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화 〉81화. 양호 선생님 등장 (3)
"이호연 생도?"
B 클래스의 교수는 나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내가 손을 들 줄 몰랐나보지.
"저도 하고 싶습니다."
그때, 내 뒤에 있던 엘리스도 손을 들었다.
아니, 얘는 왜 이래. 방해하지 말아봐.
"저도 할래요!"
가만히 있던 김영한도 손을 든다.
"저도 하고 싶습니다!"
"2학년과 대련 할 기회가 얼마나 있다고!"
"…?"
생도 중에 1/10은 손을 들었다. 내 계획이랑 다른데?
나는 땅딸보만 잡고 내려오고 싶었는데, 그렇다고 저 새끼만 족칠 테니까 비키라고 할 수도 없고.
"어어… 지원자가 꽤 많네. 어쩌지?"
"그냥 한 번에 다 시키죠?"
"네? 아, 박 교수님. 어떻게요?"
고민하던 여교수 뒤에서 튀어나온 남교수는 2학년 교수였다.
그는 귀찮은 듯이 머리를 긁으며 우리를 바라봤다.
"순위별로 한 명씩 나와서 승자대장전으로 돌리면 되잖아요. 전 인원 열외 없이 1번은 대련을 하게 만들고, 더 하고 싶은 사람들은 뒤에 대련장 많이 만들어놨으니 자율적으로 하게 만들죠."
"아… 그것도 나쁘진 않네요. 그런데 1학년들은 아직 시험을 안 봐서 순위가 안 나왔어요."
"그 정도는 적당히 끊으면 되죠. 저는 2학년 순위별로 정리하고 올게요."
"네네. 알겠습니다."
교수 둘은 서로 어쩌고저쩌고 하더니 결론을 내버렸다.
여교수가 설명한 룰은 간단했다.
1학년과 2학년이 한 명씩 나와서 일 대 일로 붙는다. 패배한 쪽은 대련장을 나가고, 승리한 쪽은 대련장에 남는다.
각 학년에 생도가 200명이 넘어서, 5팀으로 나누기로 했다.
2학년이 순위대로 팀을 나누고, 우리는 적당히 지금까지 본 느낌으로 팀을 나눴다.
난 당연히 최상위권이었다. 재평가를 못 받을 뿐이지, 약하다고 평가받는 건 아니니까.
전에 까불던 비실이를 패기도 했고.
참고로 도진혁이랑 그 따까리들도 대부분 최상위권에 있었다.
그 날 이후로 내게 접촉을 덜 해와서 편하고 좋았다. 역시 사람은 맞아야 정신을 차리지.
"내가 먼저 나가도 될까?"
40명 정도의 생도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내 목표는 땅딸보인데, 저 새끼가 언제 나올지 모른다.
그럼 뭐 어쩌겠어. 땅딸보가 나올 때까지 쓰러뜨려야지.
"그러던가."
엘리스는 1학년 최상위권에서도 가장 발언권이 강했다.
물론 무력은 남다은이 더 강하지만, 남다은은 자기 의견을 거의 표출하지 않았으니까.
"저쪽에서는 1등부터 나온다는 거 같은데, 괜찮겠어?"
얘는 김영한이다.
당연한 듯이 최상위권에 들어와 있었다.
남자라서 크게 관심을 안 주긴 했지만, 진짜 강하긴 한가보다.
"너는 그런 정보를 어떻게 아는 거야?"
"다 방법이 있지. 방법이 있어."
"… 그럼 저 땅딸보같이 생긴 선배는 몇 등인지 아냐?"
"윤현규 선배 말하는 거야? 8등이지. 그리고 저 사람 너랑 같은 학생회아니야? 왜 몰라."
"별 관심이 없어서."
드디어 정보통으로 해야 할 역할을 하는 김영한이었다.
키워놓은 보람이 있구나! 자랑스럽다!
'8등이면 위에서 8명만 박살 내면 되는 건가?'
사실 8등인 걸 알았으니 저 때만 맞춰서 나갈 수 있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말해볼까?
"어! 성녀님!"
