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5화 〉145화. 뒤처리 (2)
"아니, 우리 정글은 뭐 하는데! 맨날 나만 죽잖아!"
릴리아나가 소리를 빽빽 지르는 걸 들으며 책상에 있던 지옥의 망나니 소환 계약서를 꺼냈다.
"이게 분명 릴리아나 손으로 잡아야 숨겨진 조항이 보였었지."
지옥의 계약서라는 이름값을 제대로 하는 놈이다.
물론 나도 스칼렛한테 써먹긴 했지만, 어쩌겠어. 누가 속으래?
내가 지옥의 계약서를 꺼낸 이유는 릴리아나의 어머니와 연락할 수 있는지를 알아내기 위해서다.
방구석 백수 릴리아나와 달리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신 릴리아나의 어머님은 마왕에 대해서 알지도 모르니까.
"분명 내용이… [피계약자가 지금까지의 행동을 반성하고 계약자도 그에 동의할 때, 원래 세상과 연락할 수단을 부여한다.]였지."
릴리아나가 처음 어머니에게 편지를 보냈던 날은 당연히 기억하고 있다.
그때 나타난 문구를 생각해보면, 한 번뿐이라는 말이 없었다.
즉 다시 지옥과 연락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나는 계약서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혹시 말을 걸면 되지 않을까?
"저기요. 그 연락할 수단 좀 한 번 더 줄 수 있어요?"
스르륵-
그러자 계약서에서 마력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지옥의 망나니 소환 계약서를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서큐버스 '릴리아나'와의 계약이 안정적으로 변했습니다.]
[그에 따라 계약자의 동의가 있다면 릴리아나의 '어머니'와 연락할 수단을 제공합니다. 동의하십니까?]
"아니, 진작 해볼걸."
설마 이렇게 쉽게 되는 거였다고?
그냥 하고 싶을 때 연락할 수 있는 건가?
[마력 충전의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한 달에 한 번 연락 할 수 있습니다.]
"아하… 아쉽네."
계약서는 내 마음도 읽는 건지 말로 꺼내기도 전에 대답해줬다.
나풀나풀-
그리고 저번에 릴리아나가 사용한 편지지가 하늘에서 살포시 떨어졌다.
'…생각해보면 이건 최상품이었지.'
길 스티븐의 주머니에서 얻은 지옥의 계약서는 등급이 중상이었다.
하지만 지옥의 망나니 소환 계약서는 최상급이다.
그러니까 효과가 좋을 수밖에.
────[ 지옥의 망나니 소환 계약서 ]────
▶ 등급 : 최상
▶ 지옥의 마력이 담긴 소환 계약서다. 소환하는 놈들의 질은 나쁘지만, 새겨진 마법 자체는 초 고등 마법이기에 최상급의 계약서다.
▶ 지옥에서 애물단지 취급을 받는 망나니들을 소환해 계약할 수 있음.
────────────
"으음…."
지옥의 망나니 소환 계약서.
나는 계약서에서 강조하는 '망나니'라는 단어가 괜히 마음에 걸렸다.
그때 나왔던 선택지도 어이가 없었다.
1. 인육에 미친 정육점 사장 악마 루시퍼
2. 지옥 아카데미 아다폭격기 금태양 인큐버스
3. 20년째 F급 용병. 백전백패 노장의 저력 켄타우로스
4. 50살째 노처녀 거미줄치기 장인 서큐버스
선택지만 봐도 머리가 아파진다.
지금은 많이 좋아졌지만, 처음 소환된 릴리아나는 정말 망나니 그 자체였다.
방구석에서 게임만 하며 세상과 등진 삶이었으니까.
그런데 클리셰적으로 생각해봤을 때… 망나니는 보통 잘나가는 집안이다.
길거리에서 행패를 부리는 노숙자한테 망나니라고는 잘 안 하거든.
그냥 미친놈이라고 하지.
하지만 근본 있는 귀족이나 왕족의 자식이 막 나가면 망나니라고 하는 법이다.
"…저게 잘나가는 집안 자식이라고?"
나는 슬쩍 방문 사이로 방송하는 릴리아나를 훔쳐봤다.
"50만 원 감사합니다~ 롤리로리롤리~. 옷 더 야한 거는 없냐구요? 응. 안 보여줘. 변태 새끼 들아."
릴리아나는 후원을 해준 시청자와 싸우면서 배짱장사를 하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닌데."
하긴 아까 자기는 평범한 집안 사람이라 마왕에 대해 잘 모른다고 하기도 했으니… 그냥 오해한 걸지도 모른다.
