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화 〉95화. 1대1 결투
"으으음…."
어제 든든하게 K - 집밥을 먹고 자서 그런가? 굉장히 개운했다.
오늘은 1대1 결투 본선이 있는 날이니까, 빠르게 준비를 해야 한다.
"벌써 나가…?"
세안까지 마치고 생도복을 입고 있는데, 눈을 비비며 일어난 릴리아나가 방에서 나왔다.
"응. 오늘 1대1 결투 본선이라서. 빨리 나가야 해."
"알았어… 잘 가."
"응응. 집 잘 지키고 있어."
릴리아나와 짧은 인사를 나누고 기숙사를 나왔다.
"거기 인기남~!"
"…?"
뒤를 돌아보자 김영한이 내게 달려오고 있었다.
"이야, 요즘 보기가 너무 힘들어."
"어제 네가 나 버리고 갔잖아."
"미안, 근데 그때는 나도 바빴어."
뭐, 나도 요즘에 바빠서 볼 시간이 없었다. 얘도 나름대로 열심히 아카데미 생활을 보내느라 바빴을테고.
"오늘 1대1 결투 대진표 봤어?"
"아니, 못 봤는데. 왜?"
대진표가 나온 줄도 몰랐다.
하여튼 아카데미가 일을 안 해.
대진표가 나오면 당연히 본선 진출자한테 먼저 보여줘야지.
알아서 찾아보게 만들고 말이야.
"너 나랑 준결승에서 만날걸?"
"… 진짜로?"
"응. 잘 부탁한다! 끝날 때 까진 경쟁자야. 알지? 나 먼저 간다!"
김영한은 그대로 앞으로 달려갔다.
너무 갑자기 왔다가 갑자기 사라지니까 당황스럽네.
"으음, 쟤 능력이 뭐더라?"
기억이 안 나는 걸 보니, 별 특색이 없었던 것 같다.
게임에서 칼을 휘두르던 건 기억이 나는데, 특출난 점은 기억이 안 난다.
에이, 모르겠다.
나는 결투 준비를 위해 A클래스로 향했다.
오늘은 평소보다 일찍 나와서 1학년 수업동으로 가는 길에 사람이 많았다.
"야, 오늘 1학년 대련 관람객들이 미쳤다는데? VIP들 다 모였대."
"당연하지. 남다은, 엘리스, 이호연. 역대급이 세 명이나 있잖아."
"그래도 1등은 역시 남다은이겠지?"
"엘리스도 요즘 폼 미쳤던데? 그리고 이호연은 실전 괴수 훈련 신기록 세웠잖아. 둘 다 무시 못해."
길거리에서 내 이름으로 대화를 하고 있으니 참 신기했다.
A클래스에 도착하자, 1학년 본선 진출자들이 모여있었다.
담임 교수 김진혁과 눈이 마주치고, 김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 이호연까지 왔군. 다들 알다시피 대진표는 당일 시험이 시작하기 직전에 공개하는 게 원칙이라, 이제야 공개하게 됐다."
김진혁은 저렇게 말하면서 A클래스 본선 참가자 8명에게 종이를 나눠줬다.
뭐야. 지금 공개하는 거면 김영한은 나랑 붙는 걸 어떻게 안 거야?
심지어 대진표를 확인해보니 나와 김영한이 모든 경기를 이기면 정말로 준결승에서 만난다.
나는 김영한을 의문스럽게 쳐다봤고, 김영한은 웃으며 입에 검지손가락을 갖다 댔다.
앙큼한 표정으로 비밀로 해달라는 저 몸짓이 아니꼬워서 나는 중지손가락을 올렸다.
어디서 귀여운 척이야.
"너희들을 먼저 부른 이유는, 오늘 대련의 중요성을 말해주기 위해서다. 1학년 대련치고 관람객들이 엄청나게 몰렸어."
오는 길에 다른 생도들도 다 저런 말을 하고 있었으니, 진짜 어마어마한 모양이다.
"물론 몇몇 뛰어난 생도들을 보러 온 게 맞다. 부정하지는 않으마. 하지만 너희들의 능력을 보여줄 기회인 것도 확실하다. 무조건 최선을 다하고, 절대 포기하지 마라. 그런 태도 하나하나가 평가될 테니까."
김진혁은 정말 우리가 잘 되길 바라는 것 같았다.
생도들 하나하나와 눈을 마주치며 진심을 전하고 있었다.
사람은 참 좋다니까.
"이제 대련장에 가서 준비하도록. 본선 진출자들은 개인 대기실이 있으니 대기실에서 편하게 쉬고 있어라."
김진혁은 말을 마치고 강의실을 나갔고, 생도들도 하나둘씩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이호연!"
"루시. 대진표 봤어?"
본선 진출자로 같이 모인 루시가 내게 다가왔다.
"당연히 봤지! 너랑 나랑 만나려면 결승전에서 밖에 안 되더라."
"그러게. 그쪽 라인이 엄청 빡세던데. 힘내서 결승에서 보자."
"응! 알았어!"
