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으…."
백아영은 점심시간을 끝내고 의자에 몸을 맡겼다.
아카데미의 양호실은 일과시간보다 점심시간이 더 바빴다.
생도들이 점심시간에 가장 많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일과시간은 오히려 긴급환자만 아니라면 오는 사람이 없어서 널찍했다.
똑똑-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긴급 환자는 아닌 거 같은데, 로비 직원인가?'
하지만 직원은 보통 밖에서 자기가 누구인지 밝힌다. 저렇게 조용히 오는 사람은 없었다.
"네, 들어오세요."
어차피 밖에 경호원들도 있고, 양호실에 이상한 사람이 올 일은 없다. 백아영은 별 생각없이 허락했다.
덜컥-
문이 열리자 익숙한 얼굴이 백아영의 눈에 들어왔다.
"호, 호연아?"
"안녕하세요. 아영 씨. 심심해서 놀러 왔어요."
"지금 수업 시간 아니야? 왜 여기에…."
"아영 씨가 중요하지, 수업이 중요해요? 다 버리고 왔죠."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고 눈이 예쁜 반달을 그리는 저 미소.
장난인 걸 알지만 백아영의 가슴을 뛰게 했다.
"이, 이상한 소리 하지 마. 뭐 하려고 왔어?"
"물어볼 게 있어서요. 아영 씨. 이번 주 토요일에 파티 참가해요?"
탁-
이호연은 익숙한 듯 양호실의 환자용 의자에 앉았다.
"파티…? 아, 협회에서 여는 친목 파티 말이야?"
"네. 그거요."
"아마 안 참가할 것 같은데, 파트너도 없고…."
협회 노인네들이 주최하는 파티는 남녀 짝짓기를 좋아한다.
규칙이 명시되어 있는 건 아니고, 입 밖으로 꺼내진 않지만 오래 이어진 암묵적인 룰이었다.
그리고 젊은 남녀가 혼자서 파티에 찾아가면 짝을 구한다는 소문이 퍼져서 쓸데없는 대쉬가 많이 들어온다.
귀찮기도 하고, 굳이 백아영이 참가해서 얻을 것도 없었다.
"파트너요? 그런 것도 있어요?"
이호연은 처음 듣는다는 듯 백아영에게 되물었다.
"응, 보통 남녀가 한 짝으로 참가해. 젊은 남녀가 파트너 없이 파티에 참여하면 파트너를 구한다는 뜻이야."
"아…."
시발. 그런 거였네.
이호연은 그제서야 감을 잡았다.
그 늙은이는 남다은과 파트너로 파티에 참여하려는 속셈이다.
남들이 보기에 추하더라도, 남다은에게 다가오는 남자들은 없어질 테니까.
갑자기 표정이 굳은 이호연을 보며 백아영은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나 걱정했다.
"아영 씨. 저랑 같이 가요."
"어, 어?"
그리고, 들려온 말에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저랑 파트너로 나가자고요."
"… 그러면 쓸데없는 말이 들릴지도 몰라. 협회 주최 파티에서 파트너로 나가는 일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욱…."
"저는 괜찮은데. 아영 씨랑 그런 오해 받아도."
"…흣! 히잇!"
백아영은 당황해서 이상한 소리를 냈다.
갑자기 저렇게 치고 들어오면 백아영도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큭, 뭐에요 그건."
자신을 놀리는 듯 웃는 이호연을 보고 얼굴이 뜨거워졌다.
"네, 네가 계속 장난을 치니까!"
"아영 씨. 장난 아니에요. 저랑 같이 파티에 가요."
"으으…."
파티에 같이 가는 게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면서, 저런 말을 하는 이호연이 미웠다.
어째서 계속 장난스럽게 여지를 주는 걸까.
혹시 정말 진심으로 하는 말일까.
계속 고민하던 백아영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분명 네가 같이 가자고 한 거야. 나중에 후회하지 마."
"후회 안 해요."
이호연은 의자에서 일어나며 생각했다.
'파트너라고 소문나도 나쁘지 않지.'
파티에 참가할 겸사 백아영의 상태를 보러 온 건데, 상태가 너무 양호했다.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몰라도 내려갔던 호감도가 다시 올라왔고, 나를 보는 눈빛에도 원망이 적어졌다.
★ 히로인 상태창
[백아영]
- [ 호감도 : 96 ] (+ 0.7)
- [ 성욕 : 82 ]
- [ 식욕 : 30 ]
- [ 피로도 : 65 ]
현재 상태 : 왜 자꾸… 포기하지 못하게 만드는 거야.
