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오, 힘들어."
민예지를 시작으로 웬만한 길드 사람들이 대부분 인사를 하고 갔다.
무시하고 싶어도 옆에 백아영과 문수린이 있어서 이미지 관리를 하느라 그럴 수가 없었다.
'거의 100번은 인사한 것 같은데.'
다행인 점은 이름을 기억하느라 힘을 빼지 않아도 된다는 거다.
어차피 듣기만 해도 다 아니까.
지금은 잠시 화장실에 다녀온다고 도망친 상태다.
화장실 방향으로 가다보니 처음 보는 장소에 도착했다.
파티장이 넓은 만큼 아직 못 본 사람들도 많았는데, 여긴 처음 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회장님."
"역시 박 사장이야. 그러고 보니 옆에 아가씨는 새로운 비서인가?"
"예예. 회장님. 비슷한 겁니다."
주변을 두리번 거리다가 들리는 대화소리에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곳에 내가 찾던 사람이 있었다.
'찾았다.'
파티장의 어두운 구석.
한 아저씨의 뒤에 남다은이 서있었다.
파티장에서도 구석이었기에 조명이 어두웠지만, 남다은의 얼굴은 확실하게 보였다.
검은색 생머리에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꾸미니까 훨씬 더 아름다웠다.
옷이 면적이 많이 좁았는데, 훤히 보이는 등은 머리카락에 덮여있었고 가슴골은 손으로 가리고 있었다.
남다은은 어깨를 감싸려는 박민규의 손을 자연스럽게 피하면서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박민규는 약간 기분 나쁜 눈초리로 남다은을 바라봤지만, 앞에 있는 남자를 신경 써서인지 말을 꺼내진 않았다.
"이야, 그래서... 오?"
박민규와 대화를 나누던 남자가 눈을 돌리다 나를 발견했다.
남자는 웃으면서 내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이야, 여기 유명인이 있네? 반갑구먼. 신영 길드의 길드장 신영훈이네."
대화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차라리 괜찮을지도 모른다.
"처음 뵙겠습니다. 이호연입니다."
신영 길드면 이 사람이 학생회 부회장의 아버지란 건데... 바이어 길드장과 있는 걸 보니 아버지도 영 착한 사람은 아닌 것 같다.
"어, 민규. 자네도 오게. 이쪽이 요즘 제일 잘나가는 생도잖아."
신영훈은 뒤에 빠져있던 박민규를 옆에 세워서 나와 인사를 시켰다.
"아... 그 이호연 생도군요?"
"네. 반갑습니다."
박민규도 내게 다가와서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그제야 내 이름을 들은 남다은이 내 쪽을 바라봤다.
아예 허공을 바라보며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있다가 내 이름을 듣고 그제야 제대로 앞을 본 것이다.
남다은의 죽어있던 눈이 나와 마주치자마자 떨리기 시작했다.
그리곤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뒷걸음질 쳤다.
네가 여기 왜 있냐는, 괴물이라도 본 눈빛이다.
"응? 다은아."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어, 어. 그래라."
박민규의 허락을 받은 남다은은 그대로 뒤로 도망쳤다.
"많이 참기 힘든가 보구먼. 대화 도중에 저렇게 할 정도라니."
남다은을 본 신영훈은 허허 웃고는 술을 삼켰다.
나도 이럴 때가 아니지. 저 뒤를 따라가야 한다.
"그럼 저도 가보겠습니다."
"빌써? 아직 사업적으로 할 얘기가 남았는데...."
나를 붙잡는 손을 무시하고 남다은이 사라진 방향으로 향했다.
희미하게 느껴지는 남다은이 지닌 마력의 향을 따라가자 화장실 쪽 통로 구석에서 울고 있는 남다은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남다은은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약하게 떨고 있었다.
"... 남다은."
남다은의 팔에 손을 대자, 팍! 소리가 나도록 내 손을 뿌리쳤다.
"제발, 제발 날 내버려 둬...."
★ 히로인 상태창
[남다은]
- [ 호감도 : 57 ]
- [ 성욕 : 15 ]
- [ 식욕 : 40 ]
- [ 피로도 : 90 ]
현재 상태 : 너한테 이런 모습 보여주고 싶지 않았어.
"... 야."
"가라고! 왜 내게 가까이 오는 건데?"
벌떡 일어난 남다은은 포기하지않고 말을 거는 나를 한 차례 밀어냈다.
"내가 도와줄게. 남다은."
도와준다는 말에 남다은은 싸늘한 표정을 지었다.
"네가 뭘 안다고 도와준다는 거야. 내가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 지 알기나 해?"
"다 알아. 남다희 때문에 협박당하는 거 잖아."
"... 그래, 거기에 엄청난 빚까지 있어. 난 민규 아저씨의 말을 거스를 수 없어."
남다은은 이미 포기한 표정이었다.
아마 혼자서 나름 노력을 해봤을 거다. 그런데도 전혀 상황이 나아지지 않았겠지.
내가 도와준다고 해도 바로 믿지 못할 거다.
"그딴 빚은 갚으라고 있는 게 아니야. 그리고, 여동생은 내가 이미 구했어."
"... 뭐라고? 그게 무슨 소리야."
"못 믿겠지만, 정말이야. 남다희는 내가 구했어. 하나씩 설명해줄...."
쾅! 쾅! 콰과광!
