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화 〉29화. 계획 (3)
'얘도 오랜만이네.'
루시가 소개하는 신입 부원의 얼굴은 나에게 익숙했다.
게임에서 수없이 죽여본 마인이니까.
펠릭스.
루시에게 첫눈에 반해 빅토리아 아카데미에 숨어들어온 미친 마인이다.
의외로 순애파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 새끼의 목적은 연애가 아니라 간살(姦殺). 루시를 범하고 죽이려는 욕망에 빠진 구제 불능 쓰레기다.
처음에는 최대한 빨리 배제하려고 했지만, 좋은 생각이 났다.
'이 새끼를 공략에 이용하는 거야.'
게임에서는 루시가 납치되는 순간 배드엔딩이다.
위기에 빠진 루시를 구하는 이벤트가 없었다.
주인공이 할 수 있는 건 사건이 일어나기 전, 루시가 펠릭스와 적당히 친해졌을 때 마인이라는 정체를 밝히고 미리 막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현실이고, 내가 충분히 사건의 흐름을 조절할 수 있다.
"아, 맞다! 이번에 신입 부원으로 뽑으려는데, 네 의견도 물어보려고 불렀어. 어때. 착해 보이지?"
루시의 얼굴이 밝은 걸 보니 아예 처음 보는 사이는 아닌 것 같고, 어느 정도 친해진 상태인 것 같다.
괜찮네. 이러면 더 일이 편해지지.
오랜만에 루시가 좋아하는 나쁜 남자 이호연 등장이다.
"싫은데."
내가 펠릭스와 눈을 마주치고 웃으면서 꺼낸 말에, 동아리방이 정적에 휩싸였다.
특히 루시와 루미는 전혀 상상하지 못한 내 돌발행동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이 눈을 깜빡이고 있다.
거기서 정색하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너, 딱 봐도 루시랑 루미가 목적인 것 같은데 좋게 말할 때 꺼지지?"
루시와 루미는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나는 동아리방에 들어오고부터 지금까지 펠릭스에게 눈을 떼지 않았다.
펠릭스는 내 말에 잠시지만 표정이 굳었다가 돌아왔다.
'어떻게 나오려나?'
펠릭스는 잠시 고민하더니 벌떡 일어나서 말했다.
"미, 미안해…. 이렇게 싫어할 줄 몰랐어. 눈치 없이 기다리고 있었네…. 이만 가볼게!"
쿠당탕-
펠릭스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동아리방을 뛰쳐나갔다.
나는 아무 감정 없이 그 광경을 바라봤다.
'연기를 잘하긴 하네.'
눈물까지 찔끔 흘리면서 달려가는 꼴이 진짜 상처받아서 달려가는 줄 알겠어 아주.
잘 모르는 사람이 보면 무조건 속을만한 연기력이다.
"너… 뭐 하는 거야!"
지금 루시처럼 말이다.
루시는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다가 펠릭스가 동아리방을 박차고 나가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내게 따져왔다.
"왜, 왜 그런 거야? 진짜 저 애가 우리를 노리고 들어온 거로 생각해서 그런 거야? 진짜 싫더라도 좋게 말 할 수 있었잖아. 어째서…."
루시는 이해가 안된다는 듯 마구 말을 쏟아냈다.
하긴, 객관적으로 보면 내가 쓰레기가 맞긴 하지. 순진한 애를 내쫓은 것처럼 보이니까.
근데 그걸 감안하고도 루시의 반응이 상상 이상으로 거세다.
나는 주변을 둘러봤다.
내 [마나 감응]이 반응 했다.
이질적인 마나가 느껴지는 곳이 있다.
책상 위에 놓여 있는 꽃병.
거기서 더럽고 추잡한 마인의 마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약한 마법이라도 걸어놓았나 보네.'
강한 마법은 루시와 루미도 감지할 수 있을 테니, 소소하게 감정을 건드리는 마법을 걸어놓은 모양이다.
