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그래. 당장 처리해. 지금까지 모아둔 자료들 바로바로 기자들한테 돌리고, 기사 쓰라고 해."
- 예. 알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하라고. 응?"
뚝-
병원에서 빠져나온 이사장은 한숨을 내쉬며 비서가 기다리는 차량에 탑승했다.
"빨리 오셨군요."
"일이 빨리 끝났다."
자신의 옆에서 몇 십년이나 일한 김 비서.
아마 최근에 결혼 했었지.
"… 김 비서. 자네 자식이 몇 살이었지?"
"제 딸 말입니까? 올해에 4살입니다."
"아하… 한창 귀여울 때군."
"뭐… 자식 보는 맛에 사니까요."
김 비서는 익숙하게 운전을 이어가며 이사장의 집으로 차를 몰았다.
이사장은 뒷좌석에서 눈을 감고 이호연의 말을 떠올렸다.
'처조부라….'
사실 요즘따라 손녀가 자신을 점점 쌀쌀맞게 대한다.
10년 전만해도 할아부지~ 라고 부르면서 따라다녔는데, 이제 성인이라 자신과는 눈도 안 마주치려고 한다.
어릴 때는 정말 귀여웠는데….
"차라리 증손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모르겠어."
"네? 죄송합니다. 다시 한 번만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자신에게 하는 말인 줄 알고 되묻는 김 비서를 보며 이사장은 입을 열었다.
"김 비서. 만약 자네 딸이 결혼 적령기라고 쳐. 사위로 이호연을 데려오면 어떻게 할텐가?"
김 비서는 이호연의 문란한 성생활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시킬거냐. 라고 묻는거다.
"어… 저라면 딸이 원하는 결혼은 시켜줄겁니다. 설령 그 끝이 안좋더라도, 그것또한 경험이니까요. 그리고 못미더운 사내놈을 데리고 오는 것 보단 이호연 생도를 데려오는 게 차라리 낫지 않겠습니까? 허허."
"흐음…."
듣고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언젠가는 남자를 데려올텐데, 그럴거면 능력 있는 놈이 좋으니까.
웬 못생기고 능력도 없는 놈한테 꿰이면 정말 머리가 아플 거다.
설령 자신의 손녀라면 이호연과 결혼하더라도 휘둘리고 살지는 않을거다.
"처조부… 증손이라…."
이사장은 미간에 힘을 주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
테러 당일.
엘리스의 저택.
쉬고 있던 엘리스는 세바스 찬에게 친목 파티가 테러를 당했다는 보고를 듣고 깜짝 놀랐다.
"… 거기 이호연도 가지 않았어?"
"예. 맞습니다. 테러를 막은 뒤에 혼수상태에 빠졌다고 합니다. 엄청난 활약을 했다더군요."
"그래… 알았어. 자세한 건 내가 찾아볼테니까 가서 쉬어."
"알겠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쿵-
문이 닫히고 세바스 찬이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는 걸 확인한 엘리스는 스마트 워치로 여러 소식들을 파악했다.
이호연의 여러 활약상을 보며 놀라기도 했지만, 거기서도 눈에 띄는 건 이호연이 몸을 던져 백아영을 막아주는 CCTV영상이었다.
"확실히, 잘생기긴 했네."
재수가 없도록 잘생겨서 문제다. 쯧.
안그래도 엘리스는 요즘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책상 아래에 숨겨놓은 이호연의 스마트 워치.
아직도 밤마다 신세를 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학습이라도 한 건지 그 스마트 워치만 보면 자동으로 아랫도리가 젖어왔다.
"으… 찝찝해."
엘리스는 이호연이 혼수상태에 빠졌다는 말을 듣고, '이 성벽을 극복하기 전에 이호연이 죽기라도 하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어이없는 생각이지만, 엘리스는 진지했다.
아직 성에 대해 제대로 된 지식도 없는데, 만약 이호연의 영상과 마사지로 흥분하는 성벽을 고치지도 못하고 이호연이 사라지면 수습할 수가 없다.
물론 성벽이란 건 시간이 지나면 변하기도 하지만, 엘리스는 아직 그런 쪽에 지식이 많지 않았다.
"… 병문안 때 몸에 좋은 거라도 사가야하나."
엘리스는 병문안 선물을 고민하다가, 좋은 생각을 해냈다.
병실에 카메라를 설치하는 것이다.
변태 이호연이라면 병실에도 여자를 부를 게 뻔하다.
병실은 기숙사보다 훨씬 잠입하기 쉽고, 그만큼 영상을 찍기도 편할 거다.
그 영상을 확보하면… 더 풍족한 밤을 보낼 수 있다.
"… 스칼렛한테 연락해야겠네."
