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화 〉58화. 던전 실습 훈련 (2)
눈을 뜨니 낯선 천장이었다.
"으, 차가워."
차가운 동굴 바닥에서 몸을 일으켰다. 내 옆에는 몸을 뒤척이며 신음을 내는 백아영이 있었다.
백아영도 정신을 차렸는지 몸을 일으키고 주변을 살폈다.
"이, 이게 무슨… 무차별 전이라니, 이건 말도 안 되는 수준의 폭주인데…."
쿠우웅-
던전의 규모 자체가 커지고 마나 밀도가 높아졌다.
당연히 나오는 몬스터도 약간은 강해졌을 것이다.
"아영 씨, 일단 진정해요."
비에 젖은 강아지처럼 불안에 떨고 있는 백아영과 눈을 마주쳤다.
"으, 으응. 내가 있으니까. 걱정 마 호연아."
"아영 씨 못 싸우잖아요."
"그, 그렇긴 한데…! 회복은 잘 시켜줄 수 있어!"
백아영은 몸의 떨림을 감추지 못했다. 하긴 나 같아도 생도 하나랑 던전에 떨어지면 막막할 거 같긴 하다.
심지어 자신은 전투력이 하나도 없으니, 더 불안할 것이다.
"일단, 움직여보죠. 제가 이래 보여도 좀 강하거든요. 마인 잡은 거 뉴스 보셨죠?"
"당연하지. 상도 같이 받았잖아. 근데, 돌아다니기보단 여기 가만히 있는 게 낫지 않을까? 위험할지도 몰라."
이 폭주를 조용히 넘어가려면 가만히 있는게 가장 좋다.
이틀이면 구조대가 오는 미래를 알기 때문이다.
나는 그 전에 백아영의 처녀를 따야 한다. 상황을 만들려면 돌아다니는 게 좋다.
"지금 구조를 기다릴 시간이 없어요. 차라리 다른 생도나 힐러팀과 합류하는 게 나아 보여요."
"으으음, 알았어. 네 말대로 하자."
백아영은 떨떠름한 표정이었지만, 내 말대로 해줬다.
무력이 있는 사람이 나였으니 내 의견을 존중해 주는 것이다.
하지만 얼굴 한 편의 불안감은 숨기지 못했다. 내 무력을 믿지 못하는 느낌이다.
어쩌면, 나라는 사람을 믿지 못할 수도 있다. 솔직히 나는 게임에서 본 백아영이 친숙하지만, 내 눈앞의 백아영은 실제로 나와 관계를 맺은지 오래 되지않았다.
일단 백아영과 신뢰를 쌓아야겠다.
내가 앞장서고 백아영이 후방을 감시하는 형태로 천천히 던전을 탐사하기 시작했다.
"잠시만요."
"응."
츄츄츄!
차자작!
얼마 가지 않아 통로 앞에서 엄청난 날갯짓 소리가 들려왔다.
"이 소리는… 동굴 박쥐 떼 같아. 일단 뒤로 빠지자."
"어차피 일직선 통로라 못 도망가요. 그냥 처리할게요."
"도망가야 해. 소리를 들어보니 20마리 이상이야."
"진짜 괜찮아요. 보고만 계세요."
내 힘을 몰라 불안해하는 백아영을 진정시켰다.
마나를 조금 뽑아내 화염구를 만들어서 앞으로 천천히 날려 보냈다.
후두두두두!
약한 불을 밝히며 나아가던 불의 구는, 엄청난 수의 박쥐 떼와 부딪히고 마나로 흩어졌다.
20마리는 무슨. 50마리 이상인데 이거?
"새, 생각보다 엄청 많아! 도망쳐!"
크르르! 츄츄츄!
동굴 박쥐 떼들이 이제 시야에 잡히기 시작했다.
의외로 수가 많았다. 불태우기 만으로 처리하기엔 비효율적이었다.
'안 되겠다. 그냥 전력으로 가야겠어.'
