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화 〉47화. 본능적으로
토요일. 이호연이 루미와 데이트를 하고 있을 때, 수도권에서 터진 게이트 사태를 지원하기 위해 협회 소속 헌터들이 긴급 지원을 나섰다.
협회 소속 헌터들과 긴급 소집된 헌터들이 몸을 불사른 덕에 민간인 사상자는 없었지만, 다친 헌터들이 많았다.
그 덕에 백아영의 앰뷸런스는 사람이 끊이질 않았다.
"성녀님! 감사합니다! 덕분에 몸이 날아갈 것 같습니다! 하핫!"
"아이참,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까요."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꾸벅.
고개를 숙이고 돌아가는 남자를 배웅하며 백아영은 다시 앰뷸런스로 들어갔다
"후으, 끝이 없네. 그래도 아직 10명 정도는 더 할 수 있겠다."
"와, 진짜 대단하세요. 혼자서 다른 힐러 5명분을 해버리니까 다들 성녀, 성녀 하는 거 아니겠어요?"
"에헤헤... 고마워."
백아영의 후배인 김아라는 백아영을 볼 때마다 놀랄 수밖에 없었다. 죽은 사람도 살린다는 치유능력도 치유능력이지만, 체력과 마력이 엄청나다.
기본적으로 회복마법은 마력을 사용하지만, 정도 이상의 중상자들을 치료하려면 시전자의 체력도 필요하다.
조금이지만 생명력을 나눠주고, 그걸 증폭시키는 것이다.
그렇기에 다른 힐러들은 중상자 하나 둘만 치료해도 기력이 떨어져 버리는데, 백아영은 혼자서 중상자를 10명 이상 받을 수 있었다.
'근데 그걸 매일같이, 쓰러지기 직전까지 하는 게 사람이야?'
그 능력은 전 세계 힐러 중 부동의 1등이다.
거기에 성격까지 착하고 얼굴도 예쁘고 하는 행동도 귀엽다.
말 그대로 성녀의 재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당연히 그녀는 백아영과 일하는 매일이 항상 즐거웠다.
"와, 진짜 거기서 10명을 더 치료하셨네요."
"으응. 근데 이제 좀 힘드네. 너도 3명이나 치료했잖아. 고생했어."
"항상 백아영 선배랑 일하다 보면 무리하게 된다니까요… 저한테 3명이면 수명이 줄어들 정도의 무리라구요."
"내가 이상한 거니까 너는 무리하지 마."
"에이,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철수 준비나 하죠? 다 끝난 것 같은데."
"그럼 그럴까?"
김아라는 엄청나게 힘들 텐데도 불구하고 웃으며 일하는 백아영을 보며 그 의지가 부럽다고 생각했다.
"네넷! 오늘은 제가 저녁 쏠 테니…."
그 때, 김아라의 말을 끊으며 응급요원들이 나타났다.
"긴급 환자! 긴급 환자! 빨리 앰뷸 열어!"
"긴급 환자?!"
쿠당탕! 들것에 실려 오는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서, 선배님! 상태가…!"
"…응."
남자의 상태는 처참했다.
왼쪽 팔은 통째로 물어뜯긴 듯이 찢겨나갔고, 다리는 둘 다 발목 밑으로 절단되었다.
쇼크사가 나지 않은 게 다행일 지경이었다.
하지만 피가 계속 흐르고 있어 곧 과다출혈로 사망할 것 같았다.
"성녀님…! 숨어 있던 몬스터가 덮치는 바람에! 제발, 구해주십시오! 이제 막 결혼한 놈입니다!"
들 것을 뒤따라온 남자가 고개를 바닥에 박으면서 백아영에게 애원했다.
"제, 제가 가장 가까운 지부에 연락할게요!"
"아니, 내가 치료할게."
"선배님!"
"너도 알잖아. 지금 바로 처치하지 않으면 이 환자는 죽어."
"…."
김아라도 알고 있었다.
환자가 이 상태로는 5분도 못 버틴다는 걸.
하지만, 아무리 백아영이라고 해도 이 치료가 가능할까?
남성 환자는 헌터라서 살아있는 거지, 사실상 죽은 거나 마찬가지다.
이 정도의 중상자라면 힐러도 내상을 입을 각오로 치료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 백아영은 하루종일 치료를 해서 마력이 거의 바닥난 상태다.
