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1화 〉31화. 계약 (31/648)



〈 31화 〉31화. 계약

"하얗게 불태웠어…."


"다시 하라고 하면 못 할 것 같은데요…."


와우.


홍보부 내의 메이크업 룸에 앉아 거울을 바라봤다.


진짜 미안한 말이지만, 뭐가 바뀐 지 잘 모르겠는데.

"이 정도면 다들 깜짝 놀라겠는데요?"

"빨리 나가봐요. 회장님이랑 외국인 학생 놀라는 얼굴이 벌써 아른거리네. 호호호."

"아, 네."

그렇게까지 띄워주면 자신감이 올라가잖아.  혹시 존나 잘 생겼나?

여자 눈에만 잘 생겨 보이는 마법의 메이크업인가?


거울을 보고 깔끔하게 옷매무새를 정돈하고, 드레스 룸을 빠져나왔다.

홍보부 부실의 소파에는 자연스럽게 천사가 앉아있었다.


아니, 천사가 아니라 엘리스잖아.


게임에서 엘리스가 처음 등장하는 장면이 불현듯 떠올랐다.

[입학식의 단상을 오르는 그녀의 모습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유려한 곡선의 몸매를 따라 정돈된 금발은 주변을 환하게 비추는 듯했다.]

[비현실적으로 새하얀 피부와 오밀조밀한 이목구비.]


[아름다운 얼굴과 생도 복과의 조합은 청순함의 상징 같았지만, 차분한 표정에는 색기가 한 스푼 담겨 있었다.]

[단상의 계단 3칸을 올라가는 동안 잠시 눈에 비친 그녀의 모습은, 머릿속에 깊게 각인되었다.]

"그렇게 사람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건 실롄데."


"아, 아. 미안."

나도 모르게 엘리스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뭐 할 말이라도 있어?"

"어… 예쁘게 잘 됐네."


"…고마워. 근데 너는  들어갈 때랑 똑같아?"


아니, 난리 난다면서요. 누나들아.


아닌가? 혹시 창피해서 티를  내는 걸지도 모른다.


"큼, 뭐. 그럴 수 있지."


"다 끝났으면 빨리 나와. 회장님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거든."


엘리스는  말을 남기고 먼저 홍보부 부실을 나왔다.

저게 연기라면 연기자로 전향해도 되겠다.

아이씨, 메이크업만 1시간 넘게 걸렸는데. 쓸데없이 고생만 했네.

"…후배님, 진짜 완전 대박 미쳤다."

근데 밖에서 기다리던 수린 누나 반응은  달랐다.

"에이, 평소랑 똑같은데 무슨 소리세요."


"진짜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미쳤어! 그냥."

역시, 난 이 정돈가?

수린 누나의 칭찬과 반짝반짝한 눈빛을 받고 다시 기분이 업 됐다.

"일단 학생회를 배경으로 한 장 찍을게요!"


쾌활한 인상의 남자 사진 작가님이 사진을 권했다.

나는 어색한 표정을 하며 왼손으로 브이를 만들었다.


"에이, 남학생 너무 긴장했다. 얼굴이 아까워."

"죄, 죄송합니다."


툭툭.


옆에서 누가 툭툭 치길래 바라보니 엘리스가 내게 눈을 맞춘다.


"따라 해."

엘리스가 팔짱을 끼고 45도 정도 몸을 돌려서 내게 등을 보인다.

아. 저 자세구나.

나도 45도 정도 몸을 돌리고 엘리스의 등에 내 등을 붙였다.


"오~ 자세 좋아 좋아. 자신감 있어!"

찰칵찰칵.

"엄청나게 잘 나왔어요. 다음 장소로 가보죠!"



*



"자~ 찍습니다."

찰칵찰칵

"다음은 아카데미 도서관으로 이동할게요~."


이게 벌써 몇 번째 이동인지 모르겠네.

수린 누나는 학생회에서 구경하다가  일이 많다고 사라졌다. 내가 봤을 때 이 누나도 귀찮아서 도망친  같다.


엘리스도 약간 지쳐 보인다. 육체적으로는 건강할 테니 정신적으로 힘든 거겠지.