'히로인 상태창.'
★ 히로인 상태창
[릴리아나]
- [ 호감도 : 90 ] ( +0.8 )
- [ 성욕 : 92 ]
- [ 식욕 : 45 ]
- [ 피로도 : 35 ]
현재 상태 : 아, 빨리 방송 끝내고 치킨 먹고 싶다. 치킨 먹고 또 섹스해야지.
이거 말고 점수를 보고 싶은데.
이 세계에 미치는 영향력에 따른 점수를 보고 싶다.
릴리아나는 원래 히로인이 아니라서 점수가 부여되니까.
[현재 공략 가능성이 높은 여성 : 임솔(94점), 릴리아나 (70점), 레베카 (85점), 스칼렛 (32점)… ]
생각을 하자마자 내 눈앞에 시스템 창이 나타났다.
"70점…?"
분명 릴리아나는 65점이었는데, 5점이 늘어났다.
임솔도 93점에서 1점 오른 94점이 되었다.
'영향력이 올라갈수록 점수가 실시간으로 바뀌는구나.'
새로운 정보를 또 알았다.
근데, 임솔은 그렇다 치고 왜 릴리아나가 70점이야.
진짜 뭔가 있는 것 같기도 한데… 아니면 그냥 내가 강해진 만큼 릴리아나도 강해져서 그런 건가?
엘리스에게 심어놓은 스파이인 스칼렛은 32점이다.
역시 원작에서 비중이 없다 보니 0.3 임솔 밖에 되지 않는다.
가성비가 안 좋다.
"레베카는 또 누구야?"
레베카.
기억에 없는 이름이 공략 가능성 높은 여성 리스트에 올라와있었다.
85점이나 되는 인물이면 원작에 나오는데 이름을 모르는 캐릭터거나, 원작에 나오지 않더라도 이 세계에서 굉장히 유명한 인물일 텐데….
그런 여자가 한 둘이어야지.
애초에 85점이라는 점수가 유명세나 힘, 자산 등 어떤 영향력을 기준으로 한 건지 알 수 없으니 확실하게 특정할 수도 없다.
'일단 패스해야겠네.'
내가 모르는 인물이면 인터넷 검색을 해본다고 해서 나올 리가 없다.
나는 한 번 스쳐 지나간 정보도 다 기억할 수 있으니까.
"잠시만 화장실 좀 갔다 올게요."
때마침 릴리아나가 잠시 방 밖으로 나왔다.
"뭐야. 왜 내 방 훔쳐보고 있어?"
방 앞에서 기다리던 나와 눈이 마주친 릴리아나에게 편지지를 내밀었다.
"릴리아나. 어머님한테 연락할래?"
"엥? 갑자기?"
"응. 내가 널 위해 계속 찾아봤는데 한 달에 한 번 연락할 수 있대."
내 손에서 편지지를 가져간 릴리아나는 입맛을 다시며 편지지를 책상에 올려놨다.
"알겠어. 흐음. 엄마는 좀 불안한데."
나름 소소하게 점수를 따려고 했는데 영 반응이 별로다.
분명 저번에는 엄마랑 연락하게 해달라면서 울고불고했잖아.
갑자기 왜 그래.
"왜? 별로야?"
"그런 건 아닌데… 엄마는 내 연적이야."
"…?"
"아무것도 아니양. 나 화장실 가야 해. 비켜."
"어, 응."
릴리아나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연적… 내가 뜻을 잘못 알고 있나?"
연애의 적.
어쩌면 지옥에서는 다른 뜻일지도 모르겠네.
나는 소파에 앉아 지옥에서 연적이 무슨 뜻일까 고민했다.
*
다음 날 금요일.
생도들의 안전을 위해 기숙사 밖으로 나오지 말라는 아카데미의 공지는 하루 더 늘어났다.
금요일까지 기숙사에 갇힌 생도들은 다른 생도의 방에 놀러 가서 놀곤 했다.
루시도 루미의 방에 쿠키를 구워서 놀러 왔다.
"루미, 이거 맛있지 않아?"
"응. 맛있어."
"헤헤. 이제 실력이 많이 늘었어. 그치?"
"대단해. 루시."
루시는 자신의 쿠키가 맛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버리고, 맹훈련에 돌입해 드디어 맛있는 쿠키를 구울 수 있게 되었다.
"내일 이호연한테도 갖다줘야겠다. 이 정도면 맛있게 먹겠지."
