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화 〉32화. 계약 (2)
홍보부 활동이 끝난 다음 날.
외출했던 엘리스는 아카데미에 복귀하기 위해 고급 세단에 올라탔다.
"하아, 힘들어 진짜."
"고생하셨습니다. 아가씨."
"으응."
익숙하게 클러치 백을 내려놓고, 보존 마법이 걸려있는 와인을 한 잔 따라서 향을 음미했다.
이 달콤한 귀부 와인. 샤토 디켐은 엘리스가 좋아하는 와인이다.
"확실히 빅토리아 아카데미가 일이 빠르긴 하네요. 벌써 기사가 올라왔습니다."
"뭐 말하는 거야?
"빅토리아 아카데미 홍보 모델이시잖습니까?"
"어제 촬영했는데 벌써 올라왔다고?"
"예. 올라왔더군요."
엘리스는 스마트워치로 에브리데이에 접속했다.
대문짝만하게 [빅토리아 아카데미 홍보부 모델들 사진.jpg]라는 글이 추천을 받고 상단으로 올라와 있었다.
"진짜네…."
"그럼 거짓말이겠습니까. 아가씨. 허허."
빅토리아 아카데미 공식 홈페이지뿐만 아니라 여러 곳에 광고로 뿌린다고 했으니 기사가 올라오는 건 상관없다.
근데 일 처리가 빠르다고 해도 이럴 수 있는 건가? 어제 촬영을 끝냈는데 오늘 광고를 만든다고?
의문을 가지며 [빅토리아 아카데미 홍보부 모델들 사진.jpg]를 클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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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리아 아카데미 홍보부 모델들 광고 사진 공개됨.jpg]
[사진]
누가 빅토리아 아카데미의 미래를 물으면, 홍보부라 답해라.
추천 : 1300 비추천 :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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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사진은 딱 한 장. 학생회에서 찍은 사진만 올라와 있었다.
'결국 처음 찍은 거 올릴 거면 왜 그렇게 오래 찍은 거야…!'
엘리스는 부들부들 떨다가 화를 참고 댓글을 슬쩍 둘러봤다.
[아니 올해 신입생들 얼굴 실화인가?]
[내가 제일 불쌍하다고 느끼는 건 저 얼굴이랑 경쟁해야 하는 신입생 남자들임 ㅋㅋ]
[ㄹㅇ ㅋㅋ 저런 남자랑 같이 아카데미 생활하는데 오징어들이랑 사귀고 싶겠냐?]
[개새끼들아. 나 신입생인데 적당히 해라.]
[사실 나도 신입생임 ㅋㅋㅋㅋㅋㅋㅋ]
[와, 엘리스 언니 진짜 너무 예쁘다. 나보다 예쁘면 다 언니야.]
[누나 나를 가져요. 제발 가져가 줘.]
[쓰레기 무단투기범이 있네.]
엄청나게 달려있는 외모 칭찬 댓글을 봐도 별 감정이 들지 않았다.
인생 내내 들어온 말이니까.
[사진]
[사진 새로 공개됐다! 공지 보니까 사진들 하나하나가 레전드라서 서서히 다 올린다는데?]
[와, 잘생긴 애들은 책을 읽어도 잘 생겼구나.]
"휴."
열심히 찍은 사진들이 헛되지 않아서 다행이다.
[근데 엘리스도 진짜 이쁜데, 이호연이 너무 말도 안 되게 잘생겼다. 엘리스가 연예인 중에서도 탑급이라면, 이호연은 평가하기 싫은 얼굴임. 내가 말 하는 게 실례인 느낌.]
"참나. 이거 그 새끼가 단 거 아니야?"
잘 생기긴 했어도, 저 정도는 아니지.
이호연을 칭찬하는 수준이 아니라 찬양하는 댓글을 보고 엘리스는 괜히 짜증이 났다.
- "길을 잘 모르면 말을 하지 그랬어."
