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화 〉82화. 양호 선생님 등장 (4)
"그럼, 대련 시작!"
김진혁 교수의 시작 신호가 울리자마자, 한서율은 내게 달려들었다.
두근.
아주 약한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조금이지만 전투 감각이 반응하는 상대라는 뜻이다.
"흐아아앗!"
한서율은 2학년 1위답게 빠른 속도였지만….
'개안.'
내 눈을 따라올 순 없었다.
옆구리를 노리는 횡 베기를 '코튼 가드'로 막아내며, 동시에 약한 불꽃을 한서율의 눈앞에 터트렸다.
"윽!"
화르륵!
한서율은 빠르게 뒤로 뛰었다. 나쁘지않은 판단이었지만, 뒤에도 이미 마법진이 준비되어 있었다.
'염화.'
"…?!"
뜨거운 불길이 한서율을 통째로 삼켰고 갑자기 뒤에서 나타난 불꽃에 온몸이 그을린 한서율은 검에 마력을 일으켜 크게 베어내며 불꽃을 잠재웠다.
나는 틈을 주지 않고 공세를 몰아갔다.
화아악-!
한서율의 움직임을 예측하며 방향을 틀 때마다 불꽃을 쏘았다.
앞뒤에서 몰아치는 화염 마법을 한서율은 차분하게 막아냈지만, 점점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당하기만 해서는 답이 없다고 판단했는지, 몸에 마법을 조금 허용하며 억지로 내 앞을 뚫어냈다.
'실력이 괜찮은데?'
이 정도면 생도 중에서도 꽤 강한 편인데, 왜 엑스트라지?
내 어깨를 노린 검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쇄도했고, 나는 몸을 가속했다.
몸을 회전시켜 검을 피하며 순식간에 만들어낸 포스 마법으로 옆구리의 빈틈을 가격했다.
"크읍!"
물론 전투 감각이 제대로 발동하지 않은 걸 보면 내 수준보다 한참 낮지만, 애초에 내 기본 스탯이 지금은 생도보다 높은 편이다.
한서율은 후방을 향해 백덤블링으로 물러난 뒤, 아까 보여줬던 검을 복사하는 능력으로 4개의 검을 던졌다.
그리고 전력을 다한 검 투척은, 내 '코튼 가드'에 무기력하게 막혔다.
이제 슬슬 끝내야지.
앞으로 7명이나 더 상대해야 하니 시간을 더 뺏기면 안된다.
우웅!
불꽃의 구를 사방에 소환했다.
하나하나에 엄청난 마력이 압축된 수십 개의 화염 구.
몇 초 만에 대련장을 꽉 채운 마법에, 한서율은 한숨을 내쉬었다.
"더블 캐스팅맞지? 하… 진짜 자존감 팍팍 떨어지네."
한서율은 어이가 없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과찬이십니다. 선배님. 선배님도 강하시잖아요."
한서율은 엑스트라 치고 정말 강했다.
왜 이런 사람이 게임에 한 번도 얼굴을 비추지 않았나 싶을 정도였다.
물론 정답은 '남자니까' 겠지만. 야겜에 남자가 나올 공간이 어딨어.
"퍽이나 고맙네. 나도 이제 안 하련다. 교수님. 기권하겠습니다."
한서율은, 내 화염구를 보자마자 기권을 했다.
그래도 선배 대우해주려고 나름 열심히 준비한건데. 아깝네.
"이거, 아까운데 다음 대련에 또 쓰면 안 되겠죠?"
"되겠냐."
김진혁 교수는 내 헛소리에 핀잔을 줬다.
*
"… 야. 쟤 원래 저렇게 강했냐?"
"강하긴 했지… 김호진도 얘가 개발랐잖아."
"아니 그렇긴 한데… 더블 캐스팅이라며. 그거 생도가 익힐 수 있는 기술 맞아?"
"나도 몰라."
최상위권의 대련을 구경하는 생도들은 다들 입을 벌리고 이호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위권 학생들도, 자기 차례가 아니면 하위권에 관심이 없었다.