"서로 책을 들고 의자에 앉아서 책을 읽는 샷으로 가죠!"


진짜 열정 넘치시네. 돈을 많이 받나?

찰칵찰칵.

"자, 다음은… 아이고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드디어 끝났구나! 장장 3시간에 걸친 촬영의 끝이…!

"점심 식사하고, 1시까지 빅토리아 아카데미 중앙 분수에서 다시 만나죠."

이런 시발.

촬영 팀들은 그 말을 남기고 와하하 웃으면서 밥을 먹으러 갔다.


나와 엘리스는 버려진 오리처럼 도서관에서 서로를 마주 봤다.

"혹시 이후에 일정 있어?"


"딱히 없는데."

"그럼 같이 점심 먹으러 갈래?"


"…그러든가."


다행히 밥은 같이 먹어주는구나.

엘리스는 단답형으로 대답하고는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




"…"

엘리스는 앞장서서 걷다가  레스토랑 같은 데에 들어갔다.

나도 빠르게 그 뒤를 쫓았다.

웨이터가 와서는 주문을 받는다길래, 엘리스를 바라봤더니 한숨을 푸욱 쉬더니, '저랑 같은 걸로 주세요.'라고 주문했다.

천잰데? 나도 저렇게 말할걸.

웨이터가 사라지고, 나는 조용히 주변을 구경했다.

20대 때 큰맘 먹고 갔던 스테이크 전문점이 생각났다.


 때는  곳도 정말 좋았는데, 여기는 분위기가 다르네.


공기부터 다른게, 숨을 쉬는 것도 고급 공기라면서 돈을 받을 것 같다.

냠냠.


내 앞자리의 엘리스는 자주 오는 곳이라 별 생각이 없는지 조용히 식전 빵을 뜯어먹고 있다.

흠. 할 것도 없는데 일단 대화를 시도해볼까?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칭찬을 해보자.

"근데 너 화장 진짜  먹었네. 아까는 깜짝 놀랐어."


"갑자기  아부야?"


"어… 그냥 느낀 점을 말 한 건데… 미안."


"아니, 사과할 것 까지야… 하아. 그냥 조용히 밥이나 먹어."

"응…."

왜 이렇게 까칠하냐. 나한테 화났나?


나도 약간 어색해져서 조용히 빵을 뜯어 먹었다.


곧이어 식사가 나와서 식사까지 마쳤다.

중간중간 엘리스가 좋아하는 소재를  번씩 툭툭 던지면서 대화를 나누긴 했다.

다행히 며칠 전에 개봉한 클래식 영화 얘기가 통했다.


'엘리스의 취향 공부를 해서 다행이네.'


엘리스랑 언제 만날 일이 있을 줄 모르니, 좋아하는 작가의 신작이나 클래식 공연 같은 소식은  외우고 있다.


어찌어찌 점심을 마치고 레스토랑을 나왔다.

식사에 시간이 꽤 걸려서 곧 약속 시각이다.

"의외로 시간이 오래 걸렸네. 벌써 12시 50분이야. 빨리 가자."


"네가 쓸데없는 말을 계속 걸어서 그렇잖아. 식사할 땐 식사에 집중하는 게 매너인데, 모르는 거야?"


"그래도 재밌었잖아. 피가로와 해적 안 보고 싶어?"


"그건 그렇지만… 하아. 지치네. 오후 일정은 금방 끝난다니까, 따라오기나 해. 빨리 끝내버리게."

엘리스는 주변을 둘러보고는 앞으로  걸어 나갔다.


"어, 저기? 그쪽 아니지 않아?"


중앙 분수는 가게의 반대쪽인데.


엘리스는  말을 못 들은 건지 무시한 건지, 계속 걸어 나갔다.

내 말이 안 들리나?




*






"자, 오늘 촬영은 여기까지 하죠? 고생하셨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고생했어요!"

오후 촬영은 확실히 금방 끝났다. 두 번 정도 위치를 옮기고 끝났으니 양호한 편이다.

엘리스 때문에 길을 돌아오지 않았다면 더 일찍 끝났겠지만.

"길을 잘 모르면 말을 하지 그랬어."

"…그럴 수도 있지. 사람이 항상 완벽할 수는 없어."