괜찮으려나. 저쪽 라인에 엘리스와 남다은이 둘 다 있어서, 루시가 나를 만나려면 저 둘을 꺾고 와야 한다.
★ 히로인 상태창
[루시]
- [ 호감도 : 87 ]
- [ 성욕 : 40 ]
- [ 식욕 : 30 ]
- [ 피로도 : 35 ]
현재 상태 : 방어 마법을 연습했는데… 잘 쓸 수 있으려나.
나름대로 생각은 하고 있나 보네.
"대기실이나 가보자. 시설 좋을 거 같지 않아?"
"그래! 이따가 놀러 가도 돼?"
"당연하지."
나는 루시와 함께 대련장으로 향했다.
*
대기실은 개인당 하나씩 주어졌고, 엄청나게 시설이 좋지는 않았지만 깔끔하게 휴식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대련장과 연결된 화면에서 실시간으로 다른 사람의 대련을 볼 수 있는 것도 편했다.
"화장실이나 갔다 올까."
아까 복도에 화장실이 있었던 게 기억이 난다.
대기실의 문을 열고 나오자 다들 본선을 준비하느라 마음을 다잡고있는지,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대기실들은 다닥다닥 붙어있는 형태라서 이 길다란 복도 안에 본선 진출자들의 대기실이 다 있었다.
문에는 각각 이름이 쓰여 있었고, 내 바로 옆 방은 엘리스의 대기실이다.
'결승에는 남다은이 올라오겠지?'
대진표를 보니 준결승에서 나와 김영한이 붙고, 엘리스와 남다은이 붙는 판국이었다.
루시는 그 전에 엘리스와 만나게 된다.
아마 무난하게 진행된다면 남다은과 엘리스의 결투에서 남다은이 이기고 나와 결승에서 마주치겠지.
덜컥-
그 때, 옆에 있던 대기실이 열리고 찰랑이는 금발이 내 눈에 들어왔다.
대기실에서 나온 엘리스는, 몸을 돌리며 나와 눈이 맞았다.
"어... 안녕?"
"응. 좋은 아침이야."
"...?"
아무 기대없이 한 인사인데 엘리스는 평소와 다르게 사근사근한 말투로 인사를 받아줬다.
★ 히로인 상태창
[엘리스]
- [ 호감도 : 62 ]
- [ 성욕 : 25 ]
- [ 식욕 : 30 ]
- [ 피로도 : 20 ]
현재 상태 : 호연이네. 결승에서 서로 만났으면 좋겠다.
'호감도가 왜 이래.'
분명 며칠 전까지만 해도 35였던 호감도가 62까지 올라왔다.
"어, 어. 결투 열심히 해."
"너도 힘내. 결승전에서 보자."
엘리스는 내 응원에 상냥하게 답해주며 미소를 보내고 복도를 걸어갔다.
내게 밝은 미소를 보내오는 엘리스는, 너무나도 어색했다.
"… 진짜 뭐야. 이상해."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질투를 하다가 호감도가 올랐나?
*
"기, 기권!"
[경기 끝! 승자는 A클래스 이호연 생도입니다!]
"수고했어."
"한 수 배웠습니다…."
첫 경기의 상대는 C클래스의 3등이라는 남자였다.
아무래도 운 좋게 예선을 통과한 것 같았다.
본선에 오기에는 실력이 좀 딸려 보였으니까.
그래도 예의가 바른 놈이라 1분 정도 상대해줬다.
저 친구의 수준이라면 나랑 1분 정도의 대련으로도 꽤 큰 발전이 있을 거다.
"아니야. 나도 한 수 배웠어."
"일부러 시간을 끌어주신 거 압니다. 덕분에 눈이 뜨인 기분입니다."
"…음. 수고했어."
저렇게 말해오면 약간 창피한데.
스태프의 안내를 받으며 대련장을 내려왔다.
대련장의 마나방벽을 벗어나자마자 우레같은 함성이 내 귀를 마구 때렸다.
"와아아아아아--!"
"이호연! 이호연!"
"잘생겼다-!"
대체 언제 날 봤다고 내 이름을 저렇게 연호하는 걸까.
슬쩍 주변을 둘러보니 최소 수천은 될 것 같은 사람들이 관객석에 앉아 날 쳐다보고 있었다.
'진짜 부담감 미쳤네.'
저 사람들이 다 내 결투를 보고있다니, 미묘한 고양감이 샘솟았다.
경기를 끝낸 나는 대기실로 돌아왔다.
[다음은 16강 5번째 경기! 루시 생도와 곽상태 생도의 결투가 있겠습니다!]
"루시 경기 구경이나 해볼까."
나는 대기실에 구비되어있는 팝콘을 쥐어들었다.
*
"확실히 많이 강해지긴 했네…."
루시는 손쉽게 결투에 승리했다.
중간에 쉴드마법을 약간 삐끗하긴 했지만, 경기 결과에 영향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엘리스를 이길 정도는 아니야.'
아직은 큰 차이가 있었다.
원래 루시와 루미는 같이 행동해야 시너지 효과가 난다.