- "…그럴 수도 있지. 사람이 항상 완벽할 수는 없어."
- "하긴, 네 인간미를 본 것 같아서 기분이 좋긴 해. 중앙 분수를 향해 걸어갔는데 아카데미 외곽 성벽이 나올 줄은 나도 상상을 못 하긴 했지만."
- "…."
- "큭."
이호연과 나눴던 대화가 뇌를 스쳐 지나간다.
살면서 이딴 이상한 짜증을 느낀 건 오랜만이다.
어릴때 언니에게 장난감을 뺏기고, 유치원 때 가장 친했던 친구를 언니가 뺏어갔을 때도 짜증 났지만, 이런 느낌이 아니었다
엘리스는 '놀림'이란 걸 당해본 적이 없다.
그녀가 어릴 때부터 당해온 '놀림'들이라고 하면.
"저 씨발년. 재능 있다고 남들 무시하는 것도 아니고."
"보나 마나 뒤에서 걸레처럼 다 대주고 다니겠지."
"애초에 지 애비부터 도둑 새끼인데, 딸이라고 별다르겠어?"
그녀는 장난을 경험한 적이 없다.
어릴 때부터 시기와 질투에 노출되어 '비난'을 받았을 뿐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이호연의 '놀림'에 이상한 짜증을 느꼈다.
'이유 없는 비난'을 넘기는 방법은 어릴 때 습득했다.
재능 없는 이들이 자신을 비난하는 것 가지고 화가 나지 않는다.
오히려 동정을 느낄 뿐.
하지만 이호연은, 엘리스보다 부족한 점이 없었다.
그렇기에, 그의 '놀림'에 동정을 보낼 수 없다. 결국 느끼는 건 이상한 짜증.
결국 엘리스가 이호연에게 내린 평가는.
이상한 놈.
이상하게 모욕감이 들지만, 또 틀린 말은 아니고.
대화를 나눌수록 짜증이 나지만, 대화를 끊고 싶지는 않았다.
물론 잘생긴 얼굴이 꽤 큰 역할을 하는 걸 부정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살면서 처음 느끼는 감정들.
그 이상한 감정들은, 엘리스를 진심으로 만들었다.
- "너, 잘생겼다고 싸가지 없게 행동하는 걸 봐주는 것도 한계가 있어."
"미친년…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한 거야."
무심코 뱉어버린 진심이 들어간 말.
지금도 생각만 하는데 얼굴에 열이 올라온다.
그 때도 말을 꺼내자마자 얼굴이 빨개짐을 느끼고 도망치듯이 자리를 피했다.
"하아… 짜증 나."
엘리스는 아직도 자신이 왜 그런 부끄러운 말을 했는지 이해가 안 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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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옥의 망나니 소환 계약서 ]
지옥의 망나니들을 불러낸 자가 당신인가?
4마리의 망나니 중 하나를 골라라.
1. 인육에 미친 정육점 사장 악마 루시퍼
2. 지옥 아카데미 아다폭격기 금태양 인큐버스
3. 20년째 F급 용병. 백전백패 노장의 저력 켄타우로스
4. 50살째 노처녀 거미줄 치기 장인 서큐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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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뭐야 씨발."
지옥의 망나니 소환 계약서라길래, 좆같은 게 소환될 것 같은 느낌이 들긴 했는데.
상상 이상으로 좆같은 새끼들이 튀어나왔다.
1번은 무조건 걸러야지. 인육에 미친 정육점 사장 악마 루시퍼가 뭐냐고 대체.
이걸 소환하면 내가 정육점에 걸리는 고기가 될 것 같다.
그다음 망나니는 말하기도 싫다.
남자 새끼인 것도 마음에 안 드는데, 아다폭격기 금태양 인큐버스?
혹시라도 내 공략에 도움이 될 가능성이 있을까 고민해봤지만, 도움 주는 척 뒤에서 NTR 할 것 같다. 꺼져.