"하긴, 네 인간미를 본  같아서 기분이 좋긴 해. 중앙 분수를 향해 걸어갔는데 아카데미 외곽 성벽이 나올 줄은 나도 상상을  하긴 했지만."


"…."


"큭."

중앙 분수를 향해 가던 엘리스가 외곽 성벽을 마주하고 지은 당황한 표정이 진짜 귀여웠는데.

나를 슬쩍 흘기더니 얼굴이 빨개져선 반대 방향을 잡고 빠른 속도로 걸어가는 것도 웃겼고.


"…이호연."

엘리스가 낮은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른다.


좆됐다. 화났나 본데?

그리곤 성큼성큼 다가와서 내 가슴을 검지손가락으로  찌른다.

"너, 잘생겼다고 싸가지 없게 행동하는 걸 봐주는 것도 한계가 있어."

엘리스는 나에게 경고 아닌 경고를 날리고는 도망가듯이 자리를 피했다.

"이거 너한테 배운 거야  년아…."

그리고 아까는 메이크 업 받기 전이랑 후랑 똑같다고 했으면서, 잘생겨 진 거 맞네. 뭘.





*




"아, 일어나기 싫어."


주말 이틀 중 토요일을 촬영에 다 써버렸으니, 일요일은 쉬는 게 맞지만, 할 일이 있다.

쇼핑을 가야 한다.

물론 대형마트를 가려는 건 아니고, 암시장 쇼핑이다.

"돈을 벌라는 기회가 왔는데 벌어줘야지."

원래 아이템의 정보를 확인하려면 [감정] 마법을 사용하거나 감정 스크롤을 사용해야 한다.

하지만 장비 상태 창이라는 능력을 갖추고 있는 나는, 그냥 바라보기만 하면 정보를 볼 수 있다.

이건 누가 봐도 암시장에서 뒹굴고 있는 사기 아이템들 챙기라는 거잖아.

 생각을 주말에  실현하겠다고 마음먹었으나, 일어나기가 쉽지 않다.

"어휴. 어차피 갈 거면 일찍 갔다가 쉬는  낫지."


오늘  일을 내일로 미루자. 내 좌우명이지만, 이미 충분히 미뤘다.

내일부턴 수업에 들어가서 더더욱 시간이 없어진다.


떠지지 않는 눈을 억지로 뜨고 사복을 챙겨입고 아카데미 상가로 나갔다.


삼로백화점의 비상계단. 지하로 통하는 암시장의 통행 루트다.

저번에 있던 덩치들이랑 다른 놈들이 지키고 있었다.


코인을 내밀었더니 조용히 비켜주길래 사이로  들어갔다.


"저번에 약국에 온 이후로 처음이니까,  오랜만이네."


약국도 한 번 들려보자. 의외로 수확이 있을지도 모른다.

지하 곳곳에는 좌판을 깔고 장사하는 놈들이 있었다.

몬스터 부산물부터 시작해서 피로 가득 찬 비커들과 살아있는 물고기를 파는 놈도 있었다.


실제로 보니 참 신기한 광경이다.

물론 저런 사람 중에 가끔 기연이 있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양지의 패배자들이다.

암시장이란 것은 원래 다들 알면서 쉬쉬 넘어가는 곳이다.


국가와 협회가 바보도 아니고, 별의별 능력자들이 다 있는 곳인데 돈과 물건의 흐름을 눈치채지 못 할 리가 있나.


결국 여기는 비교적 약자들이 있는 '약한 암시장'이다.

'강한 암시장'은 정말 꼭꼭 숨겨서 VIP들만 출입하게 한다.


거기서는 정말 인신매매부터 인체실험, 강간, 몬스터 검투장 등등 선을 넘는 불법 요소들로 가득 차 있다.


만약 위치를 특정하더라도 해온 로비 금액이 상당하기 때문에 눈감아주는 경우도 있다.


어쨌든, 여기는 수준이 떨어지는 '약한 암시장'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숨은 보물이 있을 수 있다.

'약한 암시장'에 있는 떨거지들이 보물을 보는 눈이 뛰어날 리가 없으니까.

