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화 〉80화. 양호 선생님 등장 (2)
"너… 밖에서 이상한 짓 하고 다니는 건 아니지?"
김진혁의 물음에 나는, 말문이 막혔다.
솔직히 이상한 짓을 하고 다니긴 했으니 반박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긍정할 수도 없으니, 나는 시치미를 뗐다.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이상한 짓이라니?"
"으음, 이사장님이 흘러가는 말로 '어린놈이 여자를 어쩌고' 하는 말을 들었거든. 혹시나 해서 묻는 거다. 네 사생활에 간섭할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우리 클래스 생도니까."
"...."
에이 설마. 아니겠지.
내 문란한 여자관계를 들키기라도 한다면.... 진짜 좆된건데.
'아니 잠시만.'
생각해보니 불안해할 필요가 없었다.
내가 관계를 맺은 여자는 총 5명이다.
루미, 임솔, 루시, 백아영 그리고 릴리아나.
이 중에서 루미를 제외하곤, 다른 사람에게 발각된 적이 없다.
루시는 펠릭스에게 발정 마법을 당했을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그 날에 일어난 일은 나와 릴리아나 빼고는 아무도 모른다.
임솔은 연구실 안에서만 관계를 맺었으니 당연히 들키지 않았고.
백아영과는 야외 플레이도 몇 번 있었지만... 그때마다 결계를 잊지 않았기에 걸린 적이 없다.
릴리아나는 집 안에서만 있었으니 존재도 모를 테고.
남은 건 루미인데, 루미는 솔직히 걸리는 게 많다.
뭣도 모를 때 같이 모텔도 두 번이나 갔었고, 최근에 동아리방이라고 안심하고 섹스하다가 걸린 적도 있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나를 뒷조사 해봤자 나와 루미가 연인관계라는 점만 나올 뿐이지. 수상한 점은 없다는 뜻이다.
결론은, 꿀리는 게 없었다.
"걱정 마세요. 저 그런 남자 아닙니다. 제 입으로 말하긴 그렇지만, 매주 보육원 다니면서 봉사를 하고 있는데 거기서 성녀님을 자주 봤거든요. 그리고 던전 실습 훈련 테러 때도 저랑 성녀님이 같이 낙오되서 친분이 생겼어요. 그래서 저를 부른 게 아닐까 싶습니다."
"오... 자발적으로 봉사를 다닌다고? 테러 때 같이 낙오된 건 알았는데 그런 사연이 더 있었구나. 그렇다면 친분이 생길 만도 하지. 혹시 내 말이 기분 나빴다면 사과하마."
그래 이게 정상적인 반응이지.
아카데미에 침입한 마인도 잡아주고, 학생회 홍보부로서 활동도 열심히 하고, 던전 폭주 때 백아영도 구해주고, 떠오르는 유망주로서 아카데미 이름도 빛내주고, 자발적으로 주말마다 봉사까지 다니는데.
이런 에이스가 세상에 어딨냐고.
"괜찮습니다. 이사장님은 어디 계신가요? 제가 이사장실로 찾아가야 하나요?"
"아니. 이쪽으로 오고 계신다. 나는 수업 때문에 자리를 비워야 하니 여기서 대화를 나누면 될 거야."
"아하... 알겠습니다."
"네가 열심히 하는 사람이란 건 모두가 알고 있으니 긴장하지 말고 아는 그대로 말하거라."
"옙. 수업 고생하십시오."
김진혁이 합동 수업 준비를 위해 나간 후.
나는 긴장을 풀고 몸을 이완시켰다.
본래 조직이란 건 복잡한 법이지만, 아카데미의 이사장쯤 되면 웬만한 건 무시하고 다녀도 될 정도의 위치다.
실제로, 학장보다 이사장의 권력이 강하다. 헌터로서의 능력, 권위 어떤 걸 따져봐도 그렇다.
그래서 나한테 무슨 말을 할지 모른다.
나는, 그런 이사장을 위해 커피를 준비했다.
사소한 예의라도 지키는 척을 해줘야지.
비록 믹스커피지만 중요한 건 정성이다.
커피잔에 믹스커피를 털어놓고, 뜨거운 물은 붓지 않고 기다렸다.
똑 똑 똑.
"이호연 생도 여기 있나?"
"네. 있습니다!"
지금이다. 자연스러움을 유지하며 뜨거운 물을 부었다.
이게 바로 몸에 매너가 배어 있는 척하는 커피 대접하기!
문을 열고 들어온 이사장은, 중년 남자같은 외형을 가지고 있었다.
깔끔한 인상에 털털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안경을 쓰고 있으니 약간 문수린과 분위기가 비슷하기도 했다.
저 사람 분명 수린 누나의 할아버지인데.... 강한 헌터는 노화도 무시한다는 말을 몸소 보여주는 사람이다.
"자네가 이호연 생도구나. 반갑다."
이사장 문재철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두 손으로 공손히 악수를 받았다.
문재철은 내 혼신의 커피 대접은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자리에 앉았다.
약간 서운하네.
"그래, 이호연 생도...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알겠나?"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백아영에 관한 얘기겠지.