그 정도의 마법은 루시와 루미 수준에서는 파악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이 꽃병을 갑자기 가지고 나가는 것도 이상하고, 사실 루시가 흥분해서 나와 척을 질수록 더 이득이다.
그냥 내버려 두기로 하고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
"무슨 소리야. 딱 보면 모르겠어? 너 아니면 루미를 노리고 들어온 거잖아."
나도 마인에게 질 수는 없으니 혼신의 힘을 다해서 답답하다는 연기를 했다.
"너야말로… 하, 설마 그런 거야? 다른 남자가 동아리에 들어와서 네 작업에 방해될까 봐?"
"…?"
이건 뭔 개소리야.
정확히 뭔진 몰라도 펠릭스가 밑밥을 아주 잘 뿌려놓은 모양이다.
원작에서도 헛소문을 뿌리거나 맞았다고 거짓말을 하거나 여러 방법으로 주인공을 음해한다.
이번엔 내가 여자를 밝힌다는 소문이라도 퍼트렸나?
…보는 눈이 좋은데?
"무슨 이상한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어. 난 그냥 더러운 변태를 쫓아낸 것뿐이야."
"너, 진짜 끝까지…! 루미. 너도 그렇게 생각해?"
"으, 으응?"
"너도 펠릭스가 변태였다고 생각하냐고 묻는 거야."
"으음, 그, 글쎄…?"
루미가 슬쩍 눈동자를 굴려 내 쪽을 바라본다.
촉이 왔다. 여기서 더 대화를 이어가면 위험하다.
지금 루미의 호감도는 굉장히 높다.
혹시라도 루미가 내 편을 들어서 기껏 만들어 놓은 판을 뒤집으면 안 된다.
재빨리 판단을 마친 나는 루미가 입을 열기 전에 말을 꺼냈다.
"하, 나는 너희들 생각해서 그런 건데. 이렇게 나오면 나도 좀 서운하네."
"뭐? 야, 서운하긴 무슨. 네가 그런 말 할 자격이 있냐? 너 때문에 동아리 부원도 안 들어오고, 그나마 찾아온 괜찮은 애도…."
"됐고, 난 간다."
나는 최대한 열 받은 척하면서 짐을 챙겨서 동아리 방문을 쾅 열고 나왔다.
뒤에서 뭐라 뭐라 루시가 소리를 지르고 있지만 무시하고 걸었다.
근데 나 때문에 동아리 부원이 안 들어온다는 건 또 뭔 소리야?
조사할 일이 더 생겼다. 머리가 지끈지끈하네.
*
"하아, 힘들다."
나쁜 남자 연기는 참 힘들다.
그래도 계획대로 되고 있다.
루시가 펠릭스에게 납치당하고, 그 순간에 내가 구하는 건 이 계획의 기본이다.
하지만 디테일이 살아있어야 한다.
나와 루시 둘 다 펠릭스를 의심하지 않고 있다가 펠릭스에게 납치된 루시를 구하러 온 상황과,
나는 펠릭스를 의심했지만, 루시는 펠릭스의 편을 들어서 우리 사이에 다툼이 일어났는데도 불구하고 루시를 구하러 온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이게 흔들다리 효과인가 뭔가 그거 맞지?"
흔들다리인지 뭔지는 둘째치고, 이제 슬슬 루미한테 연락이 올 때가 된 것 같은데…
띠링-
루미 : 호연 씨… 루시가 호연 씨를 동아리에서 제적시키고 펠릭스를 넣자고 난리에요… 빨리 와서 화해해주세요. ㅠㅠ. (고양이가 눈물을 흘리는 이모티콘)
나 : 진정하고, 일단 루시 편들어주면서 기다리고 있어.
루미 : …그래도 될까요?
나 : 응. 나도 생각이 있으니까 괜찮아.
루시의 반응은 예상대로였다. 루미도 마찬가지고.
어차피 나를 제적하진 못한다.
