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니이이!"
"응응. 이리 와."
파티장에서 시간을 많이 쓰는 바람에 누굴 만나기엔 시간이 애매했다.
그래서 병원으로 돌아가기 전에 기숙사에 들렀다.
릴리아나와 남다은의 상태를 파악하기 위해서다.
기숙사에 사람이 5명이나 있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나와 스칼렛, 그리고 릴리아나는 남다희와 남다은이 노는 걸 보고 있었다.
언니에게 들러붙는 남다희와 미소를 지어주며 동생을 받아주는 남다은 자매는 사이가 좋아 보였다.
둘 다 진심으로 행복해 보여서 더 좋았다.
남다희는 중학생인데도 어린 애처럼 우리에게 들러붙었다.
아마도 사랑을 많이 못 받은 탓이겠지.
남다은도 그걸 알기에 열심히 남다희를 케어했다.
"다희는 밝아서 좋아. 그렇지 스칼렛."
"맞습니다. 저도 어릴 때는 저렇게 밝았었어요."
내 옆에 앉아있던 스칼렛은 진지한 표정으로 이상한 말을 꺼냈다.
"야. 너 왜 갑자기 개그 욕심이야?"
"… 정말입니다."
"냠냠."
"릴리아나. 너는 어땠어?"
"냠… 응?"
뭔지 모르겠지만 젤리 같은 걸 먹고 있는 릴리아나에게도 말을 걸었다.
"어릴 때 말이야. 너는 어땠냐고. 계속 게임만 했어?"
"나야 뭐… 그렇지."
"… 계속? 태어나서 지금까지 게임만 하진 않았을 거 아니야."
"그건 아니지! 날 뭘로 보는 거야."
릴리아나는 기분나쁜 듯 젤리를 입에 우겨넣었다.
"그니까… 뭐 했냐고. 네 고향에선 뭘 했는지 궁금해서 그래."
단순 궁금증이었다.
거실에 남다은과 남다희가 있으니 지옥은 고향이라고 표현했다.
"음… 잠시만. 성인이 되고 나서 15년 동안은 게임만 했어. 그리고 35살까지는… 뭐 했지…?"
"스칼렛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시답잖은 개그를 하네. 그걸 기억 못 하면 치매야."
"저는 장난이 아닙니다."
"… 진짜 뭐 했더라?"
릴리아나는 미간을 좁히며 고민을 시작했다.
뭐야, 장난이 아닌가?
★ 히로인 상태창
[릴리아나]
- [ 호감도 : 97 ] ( +1.4 )
- [ 성욕 : 76 ]
- [ 식욕 : 42 ]
- [ 피로도 : 30 ]
현재 상태 : 성인이 되기 전에… 으으. 머리야.
이건 심각한데.
장난이 아닌 모양이다.
"릴리아나. 진짜 기억 안 나?"
"어, 어… 모르겠어. 15년이나 지나서 그런가 봐."
"… 15년 지났다고 그걸 까먹진 않을 텐데."
진짜 치매가 의심된다.
어쩌지? 병원에 데려가야 하나?
근데 또 치매라고 하기엔 다른 건 잘 기억하는데…. 아니면 지옥에서 여기로 오면서 발생한 현상일지도 모른다.
"아니거든? 보통 까먹거든? 너 15년 전에 기억나? 5살 일 때 기억나냐고."
"아니, 5살일 때랑 35살 때랑 같냐?"
이게 무슨 이상한 논리야.
하지만 릴리아나는 자신의 논리가 매우 마음에 들었나보다.
"아무튼 기억 안 나잖아. 나도 똑같은 거야."
음음.
릴리아나는 혼자서 고개를 끄덕이더니 납득해버렸다.
저런걸로 납득하는 건 너무 이상한데….
본인이 괜찮다니 괜찮은 거겠지?
그때 옆에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 릴리아나 님이 15년 전에 35살이었으면, 지금 50살이란 말인가요?"
"응, 그렇지."
"…!"
스칼렛은 릴리아나의 나이를 이제야 알았는지,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얘기를 다 듣고 있던 남다희도 입을 쩍 벌리면서 조용히 중얼거렸다.
"헉. 아줌마…."
"아줌마 아니거든!"
"아줌마아아아!"
릴리아나는 도망치는 남다희를 쫒기 시작했다.
고급 아카데미 기숙사라 다행이지, 평범한 주택이었으면 이미 윗집 아랫집 옆집에서 우리 현관에 정모를 했을거다.
"50살이나 되셨다니… 놀랍네요."
스칼렛은 정말 놀란 모양이다.
아마 자기보다 어리다고 생각했을거다. 겉모습만 보기엔 절대 50살은 아니니까.
"인간으로 치면 5살이야."
"네?"
"아무것도 아니다."
쯧. 말해서 뭐 해.
어차피 남다은과 남다희 때문에 자세히 말도 못 한다.
그냥 릴리아나가 남다희를 쫓아가는 모습을 구경하며 복귀 시간까지 시간이나 떼워야지.
"호연아. 아니, 이호연?"
"그냥 편하게 부르자. 다은아. 어때?"
"알았어."
그때 남다희와 놀아주던 남다은이 내게 다가왔다.
원래는 이렇게 살갑게 부르지 않았지만, 남다희가 있을때는 친한척을 위해 서로 이름만 불렀다.
하지만 이제 좀 친해졌으니 그냥 이름으로 부르자고 한거다.
"꽃… 뭐 좋아해?"
"어?"
"꽃. 색이 예쁜 꽃."
갑자기 꽃은 왜 물어보는거지?