어떻게 행동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내 귀에 도저히 넘길 수 없는 단어가 들렸다.
나는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강당 정문을 통해 들어오는 미모의 여성.
협회를 그만뒀는데도 오피스룩 차림이었다.
허리까지 내려온 검은색 생머리와 새하얀 피부, 푸른색 눈동자라는 조합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적당힌 길이의 스커트와 새하얀 와이셔츠는 오피스걸이라는 이미지에 딱 맞았다.
백아영은 수많은 사람의 시선이 부담스러운지 고개를 휙휙 돌리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아…."
★ 히로인 상태창
[백아영]
- [ 호감도 : 84 ] (+0.2)
- [ 성욕 : 69 ]
- [ 식욕 : 30 ]
- [ 피로도 : 35 ]
현재 상태 : 찾았다….
백아영은, 탄성을 내뱉더니 그대로 내게 다가오려고 했다.
"서, 성녀 님이네?!"
나는 백아영과 눈을 마주치고 다가오지 말라는 시그널을 엄청나게 보냈다.
내가 성녀님이라고 부르자 약간 정신을 차렸는지, 백아영도 큼큼. 하면서 물러났다.
뒤에 서 있던 교수가 백아영에게 다가가 무슨 일로 오셨냐고 물었다.
"아, 양호 선생님의 첫 업무로 대련에서 일어날 수 있는 사고를 대비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아아… 그러셨군요. 저쪽에 교수들이 모여있는 곳이 있으니 같이 가시죠."
"아니요. 여기서 생도들을 지켜볼게요."
"네, 넵. 알겠습니다."
남교수는 슬쩍 백아영을 데려가려 했지만, 단호한 태도에 포기하고 뒤로 돌아갔다.
생도들은 백아영을 아카데미에서 보는 게 신기했는지 계속 눈길을 줬다. 하지만 다가가서 말을 거는 사람은 없었다.
아무래도 다들 이사장의 공문을 교수한테 전달 받은 모양이다.
백아영의 심기를 건드렸다간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하지만 저렇게 계속 혼자 내버려 두는 것도 좋지 않다.
직장이 바뀌어서 다들 모르는 사람이라 어색할 텐데, 나라도 슬쩍 가서 말을 걸어야 하나?
★ 히로인 상태창
[백아영]
- [ 호감도 : 84 ] (+0.2)
- [ 성욕 : 69 ]
- [ 식욕 : 30 ]
- [ 피로도 : 35 ]
현재 상태 : 여기까지 찾아왔는데, 언제쯤 만나러 와주려나?
상태창을 확인했더니 그럴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어색함은 무슨. 그냥 주변을 하나도 신경 쓰지 않고 있다.
저거 진짜 괜찮겠지? 원작에서도 협회를 그만두진 않았는데, 나 때문에 협회까지 그만두는 건 좀 그렇지 않나…?
아 몰라.
원작을 신경 쓸 거였으면 진작 신경 썼어야지.
이미 하렘 루트를 가려고 마음먹은 순간부터 원작이 뒤틀리는 건 필연이다.
어떻게 극복하냐가 중요할 뿐이다.
"순서는 다 정했나?"
1, 2학년들의 최상위권 대련을 심판을 보기로 한 김진혁 교수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어, 잠시만요! 호연아. 네가 첫 번째로 나갈 거야?"
"사실 난 8등하고만 붙으면 돼서, 별 상관없긴 해."
"그럼 우리도 순위대로 나가는 거 어때? 처음이 남다은. 그다음이 엘리스. 세 번째가 이호연 순으로…."
나야 상관없기는 한데… 남다은이랑 엘리스가 전력을 다하면 8등이 문제가 아니라 40명을 다 이길 수도 있다.
특히 남다은은 진짜 개사기 캐릭터라서, 나도 지금 시점에 얼마나 강한지 상상이 안 된다.
"불만 없지? 각각 1학년 최강, 1학년 최우수생도, 1학년 최고 미남이잖아. 당연히 이렇게 나가야지."