기숙사에 오기 전에 총 동아리 부서에 들려서 우리 동아리에 문제가 있나 체크해봤는데, 또 총 동아리 회장 놈이 장난질을 쳐 놨다.
동아리 목록에도 안 나오고, 에브리데이에 올린 동아리 홍보에도 누락됐다.
그 새끼 분명히 수린 누나가 자른다 했는데 왜 계속 있는 거야.
어쨌든, 그건 천천히 해결하기로 하고.
일단 루시와 트러블은 만들어 놨으니, 그다음으로 펠릭스를 만나봐야지.
펠릭스랑 말을 맞춰놔야 언제 납치할지 알 거 아니야.
*
다음 날 아침.
오늘은 금요일이다. 오전에 이론 수업만 끝내면 오후에는 수업이 없었다.
아침 루틴도 이제 완전히 익숙해졌다.
기분 나쁜 아침 햇살을 받으며 일어난다.
샤워는 자기 전에 하는 주의라서, 가볍게 머리를 감고 세안만 했다.
옷걸이에 걸어놨던 생도복을 챙긴다.
────[ 옷걸이 ]────
▶ 등급 : 하
▶ 옷걸이에 가공한 마법석을 박아넣고 클린 마법을 담았다.
▶ 옷걸이에 옷을 걸어놓으면 자동으로 깨끗해진다.
────────────
쓸데없이 옷걸이가 고급이라서 걸어놓기만 해도 다림질, 세탁, 이물질 제거까지 해준다.
깔끔한 생도복을 챙겨입고 기숙사를 나섰다.
이론 수업만 빨리 끝내고 B 클래스로 가야 한다. 펠릭스는 B 클래스 소속이니까.
가는 길에 김영한을 못 만나서 혼자 A클래스에 들어왔다.
항상 앉던 자리에 루시와 루미가 앉아있어야 하는데…
'없네?'
주위를 둘러보니 교실의 구석에 딱 두 자리 남은 곳에 루시와 루미가 자리를 잡았다.
이건 예상한 일이니까 어쩔 수 없지.
귀여운 여자들과 수업을 못 듣는건 아쉽지만 차선책으로 김영한을 찾아서 그 옆에 앉았다.
"좋은 아침."
"어? 응. 좋은 아침. 너 루시루미네하고 안 앉아?"
"매일 같이 앉으라는 법은 없잖아. 그냥 가끔 같이 앉은 것 뿐이야."
"싸웠구나?"
이 금발 양아치새끼. 쓸데없이 눈치는 빨라요.
"루시는 자존심이 쎈 타입이니까 네가 먼저 다가가서 사과해봐. 그럼 금방 받아줄걸? 저런 타입한테 너도 자존심 부리기 시작하면 끝도 없다."
뭐냐, 이 영양가있는 조언은.
"조언 고맙다."
인싸의 조언이니까 분명 맞는 말이겠지.
그 말은 즉슨, 저 조언과 반대로 하면 루시와 더 사이가 안 좋아진다는 뜻이다.
옆에 있는 친구와 대화를 나누던 루시를 바라보고 있으니 , 시선을 느낀 루시가 내 쪽을 바라봤다.
흥.
'분명히 입 모양이 흥 이었는데….'
티 나게 고개를 돌리는 걸 보니 화가 나긴 했는데 아직 그렇게 심한 건 아닌 모양이다.
사과하면 충분히 풀릴 수준이다.
확실히 조언대로네.
근데 이걸론 부족하다. 완전히 내게 화가 난 상태여야 한다.
그래야 구해줬을 때 더 감동적이지 않겠어?
뭐, 펠릭스를 찾아가면 루시한테 또 반응이 오겠지.
*
수업이 끝난 후.
루시와 루미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B 클래스로 향했다.
B 클래스도 이제 막 수업이 끝났는지 뒷정리를 하는 학생들이 보였다.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백금발 머리의 체구가 작은 소년에게 다가갔다.
"야. 펠릭스."