"호연 씨는 그때도 맛있게 먹어줬잖아."
"그, 그건 그냥 맛있게 먹은 척을 해준 거잖아!"
이호연이 맛있게 먹어줘서 다른 친구들한테도 맛을 보여줬다가 독약 맛이 난다는 말을 듣고 받은 상처는 아직 루시에게 남아있었다.
"루미. 우리 이거 해보자. 성격 테스트."
"응응. 좋아."
보통 루시가 주도해서 무언갈 하자고 하면 루미는 무조건 오케이였다.
어릴 때부터 부모 없이 서로에게 의지하며 살아온 루시와 루미는 서로의 얼굴만 봐도 행복했다.
"이건 어때. 남자 친구와 같이 놀러 간다면? 1번. 놀이공원. 2번. 동물원. 3번. 워터파크."
"난 놀이공원이 좋아."
"어, 나는… 동물원? 워터파크는 수영복 입어야 하잖아."
루시는 몸매 노출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남자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웠으니까.
"잠깐 손 좀 씻고 올게."
여전히 화장실 간다는 말을 못 하는 루미를 보며 루시는 살짝 웃었다.
루시는 얼마 차이나지않는 쌍둥이라도 항상 언니로서 동생을 잘 돌봐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릴때부터 그랬으니까.
그게 과보호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성격 테스트도 재밌네."
스마트 워치에 띄워져 있는 다른 성격 테스트를 보며 루시는 생각에 잠겼다.
[남자친구를 사귄다면? 1. 자연스러운 만남. 2. 소개팅, 미팅. 3. 지인으로부터 소개.
"으음… 남자친구."
내가 남자친구를 만난다면 어떻게 하면 될까.
루시는 문득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랐다.
"… 왜 이래. 진짜."
고개를 휘휘 저은 후에 다시 화면을 바라봤지만, 머릿속에서 한 남자의 얼굴이 떠나질 않았다.
"으으…."
루시는 이호연과 루미, 그리고 자신의 애매한 관계를 인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평생 루미를 봐온 루시는 루미의 행동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수 있다.
루미는 이호연을 좋아한다.
그리고 아마 이호연도 루미에게 호감이 있다.
자신보다 루미에게 조금 더 친절하게 대해주는 걸 느낄 수 있으니까.
루시는 이렇게 계속 친구로 지내고 싶었다.
평생… 아무도 이어지지 않고 셋이 놀고 싶었다.
그래야 자신이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하아…."
루시는 그냥 머리가 복잡해졌다.
*
금요일 아침.
오늘도 밖에 못 나간다는 공지를 받았다.
"흐아앙…."
나는 내 옆에 알몸으로 누워있는 릴리아나의 가슴을 만지며 정신을 각성했다.
밖에 나가질 못하니 할 게 릴리아나와 섹스밖에 없었다.
"하으읏… 주인님. 아침부터 해요?"
"그냥 부드러워서 만지고 싶었어."
"흐응."
오늘은 뭘 할까.
릴리아나와 섹스는 이따가 하고, 일단 아침을 먹어야겠다.
"치킨 먹자."
"치킨은 질리는데."
"왜애… 치킨 먹자. 오는 동안 땀 좀 빼면 되잖아. 응? 주인님."
"…그럴까?"
딸랑-
그때 기숙사 창문에 설치해놓은 종이 울렸다.
"스카웃이다!"
"스칼렛이라니까."
우리 둘은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로 나갔다.
큰 통창밖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내가 창문을 열자 스르륵- 하며 스칼렛이 천장을 기어들어 왔다.
타닥-
"오오. 멋있다. 스카웃."
짝짝.
멋지게 착지한 스칼렛을 보며 릴리아나가 박수를 쳤다.
"스칼렛. 벌써 보고할 게 있어?"
혹시라도 엘리스에게 걸리지 않도록 기록이 남는 연락수단 말고 직접 얼굴을 보고 대화하기로 했다.
사소한 거라도 도움이 될 것 같으면 보고하라고 하긴 했지만, 보낸 지 하루도 안 돼서 왔다고?
"큰 걸 물어왔습니다. 호연 님."
스칼렛은 오른쪽 귀를 만지작거리더니 피어싱을 빼내서 내게 건넸다.
눈이 번뜩이는 게 꽤 자신만만한 모양이다.
"이리와 스카웃."
"네, 네엣."
릴리아나와 스칼렛이 노는 동안 나는 피어싱을 스마트 워치와 연결해 안에 들어 있는 영상을 확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