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5화 〉125화. 서바이벌 시험 (18)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오랜만에 느끼는 전투 감각이 온몸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서바이벌 시험 내내 강적을 만난 적이 없어서 그런지 더욱 긴장됐다.
지금 이곳은 안전장치 하나 없는 무인도다.
저번 1대1 결투처럼 안전장치가 없는 이상 전력을 다할 수 없다. 혹시라도 남다은이 크게 다칠 수 있으니까.
지이잉-
하지만 남다은은 그런 걸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공간 지배]를 사용했다.
화려한 자줏빛 마력이 검을 감쌌다.
"야…. 나 죽이려는 거 아니지?"
"괜찮아. 조절할 수 있어."
걱정하지 말라는 듯 자세를 잡고 나를 노려보는 모습이 너무 무서웠다.
'시발….'
원래 좋아하는 사람이 지는 거라던데, 공략해야 하는 사람이 지는 건가.
다행히 허리에 매달려있는 아티팩트들을 쓸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나도 승산이 있다.
남다은을 쓰러뜨리는 게 아니라, 스마트 워치를 노리면 되기 때문이다.
스마트 워치를 뺏거나 스마트 워치에 붙어있는 스티커를 강제로 태워버리면 내 승리다.
타앗-
남다은은 자신있는 듯 내게 먼저 달려들었다.
두근.
내 감각이 더욱더 날카로워지고 남다은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눈에 읽혔다.
'개안'
개안을 활성화하고 룬의 결계까지 펼쳤다.
공간 지배를 떨쳐내기 위함이다. 룬의 결계로 남다은의 공간참을 막을 수 있다면, 단순히 날카로운 검이 될 뿐이다.
콰드득.
남다은이 다리에 마력이 집중하는 걸 포착했다.
그와 동시에 나도 가속을 발동하며 공격을 대비했다.
카앙-!
공간 가속으로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남다은의 검격을 코튼 가드로 막아내며 뒤로 거리를 벌렸다.
"… 빡세네."
"저번보다 조금 늘었지?"
"그러게. 열심히 수련했나 봐."
발로 바닥을 슥슥 긁으면서 남다은에게 말을 걸었다.
수련을 시작한 지 일주일 만에 성장이 느껴진다니, 말도 안 되는 재능충이다.
"다시 간다."
남다은은 약간 입꼬리를 올리며 검을 들었다.
누군 힘들어 뒤지겠는데 아주 즐거워 보인다.
나는 한숨을 삼키며 남다은과 거리를 벌렸다.
*
남다은과 이호연을 둘러싸고 있는 80명의 생도들은, 아무 말을 꺼내지 못했다.
우리 모두 비슷한 아카데미 생도 수준이라는 안일한 생각을 저 둘이 다 깨부숴주고 있었다.
"대장님. 저 두 명이 합세하면 우리 다 덤벼도 힘들 것 같은데."
"그 정도는 아니야."
다들 저 둘의 말도 안 되는 움직임에 놀라고 있지만, 김영한은 차분하게 판단했다.
한 명당 생도 15명 정도면 잡아놓을 수 있다.
물론 그게 얼마나 말이 안 되는 전투력인지는 굳이 말로 꺼내지 않았다.
"진짜 괴물이네 저거…."
"앞으로 비추천 안 눌러야겠다… 들키면 죽을지도 몰라."
"근데 저번 1대1 결투랑 조금 다르네? 남다은은더 빨라졌고 이호연은 버거워 보여."
눈을 멀뚱멀뚱 뜬 채 대련을 보고 있는 생도들은, 끼어들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굳이 남다은한테 1대1을 시켜줄 의무는 없다.
그냥 저 싸움에 먼저 끼었다가 어떻게 될지 겁나서 저러는 거겠지.
김영한도 마지막 말에는 동의하고 있었다.
다만 이호연이 버거워 보이진 않았다.
굳이 따지자면 남다은은 전력을 쏟고 있었지만, 이호연은 힘을 아끼고 있다고 해야 하나?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네. 우리 미남이."
"뭐가?"
"아니야."
"나도 좀 알려주지. 맨날 뭐 있는 척하고 아무것도 아니래."
옆에서 떠드는 생도의 말을 무시하고 김영한은 계속해서 대련을 분석했다.
*
타앙! 콰앙!
남다은과 나는 공방을 반복하며 자리를 이리저리 옮겼다.
보통 내가 공격을 흘리거나 막고 거리를벌리는 식으로 싸움이 진행됐다.
"하아… 하아…."
바닥을 발로 비비면서 거친 숨을 내뱉었다.
마력을 너무 사용했더니 슬슬 위험할 정도였다.
"왜 계속 도망 다니는 거야."
