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화 〉86화. 시험 준비
문수린은, 이호연을 보내고 터덜터덜 숙소로 돌아왔다.
빅토리아 아카데미 생도는 기숙사 생활이 기본이지만, 요청하면 밖에서 살 수도 있다.
문수린은 생도들과 계속 마주치는 기숙사가 싫어서 따로 방을 구했다.
"하아...."
샤워를 하지도 않고, 화장을 지우지도 않고, 옷만 대충 벗은 채 침대에 몸을 맡겼다.
"씻어야 하는데...."
항상 이때가 되면 움직이기가 싫었다.
지금 이 상태로 평생 멈췄으면 좋을 텐데. 나른함이 몸을 감싸며 부드러운 침대가 받아주는 이 상황.
하지만 시간은 문수린을 내버려 두지 않았다.
문수린은 비척비척 힘든 몸을 움직여 샤워실로 향했다.
온몸을 깨끗이 씻어내고 얼굴에 묻은 화장을 지워낸다.
가벼운 스킨케어까지 하고 나니 시간이 벌써 11시가 지나고 있었다.
내일 아침부터 또 짜증 나는 하루를 반복할 생각에 문수린은 스트레스가 쌓였다.
"문자, 보냈으려나?"
그래도, 일 때문에 만난 이호연과의 식사 시간은 아주 알찼다.
열심히 잡담을 하느라 예상 시간보다 1시간 늦어서 수면시간이 줄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확실히 이호연은 힐링이자 마음의 안식처가 맞았다. 절대 놓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어디 있는지 모를 아버지나 이사장실에서 놀고 있는 할아버지보다도 더 도움이 되는 사람이다.
"바로 답장 보냈구나."
이호연에게 전해준 리스트.
아카데미에서 당장 준비할 수 있는 영약들을 모두 정리해서 전달했다.
당연히 저 리스트로는 보상이 한참 모자르다. 추가로 아티팩트나 다른 걸 구해다 줄 생각이었다.
이호연에게도 더 필요한 걸 말하라고 했으니 리스트를 보고 부족한 걸 말해왔겠지.
- 호연이 : 저는 마법사라서 천년 설삼이면 될 것 같습니다. 누나!
"응...?"
이게 무슨 소리지? 천년 설삼이면 된다니?
나 : 호연아, 혹시 천년 설삼을 더 구해달라는 말이야? 정말 미안하지만... 천년 설삼은 더 구하기 힘들어. 차라리 마력 관련 아티팩트를 구해줄까?
천년 설삼은 마력량을 늘려주는 영약이다.
마력량을 늘려주는 영약은 선천적으로 정해지고 늘릴 수 있는 방법이 시간밖에 없기에, 원래 인기가 많은 영약이다.
그나마 소유하고 있는 한 근도 아카데미라서 구할 수 있었지, 다른 길드였으면 구하지 못했을 것이다.
- 호연이 : 아뇨, 아뇨! 당연히 한 근이면 되죠! 여기서 어떻게 더 바라겠어요. 더 있어도 저 주지말고 누나 드세요.
'... 이건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천년 설삼 한 근. 당연히 일반인이나 헌터들에게는 꿈도 못 꿀 영약이다.
하지만, 성녀를 아카데미에 데려온 공과 비교할 바는 아니다.
그로 인해서 얻을 이득이면 저런 영약쯤은 수 없이 살 수 있다.
문수린은 골똘히 이유를 생각했다.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도 저런 영약들을 포기할 리가 없다.
돈으로 따지면 수십억, 아니 수백억 이상의 가치가 있는 영약들이다.
물론 저걸 아끼면 아카데미에서 이호연과 협상을 한 내 발언권이 강해지지만.... 어?
'잠시만....'
문수린은 아까 식당에서 하던 대화를 되새겼다.
'일단, 말했듯이 성녀님이 아카데미에 온 건 네 덕이니까.... 너한테 감사를 표하기로 했어.'
'저야 다 누나를 위해 한 일인데 보상까지 주시면 감사하죠.'
"호, 혹시...?"
정말로 나를 위해...?
"아,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문수린은 고개를 휘휘 저으며 정신을 차렸다.
아니야. 그냥 오해겠지.
문수린은 생각을 정리하고, 떨리는 손으로 답장을 작성했다.
*
"천년 설삼 한 근이면 대박이네 완전."
한 근에 수십억이나 하는 영약이다.
물론 다른 영약들도 탐났지만, 내게 가장 필요한 건 마력량이다.
그렇기에 마력량을 늘려주는 천년 설삼을 골랐다.
띠링-!
수린 누나에게 답장이 왔다.
- 수린 누나 : 저, 정말 천년 설삼 한 근이면 되겠어? 다른 건 필요 없고?
이 누나는 필요 없다니까 왜 자꾸 챙겨주려고 하는 거야.
아무래도 호감도가 높아지다 보니 자기 몫까지도 내게 주려는 것 같다.
그러면 안 되지.