좆밥 싸움 구경이 제일 재밌다고 하지만, 수준 있는 곳에선 다르다.
아마추어 리그보다는 프로 리그가 재밌는 법이니까.
그렇기에 최상위권 대련장 주변에는 100명이 넘는 생도들이 몰려있었다.
"와, 야. 지금 혼자 6명째야."
"진짜 개 잘한다…. 어? 너 영상 찍었어?"
"당연하지 임마. 에브리데이에 이호연 관련 영상 올리면 추천 100개는 기본이야."
"야이씨. 나도 찍어야겠다."
생도들에게 이호연의 실력 논란은 이미 사라졌다.
눈앞에서 선배들을 모기 잡듯이 패고 있으니, 당연히 알 수밖에 없다.
게다가 뭔가 엄청난 마법도 펑펑 쏴대고, 몸놀림도 빠르니 재밌는 구경거리를 보는 심정으로 대련을 지켜봤다.
하지만 교수들은 달랐다.
교수들은 남다은과 엘리스의 대련을 볼 때는 칭찬을 연발했다.
"이야, 이번 1학년들이 진짜 대박이긴 하네."
"그러니까요. 1학년들한테 이름이라도 붙여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황금의 세대' 어때요?"
"나쁘지 않네~."
"엘리스 양도, 마력 운용이 너무 아름다워요."
"검술도 이미 경지에 오른 것 같은데? 생각보다 훨씬 뛰어나."
그러다가… 이호연의 대련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내가 지금 잘못 보고 있는 거 맞지?"
빅토리아 아카데미에서 가장 오래 교수직을 맡은 중년의 남자가 중얼거렸다.
"… A클래스 인원들은 다들 하나같이 살벌하네요."
"살벌?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요."
여교수가 어이없다는 듯 되물었다.
"그러게. 거품은 무슨, 진짜 역대급 물건이었네."
교수 중에서도 이호연이 아카데미의 홍보라고 믿는 교수가 있었다. 특히나 나이가 많고 오래 근무한 교수일수록 심했다.
자기가 실제로 보지 않는 건 절대로 믿지않는 사람들.
게다가 아카데미의 교수라도 이사장이나 학장에게 직접 사안을 전달받는 위치가 아니었기에, 당연히 아카데미의 광고인 줄 알았던 것이다.
그들이 대놓고 이호연을 비난한 적은 없기에, 김진혁이 굳이 설득하지 않은 것도 이유 중 하나였다.
"이제 거품 설은 완전히 사라질 것 같은데… 아니, 오히려 더 시끄러워 지지 않을까요?"
"이미 영상이 퍼지고 있어요. 길드 스카우터들이 보는 순간 끝이죠. 뭐."
교수 한 명은 스마트워치로 에브리데이를 보고 있었다.
이미 가장 상단에 이호연의 영상이 올라가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속도의 마법진 구사, 더블 캐스팅, 게다가 마법 사이의 간극은 없는 수준… 완전히 전투형 마법사의 끝판왕이네."
"신체 강화 스킬도 있는 게 분명해요. 몸의 반응속도가 순간적으로 빨라지는 구간이 보여요."
"이 정도면 각성 아니야?"
각성.
능력자가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과정이다.
이 각성을 하냐 마냐에 따라 헌터의 대우가 달라진다.
활동하는 현역 헌터들 중에서도 각성의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 헌터가 대부분일 정도로 도달하기 어려운 경지다.
"당연하죠. 각성의 경지가 아니면 설명이 안 되잖아요."
"진짜 파장이 얼마나 심할지… 치가 떨리네."
교수들은, 당연히도 이호연이 그 단계에 이르렀다고 판단했다.
남 교수 한 명이 한숨을 쉬며 커피를 들이켰다.
"나는 모르겠다. 다 김진혁 교수한테 맡기죠. 담임 교수인데."
"… 그래요."
교수들이 말을 하는 사이에, 2학년 7등까지 이호연에게 패배했다.
아까부터 계속 다른 마법을 쓰는 게, 대련이라기보단 자기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테스트하는 것 같았다.
