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5화 〉55화. 양심 (55/648)



〈 55화 〉55화. 양심

"하아…."

 같은 아카데미 새끼들.

임솔은 VIP석에 몸을 묻은 채 중얼거렸다.


이호연을 위해 좋은 상을 챙겨준 거까진 좋았다.

양심의 가책도 덜었고, 고생한 제자에게 선생이자 어른으로서 제대로 된 보상을 해주는 것도 좋았는데… 일이 너무 커졌다.

아카데미의 교수인 임솔이 필수로 참여해야 할 정도로 표창 수여식의 규모가 커진 것이다.


그리고 여러 중요한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인 만큼 귀찮은 일들이 생겼다.

"오랜만입니다. 임솔 교수님."


웬 늙은이가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대답하기 싫지만, 아카데미에 후원해주는 거부라서 매몰차게 대할 수도 없다.

크게 보면 임솔의 연구비를 대주는 사람이니까.


"예. 오랜만이에요."

"저번 마법 학회 발표 이후로 처음이네요. 그때 발표는 정말 인상적이었습니다. 요즈음 연구는 어떻게…."

임솔은 귀찮은 대화가 싫긴 했지만, 필요한 일임을 알고 있으니 참고 대화를 이어갔다.


그렇게 여러 명과 의미 없는 인사를 나누고, 늙은이들의 더러운 시선을 몇 번 받고 나니 피로감이 올라왔다.


"아, 미친 늙은이 새끼들… 진짜 얼마 안 남았어."

실적보다 경력을 인정해주는 병신같은 마법사들을 깜짝 놀라게 해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호연이 보여준 마법의 새로운 운용법.

그걸 정리하는 과정이 끝나면 마법 학회에서 연구 결과를 발표할 것이다.

그때가 오면… 다른 마법사들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될 경지에 이를 것이라고, 임솔은 생각하고 있었다.

털썩.


그 때, 누군가가 임솔의 옆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솔아아~. 오랜만이네~?"

"어?"

친숙하게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임솔은 고개를 돌렸고, 옆자리에는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민예지.

얼핏 보기엔 연약해 보이는 인상이지만, 가늘게 찢어진 눈매는 야릇함을 풍겼다.

항상 느끼지만, 이 여자는 위험했다.

분명 자주 교류하는 사이지만, 부담스러운 상대이기도 했다..

"왜 연락 안 받았어? 내가 사업 아이디어 정리 자료 보내줬잖아."

"그 쓰레기를 사업 아이디어라고 보냈다고 말하는 건 아니지?"

"왜? 비키니를 입고 마법을 쓰는 임솔을 생각만 해도 광고효과가…."

"닥쳐. 죽여버릴 거야."


이 정신 나간 텐션. 이거 때문에 민예지가 너무 부담스러웠다.

"에이, 우리 사이에 왜 그래? 그런 무서운 말 쓸 거야?"


"하아…."


임솔은, 능청스럽게 눈웃음을 지으면서 자신의 팔에 팔짱을 끼는 민예지를 보며 이 미친년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고민하기 시작했다.

[곧 행사가 시작 될 예정이니, 객석에 착석해 주시길 바랍니다.]


다행히 민예지도 행사가 시작하자 조용해졌다.

휴우. 임솔은 한숨 돌린 후에 행사에 참여했다.

처음에는 우수생도 시상으로 시작했다.

어차피 하이라이트는 게이트 진압 헌터 표창과 마인 퇴치 생도 표창이다.

우수 생도들은 그냥 애매한 표창 수여식의 이벤트를 채우기 위한 용도라는 걸 대부분의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애들 수준이 나쁘지 않네. 특히 학생회장은 현역이라고 해도 믿겠어."

"뭐, 그렇지. 그 문수린이니까."

임솔도 문수린의 재능은 많이 들었다. 분야가 달라서 크게 관심이 없을 뿐.

화악-

민예지의 눈이 잠시 금색으로 빛났다.

"흐으음, 근데 돈이 될 만한 애들은 없네."

"…넌 애들 상대로도 돈이야?"

"세상에  빼고 남는 거 없다. 솔아."


그렇게 말하는 민예지의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날카로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우수생도 시상이 끝난 후, 쓸데없는 허례허식 행사들을 버티고 나서야 표창 수여식이 진행됐다.


"아영이가 상을 받는구나…."


"성녀랑도 아는 사이야?"