무리한 치료는 힐러의 수명이나 마력 회로에 지장이 갈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당연하다는 듯이 나서는 백아영에게, 김아라는 존경심을 느꼈다.
남을 향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희생할 수 있는 태도.
'이 사람은 정말 성녀가 아닐까?'
김아라는 마력을 끌어올리는 백아영을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한편, 백아영은 다르게 생각하고 있었다.
백아영의 눈에는 죽어가는 남자가 보였다.
언제든지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남자.
백아영은 이런 남자들을 수 백, 수 천 번봐왔다.
언제부터였을까, 중상을 입은 남자들을 치료하다 보면 그들의 생존본능을 느낄 수 있었다.
살고 싶은 욕구.
쾌락을 얻고 싶은 욕구.
씨를 뿌리고 싶은 번식 욕구.
그 들에게서 느껴지는 엄청난 에너지는, 백아영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 기분은 굉장히 이상했지만, 별로 자랑할 만한 일도 아니었다.
치료 중에 남자의 성욕을 온몸으로 느낀다고 말하면 발정난 년이라고 의심당할 것이다.
그렇기에 백아영은 그 말을 가슴 속에 묻었다.
정말 숨이 넘어가기 직전인 남자들을 치료할 때 보면, 사타구니 부근이 불룩 솟아있다.
남성의 강한 페로몬은 특히 목숨이 위험해질 때 강해진다. 물건은 빳빳하게 서고 번식을 하겠다는 욕구를 풀풀 뿜어댄다.
세상에 씨를 남기려는 본능일까?
특히 젊고 건강한 남자일수록 욕구가 강했다.
지금도 느껴진다. 이 남자가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나에게 성욕을 느낀다는 것을.
수컷이라는 놈들은 추악하게도 자기 목숨을 구해주는 백아영을 보면서 성욕을 느꼈다.
처음에는 그 행태에 역겨움이 올라왔지만, 그렇다고 치료를 멈출 수는 없었다.
사람을 구하는 것에서 나오는 보람과 만족감은 역겨움이 주는 더러운 기분 이상으로 백아영에게 안정감을 부여했다.
그렇게 계속 치료를 하다 보니, 백아영을 향한 수컷의 성욕에 적응했다.
하지만 그런 짙은 생존 욕구와 수컷의 본능에 노출될수록, 백아영의 몸은 점점 이상해져 갔다.
나에게 치료를 받으면서도 내 가슴에 눈이 가는 남자의 시선.
아무리 착한 남자라도, 남자들은 모두 속 안에 성욕을 숨기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나를 짓누르고 강제로 자지를 박고 싶다는 감정이 숨겨져 있었다. 지금까지 그들이 살면서 학습해왔던 사회의 법과 도덕, 이성적 생각이 막고 있을 뿐.
진정한 남성성은 여자를 깔고 뭉개고 씨를 뿌리는 것이었다.
적어도 백아영의 생각은 그랬다.
남성의 번식 욕구. 남성의 깊은 곳에 있는 뒤틀린 남성성과 성욕.
죽음에 가까이 가서야 나오는 추악한 본성.
'내가 심연을 들여다보면 심연도 나를 들여다본다.'라는 말이 있다.
어느새 백아영은 심연에 빠져버렸다.
삐이-
백아영의 눈앞에는 숨이 넘어가기 직전의 환자가 있었다.
오늘 너무 많은 환자를 치료해서 약간 두통이 있었지만, 익숙한 듯이 마나를 끌어올렸다.
백아영에게 긴급 환자 치료는 쉽게 오지 않는 기회였다.
손에서 새어 나오는 따뜻한 빛이 환자의 몸을 감싸며 천천히 치료해간다.
환자의 생명력을 채우기 위해 백아영의 기력이 빠져나간다.
두통이 점점 심해지고 눈앞이 어지러워지며 갈증이 심해진다.
몸을 안 쪽에서부터 쥐어짜는 느낌.
백아영의 몸이 점점 무방비해진다.
곧 누워있는 환자가 정신을 차리고, 내 모습을 눈에 담는다.
그의 내면 깊은 곳의 성욕은 말하고 있었다.
- 지금이라도 저 여자를 덮쳐서 씨를 뿌려!
하지만 깊게 자리 잡은 사회인으로서의 이성적 생각이 그를 막았다.
꾸우욱.
백아영의 보지가 젖어왔다.
눈 앞의 남성에게 깔리고 싶은 본능적 욕구가 백아영을 사로잡았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되는 일이다.