엘리스는 스칼렛의 개인 번호로 띡띡 메시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간호사님. 몸상태가 괜찮은데요. 이제 퇴원해도 괜찮지 않나요?"
이사장이 병실에서 나간 뒤, 정기적으로 찾아와서 상태를 보시는 간호사님께 말을 꺼냈다.
열심히 몸을 풀며 스트레칭하는 모습도 보여줬다.
물론 아직 마나 회로의 회복이 덜 되긴 했다.
그래서 마법을 사용할 순 없지만, 솔직히 여기 있으니까 답답하다.
"안 돼요. 깨어난 지 하루도 안 지났잖아요. 안정이 필요해요."
"그럼 얼마나 더 입원해야 할까요?"
면회라도 되면 좋겠는데, 면회도 금지라 다른 히로인들을 볼 수가 없잖아.
"으음... 사실 성녀님이 허락하실 때까진 절대 면회 금지라고...."
"... 네?"
"아직 상태가 안 좋으시다고 하셔서... 근데 좀 나아지신 것 같으니까 제가 성녀님한테 말씀드려볼게요."
"그럼 성녀님 좀 불러주시겠어요? 직접 제 상태를 보면 생각이 달라질 수도 있어요."
"아, 그럼 그럴까요? 마침 성녀님도 이호연 생도의 일이라면 미루지 말고 바로 말하라고 하셨거든요."
"네네. 감사합니다."
간호사님이 나간 후, 나는 침대에 몸을 눕혔다.
흐음.
'절대 안정이라....'
과연 진짜 안정 때문에 면회를 금지 시킨 건지, 다른 목적이 있는지는 두고 봐야 한다.
똑똑.
- 백아영입니다. 들어가도 될까요. 이호연 생도?
"네. 들어오세요."
덜컹-
잠시 후 백아영이 찾아왔다.
항상 보는 익숙하지만 섹시한 정장이었다.
방금까지 일을 하다 왔는지 이마에 땀이 송송 맺혀있었다.
"호연아. 몸은 좀 괜찮아?"
"당연히 괜찮죠."
이곳이 철혈 길드의 병원이라고 들었는데, 백아영은 나 하나를 위해 양호실이 아닌 철혈 병원에서 근무하는 중이라고 한다.
아카데미의 생도를 책임지는 게 양호 선생님의 일이니 뭐니 하면서 말이다.
백아영은 문을 닫자마자 말을 낮추며 내게 다가왔다.
"그래서, 왜 불렀어? 간호사가 널 한 번 봐달라고 하던데."
"으음, 이제 몸이 좀 괜찮아졌으니까... 면회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해서요."
퇴원은 바라지도 않는다.
면회만이라도 해줬으면 좋겠다.
"아... 응. 그렇지. 너도 네 사정이 여러 가지 있을 테니까."
백아영은 서운한 티를 내면서 나를 바라봤다.
"... 네. 사실은 할 게 많아요. 이번 테러도 그렇고, 저번 천상제 때 일어난 일들도 해명해야 할 게 남아있고... 24시간 감시하는 간호사들이 부담되기도 하고...."
"면회 허락해주면 공적인 일로만 면회 할 거야?"
"그건 또 아니긴 한데...."
부담스럽다.
나를 쳐다보는 저 시선이 무섭다.
"혹시 다른 여자들 부르고... 하면... 흑."
백아영은 내 품에 안기며 얼굴을 가슴에 파묻었다.
"... 여보. 당신이 언제나 1등이라니까."
"여보... 흐으."
어쩔 수 없이 나도 무적의 단어를 꺼냈다.
포옥-
역시 효과가 있었는지 백아영은 나를 더 강하게 끌어안았다.
나도 내게 매달리는 백아영을 끌어안아주며 달래줬다.
내 품의 백아영을 몇 분 정도 등을 쓰다듬자, 백아영이 고개를 들었다.
"알았어. 너도 인간관계가 있을 테니까. 너무 내 고집만 부리면 안 되지."
"고마워요. 아영 씨."
"응. 나도 항상 네 곁에 있고 싶지만... 아직 할 일이 많아. 적어도 내가 벌여놓은 일은 다 처리해야하거든."
"네. 괜찮아요."
백아영의 말을 들으며 슬쩍 상태창을 확인했다.
★ 히로인 상태창
[백아영]
- [ 호감도 : 100 ] (+ 1.0)
- [ 성욕 : 76 ]
- [ 식욕 : 35 ]
- [ 피로도 : 55 ]
현재 상태 : 여보랑 안정적인 결혼 생활을 위해... 지금 직업도 충실해야 해.
다행이다.
아직 자신의 직업에 대한 책임감이 있다.
남들을 구하고 싶어 하는 마음도 그대로 인 것 같고.
이러면 임신 걱정은 없겠지.
"네. 몸 간수 잘하세요. 관리도 열심히 하시고."