어차피 보는 사람도 백아영 밖에 없고, 괜찮을 것 같았다.
이번 기회에 신뢰도나 좀 올려볼까?
"후우, 어쩔 수 없죠."
"호연아! 내가 막을 동안 도망쳐!"
백아영은 내 앞을 막아서더니 팔을 십자로 벌리고 눈을 질끈 감았다.
이 사람은 갑자기 왜 이래?
박쥐들이 그런 우리를 보고 달려들었다.
그와 동시에 난 손에서 회오리바람을 생성했다.
작은 폭풍이 손에서 앞으로 쏘아졌다.
날아오던 박쥐들이 속도를 줄이지 못하고 회오리에 빨려들어 갔다.
화르르륵-!
그리고 나머지 한 손으로 열댓 개의 화염구를 만들어내 회오리에 쑤셔 넣었다.
더블 캐스팅이었다.
날아오다가 회오리에 말려 들어 간 박쥐들은 거대한 하나의 불길이 되어 타올랐다.
어쩌다가 한 두 마리씩 빠져나온 박쥐는 화염 창으로 저격해서 처리했다.
"어…?"
팔을 벌리고 내 앞을 막고 있던 백아영은 눈을 크게 떴다.
나 대신 맞아주려고 하는 행동은 정말 기특하긴 한데, 박쥐들은 내 근처에도 못 오고 다 타죽어버렸다.
하지만 백아영이 놀란 부분은, 박쥐가 다 타죽은 광경보다는 내 마법이었다.
세간에 나는 불꽃 속성 마법사라고 알려져 있다. 지금까지 의도적으로 불꽃 마법만 사용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내가 익히고 있는 더블 캐스팅은 마법사라면 누구나 익히고 싶어 하는 꿈의 마법이다. 현역 마법사들도 제대로 익히지 못한 자가 많을 정도로 고급 마법이다.
남들에겐 계속 숨겨왔던 내 비밀들이다.
물론 내가 숨긴 비밀 중에 극히 일부긴 하지만, 백아영의 입장에선 이것만으로도 엄청난 비밀일 것이다.
그런 비밀들을 갑자기 알게 되었으니 당황할만하지.
내가 정말 나쁜 놈이었다면 백아영을 죽이고 입막음을 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절대 그럴 생각은 없다.
"아영 씨. 저 믿으라고 했죠?"
당황해서 말을 못 하고 있는 백아영에게 미소를 지어줬다.
백아영은 그제서야 긴장을 풀고 입을 열었다.
"호연이 너…! 이 정도면 충분히 갈 수 있겠어!"
백아영은 내가 생각보다 강하단 걸 깨닫고 희망을 본 듯 웃었다.
됐다. 백아영이 내게 희망을 품었다.
다르게 말하면 나를 좀 더 믿게 됐다는 뜻이다.
"아영 씨. 지금 본 건 밖에선 말하지 말아 주셨으면 해요."
그런 백아영을 보며, 나는 표정을 굳혔다.
솔직히 이 정도 비밀은 알려져도 별 상관없다. 내가 모든 속성을 사용할 수 있다고 알려지는 것도 아니고, 두 가지 정도는 의외로 흔하다.
물론 더블 캐스팅은 좀 위험하긴 한데… 이것도 임솔이 나서면 커버칠 수 있다.
어쨌든, 헌터의 비밀을 공유하는 사이가 된다는 건 그렇게 가벼운 일이 아니다.
특이한 스킬이나 고유 권능 등.
남이 알면 약점이 될 수도 있는 사항들은 능력자들끼리 공유하지 않는다.
언제 자신의 뒤를 찌를지 모르기 때문이다. 가진 힘의 조금씩은 숨겨야 한다.
지금 백아영은 내 비밀을 알게 되었다.
"저는 아영 씨를 믿어요. 아영 씨를 그렇게 오래 보진 않았지만 좋은 사람이란 게 느껴져요."
백아영은 조용히 내 말을 경청했다.
"저는 탈출을 위해 최선을 다할 거에요. 그러니까… 같이 살아남죠."