가장 남자가 본능적인 욕구를 느끼는 지금 이 순간이 중요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남자는 백아영에게서 눈을 돌렸다.
백아영은 사회라는 틀에 갇혀서 본능을 거부하는 남자들이 이해되질 않았다.
'왜 나를 덮치질 않는 거야? 힐끗힐끗 가슴을 쳐다보면서 왜? 날 보면서 성욕을 느끼면서 왜? 어째서?'
치료가 진행될수록 백아영의 체력과 마력은 점점 떨어졌다.
"흐으읏…."
몸을 통제하기 힘든 감각에 신음이 빠져나왔다. 더는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였다.
하지만, 몸의 힘이 빠질수록 백아영은 점점 흥분해갔다.
'지금, 지금 덮쳐지면 아무것도 못하고 박힐 텐데. 무책임하게 질내사정해도 반항도 할 수 없이 쓰레기의 자식을 임신할 텐데….'
백아영의 보지가 지끈지끈 울렸지만, 남자는 백아영을 힐끔힐끔 바라보다가도, 자기 자신을 자책하는 표정으로 백아영을 바라보던 눈을 돌렸다.
'하아, 이번에도 꽝이네.'
이윽고 치료가 끝난 후, 환자와 남자는 연신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전해왔다.
감사를 전하는 와중에도 백아영의 가슴에 눈이 가는 건 어쩔 수 없는 수컷의 본능이었다.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몸의 컨디션이 회복된 백아영은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척 미소를 지으며 감사를 받았다.
'저럴 거면 아까 힘이 없을 때 확 덮쳐주던가.'
백아영은 괜히 속으로 툴툴댔다.
"고생하셨어요. 선배."
옆에서 뒤치다꺼리해주던 김아라가 말을 걸어왔다.
"으응, 고마워. 오늘은 좀 어지러워서 밥은 나중에 먹자?"
"네네네. 당연하죠. 내일 보육원도 가셔야 하잖아요. 편히 쉬세요!"
"응. 나 먼저 들어갈게."
*
어젯밤, 루미와 모텔에서 비밀 친구 관계를 정립했다.
루미와 모텔에서 밤을 즐기고, 일요일에는 기숙사에 잠깐 들렀다가 릴리아나와 얘기한 후, 바로 기숙사를 나섰다.
목적지는 '햇빛보육원'.
히로인 백아영이 자주 들르는 곳이다.
'그러고 보니 본지 진짜 오래됐네.'
저번 던전 실습 때 보고 나서 보육원을 간 적이 없었다. 백아영도 헬퍼 일을 하느라 바빴을 테니, 못 볼 수도 있는 거지 뭐.
"어? 그, 호연 생도 맞지? 오랜만이네~! 우리는 이제 안 오려는 줄 알았어!"
햇빛 보육원에 들어가 마당을 지나가고 있는데, 저번에 본 듯 한 보육교사가 말을 걸어왔다.
"하하… 안녕하세요. 요즘 좀 바빴거든요. 원장님은 어디 계세요?"
"지금쯤 뒤 마당에서 아이들과 놀고 계실걸? 아영 씨도 왔으니까 한 번 가봐!"
"감사합니다."
나이스. 좋은 소식을 들었다.
마침 백아영도 오늘 들른 모양이다. 운 좋게 타이밍이 좋을 때 왔네.
"안녕하세요!"
아이들이 놀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는 백아영과 원장님이 보였다.
착한 몸매의 백아영과 착한 인상의 원장님이 이쪽을 돌아보고는 날 반겨줬다.
"어이고, 호연 씨. 오랜만이네요. 아영 씨도 오랜만에 들려주셨는데, 오늘 무슨 날인가?"
"죄송해요. 최근에 일이 너무 많아서 오랜만에 들렀네요. 아영 씨도 안녕하세요."
백아영은 내 인사에 놀란 듯이 손을 잡으며 말을 걸어왔다.
"호연 씨! 마인이랑 싸웠다는 기사를 봤어요. 괜찮아요?"
"마, 마인이요? 무슨 소립니까 그게?"
그래도 현역에서 활동하는 사람이다 보니 소식이 빠른 모양이다.
아니면 원장 선생님이 소식이 느린 건가? 어쩌면 아카데미 측이 힘써서 일반인들에겐 크게 이슈가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뭐, 괜찮아요. 크게 다치지도 않았고, 여기 잘 있잖아요?"
