보니 알았다.
더는 기다릴 수 없었다.
안그래도 점점 밤에 자위로 사용하는 시간이 많아진다.
이게 다 이호연 때문이다.
마나 마사지를 한 번 받으면 이 답답한 마음이 시원하게 뚫릴 것만 같았다.
마사지를 할 때 이호연의 손길은 엘리스에게 자위로 느낄 수 없는 흥분과 쾌감을 선사했고, 그때의 감촉을 엘리스는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었다.
"… 알았어. 회복된 후에 연락할게."
마사지가 이번 한 번으로 끝날 것도 아닌데, 언제까지 세바스 찬이 없을 때를 기다릴 순 없다.
'그래… 이건 치료 행위야.'
엘리스는 세바스 찬의 휴가가 끝나는 대로 이호연을 집으로 부르기로 마음먹었다.
직접 구한 마나 마사지사를 소개해줘야 했으니까.
*
이호연과 대화를 마친 엘리스는 병실에서 빠져나왔다.
'근데 뭐라고 말해야 하지?'
뒷조사를 하게 만든 생도를 마사지사라고 데려오면, 얼마나 당황할까.
어떻게 세바스 찬을 설득시킬지 고민하던 엘리스는 병원의 로비로 나왔다.
로비에는 카페나 토스트집 등 여러 가게가 운영중이었다.
그중 꽃집에서 엘리스는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 남다은?'
남다은은 꽃다발을 들고 주인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장미와 안개꽃이었는데, 주인이 답답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걸 보면 굉장히 귀찮게 한 듯했다.
'잠시만, 장미와 안개꽃….'
방금 나왔던 이호연의 병실에 있던 꽃들이었다.
혹시 이호연에게 가는 건가?
엘리스는 남다은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다가갔다.
원래부터 남다은은 1학년 생도 중에서도 아이리스 길드로 영입해야 하는 1순위였다.
물론 이호연이 나타나기 전 얘기지만.
지금까진 성적과 자존심 때문에 다가가기 힘들었는데 이호연 덕에 마력 장애의 치료가 희망이 생겼다.
그리고 성적에 연연하지 않게 되면서 엘리스의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계약이 단단하다고 하지만… 내가 직접 말해본 적은 없었어.'
남다은과 바이어 길드의 결속이 튼튼하다는 말은 업계에서 유명하다.
실제로 남다은은 빼 오려던 길드들은 모두 실패했다.
하지만 가서 영입 제의를 한다고 손해 보는 것도 없고, 부딪혀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큼큼.
목을 푼 엘리스는 남다은에게 다가가서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엘리스는 공적인 부분이라면 언제나 최선을 다했다.
"다은아. 꽃 사는 거야?"
*
한 편 남다은은 이호연의 병문안을 마치고 병원에서 빠져나가던 중 꽃집을 발견했다.
그리고 가성비 좋은 꽃을 찾기 위해 꽃집으로 들어갔다.
이호연이 좋아하는 꽃을 사기 위해서다.
꽃 말고는 아는 게 없었으니까.
그렇게 꽃의 가격을 비교하고 있는데, 뒤에서 아주 귀여운 목소리가 들렸다.
"다은아. 꽃 사는 거야?"
뒤를 돌아보자, 엘리스가 싱글싱글 웃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응. 꽃 사고 있어."
왜 자신에게 말을 거는 건지 모르겠지만, 남다은은 일단 대답해줬다.
여자 생도와 말을 하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다희가 잡혀있을 때는 의도적으로 대화를 피해다녀서 사실 이호연을 제외하고 생도와 얘기해본 적도 얼마 없다.
"무슨 고민하는 거야? 나도 꽃은 좀 아는데, 도와줄게."
"이건 한 송이에 2,500원이고 저건 한 송이에 2,450원인데 이게 꽃이 좀 더 커서 고민 중이었어."
남다은의 말에 엘리스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꽃을 생각하는 방향이 자신과는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보통 꽃다발은 색의 조화 같은 걸 보지, 한 송이당 얼마인지는 안 따지지않아?"
"그렇구나. 몰랐어."
엄청난 걸 알아낸 듯 고개를 끄덕이는 남다은을 보며 엘리스는 잠깐 눈을 찌푸렸다.
'특이한 애네.'
처음엔 영입 얘기만 하려고 했지만, 이호연의 병실에 있던 꽃이 정말 남다은이 놓은 꽃인지 궁금했다.
"혹시 이호연의 병실에 꽃다발 놓은 게 너야?"
"응."
"아… 혹시 이호연에게 관심 있어?"
엘리스의 조사 결과 이호연의 여자관계에 남다은은 없었다.
그런데 이미 꽃을 주고 나왔다는 건, 여러번 병문안을 갔다는 소리다.
보통 친구는 아닐텐데, 설마 여기서 더 여자를 추가하려는 건가?
"아니. 그냥 감사를 표현해야 해서."
"…그래? 혹시나 해서 그랬지. 같은 여자로서 충고하는데 이호연과는 거리를 두는 게 좋을 거야. 그놈 완전 여자를… 아니, 아니다."
엘리스는 눈을 깜박이며 자신을 바라보는 남다은이 이호연의 바람기에 휘둘리지 않길 바랐다.
여자가 너무 많으면 나중에 불편하니까.
'… 내가 뭐가 불편하지?'
이유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너는 친하게 지내잖아."
정작 남다은은 엘리스의 말을 신경쓰지않았다.
여자관계든 뭐든, 이호연은 자신의 은인이니까.
"나, 나는 어쩔 수 없이 사업적인 게 엮여서 그래…! 아, 맞다. 혹시 아이리스 길드에 관심 없어?"
엘리스는 남다은의 말에 당황하다가, 원래의 목적을 떠올렸다.
길드 영입이었다.
"음…."
남다은을 말꼬리를 길게 늘였다.
솔직히 길드에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바이어 길드에게 안 좋은 추억이 남아있기도 하고, 지금은 이호연에게 무언갈 해주고 싶은 게 컸다.
"생각해볼게."
그래도, 처음으로 여자인 친구와 이렇게 오래 말했는데 대화의 끝을 부정적으로 마무리하고 싶진 않았다.
남다은에겐 나름 기념비적인 날이었으니까.
"잘 생각했어. 내 번호 줄 테니까 언제든지 연락해도 좋아."
"고마워."
남다은의 스마트워치에 처음으로 여자친구의 번호가 생겼다.
얼굴에 티가 나지 않을뿐, 남다은은 기뻐하고 있었다.
"그럼… 하아… 마지막으로 당부하는데 절대 이호연한테 가까이 가면 안 돼."
자리를 떠나려던 엘리스는 또 무언가 가슴에 걸렸다.
꽃다발을 들고 멍하니 서 있는 남다은이 이호연에게 쫄랑쫄랑 달려갈 것 같았다.
'그러면 안 돼. 아무튼 안 돼….'
엘리스는 주변을 살피더니 슬쩍 다가와서 남다은의 귀에 속삭였다.
"이호연 걔 진짜 엄청나게 여자를 밝혀. 관계를 맺은 여자가 한둘이 아니라는 소문이 있어. 남자를 볼 때는 그런 걸 봐야 해. 알지?"
엘리스는 그 말을 남기고 꽃집을 나갔다.
"내가 왜 그랬지. 하이 씨…."
그리곤 바로 후회를 했다.
이렇게 남 일에 간섭하는 건 자기 성격과 어긋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엘리스는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자신이 왜 그랬는지 고민했다.
하지만 답이 나올리가 없었다.
아직 그 마음이 뭔지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