나랑 봉사활동을 같이 하기도 하고 던전 실습 훈련 때 같이 낙오된 전적도 있으니 백아영에 관해서 물을 생각일 거다.
"자네가 성녀 백아영 헌터와 친분이 있는 거로 알고 있어서 찾아왔네. 이건 사실이지?"
"예. 긴밀한 관계까지는 아니더라도, 적당한 친분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일단 적당한 친분이 있는 척 하는 게 제일 좋다. 괜히 친하다고 해봤자 이득볼 게 없으니까.
"그래.... 어제, 갑작스럽게 백아영 헌터가 아카데미에 부임하고 싶다는 의사를 알려왔다. 이 건에 대해서 백아영 헌터에게 미리 들은 적 있나?"
"아니요. 저도 오늘 아침에 김진혁 교수에게 전달받았습니다."
"흠...."
문재철은 테이블 위의 커피를 입으로 가져갔다.
"생도치고 커피를 잘 타는구먼. 그런데, 걸리는 게 있어."
"어떤 점 말씀입니까?"
"백아영 헌터가 요구한 조건이 뭔 줄 아나? 돈은 필요 없다. 원하는 건 오로지 성녀라는 이미지를 아카데미의 이익을 위해 사용하지 말 것. 그리고 생도들과 접촉하기 쉬운 자리를 줄 것."
"...."
나는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조용히 이사장의 말을 경청했다.
"아카데미 입장에서야 거절할 이유가 없지. 성녀라는 이미지는 이미 협회에서 뽑아먹을 만큼 뽑아먹었고, 다른 미사여구 없이 '성녀가 협회를 그만두고 아카데미로 왔다.'라는 사실만 언론에 전달해도 엄청난 이득이거든."
그렇겠지. 백아영은 예쁜 얼굴과 항상 현장에서 부상자들을 챙기는 모습으로 성녀라는 이미지가 깊게 각인되어 있다.
언론 뿐만 아니라 현역 헌터들이 앞장서서 백아영을 지지해주니, 일반인들도 '아, 저 여자가 성녀고 엄청 착하구나.' 하는 인식이 박힌 것이다.
그런 사람이 협회 대신 아카데미를 택했다는 것만으로도 아카데미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이득을 얻는다.
"하지만 생도들과 접촉하기 쉬운 자리라는 게... 약간 마음에 걸렸지. 우리 입장에서는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잖아."
"예."
"하지만, 협회에서 생도를 빼가려고 한다? 그렇다기엔 백아영은 너무 큰 카드야. 백아영이 생도들을 데려가서 길드를 만들려고 한다? 말도 안 되는 소리고. 그럼 남은 건 하나 뿐이지. 생도 중에 백아영의 관심을 끄는 생도가 있다...."
"...."
"그리고 그게 너다. 이호연."
무섭네.
이사장에게선 어떻게든 내 비밀을 파헤치겠다는 기세가 느껴졌다.
이게 아카데미의 이사장 자리까지 올라온 남자인가.
만약 내가 평범한 생도였다면 교수실이라는 장소와 상황, 이사장이라는 지위와 기세에 눌려 있는 사실 없는 사실 다 털어놨겠지만 나는 달랐다.
[뚜렷한 정신력]은 어느 상황에서도 내가 원한다면 감정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하루 만에 백아영의 목표가 나라는 사실을 알아낸 아카데미의 정보력이 약간 무섭긴 했지만, 이럴 때야 말로 침착해야 한다.
여기서 내 대답이 중요했다.
이 아저씨가 무슨 대답을 원하는 걸까.
"나도 양심이 없는 사람은 아니야. 네 덕에 백아영 헌터가 아카데미로 오게 된 게 맞다면 보답을 해주려고 하는 거니까 거짓말하지 않아도 된다."
말은 저렇게 하지만, 이미 진상은 파악한 게 분명했다.
사실 던전 실습 훈련 테러 때 나와 백아영을 구조했던 헌터들이나, 보육원에서 일하는 보육 선생님들 에게 물어보면 나와 백아영이 많이 친하다는 사실은 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내가 강하게 부정한다면 잠깐 이 자리를 벗어날 수는 있겠지만, 원흉을 해결할 수 없다.
어차피 아카데미까지 쳐들어온 백아영이 내게 접촉해올 테니까.
'사귀는 사이라고 하는 게 제일 나으려나.'
나와 백아영이 사귀는 사이라면, 모두 해결될 일이다. 연인을 찾아 직장을 옮기는 일이야 흔하다.
그렇게 백아영과 사귀는 사이라고 말하려다가, 잠깐 멈칫했다.
이렇게까지 조사를 했다면, 이미 루미와 내 관계도 알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사귄다는 대답은 안 된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나는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실은... 성녀님이 저를 일방적으로 좋아해서 따라다니고 있습니다."
아영 씨 미안.
"... 뭐라고?"
내 상상도 못한 대답에, 분위기를 잡으며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던 문재철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
"그랬던 건가... 던전 폭주 이후로 너에게 감정이 생겨서 계속 따라다닌다고...."
