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7화 〉127화. 릴리아나
화르륵-!
캠프파이어처럼 타오르는 세계수 위에서 엘프가 소리를 지르며 떨어졌다.
'어….'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엘프는 떨어지긴 했지만 큰 상처가 없어 보였다.
이러면 엘리스랑 루시를 데려온 의미가 있지.
"가라. 엘리스, 루시, 루미!"
"…?"
엘리스와 루시는 무슨 개소리냐는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미안. 나 마나가 없어서 못 싸워."
"그걸 이제 말하면 어떡해! 이 바보야!"
"괜찮아. 너희라면 할 수 있어."
-키야아아악-!
나무 밑으로 떨어진 하이 엘프는 활을 주워들고 활활 타는 세계수를 지키기 위해 달려갔다.
종족이 종족인지라, 엘프는 세계수를 자기 목숨만큼 소중히 여긴다.
그 습성을 이용해서 엘프를 잡기 전에 세계수를 먼저 없애야 한다.
그러면 엘프의 정수를 얻을 수 있다.
물론 서바이벌 시험장에 왜 엘프와 세계수가 있냐고 하면… 나도 모른다. 원작에서 그렇게 나왔으니까 그렇지. 내가 어떻게 알아.
촤자작-
루미의 쉴드가 화살을 막아내고 루시가 견제 마법을 쏘는 동안 엘리스는 엘프에게 쇄도했다.
"들어갈 테니까 엄호해."
엘리스는 루시와 루미에게 엄호를 부탁하며 화살 사이를 파고들었다.
하이 엘프는 서늘한 눈빛으로 화살을 사방으로 쏘아댔다. 화살은 말도 안 되는 곡사로 꺾이며 세계수를 태우는 나를 노려왔다.
자신을 노리는 엘리스보다 나를 더 신경 쓰는 것이다.
두근.
나는 바닥까지 떨어진 마나를 짜내어 '개안'을 사용해 화살을 피해냈다.
세계수를 태우는 불을 유지하는 게 마나를 엄청나게 잡아먹어서 코튼 가드를 치기에도 마나가 부족했다.
-크으으으으-!
다행히 내게 화살이 더 쏘아지진 않았다. 엘리스가 엘프에게 달라붙어 검을 휘둘렀기 때문이다. 루시와 루미는 그 뒤에서 마법으로 엘리스를 지원하고 있었다.
콰드득!
"조심해! 바닥에서 뿌리 올라온다!"
쿵- 쿵- 쿵-
하이 엘프의 마법으로 바닥에서 솟아오른 세계수의 뿌리들이 엘리스를 내려찍었다. 다행히 내 소리에 반응한 엘리스는 재빨리 옆으로 뛰며 뿌리를 피해냈다.
"아악! 왜 이렇게 많아!"
루시와 루미도 예외는 아니었다.
엄청나게 많은 뿌리들이 우리를 공격하고 있었지만, 이건 회광반조(回光返照)나 마찬가지다.
내가 세계수를 거의 다 불태웠기 때문이다.
-키아아아아악!
엘프는 그 사실을 인지하고 소리를 질러댔지만, 이미 늦었다. 싸움이 시작하기 전부터 세계수에 화력을 집중한 덕에 이미 그 거체를 가눌 수 없을 만큼 타버렸다.
엘리스는 엘프의 상태가 좋지 않은 걸 파악하고 공세를 이어가며 시간을 끌어줬다.
솟아오르는 뿌리를 베어내며 엘프까지 압박하는 검술은 내가 보기에도 대단한 수준이었다.
시간은 우리 편이었다. 엘프는 어쩔줄 몰라 하며 나를 화살로 노리려 헀지만, 엘리스가 빈틈을 줄리가 없었다.
결국 몇 십분 만에 세계수는 완전히 타버렸다.
쿠웅-!
커다란 소리를 내며 옆으로 쓰러진 세계수는 그 힘을 잃었다.
우리를 덮치던 뿌리들도 사라지고, 엘프는 활을 들고 망연자실한 채 세계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 상태로 10초 정도 기다리면 끼애애액 하면서 울부짖은 엘프가 각성하게 된다.
그리고 각성한 엘프를 잡으면 엘프의 정수를 얻을 수 있는데… 저거 굳이 기다릴 필요가 있나?
나는 세계수를 바라보며 입을 떡 벌리고 있는 엘프를 향해 다가가서, 배에 스파이럴을 꽂아버렸다.
-흐윽… 흐윽… 크아아…!
콰지직!
훌쩍거리다가 각성의 소리를 지르려는 엘프는 내 스파이럴에 몸이 찢겨버렸다.
"어으… 그로테스크."
인간형 괴수를 찢는 건 정말 기분 나쁜 경험이었다.
엘프의 심장 부근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구슬을 슬쩍 챙긴 후에, 뒤를 돌았다.
"얘들아~ 처리했다."
기쁜 표정으로 내 승리를 알렸는데, 애들 표정이 영 좋지가 않다.