남다은은 검을 팔 밑으로 내린 채 나를 쳐다봤다.
내 결계를 눈치챈 남다은도 공간 지배의 사용을 멈춰서 검에는 빛이 사라진 상태였다.
장기전으로 가면 내가 불리했다.
"… 정면 싸움이 안되니까 도망 다니지."
"저번에는 했잖아."
"아니, 안전장치 하나 없는 곳에서 그렇게 돌진해오는 네가 이상한 거라고."
"안 죽게 벨 수 있는데."
입술을 삐죽 내미는 게 진짜 서운한 모양이다.
어떤 대련을 기대했는지는 몰라도, 나도 나름대로 승리를 위해 준비중이거든?
일단 시간을 끌면서 주변을 확인한 결과. 다른 생도들이 싸움에 낄 마음이없다는 걸 알았다.
불안 요소인 김영한도 그냥 조용히 내 대련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 준비는 다 끝났다.
생도들이 몸으로 감싸서 만들어진 이 공터 내부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몰래 마법진을 준비했다.
발로 마법진을 그리는 건 처음이라 조금 헷갈렸지만, 몇 번 하다 보니 감을 잡았다.
목표는 남다은의 스마트 워치.
다치지 않게 제압하려면 그 방법밖에 없다.
혹시나 다른 생도들이 끼어들 불안 요소가 사라졌으니, 이제 승부수를 던져도 되겠지.
나는 마력을 끌어올리며 남다은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타앗-
내게 쇄도하는 남다은을 천천히 바라보다가, 검을 피하면서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스파이럴을 손에 만들어냈다.
이걸 제대로 맞으면 남다은도 위험하겠지만, 이렇게 대놓고 사용한다면 피할 수 있을 거다.
남다은은 예상대로 뒤로 빠졌고, 나는 준비해놨던 마법진들을 발동했다.
쾅! 쾅! 쾅! 쾅!
바닥에 깔려있던 마법진 들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지며 불기둥이 땅을 뚫고 솟아올랐다.
나는 재빨리 화염구를 날리며 남다은의 움직임을 제한시켰다.
이리저리 불기둥들과 화염구를 피하는 남다은의 옷을 주시하며, 불씨 하나를 몸에 붙였다.
'됐어.'
작은 불씨 하나는 남다은의 몸 위를 조심스럽게 타고 움직였다.
엘리스와 마사지를 하면서 생긴 기술이다.
남다은도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작은 불씨는 스마트워치까지 도달했고, 나는 화력을 늘려 순식간에 스마트워치를 태워버렸다.
화르륵-!
갑작스럽게 손에서 나타난 불길에 남다은은 당황했지만, 이미 스마트워치는 재가 된 이후였다.
"하아…."
다행히 기습이 먹혔다.
마나를 꽤 많이 사용한 함정이라 안 통했으면 귀찮아졌을 거다.
이제 남은 마나로 어떻게든 이 생도벽을 뚫고 나가면 끝이다.
남다은은 탈락이니까.
"어?"
근데 왜 강제 텔레포트가 안 되지? 원래 바로 텔레포트 되며 탈락해야 하는데.
"…또 졌네."
남다은의 손에는 어느새 새로운 스마트워치가 채워져 있었다.
"뭐야. 너 왜 살아있어."
"목숨 1회 세이브권이 있어. 보스 몬스터를 30마리 정도 잡으니까 주던데."
"…."
아카데미 개새끼들… 저런 걸 만들어 놓으면 어떡해.
원작 게임은 아무래도 야겜 기반이다보니 하루에 잡을 수 있는 보스몬스터가 제한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30마리나 잡을 기회가 없다.
이런 히든피스가 숨어있을 줄은 몰랐네.
"하아… 그래. 네가 이겼다."
어쩔 수 없다. 포기할 건 포기해야지.
서바이벌 시험도 몇 시간만 지나면 7일 차에 접어든다.
그때까지 엘리스, 루시, 루미가 살아있기만 하면 모두 순위권에 들 수 있을 거다.
김영한 팀은 김영한과 남다은 빼고 전멸할 테니까.
대충 히로인들 순위는 높일 수 있겠지.
마지막 보스에서 나오는 히든피스를 못 얻는 게 아쉽긴 한데… 다른 거로 때우는 수 밖에.
철컥. 철컥.
그때 앞에 서 있는 남다은이 스마트 워치를 만지작거리다가, 팔에서 벗겨낸 스마트워치를 내게 집어 던졌다.
"어?"
무의식적으로 스마트 워치를 받고서 남다은을 쳐다봤다.
이거 뭐야. 무슨 상황이지?
"처음부터 주려고 했어. 실기시험 보답."
"…?"