"누가 봐도 여기 있을 것 같은데."

[부티앤티크]

대놓고 여기 골동품들 모여있어요~ 하는 가게다.

애초에 좌판이 아니라 가게를 차리고 있는 것부터 괜찮은 곳이다.

천으로 덮여있는 가림막을 위로 들추면서 가게로 들어갔다.

옛날 물품에서 나는 퀘퀘한 냄새. 돈이 되는 냄새다.

"처음 보는 얼굴이네. 어서 오시게."


카운터 안쪽에서 의자에 앉아있는 노인네가 웃으며 나를 반겼다.


옷도 후줄근하고 이도  개 빠진 게 인상은 별로 좋지 않네.

"뭐 찾는 거라도 있으신가? 내가 대충 골라줄 순 있는데."

대답하지 않고 조용히 물건을 둘러봤다. 노인도 딱히 대답을 기대한 건 아닌지 조용히 눈을 감고 부채질을 하고 있다.


'쓰레기. 이것도 쓰레기. 연초 레시피? 이것도 쓰레기.'

 그대로 쓰레기의 향연이었다.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도 아니고, 쓰레기 사이에서 보물찾기를 하고 있네.

"흐음…."


내가 물건들을 하나하나 체크하고 있으니, 어느새 노인이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고 있다.

 저러는 거야. 미친 노인네가 노망났나?

뜨거운 시선을 무시하고 계속 물건을 찾았다.


 30분 정도 골동품들을 뒤지다 보니, 무언가 하나 나오긴 했다.


────[ 지옥의 망나니 소환 계약서 ]────

 등급 : 최상

▶ 지옥의 마력이 담긴 소환 계약서다. 소환하는 놈들의 질은 나쁘지만, 새겨진 마법 자체는 초 고등 마법이기에 최상급의 계약서다.


▶ 지옥에서 애물단지 취급을 받는 망나니들을 소환해 계약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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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애매하게 좋은 건지 안 좋은 건지 모르겠는 아이템은 뭐지?


지옥의 소환 어쩌고 길래 냅다 집어서 확인했는데, 망나니 소환 계약서란다.

"어이가 없네."

너무 어이가 없어서 노인네가 있는 것도 까먹고 혼잣말을 지껄였다.

다행히 노인네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골동품점을 운영하는 동안 미친놈들을 만나면서 멘탈 수련을 한 모양이다.


'아, 이거 꼴리는데.'

망나니. 애물단지. 이런 단어들이 심히 거슬리긴 하지만, 최상급 소환서라잖아.


남자의 마음을 자극하는 뭔가가 있단 말이다.

'아니, 지금은 더 확실한  찾아야 해.'

나는 [ 지옥의 망나니 소환 계약서 ]에게서 억지로 눈을 돌리고 다른 상품들을 둘러봤다.


"…."





*






"좋은 선택이네.  두루마리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10년 전에 온몸을 로브로 둘러싼 남자에게 구입했지. 자네에게 도움이 될 물건이길 빌겠네."

"예예. 고생하세요."

젠장. 질러버렸다.

[ 지옥의 망나니 소환 계약서 ]!


뭔진 모르겠지만 멋있잖아!

나는 소환서를 써볼 생각에 설레서 당장 기숙사로 달려왔다.


덜컥!


기숙사 문이 잠기는 걸 확인한 후에, 가슴에 품고 달려온 소환서를 꺼냈다.


소환서를 바닥에 내려놓고, 천천히 마나를 불어넣었다.


슈우웅-

소환서에서 빛이 쏟아져나와 방을 가득 채운다.


빛 때문에 눈을 감았다가 떴더니, 눈앞에 뭔가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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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의 망나니 소환 계약서 ]


지옥의 망나니들을 불러낸 자가 당신인가?

4마리의 망나니 중 하나를 골라라.


1. 인육에 미친 정육점 사장 악마 루시퍼
2. 지옥 아카데미 아다폭격기 금태양 인큐버스
3. 20년 째 F급 용병. 백전백패 노장의 저력 켄타우로스
4. 50살째 노처녀 거미줄치기 장인 서큐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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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뭐야 씨발."


 눈앞에 시스템 창 같은 선택지가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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