- 나 : 당연히 그걸로 괜찮죠. 저 걱정하지 마시고 누나 몸 먼저 살피세요. 안색이 안 좋아 보이시던데 몸에 좋은 거 챙겨 드시고요.
나는 좋은 말을 많이 써서 답장을 보냈다.
- 수린 누나 : ... 고마워. 꼭 보답할게.
문수린도 내 정성에 만족한 것 같았다.
"크으... 이 정도면 A급 신랑감이지."
나는 내 처세술에 만족하며 침대에서 눈을 감았다.
*
"하아...."
그리고 그와 같은 시간.
엘리스는 공부를 하면서 머리를 부여잡고 있었다.
커피를 쪽쪽 빨면서 현대 헌터학의 남은 부분을 정리하다가, 느껴지는 두통에 잠시 스트레칭을 하며 몸을 풀어줬다.
"하아, 머리야. 근데 아빠는 왜 연락이 안 되지?"
분명 내 애교 문자를 받고 의뢰권을 준다고 했는데, 도통 연락이 없다.
"밤에는 무조건 깨어 있는 사람인데 이상하네."
낮에 자고 밤에 일어나는 아빠의 특성상 자고 있을 리는 없었다. 혹시 일이 남았나?
설마, 애교 먹튀는 아니겠지?
엘리스는 아버지에게 문자를 보냈다.
- 나 : 아빵...? 의뢰권은 언제 보내줄 거에요? ㅇ.ㅇ?
손이 오그라들다 못해 안과 밖이 뒤집힐 것 같았지만, 아버지란 사람한테 부탁하려면 이렇게 해야 한다.
그래야 효과가 두 배가 된다.
- 아빠 : 엘리스?! 미안하다. 아빠가 방금 일이 끝났네. 지금 전화하마.
"아니 전화로 하지 말지...."
뚜르르-
엘리스의 바람과 달리 열심히 울리는 전화벨 소리.
이 애교를 입으로 내야 한다는 사실에 엘리스는 온몸이 떨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약속을 지키는 건 자존심의 문제였으니까.
"여보떼용?"
- 엘리스! 무슨 일이야?! 아카데미에 사건이라도 있니?
전화기에선 불이라도 난 듯 커다란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엘리스는 한 쪽눈을 찌푸리면서도 혀를 굴리며 말했다.
"아빵, 저번에 보내주기로 한 의뢰권은 왜 안보내주세용?"
- 아, 그거... 금방 보내주마. 길드 간부들이 스케줄을 도저히 못 뺸다고 징징대서 갈구느라 시간이 좀 걸렸단다.
"아항... 너무 급하게 안 주셔도 되니까 천천히 주세용."
언제까지 준다는 말은 안했으니, 천천히 줘도 된다.
물론 저런 변명으로 아예 주지 않는 건 엘리스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 당연히 줄 수야 있지. ...근데 의뢰권은 왜 필요한거니?
"우웅... 엘리스가 꼭 필요해용. 한 번마안...."
- 그, 그래! 엘리스가 필요하다면 줘야지! ......누구한테 줄건데?
"아빠 고마워! 사랑해용!"
- 아, 아빠도 사랑한다! 엘리스! 세바스 찬을 통해 의뢰서를 보내마! 사랑해 엘리스!
"네에엥. 끊을게용. 아빵. 빠이빠이."
- 그래! 아빠가 항상 너를 생각하고, 항상 너를 위해....
뚜우-
"이 정도 받아줬으면 됐지. 어우...."
엘리스는 양팔에 돋은 소름을 손바닥으로 문지르고는 다시 커피를 입으로 가져갔다.
아빠가 집요하게 누구한테 줄거냐고 물어왔지만, 다행히 애교로 넘길 수 있었다.
"이호연... 시험은 꼭 이겨야겠어."
엘리스는 방금 부린 애교를 연료 삼아 의지를 활활 불태우며 공부를 이어갔다.
*
"안 일어나? 오늘 시험이라며."
나는, 침대 위에서 날 발로 툭툭 차고 있는 릴리아나를 보며 잠을 깼다.
"... 지금 몇 신데?"
어제 그렇게 늦게 자지 않았는데도 이상하게 몸이 피곤했다.
"7시 50분."
"이런 미친."
시간을 듣자마자 몽롱하던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이불을 걷어차고 생도복을 챙겨입었다.
"흐아암, 바로 가려고?"
릴리아나도 일어난 지 얼마 안 됐는지 하품을 하며 나를 배웅했다.
"8시까진데 당연히 달려가야지!"
"세수는 하고 가. 눈곱 끼었어."
"... 땡큐."
나는 세수만 하고 떡진 머리로 기숙사를 나섰다.
시간은 7시 52분.
몸에 마력을 집중시켰다.
내가 설마 등교 중에 가속을 쓸 줄이야.
역시 뭐든 배워놓으면 쓸모가 있다.
얼굴을 스치는 바람을 느끼며 아카데미를 달렸다. 주변에 등교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게 진짜 늦은 것 같다.