다른 생도들과는 격이 다른 수준이었다.
"이번 중간고사… 1등 팸플릿은 먼저 만들어놔도 될 것 같은데요."
"…."
이호연에 대한 교수들의 인식은 180도 달라졌고, 교수들은 앞으로 이호연이 불고올 풍랑을 걱정했다.
"역시, 여보…!"
"네? 성녀님,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 아니에요!"
백아영은 열심히 대련장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
함성이 울려 퍼지는 대련장에, 작은 땅딸보 하나가 올라왔다.
"안녕하세요 윤현규 선배님?"
"너, 너… 정체가 뭐야!"
떠밀리듯이 대련장에 올라온 윤현규는, 학생회 회의실에서 보내던 야비한 미소는 어디다 숨겼는지 긴장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워낙 자존심이 강하시길래, 마법 실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후배가 직접 경험해보러 왔습니다. 잘 부탁드려요."
"이… 이 개 같은…!"
윤현규는 내 인사에 당황을 감추지 못하고 손을 부들거렸다.
"설마 7명이나 쓰러뜨려서 체력과 마나가 없어진 후배를 상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기권하실 건 아니죠?"
나는 실실 웃으면서 윤현규를 도발했다.
"누가 기권한대? 덤벼!"
땅딸보 윤현규는 몸에 마력을 일으켰다.
마법사, 게다가 나와 같은 불 속성이다.
'여기서 다른 속성까지 공개해버려?'
보는 사람도 많고, 내 힘을 공개하기에 나쁘지 않은 무대다.
다른 속성마법들까지 다 다루는 모습을 보여주면, 엄청난 파장이 일어나겠지.
'아니야. 더 큰 무대가 있어.'
중간고사 그리고 축제.
분명 둘 중 한번은 기회가 올 것이다.
이왕 받을 스포트라이트라면, 가장 크게 받는 게 좋은 법.
게다가 같은 속성으로도 충분히 제압할 수 있는 상대한테 굳이 힘을 드러낼 필요는 없다.
"준비됐으면, 시작한다!"
김진혁 교수의 시작 신호와 동시에 윤현규는 마법진을 그렸다.
화염구. 단순하지만 빠르고 강한 불 속성 마법사의 기본 마법이다.
파아악!
뜨거운 불길을 내뿜는 화염의 구가 만들어지며 불꽃을 내뿜었다.
"방심하는 거냐!"
다섯 개의 화염구가 나를 노리고 날아왔다.
나는 가볍게 코튼 가드로 막아냈다.
"선배님, 너무 느립니다. 화염구는 이렇게 쓰는 거예요."
화르륵-
화르륵-
내 몸을 중심으로 2개의 화염구가 끊임없이 생성되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총 24개의 화염구가 3초 만에 대련장을 덮었다.
5개의 화염구를 만드는데 5초 이상 사용한 윤현규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속도였다.
"잘 막아내셔야 합니다. 한 번에 끝나면 재미없잖아요."
콰과광!!
24개의 화염구를 윤현규에게 한 번에 쏟아부었다.
윤현규는 피할 곳이 없다는 걸 깨닫고 정면에 방어막을 쳤다.
불의 장벽. 불 속성으로 만들어진 쉴드기에, 당연히 불 속성에 면역이 높은 마법이다.
판단은 괜찮았다.
하지만.
파아악-!
내 화염구들은 윤현규의 쉴드를 가볍게 찢고 들어갔다.
"으악!"
나는 화염구가 쉴드를 찢어냄과 동시에 바닥에서 화염 사슬을 뽑아내어 윤현규의 발을 잡아당겼다.
꽈당! 하고 넘어진 윤현규의 머리위로 화염구가 스쳐지나간다.
"불 속성 쉴드가 화염구에 뚫릴 수가 있어?"
"그만큼 기량 차이가 심하다는 거지. 이호연하고 저 선배하고."
"아… 하긴 못 싸우게 생기긴 했는데. 이론파인가?"
대련장 밑에서 생도들의 조소와 비웃음이 들려왔다.
