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4화 〉124화. 서바이벌 시험 (17)
6일 차 점심.
"아니, 도대체 왜?"
미니맵에 커다랗게 무리를 지은 점들이 섬 중앙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우리한테 오는 것 같은데."
"도망갈까?!"
"호, 호연씨…."
"일단 기다려봐. 하아. 이 멍청한 새끼들."
김영한이 생각만큼 김영한 팀을 장악하고 있지 않은 모양이다.
엘리스를 제치고 김영한이 3등에 올랐는데도 앞장서서 나한테 쳐들어오고 있는 게 그 증거다.
그 영약한 놈이 이런 멍청한 짓을 할 리가 없다. 상위권인 우리끼리 싸워봤자 좋은 점이 없으니까.
"일단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면서 뒤로 빠지자."
섬 중앙에 가려고 했던 계획은 폐기다.
이대로 가다간 7일 차가 밝기 전에 김영한 팀과 만나게 될 거다.
"루시, 루미. 너희들 포인트 몇이야?"
"저는 180점이에요."
"난 210점!"
"충분하네."
7일 차가 되기 전까지 200점을 유지해야 한다.
그게 살아남기 위한 조건이다. 루미가 부족한 20점 정도는 내가 지원해주면 되니 문제없다.
어차피 남다은을 따라가기엔 늦었으니 포인트는 조금 나눠도 상관 없다. 마지막 보스를 잡아도 좁혀지지 않을 격차가 벌어져 있다.
"이렇게 거리를 유지해서 뭘 하고 싶은 건데?"
"… 일단 기다려봐."
루시나 루미처럼 내 말에 무조건 따라주면 좋을 텐데, 엘리스를 설득하려면 논리를 가지고 와야 해서 너무 힘들다.
"나는 섬 중앙에 뭔가 있다고 생각했어. 섬 가운데에 있는 텅 빈 공터와 커다란 나무 보이지?"
"응."
"저게 무언가 표식이 아닐까 싶어서 섬 중앙에 있으려고 했던 거야. 지금은 일단 후퇴하자."
"그런 견해는 일찍 말해주면 좋겠네. 일단 알겠어."
휴.
속으로 안도의 숨을 삼키며 우리는 김영한 팀의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
김영한은 생도들의 앞에서 이호연을 따라 길을 잡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곧 만난다.'
김영한 팀은 수많은 보스 몬스터를 잡고, 보물을 찾고, 몬스터를 사냥했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아티팩트도 엄청나게 얻었다.
그중에는 작은 공간 내부의 이동속도를 상승시켜주는 아티팩트가 있었고, 버프를 강화시켜주는 아티팩트도 있었다.
처음에는 생도들 몇 명이 장난으로 아티팩트를 만졌었다.
그런데 뜬금없이 이 두 가지 아티팩트의 시너지가 발동되면서 김영한 팀 전체가 빨라져 버렸다.
"이호연 잡으러 가즈아!"
"가보자가보자!"
추적속도가 빨라져 신난 생도들은 손을 들고 김영한의 뒤를 따랐다.
'저 미친놈들은 뭐가 좋다고 환호하는 거야….'
저렇게 신난 놈들이 꼭 제일 먼저 죽더라.
"후우…."
김영한은 80명이 넘는 생도들에게 포인트를 조금씩 받는 입장이다 보니, 가기 싫다고 빠질 수도 없다.
어쩔 수 없이 선두지휘를 하면서 이호연을 쫒았다.
"대장님, 왜 그래?"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그래.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나한테 오는 것보단 이호연을 타깃으로 삼는 게 낫지.
누군가 다 같이 일하는데 왜 너만 포인트 랭킹이 3등이냐 라고 지적하는 순간 끝이다.
물론 보물과 보스몬스터의 코드를 김영한이 독식하고 있어서 다른 생도들은 포인트 랭킹을 확인하지 못했지만, 위치도 공개된 마당에 포인트 랭킹도 공개될 가능성은 열려있었다.
"가자! 남자의 적 미남 이호연 잡으러!"
'미안하다. 미남아….'
김영한은 열심히 생도들을 선동하며 이호연을 쫓았다.
"드가자!"
"남자의 적! 죽여!"
"남자들은 참 단순해. 그래도 다은이가 다 해주겠지?"
"그럼. 다은이가 얼마나 강한데."
김영한 팀은 각자의 목적을 가지고 이호연을 쫒았다.
*
"… 너무 빠른데?"
김영한 팀의 속도가 빨라지길래 우리도 속도를 높였다.
하지만 그에 맞추듯 김영한 팀은 더더욱 빨라졌다.
속도를 높였는데 무슨 비행기라도 탄 건지 전력 질주를 하는 우리보다 3배 이상 속도로 쫒아왔다.