1학년 수업동이 내 시야에 잡혔다.
시간은 7시 58분.
탁탁탁. 드르륵-
냅다 달려가서 A클래스의 문을 열었다.
강의실에 있는 생도들의 시선이 내게 꽂히고, 김진혁 교수의 차가운 눈초리가 나를 향했다.
"왔구나."
"헉, 헉, 죄, 죄송합니다...."
"지각 처리는 안 할 테니 빨리 앉아라. 시험에 관해 설명하고 있었으니."
"감사합니다."
나는 재빨리 루시와 루미 옆에 자리 잡았다.
아무래도 어제 연속 8번 대련이 보이지 않게 체력적으로 타격을 준 것 같다.
마력량이 아슬아슬했으니까.
빨리 천년 설삼을 먹고 마력량을 올리든가 해야지.
"야, 늦잠 잤어? 머리가 왜 그래."
"응, 일어나니까 7시 50분이더라."
"대, 대단해요. 어젯밤까지 공부하신 거에요?"
옆에서 루미의 감탄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눈을 반짝반짝 하는 게 엄청난 걸 보는 눈이다.
"아니 그런 거 아니야...."
"맞네. 맞아. 너 공부하느라 밤새웠지?"
"아니라니까...."
얘들은 왜 말을 해도 믿지를 않냐.
뒤에 있는 애들도 나에게 견제하는 눈빛을 보낸다.
나도 모르겠다. 알아서 생각해라.
"잡담은 그만하고 집중하도록."
김진혁 교수는 내 쪽을 보면서 말했다.
'아니 나한테만 그러네.'
별 거 안해도 시선이 집중되니, 주인공의 삶은 참 힘들다.
"다들 에브리데이로 전달받았겠지만, 다음 주까지는 내내 중간고사다."
아아--...
생도들의 탄식 소리가 강의실을 가득 채웠다.
김진혁 교수는 익숙한 듯 무시하며 다음 사항들을 전달했다.
"오늘은 필기시험이 있을 예정이고, 내일은 조별 시험과 실전 괴수 시험이 있다. 금요일에는 1대1 결투가 토너먼트로 진행된다. 오늘과 내일에도 남는 시간에 예선전을 진행할 테니 인지하도록."
오늘은 필기구나.
필기시험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현대 헌터학 같은 암기과목과 암호해독이나 역산 같은 문제 해결 과목.
오늘 하루가 필기시험이라고 했으니 오전 오후 내내 시험만 보겠네.
"괜히 실기시험만 준비하다가 필기시험에 발목 잡혀서 피눈물 흘리는 생도가 한둘이 아니다. 실기가 재밌는 건 알겠지만 필기도 놓치지 말고 공부해라. 물론 오늘이 시험이라서 이미 늦은 충고지만."
"네~."
나야 뭐, 필기는 걱정 없으니까.
엘리스한테 미안하지만, 1등 해서 질투 유발이나 해야겠다.
"다음 주 일정은 다음 주에 다시 공지하마. 그럼 각자 시험장으로 이동하도록."
김진혁 교수는 전달사항을 다 전달하고 강의실 밖으로 나갔다.
시험장으로 이동하라는 걸 보니 아마 오전에는 자기 분야에 맞는 시험을 보고, 오후에 공용 시험을 보는 모양이다.
"루시, 시험장이 어디야?"
"너 시험장 체크도 안 하고 왔어? 얼마나 급하게 온 거야."
"미안미안. 어차피 같은 곳이니까 같이 가자. 루미도 같은 곳이지?"
"네. 저도 마법사 필기시험이에요."
"가보자, 가보자~."
나는 루시와 루미의 뒤를 따라 강의실을 옮겼다.
1학년 수업동의 마법사 강의실로 들어갔다.
그곳엔 엘리스도 앉아있었다.
쟤도 마법사 시험을 보러 왔구나.
루시와 루미가 같이 화장실에 간 동안 엘리스에게 인사를 하러 다가갔다.
"엘리스, 공부 많이 했어?"
"... 밤 샜나보네?"
엘리스는 퀭한 눈으로 나를 견제하듯이 쳐다봤다.
밤 샌건 자기면서 왜 저래.
"아니 안 샜다니까...."
애들이 경쟁심 때문인가 하루 안 씻고 왔다고 견제가 심하다.
그냥 늦잠 잔 거 뿐인데.
"아무튼, 열심히 해. 화이팅."
"... 꼭 1등 할 테니까 두고 봐."
엘리스는 눈을 찌푸리며 책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늘은 순수하게 응원해 줄 생각이었는데....
★ 히로인 상태창
[엘리스]
- [ 호감도 : 36 ]
- [ 성욕 : 25 ]
- [ 식욕 : 30 ]
- [ 피로도 : 40 ]
현재 상태 : 세바스 찬은 아직도 안 끝난 건가? 이렇게 일 처리가 느린 사람이 아닌데....
세바스 찬? 그건 또 누구야.
개인적인 사정인가? 아무튼.
나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자리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