"…."
속마음을 보니 조금 미안하긴 하네.
이번 일만 끝나면 바로 백아영을 해결해야 할 것 같다.
계속해서 터지는 사건 때문에 어쩌다 보니 비운의 여주인공이 되어버렸다.
더 걱정하기 전에 해결해줘야지.
그래도 이렇게 밀당을 해줘야 당길 때 확 당겨지는 법이다.
내가 개발한 여자를 꼬시는 작용반작용의 법칙이다.
"여보, 이리 와요."
"……네. 여보."
콩닥콩닥-
백아영의 가슴이 뛰었다.
파블로프의 개처럼 여보라는 단어에 설레게 되는 자신이 미웠다.
'하지만, 그리 싫지 않아.'
백아영은 의자에서 일어나 이호연에게 안겼다.
"삼일만이네요."
"응, 여보… 자, 잠시만 적어도 문은 잠그고…."
"들어올 때 이미 잠가놨어요."
"흐으읏…."
백아영은 이호연의 손길에 몸을 맡겼다.
하나씩 옷이 벗겨질 때마다 두근거림이 심해졌다.
과연 이 두근거림을 언제까지 느낄 수 있을까.
어쩌면, 정말 이뤄질 수도 있지 않을까.
백아영은 언젠가 같은 가정을 이루고 여보라는 호칭이 어색하지 않을 때가 오길 바라며 이호연에게 안겼다.
"쪼옵… 쫍."
관계를 끝낸 후, 백아영은 내 자지를 물고 있었다.
"맛있어요?"
"응… 여보 자지 맛있어. 쪽."
나는 편하게 누워있고, 백아영은 고양이처럼 몸을 만 채 엎드려 내 다리 사이에 들어가 있다.
방금 사정을 끝냈는데도 내 물건은 단단했다.
나는 열심히 내 자지에 봉사하는 백아영의 볼을 쓰다듬었다.
그 맛있는 자지가 겨우 몇 시간 전에 임솔의 입에 들어갔다 나온 자지인 걸 알까.
"아영 씨. 이제 그만."
"푸하… 하아, 하아…."
숨을 몰아쉬는 백아영의 머리를 만지다가 옷을 챙겨입었다.
"다음엔 파티에서 봐요."
"… 응. 알았어."
시무룩한 표정을 하는 백아영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주었다.
그래도 오늘은 최대한 맞춰주었다.
백아영이 원하는 대로 해주고 섹스 내내 할 수 있는 만큼 배려해줬다.
이 정도면 그래도 많이 당겨졌겠지.
요즘 너무 밀어낸 느낌이라서 미안했거든.
나는 옷매무새를 정돈하고 백아영에게 인사를 한 뒤에 양호실을 나왔다.
'오후 수업은 끝났겠지.'
설령 끝나지 않았더라도 중간에 들어갈 생각은 없다.
나는 그대로 기숙사로 향했다.
*
A클래스 강의실.
빈자리들을 보며 노 교수가 한숨을 내뱉었다.
"하아… 시험이 끝났다고 바로 수업을 빠지는 생도들의 모습을 보니 한숨만 나오네요. 지금 자리에 없는 생도들은 다음 시험에 피눈물을 흘리며 돌아올 겁니다."
교수는 자리에 없는 생도들에게 매우 실망한 듯 했다.
하지만 아카데미에서 최소한의 출석만 하면 더이상 출석으로 점수를 깎을 수 없게 만들어놨기에, 할 수 있는 건 한숨밖에 없었다.
그리고 자신의 수업을 모두 들은 생도들에게 조금이라도 유리하게 시험을 내는 게 교수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복수였다.
"필기 1등이 시험 끝나자마자 도망간 게 레전드네. 큭."
"그만큼 지루하셨단 거지."
물론 노교수의 수업이 지루한 걸 아는 생도들은 다음 수업엔 자기도 도망쳐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때 루시는 맨 앞자리에서 수업을 들으며 턱을 괴고 있었다.
"오늘도 바쁜가 보네."
이호연은 어제처럼 점심시간부터 또 사라져버렸다.
오늘은 꼭 카페에 가고 싶었는데.
루시는 아쉬움을 달래며 옆에 루미를 바라봤다.
평소에는 이호연이 없으면 항상 시무룩했는데,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 보였다.
"루미."
루미는 루시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방긋방긋 웃으며 스마트워치를 바라봤다.
"루미이?"
콕. 콕.