아니 최고 미남이 뭐야. 나도 마인 잡고 오우거 잡고 다 했다니까?
이제보니 얘도 내 이미지를 잘못 만드는 일에 일조하는 것 같다.
"이건 성적에 반영되는 요소입니까?"
지금까지 가만히 있던 남다은이 김진혁 교수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친선 대련 느낌이라 성적에는 반영되지 않는다."
"예. 알겠습니다."
저 모습을 보니 남다은은 열심히 안 할 생각인가 보네.
그럼 엘리스에게만 말하면 된다.
"엘리스. 나 2학년 8등이랑 꼭 붙고 싶은데, 7등까지만 잡고 기권해줄 수 있을까?"
"… 내가 왜?"
반응이 부정적이다.
★ 히로인 상태창
[엘리스]
- [ 호감도 : 35 ]
- [ 성욕 : 25 ]
- [ 식욕 : 30 ]
- [ 피로도 : 40 ]
현재 상태 : 얘 때문에 아빠한테 애교부렸던 걸 생각하면… 으.
음. 내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아빠한테 애교도 부렸구나.
평소에 차가운 애가 애교를 부렸다는 생각을 하니 보고싶었다.
"설마 내기 때문에 아직도 삐져있는 거 아니지?"
"참나. 내가 무슨 앤 줄 알아? 아니거든?"
엘리스는 표정을 찌푸리며 나를 피해 도망쳤다.
저러면서 해줄 거 같긴 한데… 해주겠지?
1학년의 나머지 순서는 별 관심이 없어서 알아서 정하게 내버려 두고 남다은의 대련을 구경했다.
남다은과 2학년 1위는 대련장에서 마주 보고 섰다.
"잘 부탁드립니다."
"으응. 잘 부탁해."
남다은은 저래 보여도 공적인 자리에서는 예의 바른 편이다. 정확히 저 말 빼고는 아무 말도 안 해서 그렇지.
"그럼, 시작!"
김진혁 교수의 시작 신호와 함께 남다은이 몸을 움직였다.
콰앙-!
남다은의 고유 권능인 공간 지배, 자신 주변의 공간을 지배하고 가속해 순식간에 신형을 움직였다.
2학년 1위는 시작과 동시에 뒤로 물러났음에도 남다은의 일격을 허용했다.
"크흡ㅡ!"
남다은의 빠른 공격을 대비해 칼을 들어서 막고 있던 건 정말 칭찬해줄 만한 일이지만, 그런데도 힘을 이기지 못해 뒤로 몇 발자국이나 물러났다.
"2학년 1위가 이 정도면… 계속 조금만 써도 되겠네."
남다은은 뜻 모를 말을 중얼거리더니, 갑자기 손을 들었다.
"기권하겠습니다."
"이, 이봐!"
2학년 1위는 갑작스러운 남다은의 기권에 자존심이 상한 듯 남다은을 붙잡았다.
"이렇게 끝내는 게 어딨어! 아직 나는 시작도 못 했다고!"
"죄송합니다. 제 훈련에 도움이 될 것 같지가 않아서요."
"…."
와… 저건 진짜 자존심 상하겠다.
오히려 예의 바르게 나오니까 더 슬프다. 진짜로 도움 안 되는 것 같잖아.
대련장의 2학년 1위는 넋이 나간 듯 멍하니 남다은을 바라보고 있었고, 남다은은 무감정하게 걸어 나와 강당 밖으로 나갔다.
"음, 1학년의 기권으로 승자는 2학년 한서율입니다. 한서율은 남고, 1학년에서 다음 타자 나오도록."
다음은 엘리스다.
엘리스도 역시 예의 바르게 인사하며 대련을 시작했다.
"쟤는 진짜 1학년이 아닌 것 같아."
"그치. 남다은은 그냥 엄청 세서 잘 모르겠는데, 엘리스는 기술이나 마력 운용이 말도 안 되는 게 눈에 보여서 더 대단해 보여."
"솔직히 재능이랑 능력이 사기지. 마나 소모가 심한 재능을 타고났는데, 마나량도 타고났잖아."
