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3화 〉123화. 서바이벌 시험 (16)
나와 엘리스는 대련을 마치고 땀을 씻기 위해 강가에 도착했다.
"저 바위 뒤로 갈 거니까 오지 마."
"안 갈 거거든."
걸렸다가 무슨 욕을 들으려고.
나는 큰 바위를 사이에 두고 씻기로 했다.
지잉-
나는 누군가 우리 모습을 보지 않도록 룬의 결계를 설치했다.
당연히 루시와 루미가 씻는 동안에도 설치했다. 날 중심으로 펼친 결계를 엘리스도 들어오도록 범위를 넓혔다.
"50분 까지 끝내는 거 잊지마!"
"알아."
시간을 전달한 뒤에 몸을 빡빡 씻었다. 환경이 환경이다 보니 씻을 때 잘 씻어주지 않으면 청결을 유지하기가 힘들다.
엘리스를 배려해 30분이라는 시간을 줬지만, 정작 나는 10분 만에 다 씻었다.
솔직히 씻는 데 30분이나 걸리는 게 이상한 거지.
샴푸하고 바디워시 하고 양치하면 10분이잖아.
나는 바위에 등을 기대고 엘리스를 기다렸다.
개같은 서바이벌이지만, 솔직히 너무 준비를 열심히 해와서 캠핑 온 줄 알았다.
아쉬운 건 릴리아나가 보고싶다는 거다.
일주일이나 못 봤으니 슬슬 서큐버스의 그 부드러운 몸이 그리웠다.
'나도 성욕의 노예가 돼버렸네.'
그나저나 30분은 지난 것 같은데, 엘리스한테 반응이 없다.
이제는 다 씻었겠지 싶어서 슬쩍 바위 위로 고개를 들었다.
엘리스는 이미 옷까지 다 입은 채로 구석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뭐야?'
결계의 구석에 쪼그려 앉아 손으로 무언가 조물락거리는 엘리스를 보며 상태창을 켜봤다.
★ 히로인 상태창
[엘리스]
- [ 호감도 : 42 ]
- [ 성욕 : 62 ]
- [ 식욕 : 17 ]
- [ 피로도 : 31 ]
현재 상태 : 이렇게 하면 결계에 살짝 구멍이 생겨. 구멍을 마력으로 감싸면 안 들킬 가능성이 높아….
"…?"
저게 무슨 소리야.
나는 재빨리 룬의 결계를 구성하는 마나를 확인했다.
'구멍이 느껴지지가 않는데…? 아니, 잠시만.'
아주 사소한 이질감.
룬의 결계를 구성하는 마나가 정말 조금이지만 손상되어있었다.
[마나 감응]을 가지고 있는 나도 신경을 쓰지 않으면 느끼지 못할 정도의 차이였다.
'굳이 이렇게 까지 한다고?'
내 결계를 뚫어낸 엘리스의 천재성은 둘째 치고, 왜 내 결계를 뚫으려고 노력하는 건지를 모르겠다.
결계를 공략해서 나랑 싸우려는 목적이라면 이해하겠는데, 내게 들키지 않는 작은 구멍을 뚫어서 뭐하겠다고?
일단 저 이상한 짓을 당장 막자.
"엘리스. 뭐해?"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바위 뒤에서 나오며 엘리스를 불렀다.
"아무것도 아니야."
엘리스는 순식간에 마나를 지워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 게 미리 보지 않았다면 깜박 속아 넘어갈 뻔했다.
하지만 엘리스가 마나를 지우는 그 짧은 순간, 구멍의 크기를 완전히 파악했다.
주먹도 들어가지 못할 크기였다. 굳이 따지자면 손가락 하나 정도?
즉 무언가 내게 해를 끼칠 용도는 아닌 것 같은데… 설마 엿보기 구멍이라도 되나.
"…."
"뭐해? 빨리 와."
"어, 응."
엘리스는 가만히 서있는 나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봤다.
백아영과 섹스가 끝난 후 호감도와 성욕이 올랐던 모습과, 루미와 섹스를 마치고 다음 불침번 때 피곤해 보였던 엘리스의 얼굴이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음, 아니겠지?
설마 날 훔쳐보려고 이러는 건 아닐 거 아니야.
근데 그게 아니면 이유가 있나…? 이젠 내 약점을 잡을 필요도 없을텐데.