그래도 혹시 몰라 한 마디 더했다.
"응. 고마워. 면회는 내일부터 가능하다고 말해놓을게. 상태를 보니 당직 간호사도 필요 없을 것 같으니 그것도 처리할게."
그 후로 백아영과 조금 더 대화를 나누었다.
백아영은 일이 많이 밀려서 슬슬 가봐야겠다고 말한 뒤 병실을 나갔다.
사람이 사라지자 병실은 쥐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 공략하고 나서도 문제네."
그래도 호감도 100이라 그런지 질투가 엄청나게 심하진 않았다.
물론 여자가 5명이 넘어도 그 태도가 유지될지가 문제긴 한데... 그건 그때 생각해야지.
나는 스마트 워치를 켜고 시간을 때우기 시작했다.
혼자 있는 병실에서는 이거 빼고 할 일이 없었다.
"이제 볼 것도 없는데."
그렇게 몇 십 분 정도 지나자, 심심함이 몰려왔다.
아카데미가 언제쯤 입장 발표를 할까 보는 것도 질렸다.
빨리 면회가 풀려야 할 텐데.
남다은과 남다희, 엘리스, 루시, 루미, 임솔, 문수린까지. 신경 쓸 사람이 너무 많았다.
사사삭-
그때, 익숙한 마나의 흐름이 느껴졌다.
마나를 사용할 순 없어도 느낄 순 있었다.
이건 [마나 감응]이라는 특전이니까.
"... 스칼렛?"
병실 천장 위에서 움직이는 무언가에 대고 말을 걸자, 마나의 움직임이 멈추고 천장의 타일 하나가 열렸다.
툭-
곧 익숙한 금발의 미녀가 바닥에 착지했다.
"호연 님은 대단하시네요. 마나 회로가 아예 엉망이라는데, 그 상황에서도 절 찾아내시다니."
스칼렛은 몸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며 내게 말을 걸었다.
".. 무슨 일이야? 왜 거기서 나와."
"갑자기 호연 님 병실의 방비가 약해져서 바로 숨어들어왔습니다. 마침 보고드릴 것도 있었고요."
"잘했네."
역시 스칼렛이다.
안 그래도 심심했는데... 어?
스칼렛의 목에 걸린 목걸이가 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이제 보니 어디서 많이 본 목걸이였다.
예전에는 저런 모습의 릴리아나를 자주 데리고 다녔으니 확실히 기억하고 있다.
"너 그거... 릴리아나야?"
"맞습니다. 릴리아나 님. 이제 안전하니 나오세요."
퍼엉-
안개가 풀풀 날리며 릴리아나가 스칼렛의 옆에 나타났다.
"아으... 오랜만이라 너무 답답했어."
"릴리아나!"
스칼렛과 릴리아나라면 내 병실 생활도 지루하지 않을 수 있다.
처음으로 릴리아나에게 사랑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역시 튼튼하잖아. 내가 이럴 줄 알았다니까?!"
"대단하시네요. 릴리아나 님. 저는 위험하다길래 믿고 있었는데...."
"그렇게 쉽게 죽을 놈이 아니거든. 그랬으면 진작 죽었을 거야."
"저기, 둘이 뭐해?"
나를 빼고 시작한 둘의 대화에 나도 끼어들었다.
"스칼렛이 네가 위험하다고 걱정하길래 내가 신경 쓰지 말라고 했거든. 네 목숨 질긴 거야 내가 잘 아니까."
"...?"
갑자기 이상한 소리를 하는 릴리아나의 꿀밤을 때리려다가, 그래도 날 보러 찾아와줬으니 참기로 했다.
"스칼렛. 남다은과 남다희는 어떻게 되고 있어?"
아무튼, 마침 잘 됐다.
남다은이 제일 걱정거리였는데 사정을 제일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왔으니까.
"기숙사에서 쉬고 있어요. 둘이 꼬옥 끌어안고 잠든 걸 확인하고 나왔습니다. 그러고 보니 관련해서 보고드릴 것도 있습니다."
"뭔데?"
"바이어 길드에서 남다희 양을 구한 이유를 알 수 없어서, 일단 이호연 님이 가진 세력이 구해낸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정확한 이유는 이호연 님이 말하지 않아서 모르겠다고 전했고요."
"역시 스칼렛. 일 처리가 확실해. 그건 내가 알아서 할게."
"네. 남다은 양과 남다희 양은 내일 데려오겠습니다."
이유를 생각해놓긴 했다.
물론 그걸 남다은이 들어줄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괜찮을 거다.
"다른 특이사항은 없고?"
"아... 그러고 보니 엘리스 님에게 개인적인 지령을 받았습니다."
"개인적인 지령?"
"네. 여기 병실에 몰래카메라를 설치하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