사실 나는 꽃을 왜 사는지 이해를 못하겠다.
그 돈으로 든든하게 국밥이나 사먹지.
"… 가성비 좋은 거?"
"가성비…."
약간 장난으로 대답한건데, 남다은은 그 대답으로 만족한 것 같았다.
음음. 하면서 고개를 끄덕이더니 남다희를 바라보기 시작했으니까.
'뭐야.'
다음 병문안 때 사오려고 하나?
'그나저나 얘는 릴리아나가 몇 살인지 신경도 안 쓰는구나.'
역시 참 신기한 애다.
나도 별로 깊게 생각하지 않고 넘겼다.
*
이호연과 박민규가 만난 다음 날.
목요일.
파티장 테러 조사가 모두 끝나고, 길드의 밀려있던 일까지 처리한 박민규는 길드 순찰을 나섰다.
"고생하십니다! 길드장님!"
"응응. 모두 고생이 많아요. 항상 안전 조심해요."
"예! 감사합니다!"
박민규는 일반 길드원들의 인사에 친절하게 대답했다.
일반 길드원들중에는 바이어 길드가 얼마나 더럽고 추잡한 짓을 하는지 모르는 길드원도 있었다.
어느 정도 연차가 쌓여야 서서히 그런 일을 맡으면서 봉급이 올라가게 되니까.
게다가 믿을만한 사람에게만 일을 맡겨야 하기에 더욱 조건은 까다롭다.
"길드장님 덕에 항상 길드 분위기가 밝다니까."
"그치. 나도 그래서 여기 남아있는 거야. 작지만 분위기가 좋거든."
'뭐라는 거야. 쓰레기들이.'
박민규는 일반 길드원들의 목소리에 짜증이 났다.
빨리 일이나 할 것이지, 잡담을 나누는 놈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희는 잘 있나?"
"예. 며칠 전부터 조용히 놀고 있길래 밥만 넣어주고 나오고 있습니다."
"그래그래. 너희들은 필요 상황이 아니면 말을 섞지 말도록 해."
박민규는 남다희와 길드원들이 대화를 섞는 것도 금지시켰다.
그 대신 자신이 더욱 살갑게 대해주며 자신을 의존하도록 만들기 위함이다.
똑똑.
"다희야. 아저씨 들어간다?"
박민규는 대답도 듣지 않고 문을 열었다.
방 중심에는 남다희가 멍하니 앉아있었다.
"오늘 아저씨가…."
친절한 표정으로 입을 열던 박민규의 얼굴이 굳었다.
방 안에 즐비한 마력의 향기.
마법의 흔적이었다.
박민규는 즉시 마력을 내뿜었다.
이미 출력이 떨어진 마법진에서 마력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이런 씨발…!"
누군가 침입한 흔적이다.
박민규는 즉시 방에 있던 마법진을 해체했다.
그러자 남다희의 모습은 연기처럼 사라졌고, 텅 빈 방을 마주했다.
"이, 이게 무슨 일이야. 남다희! 남다희 어딨어!!!"
"왜 그러십니까! 길드장님!"
"야 이 미친 새끼야! 관리를 어떻게 하는 거야!"
박민규의 괴성에 길드원들이 방으로 들어왔고, 그들도 남다희가 사라진 걸 발견했다.
마법진은 며칠이나 지나서 마력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술사가 마력을 계속 주입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남다희가 사라진 지 시간이 꽤 지난 상태란 소리고,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는 건 술사도 엄청난 실력자란 뜻이다.
그런 사람이 바이어 길드에 원한이 있다니….
"도대체 누구…."
잠시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박민규의 머리에 더 중요한 사람이 스쳐지나갔다. 박민규는 소리를 듣고 방으로 들어온 실장에게 말을 걸었다.
"남다은. 남다은한테 연락해!"
"그게… 길드장님이랑 파티에 간 이후로 연락을 안 받습니다. 저희는 길드장님과 같이 있는 줄 알고…."
실장은 남다은에 대한 정보를 몰랐다.
박민규가 남다은과 남다희를 독차지하기 위해 정보를 길드원들에게 공개하지 않은 탓이다.
여태껏 서로 소통이 되지 않았고, 지금까지 그래왔으니 문제없으리라 생각한 실장은 딱히 행동하지 않았다.
그 결과가 이랬다.
심지어 지금까지 순순히 자신들의 말을 듣던 남다은이 갑자기 연락을 끊어서 더욱 당황스러웠다.
"이 멍청한 새끼들이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죄, 죄송합니다!"
박민규의 착한 인상이 일그러졌다.
이래선 안 된다.
어떻게든 남다희를 찾아내야 한다.
자신이 쌓아온 모든 계획이 무너질 위기에 처했으니까.
"지금 당장 남다은이랑 남다희 찾아내.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아, 알겠습니다! 정보통들에게 연락 돌리겠습니다!"
"정보통뿐만 아니라 정보 길드에도 의뢰해. 절대 안 들킬만한 곳으로 조심해서. 알겠어?"
"예, 예!"
박민규의 말에 실장이 식은땀을 흘리며 의뢰를 위해 뛰쳐나갔고, 박민규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이를 악물었다.
'절대 이렇게 끝날 수 없다. 다은아. 다희야.'
눈앞에 남다은의 몸이 아른 거리는 것 같았다.
곧 자신의 것이 될 몸이었다.
10년이 넘게 그 몸을 바라봤다.
절대 이렇게 포기할 순 없다.
박민규는 주먹을 꽉 쥐고 어딘가로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