"응. 걱정하지 마. 나도 최선을 다할게."
똘망똘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백아영은, 처음보다 나를 조금 더 믿는 것 같았다.
*
얼마나 걸었을까. 꽤 오래 탐사를 했는데도 다른 사람은커녕 출구도 보이지 않았다.
'시발, 원래 이런 건가?'
나도 테러 때문에 전이를 당했다는 사실만 알지, 자세한 사항을 아는 건 아니라서 조금 불안했지만, 이 던전에서 날 위협할만한 몬스터는 없으니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후우… 후우…."
내 뒤에서 따라오는 백아영의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진다.
힐러는 원래 체력이 약해다. 어쩔 수 없이 잠시 쉬어가기 위해 공터에서 발을 멈췄다.
"아영 씨, 좀 힘드네요. 여기서 잠시 쉬어가도 괜찮을까요?"
"응, 고마워. 하아…."
"아니에요. 저도 힘들어요."
나는 공터 가운데에 자리를 잡고 명상을 시작했다.
여기까지 오는 길에 몇 번의 전투가 있어서 마나를 꽤 사용했다.
케케켁… 크르륵…
명상이 끝나자마자 약속이라도 한 듯이 고블린들이 공터로 다가왔다.
"기껏 채운 마나 다시 다 쓰겠네."
콰과광!
고블린들은 근처에 다가오지도 못하고 재가되어 사라졌다.
"호연아, 괜찮아? 무리하는 건 아니지?"
"네. 괜찮아요."
던전이 강화되긴 했지만, 나한테 위협이 될 상대는 없다.
근데 그래서 문제였다.
백아영의 취향은 특이하다.
자기가 직접 치료한 중상의 '남성'이 치료 때문에 힘이 빠져서 손가락 하나 못 움직이는 상태인 자신'을 덮쳐야 한다.
게다가 백아영이 치료를 해줬음에도 불구하고, 남자가 올라오는 성욕을 참지못하고 본능대로 움직였다는 설정까지 필요하다.
일단 정신적인 문제는 빼더라도, 물리적인 문제가 있다.
백아영이 모든 힘을 쏟을 정도로 내가 큰 부상을 입어야 한다.
그 정도면 내장 대부분이 파열돼야 할 거 같은데.
다행히 던전을 걸으면서 백아영의 체력이 많이 떨어졌으니 큰 상처 한 번이면 될 거 같지만… 마법 하나로 태워버리던 박쥐들에게 갑자기 맞는 것도 이상하고, 좀 생각을 해봐야 겠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걸까…?"
백아영은 무릎을 끌어안고 우울하게 말했다.
나야 늦어도 이틀이면 구조될 걸 알지만, 백아영 입장에선 확실히 불안하겠지.
당장 우리가 먹을 식량도 없으니 굶어야 한다.
이런 상황을 대비해서 식량을 챙겨오려고 했는데 소지품 검사가 있어서 가져오질 못했다.
"괜찮아요. 미래의 대마법사인 제가 있잖아요. 어떻게든 살아나가야죠."
"… 큭. 그래. 너만 믿을게. 어른스럽지 못한 모습을 보여줘서 미안해."
"아니에요. 저도 혼자 떨어졌으면 엄청 불안했을 텐데, 아영 씨 덕에 외롭지 않아요."
백아영은 아직도 숨이 고르지 못한 게 조금 힘들어 보였다.
하지만 여기서 완전히 체력을 회복하게 내버려 두면 안된다.
그녀는 나를 치료하고 탈진해서 쓰러져야 한다.
그러려면 체력을 좀 깎아놔야 한다.
"이제 슬슬 출발할까요? 시계가 없어서 몇 시인지는 모르겠지만 빨리 나가야 할 것 같아요. 슬슬 몬스터들도 여기로 찾아오고 있고요."
"응. 가자."
백아영은 힘든 티를 내지 않고 일어났다.