임솔과 달리 현역으로 활동하는 민예지는 발이 넓었다.

"뭐, 우리 길드에 자주 헬퍼로 와. 저번 공략 때도 왔었어."


"으음. 하긴, 철혈길드니까."


-다음은, 마인 퇴치 생도에게 표창 수여가 있겠습니다.


'드디어 나온다.'

임솔은 집중해서 시상자가 나오는 통로를 바라봤다.


잠시 후, 이호연과 루시가 쭈뼛거리며 무대 위로 올라왔다.


임솔은 반가운 마음에 반사적으로 입가에 미소가 올라왔다.


"아하… 쟤가 요즘 네가 편애한다는 제자구나?"

"머, 뭐? 어떻게 알았어?!"

"어떻게 알긴,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보는데 모르겠니?"

민예지는 깜짝 놀란 임솔을 보며 코웃음을 치고 단상을 바라봤다.

- …… 이에 표창함. 생도 이 호 연.

"호연이라고 하는구나. 우리 솔이가 좋아하는 생도가 얼마나 대단한지 볼까요~?"

"하아… 너, 이상한 짓은 그만하고…."

화악-

임솔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민예지의 눈이 금빛으로 빛났다.


그리곤 실실 웃고 있던 민예지의 얼굴이 진지한 표정으로 변했다


"…저 애, 돈이 되겠는데?"

민예지의 눈이 사냥감을 보는 눈으로 변했고, 임솔은 손을 휘휘 저으면서 민예지의 시야를 방해했다.

"야. 눈독 들이지 마. 내 제자거든?"

"알았어 알았어. 노력은 해볼게."


"아니, 노력하지 말고 건드리지 말라고!"

"아잉, 솔아~! 우리 사이에 왜 그러는 데에~"


"아악!"







*









[룬의 일족 비서]


"이게 여기 있을 줄이야…."


'룬의 일족'

원작 게임에서 등장했던 일족이다.


특기는 '결계'


결계에 특화된 마나 형태를 가진 일족으로, 태어날 때부터 결계 마법만을 위한 교육을 받으며 마나 형태를 그것에 맞게 고정한다.

그렇기에 그들의 결계는 최강이고, 최악이었다. 결국엔 그 위험성 때문에 역사에서 사라질 정도로 위험한 종족이었다.


내가 이 결계 마법을 배우려는 이유는 간단했다.


앞으로 스토리 진행을 하다 보면  '룬의 일족' 결계 마법을 존나게 마주치게 된다. 왜냐하면 중요한 악역 중 하나가 '룬의 일족'의 생존자거든.


저번에 펠릭스를 상대할 때, 펠릭스가 펼쳤던 중급수준의 결계를 푸는 데 1분 정도 걸렸다.


이게 게임이었다면 그 시간이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에 맞게 게임이 진행될테니까.

하지만 여긴 현실이다.

수준 높은 결계를 파훼하는 데 걸리는 시간  분때문에 히로인들의 목숨이 오갈 수도 있다. 그 시간을 조금이라도 단축하는 건 분명 의미 있는 일이다.


게다가 나는 한 명만 구하는 게 아니다.

스토리대로 아카데미에 테러가 일어나면, 모든 히로인 들을 구해야 할 수도 있다.


빠른 결계 해제를 위해서 '룬의 일족' 결계 마법을 익히는  중요한 일이다. 무기나 아티팩트는 돈이 생기면 언제든 얻을  있다.

그리고  한 가지 중요한 점. 결계는 방음이 뛰어나다.


히로인들과 원만한 관계(?)를 위해선 꼭 필요하다.


어쨌든, 겉보기엔 너덜너덜한 쓰레기로 보이는 '룬의 일족 비서'를 들고 보물창고에서 나왔다.


아쉽게도 쓰레기를 가져왔다고    찬스는 없었다.

학장은 그냥 이걸  가져왔냐고 물었고, 마법 연구를 위해 가져왔다고 했더니  교수에 그 제자라는 말만 들었다.

아쉽네.

곧 루시가 들어갔다가, 10분 정도 후에 나왔다.


루시는 구슬을 들고 왔다. 저게 분명히 마나 순환에 도움 되는 물건이었던  같은데.

나한테 필요한 물건이긴 하지만, '룬의 일족 비서'는 여기서 밖에 얻지 못할 것 같은 예감이 들어서, 어쩔 수 없이 포기했다.

"좋은 선택이었길 바라네. 자네들의 아카데미 생활에 행운을 빌지."