얼굴이 빨개진 윤현규는 내 화염 사슬을 벗어내고 벌떡 일어났다.
"너, 너… 절대 가만 안 놔둔다…! 나를 가지고 놀아? 부회장님과 척을 지면 어떻게 되는지 알려주지!"
"네네. 기권이나 하지 마세요."
윤현규는 잔뜩 성이 난 채 마법을 쏘아댔고, 나는 코웃음을 치면서 윤현규의 마법을 하나씩 파훼하기 시작했다.
*
"어, 어떻게…."
"이제 좀 인정해라. 선배. 당신 더럽게 약하다니까?"
"나, 나는 2학년이라고! 1학년 신입생한테 질 이유가 없다고!"
마법이란 마법은 다 파훼 당하고, 현실을 부정하는 윤현규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냥 부회장 엉덩이나 핥으면서 살아. 괜히 까불지 말고."
"끄악!"
정강이를 마력으로 감싼 발끝으로 걷어차고, 주저앉은 윤현규를 내버려 둔 채 뒤로 돌았다.
"기권하겠습니다."
"… 기권을 그렇게 사용하는 건 바람직하지 못해."
김진혁 교수가 별로 좋지 않은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대련에는 최선을 다하자. 이런 느낌인가 보다.
'아까 남다은하고 엘리스도 대충 기권했잖아요. 교수님….'
김진혁 교수도 남자라서 예쁜 여자를 편애하는 건가.
다행히 나는 좋은 변명거리가 있었다.
"교수님. 대련을 너무 많이 했더니 머리가 아파서요. 양호실에 가서 쉬어야 할 것 같습니다."
"요 근래 내가 본 최근 몸 상태 중에 베스트컨디션 같은데."
"… 아닙니다. 양호 선생님한테 여쭤보셔도 됩니다."
"하아, 네 장난에 어울릴만큼 백아영 선생님은 그렇게 한가한 분이 아니…."
김진혁의 목소리를 끊고, 청아한 목소리가 강당에 울려 퍼졌다.
"이호연 생도!!! 무슨 일 있어요??!!"
언제부턴가 교수들 사이에서 대련을 보고 있던 백아영이, 호다닥 대련장에 올라와 내 상태를 파악하기 시작했다.
"확실히. 상태가 안 좋네요. 휴식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김진혁 교수님."
"…정말입니까? 제가 보기엔 정상 같았는데…."
"확실합니다. 제 눈을 의심하시는 건가요?"
백아영은 눈을 부릅뜨며 김진혁을 바라봤다.
[백아영보다 뛰어난 힐러는 없고, 성녀가 한국에 있다는 사실에 한국 헌터들은 감사해야 한다.]
현역 헌터 중 모르는 사람이 없는 말이다.
"… 죄송합니다. 빨리 데려가시죠."
"호연 생도. 혼자 걸을 수 있겠어요? 부축해줄까요?"
"… 네. 부축해주세요. 그럼."
★ 히로인 상태창
[백아영]
- [ 호감도 : 88 ] (+0.2)
- [ 성욕 : 80 ]
- [ 식욕 : 30 ]
- [ 피로도 : 35 ]
현재 상태 : 이, 이대로 양호실로 데려가서… 무, 문을 잠그고…!
이 변태 같은 눈을 보고도 다들 의심을 안 한다고?
다들 성녀라는 이미지를 깨고 현실을 직시해야 하는데, 백아영이 쌓아온 성녀로서의 이미지는 정말 확고했다.
"와, 부임하자마자 부상자 체크하는 거 미쳤다…."
"저러니까 성녀님이라고 불리지. 나도 오늘부터 팬 해야겠다."
욕망에 가득 찬 눈도 치료를 위해 몸을 불사르는 사람이 되고 있으니, 대단하긴 하네.
"눈이 멀었어 다들."
"이호연 생도. 상처가 벌어질 수도 있으니 말하면 안 돼요."
"애초에 상처가 난 적이…"
"쉿!"
"…네네. 알겠습니다."
백아영과 나는, 그렇게 강당을 빠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