"나무를 불태웠더니 갑자기 죽어버렸어…? 엘프의 습성인가?"
"뭔가 꺼림칙해…."
"잘하셨어요. 호연 씨…!"
아무래도 직접 엘프와 싸우던 엘리스와 루시는 엘프의 행동에 약간 어색함을 느낀 것 같다.
그래도 루미는 내 편을 들어줘서 기뻤다.
"고마…. 윽"
머리가 지끈지끈하고 시야가 뱅뱅돌았다. 너무 어지럽다.
마나가 진짜 얼마 남지 않았다. 마나 탈진이 오기 직전이었다.
포인트 랭킹을 확인하니 다행히 남은 생도는 10명도 채 되질 않았다.
"저거… 알아서 해줘."
나는 손가락으로 엘프를 가리켰다.
엘프의 코드를 읽으면 350점이라는 큰 점수가 부여된다. 어차피 생도가 얼마 남지 않긴 했지만… 그래도 점수를 버릴 순 없으니까.
미니맵에서 보이는 생도들은 모두 멀리 위치해있었으니 이제 위험할 일은 없을 거다.
"얘들아… 나 좀 잘게."
나는 아공간에서 텐트를 꺼내 그 안에 들어가 눈을 감아버렸다.
"야… 괜찮아?"
"저희가 망보고 있을게요."
"…."
"응… 부탁해."
나는 루시와 루미가 걱정해주는 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잠에 들었다.
*
"일어나."
툭. 툭.
누군가 내 몸을 치고 있다.
"으음…."
게슴츠레 눈을 뜨자 엘리스가 위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네가 마지막이야. 불침번."
"아…."
어차피 위험한 건 없을 텐데… 그래도 확실한 게 좋긴 하지.
나는 정신을 차리고 몸을 일으켰다. 내 양옆에는 루시와 루미가 몸을 동그랗게 말아서 자고 있었다. 루시와 루미의 자는 모습을 구경하며 옷을 정돈한 뒤에 텐트에서 나왔다.
바깥은 완전히 밝은 낮이었다.
"들어가서 쉬어. 고마워."
"응."
엘리스도 피곤을 감추지 못하고 하품을 하며 텐트에 들어갔다.
벌써 낮 12시가 넘어있었다. 아마도 내 취침 시간을 위해 세 명이 긴 시간 동안 돌아가며 불침번을 선 모양이다.
"아주 착해. 내가 히로인들은 잘 키워놨어."
음. 만족스럽다.
나는 주머니에 있던 엘프의 정수를 꺼냈다.
────[ 엘프의 정수 ]────
▶ 등급 : 상
▶ 하이 엘프가 세계수를 지키기 위해서 모은 마나의 정수
▶ 흡수할 시 매력이 증가하며 잘생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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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프의 정수의 효과는 매력 증가.
매력은 상태창에도 없는 스탯이다.
그리고 잘생겨진다니 얼핏 들으면 쓸모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주인공 버프를 받는다면 달라진다.
기본적으로 매력이란 것은 얼굴이 잘생긴 걸 말한다. 올라갈수록 얼굴이 잘생겨진다.
하지만 매력이 올라가기 전부터 잘생김의 끝에 달했다면 어떨까?
그냥 적당히 잘생긴 게 아니라, 오히려 손을 대면 망가질 정도로 말도 안 되는 얼굴이어야 한다.
예를 들면…. 나처럼.
그런 잘생긴 사람이 매력을 올리면 어떻게 되냐 하면, 다른 게 잘생겨진다.
첫 번째는 몸. 신체의 조형이 아름다워지고 이상적으로 변한다.
두 번째는 신체 내부.
혈관이나 마력 회로, 장기 등이 효율적으로 변한다.
'잠시만… 이거 엘리스가 먹으면 마력 장애 치료되겠네?'
원작에서는 그 즉시 섭취해서 생각도 못 했던 전개다.
물론 치료가 된다고 해도 내가 먹을 거다. 엘리스는 나중에 치료해야 하니까.
"나가서 먹어야지."
이게 게임도 아니고, 시험 중에 영약을 먹을 순 없다. 시험이 끝나고 집에서 천천히 흡수하기 위해 엘프의 정수는 아공간 주머니에 다시 잘 넣어놨다.
*
[특별 시험 종료. 곧 아카데미로 텔레포트 됩니다.]
일요일 오후 10시. 드디어 개 같은 특별 시험이 종료되었다.
엘프의 정수가 목표긴 했지만, 엘프의 정수 말고도 엘리스와의 관계에 진전이 있어서 괜찮은 성과를 얻었다.
성적은 아직 공개되지 않았다. 하지만 압도적인 포인트 차이가 있었으니 1등은 나겠지.
엘리스도 이제 성적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 듯했다. 아마 마력 장애를 고칠 수 있는 가능성을 찾아서 그쪽에 더 집중하는 모양이다.
"응. 세바스 찬. 마나 마사지사를 찾아야…."