"감사합니다."


받을 건 다 받았으니, 인사를 하고 학장실을 나왔다.

"아, 배고프네. 밥이라도 먹고 들어갈까? 루미도 불러서."

벌써 점심때다. 오전 내내 시상식을 했지만, 오후에 수업이 있어서 시간이 약간 빠듯했다.

"루시?"


대답이 없길래 뒤 돌아보자, 루시는 제 자리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 호연아."


"엉?"

얘 왜 이래? 표정도 굳어서는.


"이거 받아."


루시는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내게 창고에서 가져온 마력 구슬을 내밀었다.


"야, 왜 그래? 이건 네가 써."


"으으응. 괜찮아. 난 한 것도 없는데 뭐."


"그래도… 네가 받은 거니까…."

 그제서야 발견했다.

구슬을 건네는 루시의 팔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 것을.


"루, 루시? 왜 그래."


바로 루시의 몸을 붙잡고 루시의 얼굴을 확인했다.


루시의 얼굴에 눈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팔에서 시작된 떨림은 온몸으로 전염되었고, 마력 구슬은 힘없이 손에서 굴러떨어졌다.


"호, 호연아… 나 너무 힘들어. 그날, 펠릭스 생각만 하면 두렵고… 눈앞이 깜깜해져. 이 구슬을 볼 때마다 펠릭스가 떠오를 거야. 나, 나는… 더 이 일과 엮이고 싶지 않아…."


루시는 바닥에 떨어진 마력 구슬을 불안한 듯이 쳐다보다가, 양손으로 눈물을 흘리는 얼굴을 감싸고 주저앉아서 울기 시작했다.

"…."


조용하길래 괜찮은 줄 알았는데, 이렇게 까지 힘들어 할 줄이야.


히로인 상태창에서는 루시의 이런 상태가 나오지 않았다.


아마도 나에 대한 미안함이 펠릭스가 싫은 것보다 커서 그랬겠지.

"괜찮아 루시. 괜찮아. 이미 펠릭스는 죽었어. 괜찮아…."

"흐흐흑… 내, 내가 왜 그런 일을 당해야 했는데, 내가 왜… 대체 왜…?"

"…."


나는 눈물을 흘리는 루시의 손을 잡아주며, 하늘을 바라봤다.


성인이라기엔 연약한 체구였다. 내가 한 손으로도 어깨를 거의 끌어안을 수 있을 만큼 작은 여자였다.


이 여자는 게임 속 히로인이 아니었다. 누구보다 밝게 아카데미 생활을 보냈어야 할 생도였다.

내가 그걸 망쳤다.


이런 순수한 여자의 인생에 지울 수 없는 트라우마를 남긴 사실이 너무나도 후회됐다.


그깟 호감도 조금 더 빨리 올리겠다고, 나에게 좀 더 의존시키겠다고, 쓰레기 같은 판단을 한 내가 원망스러웠고 과거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내 [뚜렷한 정신력]은 지금 상황에서도 최선의 말을 꺼내라고 충고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충고에 따랐다.

"… 괜찮아 루시. 앞으로 내가 꼭 지켜줄게. 영원히 지켜줄게."


뻔하지만 따뜻한 위로를 하며, 루시를 더 꽉 안아줬다.

이게 가장 호감도를 높이기 좋은 방법이었다.


"흐윽… 흐흐흑. 호연아아아… 흑…."

루시는 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렸다.

생도복을 젖게하고도 남은 눈물로 인해서 내 가슴에 습기가 느껴졌다.

"…."

 기분은 더러웠고, 푸른 하늘은 오늘따라 구름  점 없이 맑았다.





얼마나 루시를 끌어안고 있었을까. 루시는 곧 눈물을 그치고 충혈된 눈으로 내게서 벗어났다.

"아, 아아. 미안해. 갑자기  슬퍼서. 응.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오늘은  먼저 가볼게."

루시는 손으로 마구 부채질을 하면서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루시, 잠시만."


"오지 마."

나는 루시에게 내밀던 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오지 마… 내일, 내일은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만나자. 응? 알았지?"


"… 응. 내일 보자."

그 애원하는 듯한 말에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




점심을 먹을 기분이 아니어서 훈련장의 프라이빗 룸으로 향했다.

오늘 오후 수업은 마법 분석학. 마법 역산과 결계 파훼 수업이다.