"무슨 아티팩트라도 얻었나 봐."
"이대로 가면 무조건 잡힐 것 같은데."
"…."
우리 팀의 전략 담당인 나와 엘리스가 머리를 모았다.
'지금이라도 위치 좌표를 끌까?'
혹시나 해서 실험해봤는데, 룬의 결계로 배틀로얄에서 제공하는 위치 좌표도 끌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걸 아카데미 측에서 어떻게 받아들일까가 문제다.
생도의 스킬이니까 허락하는 게 맞지만, 다른 생도들에게 불만이 나올지도 모른다.
'시험의 규칙을 생도가 어겼다'는 반응이면 괜찮다. 하지만 '아카데미가 생도의 스킬 하나 뚫어내지 못한다'라는 평가를 받으면 귀찮아질 거다.
빅토리아 아카데미 놈들이 일 안 하는 건 진작 겪어봤으니 또 엮이긴 싫었다.
만약 좌표를 끄더라도 더 이상 피할 수 없을 때 비상용으로 써야 한다.
고의가 아니라고 우기기라도 해야지 뭐 어쩌겠어.
"일단 빠질 수 있을 때까지는 빠지자. 그다음에 내가 시간을 끌어볼게."
"… 네가 왜?"
"도망칠 수 있는 사람이 나 밖에 없잖아."
당연한 수순이다.
아무리 저놈들이 빠르게 우릴 추격해도, 내가 마음먹고 '가속'과 '룬의 결계'를 병행하며 위치를 숨기면 절대 날 잡을 수 없다.
내가 시간을 끄는 동안 엘리스나 루시, 루미가 7일 차가 되는 시간까지만 버티면 된다.
그럼 우리의 승리다.
엘리스는 뜻밖이라는 듯 날 바라봤다.
나만큼 착한 사람이 어딨다고 이러는지 모르겠네.
★ 히로인 상태창
[엘리스]
- [ 호감도 : 42 ]
- [ 성욕 : 38 ]
- [ 식욕 : 25 ]
- [ 피로도 : 45 ]
현재 상태 : 착한 척을 하는 건지… 착한 건지 아직 잘 모르겠어.
우리 엘리스는 얼마나 나쁜 놈들이랑 오래 살았길래 사람을 이렇게 못 믿을까.
힘든 과거사를 다 알고 있으니 이해한다.
너도 곧 내 순수한 마음을 이해해주겠지.
"내 결계알지?"
"알아."
"그걸로 너희 위치 좌표를 잠깐 숨길 수 있어. 내게서 멀어지면 결계가 해제되면서 풀릴 거야. 그때까지 숨어있어. 알겠지? 7일 차로 넘어가는 시간에 4명 위치를 선으로 이은 중심에서 만나자."
옆에서 듣고 있던 루시와 루미와도 눈을 마주쳤다.
두 명은 내가 시간을 끌어준다는 말에 걱정해줬지만, 내가 괜찮다고 신신당부하자 곧 고개를 끄덕여줬다.
엘리스는 결계가 위치 좌표도 차단할 수 있다는 말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더 길게 설명할 시간이 없었다.
이 대화를 나누는 도중에도 김영한 팀은 가까워지고 있었다.
"나는 이쪽으로 갈게. 잘 숨어있다가 합류하자."
아직 김영한 팀이 우리를 따라잡으려면 시간이 필요하지만, 우리 여자들이 숨을 시간도 필요하다.
그 시간을 벌어주려면 먼저 김영한 팀과 마주해야 한다.
"호연 씨…."
"꼭 살아서 돌아와!"
"… 알았어. 고마워."
루시와 루미는 전쟁터에 남편을 보내는 아내처럼 나를 배웅해주고 있다.
곧 만난다니까.
엘리스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손을 가볍게 흔들며 김영한 팀을 향해 달려갔다.
*
"… 뭐지?"
가장 먼저 이상을 감지한 건 당연히 김영한이었다.
선두에서 이호연의 좌표를 몇 시간 째 보며 따라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장님. 왜 그래?"
"미남이가… 이쪽으로 접근하고 있는데?"
이호연의 좌표는 갑작스럽게 유턴해서 이 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무슨 생각이지?'
아무리 이호연이라도 혼자서 80명한테 달려오는 건 말이 안 되잖아.
80명 중에 수준 낮은 생도가 포함되어있더라도, 생도 한 명 한테 질 수준은 절대 아니다.
"다른 여자 셋의 좌표는 그대로… 어?"
방금까지 미니맵에서 깜빡이던 이호연 팀 여자 세 명의 좌표가 사라졌다.
'설마 직접 처리한 건가?'