나는 앞장서서 걸어가는 엘리스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어째선지 그 뒷모습은 날 유혹하는 것 같았다.
*
엘리스와 텐트로 돌아왔다.
루시와 루미는 서로 어깨를 붙이고 손을 건들며 장난을 치고 있었다.
나도 저 사이로 들어가고 싶었지만 꾹 참고 스마트워치를 확인했다.
9시 57분.
타이밍 딱 좋네. 곧 배틀로얄 알림이 올 거다.
"내일이면 시험도 끝인데, 어디로 갈 거야?"
장난치던 루시가 돌아온 우리를 보며 물었다.
"으음… 일단 김영한팀을 주의하면서 움직여야지."
스마트워치를 조작해 포인트 랭킹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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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섬 내의 포인트 랭킹 순위.
1. 남다은. 1460p
2. 이호연. 480p
3. 김영한. 452p
4. 엘리스. 43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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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한이 3등까지 올라왔어. 저 쪽에서 먼저 싸움을 원하진 않을 것 같으니까 내일까지는 기회를 보자."
김영한팀은 나와 싸움을 원하진 않을 거다.
거기 모인 생도들이 나를 잡을 목적으로 모였더라도 이미 6일 차가 된 이상 하루만 버티면 끝인 상황이다.
아무리 멍청한 놈들 이어도 굳이 나를 잡으러 오진 않을 거다.
엘리스도 1등을 노리던 의욕이 조금 줄었다. 아마 내게 마력 장애를 치유할 방법을 얻었으니 성적에 대한 욕구를 조금 버린 모양이다.
띠리리링- 띠리리링-
그때, 모두의 스마트워치가 울렸다.
[특별 시험의 6일 차에 도달했습니다.]
[지금부터, 배틀로얄을 시작하겠습니다.]
[모든 생도의 이름과 위치가 미니맵에 실시간으로 표시됩니다. 혹시라도 살아남기 위해 도망만 치던 생도들은 주의하길 바랍니다.]
스마트워치에는 섬의 지도와 함께 빛나는 점들이 찍혀있었다.
"배틀로얄이 뭐야?!"
"이, 이런 것도 있었네요."
"…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모두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미니맵을 천천히 바라보자, 예상대로 김영한을 중심으로 수많은 생도들이 뭉쳐있었다.
'아니, 더럽게 많네 진짜.'
원작에서 진작 탈락했어야 할 수준 낮은 생도들까지 다들 살아있었고, 무려 80명이 넘는 생도들이 팀을 이루고 있었다.
"일단 섬의 안쪽으로 들어가자."
"그 방향은 오히려 김영한팀과 가까워지는 방향이야."
"나도 알아."
"내일까지 기회를 보자고 한 건 너 아니었어?"
"지금까지 가만히 있다가 6일 차에 배틀로얄을 시작했잖아. 그렇다면 마지막 날에도 이벤트가 있을 거야. 지도도 생겼으니까, 너무 거리를 두기보단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게 좋다고 생각해."
"… 그래. 네 말대로 하자."
나는 준비해놓은 변명으로 엘리스까지 설득한 후, 똘망똘망한 눈으로 우릴 바라보고 있는 루시 루미 쌍둥이를 데리고 섬 중앙으로 향했다.
*
메시지는 김영한 팀에도 전송되었다.
그리고 김영한은, 상상하지 않았던 난감한 상황에 빠졌다.
당연히 이호연과 마주치면 싸울 생각이었다. 하지만, 굳이 나서서 찾을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특별 시험은 상대평가다. 이대로 시험이 마무리되면 김영한은 3등으로 마무리할 수 있는 상황이다. 굳이 변수를 만들 필요가 없었다.
물론 김영한팀의 인원은 80명 이상이고, 이호연은 엘리스, 루시, 루미 총 4명이 같이 있었으니 단순계산으로 차이가 20배였다.
전투가 일어나더라도 이길 가능성이 높지만, 굳이 위험을 초래하고 싶지 않은 거다.
눈먼 공격에 탈락할 수도 있고, 이호연이 김영한에게 악감정을 품는 만약의 상황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수준 이하의 생도를 너무 많이 모아서 그런지 문제가 생겼다.
"이호연 잡으러 가자!"
"가보자가보자~ 우리도 신분 역전 가보자!"