남다은은 무표정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상황 파악을 위해 스마트 워치를 바라보다가,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뱉었다.
"그럴 거면 진작 주지."
"대련 한번 하고 싶어서."
"대련 하고 싶으면 그냥 불러. 언제든지 상대해줄 테니까."
이런 방식이 아니라도 상대해줬을 텐데.
사회생활을 안 해봐서 그런가. 생도들하곤 소통이 참 힘들다.
"야. 남다은! 뭐해!"
우리를 보고 있던 김영한이 내게 스마트 워치를 던진 남다은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내가 졌으니 이제 끝낼 거야."
"그러는 게 어딨어!"
"내가 너랑 무슨 약속을 한 적이 있나?"
"…."
입을 다무는 걸 보니 딱 봐도 간 보겠다면서 팀에 받아준 후에도 계속 눈치를 본 모양이다.
차라리 솔직하게 대화를 시도했으면 이러진 않았을 텐데.
"고맙게 쓸게."
나는 남다은의 스마트 워치를 내 스마트 워치로 읽었다.
"응."
남다은은 짧은 대답만 남기고 텔레포트 마법으로 사라졌다.
이런 걸 받을 줄은 몰랐네. 그래서 서바이벌을 포기 안하고 남아있던 거구나.
나중에 남다은한테 선물이라도 하나 사줘야겠다.
"그럼 이제… 째야지."
아직 생도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처음과 같은 적의는 이미 없었다.
김영한을 제외한 다른 생도들은 상황 파악이 안 된 놈들이 많다.
갑자기 불기둥이 마구 솟았다가, 남다은이 스마트 워치를 내게 주더니 사라져버렸으니까.
상황 파악이 되었더라도 내 전투력을 봤으면 쉽게 덤빌 생각은 안 들 거다.
마지막에 남다은을 덮쳤던 수십 개의 불기둥은 내가 봐도 멋있었다.
주변 땅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쑥대밭이 되었으니 전의를 상실할만하지.
지금이 기회다.
'내 남은 마나량을 들키기 전에 도망간다.'
마나량은 정말 아슬아슬하게 남아있었다. 몇몇 생도들이 바로 정신을 차리고 덤벼들면 그대로 탈락할 수도 있을 정도다.
7일 차까지 남은 시간은 세 시간 정도.
도망칠 기회는 지금뿐이다.
나는 즉시 마력을 짜내어 대련 내내 봐두었던 사람이 가장 적은 곳으로 돌진했다.
"안 비키면 다친다!"
콰앙!
그리고 탈출을 위해 준비해 놓은 마지막 마법진을 터트렸다.
아까보다 훨씬 커다란 불기둥이 솟아올랐다.
당황한 생도들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나는 그 사이로 파고들어 몸을 빼냈다.
"야 이 새끼들아! 그거에 속으면 어떡해!"
마법진은 폭음과 시각적 효과만 있을 뿐 제대로 된 피해를 주는 마법이 아니었다.
김영한이 가장 먼저 눈치챘지만, 이미 늦었다.
뒤에서 들리는 소리 들을 무시한 채 나는 히로인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
"하아… 징하네."
7일 차 까지 남은 시간은 단 5분.
김영한은 꾸역꾸역 팀을 다독이며 나를 몰아붙였다.
지금 나를 둘러싼 포위망을 탈출하기엔 마나가 너무 부족했다.
"근데 늦었어 인마."
이제 5분 뒤면 서바이벌 시험의 최종 보스가 등장한다.
엘리스와 루미 쌍둥이는 1시간쯤 전부터 셋이 같이 모여있었다.
아마 날 둘러싼 생도들을 보고 가까이 오지 않는 모양이다.
좋은 판단이다. 내가 말해놓은 대로 잘 따라주고 있었다.
나를 둘러싼 포위망이 점점 좁혀오고 있었지만 나는 스마트워치만 바라봤다.
58초. 59초. 12시 정각.
7일 차가 된 순간.
어두웠던 밤 하늘에 빛 한 줄기가 내려오고, 그 빛을 중심으로 하늘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와… 게임에선 몰랐는데 미쳤네 저거."
실제로 보니 얼마나 많은 마법 교수들이 갈려 나갔을지가 상상이 된다.
임솔을 중심으로 한 대마법이겠지.
섬 중앙에 있는 커다란 나무에 꽂힌 빛 한 줄기에서 무언가가 등장했다.
띠링-
스마트 워치가 울리며 알람이 나타났다.
[서바이벌 시험 마지막 날이 밝았습니다.]
[하이엘프 사냥꾼이 섬에 등장합니다. 하이엘프는 포인트가 200점 이하인 생도를 우선적으로 노립니다.]
드디어 최종 보스가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