각자 재능을 발휘해 공격과 방어에 집중하면 두 배가 아니라 세 배 네 배의 효율을 내는 게 루시루미 쌍둥이였다.
똑 똑 똑.
"누구세요?"
"나야 루시. 들어가도 돼?"
방금 경기가 끝났는데 벌써 왔으면, 자기 대기실에 들리지도 않고 온 건데.
왜 저렇게 급하게 온 거야?
"당연하지. 들어와."
루시는 조심스럽게 대기실로 들어와서 소파에 앉았다.
왜 이겨놓고 몸을 움츠리고 있지?
"으음. 호연이 너, 방금 결투 봤어?"
"응. 잘하던데?"
이상하게 자신감이 없는 모습이다.
"어, 어땠어? 엘리스한테 이길 수 있을 거 같아?"
"…."
왜 그런가 했더니, 다음 상대가 엘리스였구나.
★ 히로인 상태창
[루시]
- [ 호감도 : 87 ]
- [ 성욕 : 40 ]
- [ 식욕 : 30 ]
- [ 피로도 : 35 ]
현재 상태 : 방어 마법과 밸런스가 맞지 않아…
으음, 하는 고민도 대충 알겠다.
1대1 결투다 보니 공격 마법에만 자신 있는 루시가 방어 마법을 연습하다가 고민에 빠진 것 같다.
"루시. 괜찮다면 내가 조언을 좀 해줄까?"
"으, 으응. 부탁해. 너 마법 잘하니까."
"아까 대련에서 방어 마법이 좀 아쉬웠던 거, 알지?"
"응… 계속 연습해도 잘 쓸 수가 없어."
당연히 그렇겠지.
루시는 공격 마법에 재능이 있으니까.
이건 다시 태어나도 변하지 않을 원작 게임의 설정이다.
루시는 애초에 잘못 생각하고 있다.
밸런스가 안 맞는 게 아니라, 밸런스를 맞추면 안 된다.
"루시, 너는 방어 마법을 쓰지 않는 게 좋아."
"쓰지 말라고…?"
내 극단적인 말에 루시는 약간 의아해했다.
"오해하지 말고 들어. 너는 공격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어. 차라리 상대에게 틈을 주지 말고 공격하는 게 나아."
"그런가...?
"응, '공격은 최선의 방어다.' 라는 말은 널 위해 있는 거야."
굳이 방어할 필요가 없다. 차라리 공격할 틈을 주지 않는 게 루시에게 더 맞는 전투법이다.
"공격은 최선의 방어다…."
"최선을 다하면 좋은 결과가 있을 거야. 힘내."
"… 고마워. 공격은 최선의 방어다. 꼭 마음에 새길게."
루시는 내 말에 기운을 좀 얻은 듯 다시 표정이 밝아졌다.
나는 루시와 남은 경기들을 같이 관람했다.
*
[경기 끝! 승자는 A클래스 이호연 생도입니다!]
"솔아아~. 저런 인재를 내버려 두면 안된다니까?"
"뭐. 대체 호연이로 뭘 하고 싶은 건데."
관람석에서 임솔과 민예지가 대련을 마치고 내려가는 이호연을 보며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니이, 뭐든 하면 다 돈이 될 관상이잖아. 이건 진짜 전 인류적 손실이야."
"그러면서 나한테 비키니 입히려고 했던 거 다 기억하거든? 절대 연락 금지야."
"이호연 생도도 나한테 무슨 사업이냐고 궁금해했단 말이야~ 답장은 해도 되잖아."
"안 돼. 내가 허락할 때 까지 절대 접촉 금지."
임솔은 민예지의 더러운 속셈을 다 알고 있었기에, 제자 이호연이 절대 넘어가지 않도록 민예지에게서 열심히 보호하고 있었다.
저 감언이설에 넘어가다가는 진짜 이호연의 비키니 차림을 보게 될 수도 있다.
"쟤도 성인인데 자기가 판단할 수 있잖앙. 안 그래?"
"내 논문 작업만 끝나면 하게 해준다니까. 그게 제일 중요해. 돈 몇 푼이 문제가 아니라 세상이 뒤집어질 연구 논문이야."
"그렇게 대단해? 그러면 나도 투자하면 안 돼?"
"… 그냥 조용히 경기나 봐."
임솔은 민예지의 깐죽거림에 욕이 나오기 직전까지 분노가 올라왔고, 이 눈치 빠른 여자는 바로 알아챘다.
"알았어 알았어. 화내지 마."
"하아."
이렇게 열심히 자기를 지켜주고 있다는 걸 이호연은 알까.
임솔은 한숨을 쉬며 대련장을 바라봤다.
"근데 엘리스랑 남다은? 쟤내는 진짜 미쳤네. 이호연까지 세 명은 다른 애들하고 차원이 달라."
"그런 애들이니까."
"너는 어떻게 저런 인재들을 보고도 가만히 있어? 세상에 마법 말고도 즐길 게 얼마나 많은데."
"좀 조용히 해…."
임솔은 그냥 조용히 이호연의 경기를 보고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