3번은 20년째 F급 용병 백전백패 노장의 저력 켄타우로스.
"아니, 병신을 뭐 이렇게 길게 표현해놔."
얘도 거른다.
그러면 남은 거라곤 마지막 4번… 그나마 얘가 제일 나은 것 같긴 한데….
서큐버스.
남자의 가슴을 울리는 단어다.
근데, 50살째 노처녀 거미줄 치기 장인 서큐버스?
서큐버스 눈나가 아니라 개 빻은 중년 아줌마가 나오면 어떡하지?
"그래도 이거밖에 없잖아."
어차피 고를 거 빠르게 하자.
나는 둥둥 떠 있는 시스템 창의 4번. [50살째 노처녀 거미줄 치기 장인 서큐버스]에 검지 손가락을 가져갔다.
펑!
시스템 창이 사라지며 소환 계약서가 있던 자리에 안개와 함께 엄청난 마법진들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오…."
너무 고위 마법 진이라 모든 이해가 되진 않지만, [마나 감응]으로 인해 대충은 이해가 간다.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그려진 게 소환이고, 왼쪽은 좌표네. 나머진 모르겠다.'
아직 내 수준이 낮은 탓에 모든 이해는 불가능했다.
"으으으…."
이윽고 안개가 걷히며 여성의 신음이 들려왔다.
목소리만 들어도 예쁜 여자일 것 같은 느낌이 들긴 하는데, 아직 방심하긴 이르다.
안개가 완전히 걷히고, 웬 츄리닝복 같은 걸 입은 여자가 주저앉아 있었다.
"어, 저기. 괜찮아…요?"
검은 머리는 푸석푸석하지만 피부는 잡티 하나 없이 깨끗했고, 허리는 잘록하고 엉덩이는 순산형이었다.
가슴은 F컵 정도 되는 것 같다.
인상도 좋아서, 50대 아줌마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엘프가 250살이면 인간으로 치면 25살. 뭐 이런 건가?
"저기요? 괜찮으시죠?
겉모습은 누가 봐도 20대인데. 50살이라고 했으니 존댓말을 해줬다.
"아이, 씨발. 레이드 돌아아 되는데 여긴 어디야. 짜증 나게."
음, 좆된 거 같은데.
*
"아, 씨발. 이 새끼들 진짜 뒤지게 못 하네."
타다다닥! 나는 빠른 속도로 키보드를 두들겼다.
- 아니, 뭐해 병신들아. 안 들어감?
- 님이 물려놓고 먼 소리 에요;;
- 내가 어그로 끌었는데 싸움 각이 안보임? ㅄ임?
- 차단할게요.
- 야 이 씨발…
[ 패배 ]
"와나, 진짜 미치겠네."
이런 새끼들이 지옥의 미래랍시고 지옥을 이끌어 나가야 한다니, 지옥의 미래가 어둡다.
이대로는 게임을 할 기분이 나지 않았다. 배고프기도 하고.
꿀꺽꿀꺽.
"푸우."
모니터 옆에 있던 음료수를 마시고 방을 나섰다.
마침 거실에 엄마가 있었다.
엄마는 어딜 놀러 갔다 왔는지 지친 기색이었다.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게 이제 슬슬 재산을 남기고 초대 마왕님 곁으로 가실 때가 됐는데.
"엄마~. 할 거 없으면 나 먹을 것 좀 줘. 배고팡."
"릴리아나! 너 또 맞선 파기했다며!"
"아, 빨리, 게임 너무 오래 해서 현기증 난단 말이야."
"엄마는 야근하고 와서 이제 퇴근하는데, 너는 하루종일 방구석에서 뭐 하는 거야!"
"오늘 고기 사 온다고 하지 않았어? 근데 왜 빈손이야?"
쾅!
"지금 고기가 문제야! 이번이 얼마나 중요한 기회였는데!"