"시험에서도 여자 세명을 끼고 다니네? 진짜 모든 힘을 다해서 죽인다."
남자 새끼들이 이호연을 잡으러 가자며 난동을 부리고 있었다.
'아니 왜 6일이나 버텨놓고 이제 와서 난리야.'
명목상 이호연의 식량을 뺏자고 모인 팀이긴 하지만, 당장 하루밖에 안 남은 이상 그 의미는 많이 퇴색되었다.
굳이 싸움을 일으켜서 탈락의 위험을 짊어질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김영한이 몰랐던 사실이 있었다.
의외로 아카데미에는 성적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생도가 많다.
어차피 중하위권 생도들은 취급이 비슷하다. 상위권 길드에는 들어갈 생각도 못하고, 그냥 졸업장만 따서 나중에 써먹겠다는 생도들이다.
현재 김영한 팀에는 당연히 그런 생도들도 많이 있었다. 보이는 사람은 죄다 팀에 받아들이다 보니 생도들의 질이 떨어진 것이다.
게다가 사람이 많아지는 만큼 생존의 난이도도 낮아졌다. '지금까지 버텨온 게 아까우니까 그냥 이대로 끝내자.' 같은 생각을 하는 생도들도 줄었다.
남은 희망은 여자생도들이지만, 여자 생도들도 남다은의 갑작스러운 발언에 다들 관망의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내가 이호연을 맡을게."
여태껏 가만히 있던 남다은이 이호연을 내게 맡기라며 호언장담했기 때문이다.
"하아… 저 멍청한 새끼들."
김영한은 지끈거리는 머리에 미간을 잡으며 고개를 숙였다.
"대장님! 빨리 이호연 죽이러 가죠!"
항상 김영한의 옆에서 떠들던 놈도 똑같은 놈이었다.
"… 그래. 나도 모르겠다. 가자."
여기서 가만히 있으면 지금까지 대표로 포인트를 모아 온 내게 불만의 화살이 돌려질 수도 있다.
더가서 아카데미에서 쌓아온 이미지에 타격이 갈 수도 있다. 나중에 철혈 길드의 후계자임을 공표했을 때 자연스럽게 나오는 미담을 위해 이미지 관리에 힘쓰고 있는데, 그 노력이 물거품이 될지도 모른다.
김영한은 어쩔 수 없이 이호연을 향해 섬 중앙으로 향했다.
*
한 교수의 연구실.
벽에 장식된 상장과 표창장, 연구 실적 등은 이 교수의 찬란한 과거 실적을 얘기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최근 10년간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한 교수라는 사실을 말하는 자료이기도 했다.
그런 노 교수의 연구실에서는 생도복을 입은 남자와 노 교수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교수님. 저 신동민입니다. 학생회 부회장이에요. 제가 겨우 1학년에게 지겠습니까? 그냥 확실하게 하자는 거죠."
"… 자네. 이게 걸리면 어떤 파장이 일어날지 알고 말하는 건가?"
신동민이 내밀고 있는 자료는, 축제 때 친선 경기의 대련장을 조작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안 걸리면 되죠. 교수님이면 충분히 가능하시잖아요."
"어쩌다가 이렇게 된건가. 1학년 때 자네는 모두의 기대를 받는 총명한 아이였거늘…."
"교수님, 곧 정년퇴직이신데 앞으로 계획도 세우셔야죠. 신영 길드에 자리를 만들어두겠습니다."
신동민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노 교수와 눈을 마주쳤다.
"……."
그 시선에 노 교수는 아무 말하지 못하고 조용히 자료를 자기 쪽으로 당겼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잘 처리해주세요."
입꼬리가 올라간 신동민은 고개를 숙이며 교수실에서 나왔다.
신동민은 건물에서 빠져나오고 한참을 걷고 나서야 표정을 구겼다.
"쯧. 너구리 같은 노인네. 이미 썩은 쓰레기 주제에 신영에 들어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1대1 결투를 보고 이호연의 무력에 약간 불안감을 느꼈던 신동민이지만, 이제야 안심하게 되었다.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더라도, 불속성 마법사와 물속성 마법사의 대결이다.
상성도 유리한데 대련장은 바다 한가운데의 작은 부표로 정해질 거다.
"조금만 기다려라. 버러지…."
신동민은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며 주머니에 손을 꼽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