"휴우, 다행이네요. 기사에서 호연 씨 이름을 보고 엄청나게 걱정했답니다."
백아영에게선 착한 사람 특유의 아우라가 느껴진다.
이런 사람과 대화하다 보면 나도 마음이 깨끗해지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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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브 퀘스트가 전송되었습니다.』
[당신은 본능에 충실한가요?]
백아영은 본능이 이끄는 남자를 찾고 있습니다!
백아영에게 조금이라도 흥미를 이끌어보세요!
클리어 조건 : 백아영의 흥미 유발 0 / 1
- 보상 : 백아영의 호감 상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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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닌가?'
본능이 이끄는 남자라…
어떻게 해야 할 지 감이 약간 올 것 같기도 하다.
백아영은 성녀라는 이름 때문에 숙원인 무방비 상태에서 강간당하기를 못 이루고 있다.
성녀라는 이름에서 느껴지는 거룩함은 도저히 그런 분위기로 이끌어 주지 않는다.
"형아~!"
저번에 내 저글링을 보면서 제일 좋아하던 꼬맹이가 다가왔다.
"오랜만이네?"
"형아! 왜 이제 왔어! 저번에 그거 또 보여줘!"
"그래그래, 같이 놀자."
꼬맹이는 내 손을 잡고 아이들 사이로 이끌었다.
"킁킁. 형, 근데 왜 몸에서 사탕 냄새가 나?"
"응?"
뭔 소리냐 이건?
*
비장의 5단 저글링쇼를 보여주면서 아이들과 놀아줬다.
얼마 후에 원장이 밥시간이라며 아이들을 데리고 보육원으로 들어갔다.
나와 백아영은 마당 벤치에 앉아서 담소를 나눴다.
"고생했어요. 이번에도 저글링만 하셨네요. 큭."
"그래도 저번보다 많이 나아졌죠?"
"그러게요. 눈에 띄게 실력이 늘었던데. 좋은 냄새 난다면서 애들도 많이 붙고… 부럽네요."
"에이… 아영 씨 한테 붙는 애들이 더 많았잖아요."
"후후. 그랬나요."
루미 퀘스트를 클리어하고 얻은 달콤한 몸이라는 보상.
그 효과로 내 몸에서 나는 향이 달콤해졌다.
혹시나 해서 내 팔을 핥아봤는데, 팔에서도 달콤한 맛이 났다.
이건 무슨 초콜릿 인간도 아니고.
"다음 주면 던전 실습이네요. 잘 준비하고 있어요? 이번 시험은 어렵다는 소문이 있답니다?"
방긋방긋
백아영은 다음 주에 날 볼 생각에 좋은 건지, 싱글벙글 웃고 있다.
아마 또 정장 차림의 어른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가 보다. 저번에 반응해주니까 참 좋아하던데.
다음 던전 실습은 테러 때문에 사고가 생긴다. 굳이 이 얘기를 더 길게 끌기보단 다른 화제로 전환해야겠다.
"그러고 보니 던전 헬퍼를 가면 무슨 일을 하세요?"
"어… 여러 가지 일을 하죠. 지원 같은 것도 나가고, 물론 힐러가 대부분이지만요."
"아하. 아영 씨 치유능력이 엄청나다고 들었어요. 성녀의 재림이라면서요."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 솔직히 창피해요. 성녀라니."
"근데 힐러들이 정신적 피로가 많지 않나요? 던전 같은 곳은 부상자도 많을 텐데."
물론 백아영 한테는 해당되지 않는 말이다. 사실 매일 무리하게 치료를 해서 힘든 거지, 적당히 치료를 조절하면 피로를 느낄 일도 없을 거다.
"그렇긴 하죠. 무리하는 날에는 아예 하루 내내 몸살이 나버려요."
"와, 그때는 완전히 무방비하겠네요. 조심해야겠어요."
일부러 약간은 실례일 수도 있는 말을 내뱉는다.
백아영은 오히려 그런 걸 좋아한다.
"…아무래도 그렇죠."
"누가 그때를 노려서 덮치기라도 하면 진짜 큰일이겠어요."
성녀라는 타이틀때문에 자신을 신성시하는 남자들의 태도를 혐오한다.
그런 여자의 흥미를 끄는 건 쉬운 일이다.
항상 하던 나쁜 남자 이호연이 되면 되니까.
"네에… 그러면 큰일이에요. 정말 큰일…."
백아영의 눈빛이 조금 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