비록 증명을 보여주고 싶은 루시가 수업에 나올지는 의문이지만… 그래도 수업에 들어가기 전에 '룬의 일족 비기'를 다 익히고 싶었다.


"하아, 자. 일단 결계를 이루는 마력 형태는 육각형을 이어 붙인 형태고… 아, 시발."


더럽게 집중  되네.


[뚜렷한 정신력] 때문에 웬만한 일로 감정 기복이 일어나지 않는 데도 이번엔 유난히 심했다.

"다시, 육각형 형태의 마력을 이어붙여서 균형 있게 힘을 배분한다… 오케이."

사실 이렇게 말하는 것도 기분을 내기 위해서 하는 거지, 구조는 이미 다 파악했다.


애초에 마법진이고 마력 운용 방법이고 다 쓰여 있는데, 내 재능으로 못 할 리가 없었다.

"그래도  골랐네. 실용적인 거로 음."

내 왼손에는 마력 운용 구슬도 있었다.

────[ 인어의 눈물 ]────

▶ 등급 : 중상 (A)

 마력석에 인어의 눈물을 다량 첨가해서 마법적 조처를  아티팩트다.


▶ 마력 운용 속도가 늘어나고, 마력 순환 속도가 빨라진다.

-────────────

"인어의 눈물…."


눈물. 이라고 하니 왠지 기분 나쁜 이름이었다.


띠링-


그때, 스마트 워치에 알림이 도착했다.


"뭐지? 메시지 알림 소리가 아닌데?"

[에브리데이에서 개인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예지요미 : 안녕하세요. 이호연 생도님. 개인적으로 후원을 드리고 싶어서 연락드렸습니다. 편하게 연락 가능한 연락처를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 뭐야 이건."

솔직히 이때는 돈이 필요했지만, 지금은 든든한 돈 복사 기계가 있어서 괜찮은데…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답장은 보내볼까?

나중에 수업 끝나고 천천히 고심해서 보내야겠다.


대충 훈련도 끝냈으니 훈련소에서 나와 수업동으로 돌아갔다.

수업까진 아직 30분 넘게 남아있어서, 강의실에 사람이 얼마 없었다.


"호연 씨?"

"루미. 일찍 왔네?"


루미는 우등생답게 30분 전부터 대기하고 있던 모양이다.

"네에. 그러고 보니 루시는 몸이 갑자기 안 좋아져서 수업을 못 나온대요. 히잉."


"… 그렇구나. 괜찮으려나? 나중에 연락해봐야겠네."

"네네. 그래요."

앉아서 나와 눈을 마주치고 있는 루미의 얼굴을 바라봤다.


루시와 엄청나게 닮았다. 아니 거의 똑같이 생겼다. 머리색이나  스타일, 표정으로 구분하는 거지. 본판 자체는 일치한다고 봐도 된다.

그런 '설정'이니까.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요?"

흐응.


루미는 손으로 얼굴을 쓰다듬으면서 나를 바라봤다.


꿀꺽.

갑자기 성욕이 올라왔다.


루시와 똑같이 생긴 루미를, 내 맘대로 범하고 엉망으로 만들고 싶었다. 이 갈 곳 없는 욕구를 가녀린 여체에 쏟아붓고 싶었다.

"루미…."

"네?"

루미는 수업 30분 전이다 보니 야한 생각은 전혀 하고 있지 않은 모양이다.


"따라와."

"네, 네? 넷?"

나는 무작정 루미의 손을 붙잡고 강의실을 빠져나왔다.


"호, 호연 씨? 갑자기 왜 그러세요? 얼굴도  좋아 보이시고… 호연 씨?"

탁탁탁.


루미의 말을 무시하고 최대한 빨리 1학년 수업동에서 가장 외곽에 있는 화장실로 루미를 끌고 왔다.


남자 화장실의 마지막 칸에 루미를 끌고 들어가서, 룬의 결계를 펼쳤다.

조용하고 작은 무색의 결계가 펼쳐졌다.

순식간에 완성된 완벽하고 단단한 결계는, 우리의 소리를 밖으로 내보내지 않을 것이다.

익혔으면 써봐야지. 안 그래?

"호, 호연 씨? 잠시만요. 서, 설마 지금?"

"루미. 우리 비밀 친구 맞지?"

"맞아요. 맞는데, 그, 지금은… 읍!"


나는 루미의 입 안으로 혀를 집어넣으며 루미의 입을 막았다.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