우리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앞으로 앞으로 점점 나아갈수록 나오는 건 똑같은 동굴의 벽이었다.
정확한 시간은 모르더라도 아마 몇 시간 정도는 걸었을 텐데, 아무도 못 마주치는 게 말이 되나?
던전이 더럽게 넓어졌거나,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는 모양이다. 정확히는 모르겠다.
우리 사이에서 종종 오가던 대화도 사라졌다.
동굴은 그 정도로 정적인 분위기를 우리에게 강요했다.
그렇게 서로 숨 쉬는 소리만 들리던 그 때,
"끄아아아아악!"
갑자기 멀리서 사람의 비명이 들려왔다.
나는 고개를 돌려 백아영과 눈을 맞추고, 그쪽으로 달려나갔다.
"끄아아! 아아아아악!"
푸슈욱! 뿌직!
끔찍한 비명과 함께 무언가가 뭉개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끄아아아악!"
잠시 후, 끔찍한 비명은 더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소리가 들려왔다.
쿵. 쿵. 쿵.
내 귀에 거대한 생명체가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 일정한 발걸음은 정체가 인간형 몬스터임을 짐작하게 했다.
방향은 정면이었고, 소리가 들려오는 거리는 빠르게 좁혀졌다.
백아영도 이제 소리가 들리는지, 내 바로 뒤에 붙었다.
"쿠어어-!"
"오, 오우거야!"
못생기고 거대한 덩치가 내 시야를 가득 채운다.
머리는 나쁘지만, 강한 힘과 생명력을 지닌 상급의 몬스터다.
한 손에는 반으로 찢어진 생도의 몸을 들고 있었다. 처음 보는 잔인한 시체였지만, 내 정신력은 그렇게 약하지 않았다.
"그르르-!"
오우거의 무식한 살의가 나에게 쏟아졌다.
슈우욱!
오우거는 생도의 시체를 내게 집어던졌다.
'코튼가드.'
더러운 시체를 막아내고, 뒤의 백아영을 바라봤다.
"호, 호연아. 괜찮아?"
백아영도 현역헌터인 만큼, 시체를 보고 놀라지는 않았다.
오히려 내 정신상태를 걱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난 어느 때보다 정신이 또렷했다.
두근.
익숙한 감각이다.
두근.
몸을 채우는 전투 감각이 말하고 있다. 눈 앞에 있는 오우거가 더럽게 강하다고.
두근. 두근.
펠릭스를 상대할 때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몸이 뜨거워진다.
오우거는 뿔 두개 마인인 펠릭스 보다도 강했다.
게임에선 이상하게 오우거를 강하게 표현하곤 한다. 솔직히 힘만 센 멍청한 새끼가 얼마나 강하겠어 싶지만, 실제로 만나니까 굉장히 좆같았다.
거대한 덩치와 험상궂은 얼굴에서 나오는 압박감이 장난이 아니다.
구라안치고 한 대 맞으면 빈대떡이 될 것 같다.
시발. 왜 강하게 설정해서 힘들게 하는 거야. 대충 약하게 만들지.
"호, 호연아. 이번엔 진짜 도망쳐야 해. 진짜로!"
"도망치면 살 수는 있고요?"
"내가 막을게. 그동안 도망쳐. 한 살이라도 어린 네가 살아야 해!"
"됐어요. 얼마나 차이 난다고."
이 사람은 참 어른스러워 보이고 싶어 한다. 별로 나이가 많지도 않으면서.
나는 백아영을 뒤로 밀쳐내고 앞에 섰다.
"호, 호연아…!"
왜 저딴 괴물이 이 던전에 있는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마나 밀도가 높아진 만큼 더 강한 몬스터가 나온 것 같다.
어차피 백아영을 두고 도망칠 순 없다.
히로인인 백아영이 죽으면 메인 퀘스트 실패로 내가 죽는다.
그러면 싸울 수밖에.
"잠시만 기다리고 계세요. 금방 처리할 테니까."
두근.
'개안'
나는 온몸에 마력을 끌어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