아씨, 깜짝이야. 왜 책상을 치고 난리래
또 잔소리타임 시작했네.
나는 뒤에서 들리는 소리를 한 귀로 흘리면서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배가 고프긴 하지만, 잔소리를 들을 바에 참고 게임이나 해야지.
진짜 살기 힘들다. 힘들어.
문을 닫으니 들리는 소리가 좀 작아진다.
다시 게임에 접속했다.
팀 새끼들이 답답해서 팀 게임은 못하겠고, 레이드나 하러 가야겠다.
쾅!
하지만, 내 휴식을 방해하기 위해 엄마가 방으로 들어왔다.
"너! 오늘은 못 참아!"
오늘따라 엄마의 반응이 거세다. 방까지 따라 들어와서 왜 이러는 거람.
"엄마 말 좀 들어봐! 왜 그랬냐고 왜! 이번이 진짜 마지막 기회였잖아! 네 나이도 이제 50이야. 서큐버스중에 50살까지 결혼 안 한 서큐버스가 지옥에 어딨니?!"
"아, 좀 내버려 두라고! 돈도 없고 못생긴 오크랑 내가 결혼을 왜 하는데! 진짜 미쳤어?"
"야 이 미친년아. 그러면 진작 결혼하던가, 성인식 하고 15년 동안 게임만 처하면서 놀다가 이제 와서 그런 소리를 해?"
"엄마, 1000살까지 사는데 50년이면 아직 950년이나 남았잖아. 나 게임해야 되니까 나가."
"엄마도 서큐버스야! 서큐버스! 이번에는 널 믿었단 말이야!"
"네, 잠시만요. 포션만 챙기고 갈게요~."
게임을 하겠다는 내 의사를 전달했으니 모니터로 눈을 돌렸다.
장사꾼 새끼들이 포션을 사재기해놔서 더럽게 비싸네. 이거 다 고소해야 하는데.
"아이고, 진짜 미치겠다. 릴리아나. 네가 몇 살인데, 도대체 어디가 부족해서 이러는 거야!"
"네네, 곧 가요."
공대가 나 하나를 기다리고 있다. 바로 공대에 들어가야...
픽-
[인터넷 연결이 원활하지 않습니다. 연결을 확인하시고…]
이제 레이드를 들어가기 직전인데, 갑자기 인터넷이 나갔다.
"어? 뭐야."
"너, 이렇게 나올 거면 집에서 나가."
엄마의 손에 인터넷 선이 들려있다. 아니, 이제 레이드 들어가는데 왜 이래.
"엄마, 잠시만. 내가 진짜 한 시간만 하고 얘기할게. 지금 같이 해야 하는 사람들이 있어."
"언제까지 이럴 거야. 엄마도 진짜 힘들어."
"아니, 알겠어! 엄마. 앞으로 말 잘 들을게. 일단 그거 놔봐."
"릴리아나, 제발… 이제 그만 하자. 엄마 진짜 너무 힘들어…."
"내가 게임을 하고 싶어서 이러는 거 같아? 게임 안에 사람들이 있다니까!"
"흑흑…."
아이씨 진짜.
엄마가 인터넷 선을 부여잡고 꺼이꺼이 울기 시작했다.
하, 저러다가 인터넷 선에 물들어가면 어쩌려고 아오.
펑!
뭐야 씨발. 눈 앞에 이상한 글자가 나타난다.
[축하드립니다. 당신은 지옥의 4대 망나니로 선출되셨습니다.]
[지옥 복지팀에서 자동 취업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4대 망나니? 망나니가 뭐지?
어감이 안 좋은 건 알겠는데.
펑!
[축하드립니다! 지옥의 망나니 소환 계약서의 주인이 당신과의 계약을 원합니다. 자동 취업 서비스를 제공하겠습니다.]
응? 자동 취업 서비스는 또 뭐…
펑!
"릴리아나! 또 어디로 도망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