김영한은 급하게 포인트랭킹을 확인했다.
하지만 엘리스의 이름은 사라지지 않았다. 더 밑에 있는 루시와 루미의 이름도 마찬가지였다.
"설마 우리 미남이가 1대1 결투 준우승 뽕에 취한 건가?"
여자 세 명의 위치 좌표가 사라진 건 위치를 숨겨주는 아티팩트를 얻었을 확률이 크다.
그런 사기적인 아티팩트가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그게 아니면 설명이 되지 않으니까.
"야. 이호연 혼자 이쪽으로 달려오는데?"
"이걸 1 대 80을 한다고?"
"저 정도 패기는 있어야 여자를 얻는 건가…."
다른 생도들도 눈치채기 시작했다.
"대장님. 어떡해?"
"…."
변수가 있나?
곰곰이 생각해봐도 손해 볼 건 없었다.
어차피 이들의 좌표를 추적해가는 길에 이호연을 마주치는 거다.
싸움이 일어난다면 무조건 처리할 수 있다. 싸움이 일어나지 않더라도 김영한 팀의 입장에선 가던 길을 갈 뿐이라 손해가 없다.
"…4팀으로 나눠서 포위해! 이호연이 온다!"
"대장님이 포위하라고 전한다!"
김영한은 당장 할 수 있는 최선의 조치를 취했다.
팀이 4개로 나뉘고 이호연을 감싸는 형태로 접근했다.
이호연은 이 움직임을 다 보고있을텐데도 도망치지 않았다.
'이미 포위망은 완성됐어. 도망갈 길은 없다.'
김영한은 승리를 확신하며 이호연을 맞이했다.
혼자 서바이벌이 아니라 캠핑을 한건지, 혈색이 좋았다.
"여어, 김영한. 1대1 결투의 패배를 여기서 복수하는 거야?"
"오랜만이네. 미남 이호연 씨."
이호연의 사방을 큰 원을 그리며 80명의 생도가 둘러쌌다.
그런데도 이호연은 여유로워 보였다.
"이야. 진짜 많네. 이렇게 모으는 것도 능력이다."
"… 무슨 생각이야? 너 완전히 포위됐다고. 그렇게 여유로울 때가 아니잖아."
김영한은 도저히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도대체 왜 저렇게 여유로운 거지?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거지?
"큭. 힘 빼라. 이거 전쟁 아니야. 진다고 안 죽어."
이호연은 어깨를 으쓱하며 너스레를 떨었고, 그 말을 들은 김영한은 헛웃음을 지었다.
"또 나만 진심이지."
고개를 저은 김영한은 굳은 표정을 풀고 입꼬리를 올렸다.
딱 봐도 여자들을 지키기 위해 시간을 끌러 온 것 같다.
물론 김영한이 그 사정을 이해할 필요도 없었다.
"얘들아! 한꺼번에 덮…!"
"이호연은 나한테 맡기기로 했잖아."
뚜벅뚜벅.
김영한의 말을 끊은 여자 한 명이 인파에서 빠져나왔다.
조각같은 이목구비에 허리까지 내려온 생머리가 매력적인 소녀였다.
"… 남다은?"
당황하는 저 얼굴을 보니 김영한도 미리 듣지 못한 모양이다.
"남다은? 이게 무슨…."
"이호연은 내가 맡겠다고 했잖아. 그건 너도 동의했어."
"그건 이호연 팀 4명과 동시에 만났을 때 얘기잖아… 남다은. 저기, 남다은 씨?"
남다은은 김영한의 말을 들은 채도 하지 않으며 내 앞까지 다가왔다.
"…."
이호연도 갑작스럽게 등장한 남다은의 모습에 적지 않게 당황했다.
'그냥 어그로 좀 끌다가 가속으로 도망가려고 했는데, 왜 갑자기 저러는 거야.'
이호연은 남다은의 상태창을 확인했다.
★ 히로인 상태창
[남다은]
- [ 호감도 : 51 ]
- [ 성욕 : 17 ]
- [ 식욕 : 34 ]
- [ 피로도 : 26 ]
현재 상태 : 널 위해 열심히 준비했는데… 대련 한 번 정도는 괜찮겠지?
남다은의 몸에는 섬에서 구할 수 있는 아티팩트들이 주렁주렁 달려있었다.
'나랑 대련하려고 아티팩트를 준비한거야?'
"오랜만이야. 그 때는 고마웠어."
남다은은 내게 감사를 전하면서 칼을 들었다.
도대체 나한테 무슨 원한이 있는 거지?
꿀꺽.
이호연은 침을 삼키며 긴장하기 시작했고.
두근.
동시에 이호연의 심장이 빠르게 뛰며 마나가 가속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