남다은에게 제대로 사정을 설명하려던 그때, 파티장을 채우는 의문의 폭발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내 몸에 익숙한 마력의 파동이 지나갔다.
'룬의 결계...?'
파티장을 작은 공간 하나하나로 분리하는 룬의 결계가 설치되고 있었다.
지이잉-
나와 남다은 사이를 가로막는 결계 일부분을 역산했다.
각성한 이후로 이 정도 마나 컨트롤은 쉬워졌다.
"이, 이게 무슨...."
당황한 남다은은 주변을 돌아보며 마력을 끌어올렸다.
"남다은. 괜찮아."
테러다.
테러 중에서도 룬의 결계를 이용한 테러는 판데믹밖에 없다.
판데믹이 어째서 친목 파티에 등장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남다은과 하던 얘기는 마저 끝내야 하는 데...
[서브 퀘스트가 전송되었습니다.]
그때, 실기 시험 1등이라는 퀘스트를 깨느라 오랫동안 보지 못햇던 알림이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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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인을 구해라!]
전투력이 없는 히로인은 주인공의 보호가 필요합니다.
심지어 처음부터 목표가 그 히로인이라면 더더욱이요.
히로인을 노리는 악의 손길을 막아내세요!
- 보상 : 대상 히로인의 호감도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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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투력이 없는 히로인이라고 하면, 한 명뿐이다.
백아영.
이유는 아직 모르겠지만, 백아영이 목표라면 당장 구하러 가야 한다.
백아영은 전투력이 아예 없기 때문이다.
나는 남다은을 바라봤다.
나를 보며 떨고있는 남다은에게 제대로 설명을 해주고 싶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다.
"남다은. 지금 당장 길드의 연락을 모두 무시하고 아카데미의 중앙 분수로 가."
다행히 혹시나해서 보험을 들어놨다. 스칼렛에게 말해놓은 게 있기 때문이다.
"... 뭐?"
"거기서 너에게 말을 거는 금발 여자를 따라 남자 기숙사의 내 방으로 가면 남다희가 있을 거야. 그 여자가 설명도 다 해줄거야. 나는 바로 사람들을 구하러 가야해."
"잠, 잠시만!"
"절대 바이어 길드를 믿지 마. 한 번만 나를 믿어줘."
당황한 표정의 남다은과 눈을 마주쳤다.
무언가 말하려던 남다은은 내 진지한 표정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남다은에게서 처음 보는 이상한 얼굴이었다.
내 갑작스러운 말에 많이 당황한 모양이다.
하지만 다행히 하나는 알 수 있었다. 나를 믿고 있다는 점이다.
나는 남다은을 내버려 두고 파티장으로 달려갔다.
*
"하아... 이게 무슨!"
"부서져! 부서지라고!"
한 남자가 결계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캉! 캉!
하지만 결계는 흠집 하나 없었다.
파티를 즐기던 헌터들은 옆에서 대화를 나누던 몇몇 사람과 함께 결계에 갇혔다.
처음 보는 강도의 결계에 상위 헌터들도 역산하는 데에 시간이 엄청나게 소모되었다.
"도대체 어떤 미친놈이 친목 파티에서 이런 짓을...."
결계에 갇힌 민예지는 눈을 찌푸리며 결계를 바라봤다.
초대장이 필요한 파티 시스템상 누군가 배신한 게 분명하다.
믿을만한 사람들만 들여보냈고, 확실하게 조사를 끝냈는데 이런 일이 발생했다는 건 내부에 배신자가 없다면 불가능했다.
'이 페이스면 역산에 10분은 걸리겠어.'
테러 상황에서 10분이면 엄청나게 긴 시간이다.
이미 상황이 끝나고도 남을 시간이다.
하지만 1초라도 시간을 줄이기 위해 민예지는 잡념을 지우고 결계 역산에 집중했다.
그때, 결계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역산을 진행하던 헌터들의 집중도 깨졌다.
"젠장, 역산이 끊겼어!"
우우웅-
헌터들은 흔들림의 근원지를 바라보았다.
결계의 한 군데가 떨리고 있었다.
찌지직
곧 무언가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결계의 한 부분이 찢어졌다.
그리고 거기서 머리 하나가 쏙 하고 나왔다.
"... 여기도 없네. 어? 민예지 씨. 아영 씨 봤어요?"
"너, 너... 대체 어떻게?"
갑자기 튀어나온 이호연의 얼굴에도 놀랐지만, 상위 헌터들이 달라붙어서 역산하고 있던 결계를 가볍게 찢어내는 이호연의 모습에 민예지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건 나중에 설명하고요. 아영 씨 못 봤냐구요."
"어, 어... 못 봤어."
민예지도 파티를 즐기다 보니 백아영은 잊고 있었다.
"흠. 알았어요. 여기 있는 분들도 나와서 마인들 잡는 것 좀 도와주세요. 밖에 엄청나게 많이 있거든요."
이호연은 그 말을 하고는 밖으로 사라졌다.
갇혀있던 헌터들은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이호연이 머리를 내밀었던 구멍으로 몸을 집어넣었고, 밖에 나올 수 있었다.
밖은 아비규환의 현장이었다.
수많은 마인 들이 파티장에서 헌터들과 싸우고 있었다.
헌터들은 대부분이 이호연이 구해낸 헌터들이었다.
민예지는 즉시 마력을 끌어올려서 전장에 난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