"으, 으응? 왜 그래 루시?"
볼을 찔리자 루미는 그제서야 고개를 돌렸다.
"무슨 생각 하길래 그렇게 혼자 웃어?"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멍때리고 있었어. 헤헤."
"…그러시구나."
또 거짓말이다.
루미는 딱봐도 거짓말하는 게 티가 난다.
쩝.
어쩌겠어. 그냥 창피한 생각이었나 보지.
자신도 가끔 그런 생각을 하곤 하니까 이해해야 한다.
루시는 아쉬운 듯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이었다.
"내일 수업 끝나고 같이 카페 가자. 이호연은 바빠서 못 갈 것 같으니까, 우리 둘이라도 가자."
"응? 어… 내일은 나도 일이 있어."
"무슨 일인데?"
"컨디션이 안 좋아서…."
"내일 컨디션을 지금 알아?"
루미는 루시의 눈을 피했다.
"미안해 루시. 내일 모레는 괜찮아. 그때 꼭 가자."
"… 그래. 알겠어."
루시는 요즘 따라 느껴지는 이 소외감이 가슴에 걸렸다.
자신에게 아무것도 숨기는 게 없던 동생이었는데.
언제나 자신의 편이었던 동생과 조금이지만 멀어진 것 같았다.
*
지루한 수요일의 오후 수업이다.
이틀 연속 수업을 빼먹었으니, 하루 정도는 들어줘야지.
물론 자리를 지키기만 하고 수업을 듣진 않았다.
당장 급한 일이 너무 많아서 머리를 쓰기 싫었다.
수업이 끝나면 루미랑 같이 비밀 친구 활동도 해야 하고, 그 후엔 집에 돌아가 스칼렛에게 보고 받을 게 있다.
"그럼 오늘 수업은 여기서 끝내겠습니다."
수업이 끝나고 이론 수업 교수가 강의실을 나섰다.
테러의 뒤처리 때문에 실기 담당 교수들이 모두 빠지면서, 이론 수업이 이번 주로 당겨졌다.
"이호연. 오늘 진짜 바빠?"
"미안. 요즘 수업도 못 듣는 거 알잖아."
수업이 끝나고 다가온 루시가 카페에 가자고 했지만, 이후에 약속이 있었다..
바로 루미를 만나러 가야 한다.
루시는 입을 우물거리며 나를 째려보다가, 힘없이 내 팔을 잡았다.
"… 역시 신경 쓰고 있는 거 맞지! 내가 미안해. 너무 늦게 사과한 것도 미안하다구…."
"아니… 신경 안 써. 정말이야."
"미안해… 내가 너무 멍청해서 그래. 알잖아… 나 되게 바보 같고 자존심 강한 거…."
"…."
★ 히로인 상태창
[루시]
- [ 호감도 : 93 ]
- [ 성욕 : 36 ]
- [ 식욕 : 40 ]
- [ 피로도 : 75 ]
현재 상태 : 내 잘못을 어떻게 해야 하지…
'얘는 또 왜 이러는 거야….'
아오, 그 미친년이 고백만 안 했어도 이렇게 안 됐는데.
괜히 루시의 트라우마를 건드려서 애가 이상해졌다.
"루시. 아니야. 난 진짜진짜 괜찮거든? 내가 너무 바빠서 그래."
"그럼 뭐 때문에 그러는데? 적어도 왜 그러는지 얘기해 줄 수 없어?"
일단 루시를 진정시키려고 했는데, 도저히 대답해 줄 수 없는 질문을 해왔다.
남다은을 꼬시느라 하루종일 뛰어다닌다고 할 순 없잖아.
수업까지 빼먹으면서 돌아다녔으니, 변명하려면 제대로 해야 하는데 당장 마땅한 변명거리가 없다.
임솔 교수를 팔아먹으려고 해도 수업을 뺄 변명이 되지 않는다.
"미안…."
괜히 어쭙잖은 변명을 댔다가 들키기라도 하면 더 복잡해질 수 있다.
이럴 때는 그냥 솔직하게 사과하는 게 좋다.
"… 알았어. 갈게."
루시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눈을 살짝 찡그리고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
챙겨줘야한다.
지금이 루시를 챙겨줄 타이밍이 분명한데, 사건이 너무 줄줄이 터지고 있었다.
서바이벌 시험과 축제, 테러, 그리고 남다은까지.
사이사이 엘리스나 백아영, 문수린을 관리하다보니 루시에게 너무 소홀했다.
진짜 몸이 열 개라도 모자라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