"예. 저번 주말에 학생회에서 보육원에 봉사를 나갔었는데, 그 때도 미리 알고 따라왔다고 하더군요. 보육원 원장님께 확인해보셔도 됩니다."
"허어... 잠시 기다리게."
문재철은 스마트 워치를 두드리며 어딘가에 연락을 보냈다.
"정말이군. 보육원 원장에게 확인했다."
"네."
"으음, 자네가 보호를 원한다면 아카데미 차원에서 백아영 헌터를 지금이라도 내보내 줄 수 있네. 어떻게 생각하나?"
오호. 생도 하나를 위해서 성녀를 내보내다니, 그래도 이사장으로서 의식은 있는 사람이다.
애초에 문수린의 할아버지니까 나쁜 사람일 리가 있나.
"아닙니다. 저도 아직 성녀님과의 관계를 생각하고 있는 단계라서요."
나름 잘 대답했다고 생각했는데, 문재철은 내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자네는 확실히, 다른 생도와는 달라."
"별 거 아닙니다."
아뿔싸. 너무 침착하게 행동했나.
하지만 진짜 생도를 연기하면서 실수를 할 바엔, 실수 없이 침착한 대응이 낫다.
이보다 더 좋은 대처는 없었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별거 아니긴. 내 앞에 서기만 해도 벌벌 떠는 놈들과는 차원이 다르지. 그 정도면 수린이가 관심을 보내는 것도 이해가 돼."
"...네?"
잘못 들은 건가? 문수린이 나한테 관심이 있는 걸 이사장이 어떻게 알지?
"하지만 말이야...."
두근.
이사장은 마력을 뿜어내지 않고 있었다.
그럼에도 내 전투 감각은 위험한 상황이라고 알림을 보내왔다.
"우리 수린이와 친하게 지내려면... 적어도 모든 여자관계를 정리하고 수린이만 바라보는 상태여야 할 거야. 안 그러면, 나도 내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거든."
"...옙.'
이사장은 웃고 있었지만, 웃음이 웃음으로 보이지 않았다.
"끝까지 고개를 숙이지는 않는구나. 패기는 인정하마."
이사장은 내 여자관계만 빼면 사윗감으로 마음에 든 모양인지, 사람좋은 미소를 보내왔다.
솔직히 무서워서 변명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직 극대노 상태가 아닌 걸 보니, 내가 꼬리치는 건 모르는 것 같다. 다행이네.
"다음에 수린이를 보내마. 덕분에 성녀를 아카데미 소속으로 바꿨으니 보상은 확실하게 해줘야지."
문제는 아직 문수린 공략을 시작도 안 했다는 점이다.
내가 제대로 꼬리쳐도 저런 쿨한 반응을 보낼까?
혹시나 오징어 다리만큼 여자를 사귀어야 한다고 하면 무슨 반응을 보낼까?
'나도 모르겠다….'
*
이사장은 대화를 마치고 방을 나갔다.
나도 수업을 재낄 순 없으니 빠르게 합동 수업을 하는 강당으로 달렸다.
끼익-
강당 문을 열고 들어가자, 1학년과 2학년들이 모여서 교수들의 지도를 받고 있었다.
나는 1학년들 앞에 서 있던 김진혁 교수와 눈이 마주쳤고, 살짝 묵례하며 루시의 옆에 앉았다.
"어? 이호연. 왔구나?"
"응응. 루미는?"
"잠깐 화장실. 이제 정신교육 다 끝나고 대련할 시간인데, 타이밍 딱 맞게 왔네."
"오... 그래?"
어쩐지, 교수들이 몇 명 없다 싶더니 저 뒤편에서 대련장을 설치하고 있었다.
10개가 넘는 대련장이 설치되는 걸 보니, 전 인원이 대련을 하는 모양이다.
"자, 1학년 들은 다 이쪽으로 오도록 해라. 2학년들과 실전 대련을 할 예정이니까."
웅성웅성.
"와, 2학년 들은 엄청나게 강하겠지?"
"근데 2학년에는 유명한 사람이 없잖아. 1학년 유망주들은 2학년도 그냥 이길걸?"
저 말이 맞다.
게임 전개의 편의성을 위해 유망주들이 1학년에 몰려있으니까. 사실 2학년은 잘못없는 피해자다.
"와, 1학년들 태어난 년도에 뭐 있었나?"
"글쎄. 운이 좋은 거지 뭐."
나는, 1학년에 '황금의 세대' 같은 수식어가 붙지 않는 점에 감사하고 있다.
'황금 세대의 주역. 이호연' 같은 소리가 들리면 진짜 죽고 싶을 것 같다.
"그럼, 순서는 어떻게 정할까? 혹시 2학년과 대련을 먼저 해보고 싶은 사람?"
김진혁 교수가 잠시 대련장 설치를 도우러 간 동안, B 클래스 담당 교수인 여교수가 무대로 올라와 1학년들에게 물었다.
수업시간과 달리 이번에는 생도들도 조금 관심이 있는 것 같았다. 선배들과 대련을 해볼 기회가 많지는 않으니까.
나는 선수를 뺏기기 전에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