엘리스는 시험이 끝나자마자 강의실 구석에서 열심히 통화를 했다.
다른 생도들은 강의실 책상에 다들 엎드려 있었다.
먼저 탈락한 생도들은 시험이 끝날 때까지 아카데미에서 잡아 둔 숙소에 갇혀있었다고 한다.
"으아아… 끝났다. 나는 이제 기숙사 침대에서 안 나갈 거야…."
"축제 기간에 안 돌아다닐 거야? 루시?"
루시도 축 늘어져서는 피로한 표정이었다.
"아악… 축제 때 놀고 싶긴 한데. 이호연 너는 어떡할 거야?"
"나? 글쎄."
솔직히 축제 때는 계획이 없다.
나도 좀 힘들어서 기숙사에서 쉬고 싶은데… 만날 사람이 좀 많다.
그러고 보니까 축제 때 그 부회장이랑 대련도 해야 하네. 서바이벌을 신경 쓰느라 아예 까먹고 있었다. 축제 시작할 때 한다고 했는데… 정확히 언제 쯤이지?
릴리아나도 빨리 보러 가야 한다. 밥은 잘 챙겨 먹었겠지?
드르륵-
그때 문을 열고 담임 교수인 김진혁이 강의실로 들어왔다.
단단한 구두 소리에 늘어져 있던 생도들도 하나 둘 씩 몸을 일으켰다.
"아주 얼굴들이 좋아 보여. 시험은 끝이다. 시간이 늦었으니 기숙사에 사는 사람들은 빨리 들어가도록 해. 내일부터는 축제니까 재밌게 즐겨라. 그럼 이만."
'참 일 처리 대충하네.'
물론 메디컬 체크는 다 끝냈으니 문제는 없겠지만… 뭔가 찝찝하다.
다른 생도들은 불만을 말할 힘도 없는지 좀비처럼 흐느적거리며 강의실을 나갔다.
"나도 가서 쉴래… 그럼 나중에 봐. 가자. 루미."
"응. 축제 때 봬요. 호연 씨."
"알았어. 연락할게."
루미는 늘어진 루시를 데리고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나도 슬쩍 강의실을 나와서는 전화하고 있는 엘리스에게 다가갔다.
"응. 잘 부탁해. 세바스 찬."
마침 전화도 다 끝난 모양이다.
"엘리스. 고생했어."
"너야말로. 이번엔 고마웠어."
"마나 마사지 잘하는 분 꼭 잘 찾고… 궁금한 거 있으면 언제든지 물어봐."
"알았어."
엘리스에게 인사도 할 겸, 슬쩍 언제든지 궁금한 걸 물어보라는 말을 남겨주고 기숙사로 향했다.
'언제쯤 연락이 오려나.'
아마 바로 오진 않을 거다. 마사지 사를 적어도 몇 명이상 써볼테니까.
밤 10시가 넘는 시간이다보니, 기숙사까지 가는 길은 어두웠다.
오랜만에 숲이 아니라 가로등이 켜진 도로를 걷는 기분은 좀 이상했다.
"와… 메시지 엄청 와 있네."
스마트 워치에는 메시지가 엄청나게 쌓여있었다. 이건 좀 쉬고 나서 여유롭게 확인해야겠다.
나는 릴리아나에게 지금 간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방송은 잘 했을거고… 혼자 밥 잘 챙겨 먹었겠지?'
띠링-
일주일 만에 돌아온 기숙사는 역시 그대로였다.
하지만 이상하게 조용했고….
"하아…! 하아…."
철벅 철벅
음란한 물소리와 낮은 신음소리가 방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
나는 천천히 방에 다가가 문을 열었다.
"하윽… 끕…!"
방 안은 완전히 엉망이었다.
입구만 뜯어진 채 널브러져 있는 즉석식품들.
언제부터 열려있던 건지 모를 김이 다 빠져버린 콜라.
흠뻑 물을 머금은 스펀지처럼 젖은 침대.
그리고… 꼬리를 축축한 보지에 넣은 채 몸을 움찔거리고 있는 변태 서큐버스.
"릴리아나…?"
도대체 저게 무슨 꼴이야.
심지어 눈도 초점이 맞지 않는 게 정신을 차리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주인님…."
"릴리아나!"
목이 쉬어버린 건지 힘들게 목소리를 내뱉는 릴리아나에게 달려가 몸을 끌어안았다.
설마 밥을 챙겨 먹는 게 문제가 아니라 발정난 게 문제였다니.
"미안해. 설마 이럴 줄은… 릴리아나?"
흐. 흐.
하는 작은 웃음소리가 내 품에서 들렸다.
이상함을 느낀 나는 슬쩍 릴리아나를 밀어내며 상태를 살폈다.
"주인님… 다 주인님 때문이야…."
바들바들 떨던 릴리아나는, 어느새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씩 웃고 있었다.
콰드득!
몸 끝부터 올라오는 공포를 감지함과 동시에 무언가가 내 머리를 강하게 후려쳤고, 나는 그대로 정신이 아득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