주변 생도들은 엘리스에 대해 평가를 하고 있었다.
대부분 긍정적인 평가였지만, 사실 엘리스에겐 몇몇 측근 빼고 모르는 비밀이 있다.
바로 선천적인 마력 장애.
남들보다 마나량이 극도로 적은 장애다.
검술과 마법이라는 타고난 재능도 마력 양의 한계는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엘리스는 힘을 쓰기 위해 마석이 필요하다. 남들보다 마나량이 적은 데 검술과 마법이라는 두 가지를 양립시키기 위해선 강제로라도 마나를 충당해야 했다.
그렇기에 매일같이 비싼 장비로 마나석을 몸에 흡수시킨다.
단순마나량만 올려줄 뿐, 도핑 같은 게 아니기 때문에 빅토리아 아카데미에서도 정식으로 허락을 맡았다.
물론 아이리스 길드의 딸이 아니었다면 허락해줬을지 미지수지만…. 원래 세상은 이런 법이니까.
촤자작-
엘리스의 검이 한서율과 닿을 때마다 뜨거운 열기가 치솟는다.
"크윽…."
남다은과의 대련처럼 한 방에 나가떨어지진 않았지만, 한서율은 조금씩 밀리고 있었다.
이대로면 곧 패배할 것 같았다.
챠앙!
엘리스에게 점점 뒤로 밀리던 한서율은, 참지못하고 엘리스에게 달려들었다.
사사삭-
한서율이 바닥을 박차며 마력을 끌어올렸다.
순간 한서율의 검이 4개로 늘어나며, 각각 엘리스의 사지를 노려왔다.
"막을 수 있으면 막아봐라!"
누가 봐도 비장의 수단처럼 보이는 기술을 보며, 엘리스는 가볍게 팔을 움직였다.
양팔로 날아오는 검을 검으로 받아치고, 오른 다리를 향하는 검은 바닥에서 튀어나온 줄기들이 붙잡았다.
왼쪽 하단의 검은 포스 마법으로 칼날을 건드려 엘리스의 몸을 빗나가게 했다.
"크읏!"
순간의 공방 이후에 한서율은 검을 놓치고 있었고, 엘리스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완벽한 압승.
2학년 1위가 처참하게 깨지는 모습에 2학년들은 고개를 저었고, 1학년들은 환호를 질렀다.
"선배님. 제대로 한 수 배웠습니다. 기권할게요."
그리고 엘리스는, 기권했다.
"…?"
"뭐라고?"
한서율은 '졌지만 잘 싸웠다…!' 라는 표정을 짓고 있다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고, 김진혁도 잘못 들었는지 다시 물었다.
"확실히 선배님은 다르시네요. 후배가 많이 배웠습니다."
엘리스는 당당하게 고개를 숙이며 예의 바른 태도를 보였다.
쟤는 왜 저래 대체?
★ 히로인 상태창
[엘리스]
- [ 호감도 : 35 ]
- [ 성욕 : 25 ]
- [ 식욕 : 30 ]
- [ 피로도 : 40 ]
현재 상태 : 이 정도 실력이면, 테스트 해볼 만 해.
'아하… 나를 테스트 하시겠다.'
누가봐도 다음 차례인 내 실력을 테스트하겠다는 의도였다.
기분 나쁘진 않았다. 나도 실전경험이 많을수록 좋고, 이 기회에 약골이라는 누명도 벗으면 좋으니까.
이왕 보여줄 거면 화끈하게 보여줘야지.
나는 자신있게 대련장으로 올라갔다.
내 앞에는, 얼굴이 울그락불그락 해진 2학년 1위가 서있었다.
"도대체, 선배를 얼마나 무시하길래 날 이렇게 비참하게 만드는 거냐...!"
아니, 내가 무시헀냐고요.
"선배님. 잘 부탁드립니다."
"... 이번엔 이기고 말겠어."
한서율은 분을 삼키며 내게 인사를 했다.
이 사람은 무슨 잘못을 했길래 후배한테 세번이나 져야 할까.
처음으로 2학년이 불쌍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