"…?"
"너 잠깐 따라와 봐."
"왜, 왜 그러세요. 저는 아무 말도 할 게 없어요…."
펠릭스는 의도적으로 소리를 높이면서 주변의 시선을 모으고 있었다.
그 소리를 듣고 몇몇이 이 쪽을 쳐다본다.
이 새끼 영리하네.
'근데 이건 나도 바라던 바야.'
보는 사람이 많아야 루시의 귀에도 빨리 들어간다. 강압적으로 데려갔다는 말이 들리면 더 좋다.
그래야 루시가 펠릭스 편을 들면서 나를 더 싫어하지.
일단은 펠릭스를 데려가야 하니, 조용히 내 얼굴을 펠릭스의 귀에 갖다 댔다.
"저기, 너 마인인거 알고 있으니까 빨리 나와. 안 오면 여기서 다 까발릴 거야."
"…!"
펠릭스의 눈이 크게 떠진다.
"퍼트릴 생각 없으니까. 이상한 생각 하지 말고 조용히 따라 나와."
펠릭스는 입을 꾹 다물더니, 어차피 들키면 끝이라는 굳은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조용히 웃으면서 교실을 나왔다.
1학년 수업동 뒤에 있는 산책로.
지금은 돌아다니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산책로의 길이 아닌 옆에 있는 수풀 안쪽으로 들어갔다.
부스럭부스럭
뒤에서 펠릭스가 따라오는 소리가 들린다.
어느 정도 너비가 있는 공터에서 멈춰서 뒤로 돌았다.
"무슨 속셈이지…?"
펠릭스는 사방을 주의하면서 내게 말을 걸었다.
하긴 당황스럽겠지. 마인이라는 걸 알면서도 이렇게 단둘이 대화를 시도하다니.
"워워, 왜 그래. 표정 풀어."
나는 손에서 마나를 뿜어냈다.
정순하고 깨끗한 마나가 아닌, 더럽고 추잡한 마인의 마나 운용 방식이었다.
동아리 방에 있던 물병에 걸린 마법을 한 번 보고 나니 쉽게 따라 할 수 있었다.
파괴적이고 충동적인 마나 운용방식. 딱 마인에게 맞는 방식이었다.
"설마… 너도냐?"
"그래, 정확히는 내가 먼저 눈독 들이던 년인데 네가 끼어든 거라고."
"… 하지만 루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양보 못 한다."
펠릭스는 내게 적대감을 표하면서 마력을 끌어올렸다.
이 새끼는 자기가 무슨 공주를 지키는 용사인 줄 아네.
"워워, 진정해. 나도 싸우자는 건 아니야. 그냥 하나만 부탁하려고 왔어."
"…부탁이란 건 뭐지?"
부탁이라는 말에 펠릭스도 일단 끌어올렸던 마력을 가라앉혔다.
"그냥 나도 네가 하려는 일을 도와주겠다는 거지. 대신 나는 두 번째라도 좋아. 오케이? 우리 좋게좋게 가자고."
원래는 마인이라고 거짓말할 생각은 없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게 더 좋은 방식이다.
일단 펠릭스가 마인이란 걸 밝혀야 납치계획에 동참할 수 있는데, 인간이 그런 말을 하면 너무 의심스럽잖아.
쓰레기는 쓰레기끼리 통하는 법이다.
펠릭스는 내 말에 고민을 하고 있었다.
나를 받아주는 게 이득일지 여기서 죽여버리는 게 이득일지 저울질을 하는 것 같다.
"어차피 너도 즐기고 나서 도망갈 계획 아니었어? 내가 너 즐기는 동안 감시도 해주고, 그다음에 네가 도망갈 시간도 벌어준다니까? 손해 볼 게 없는 장사잖아."
"네 말만 들으면 그렇긴 하지. 근데 널 어떻게 믿고? 날 배신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잖아."
"그럼 그때 나를 처리하면 되잖아. 자신 없어?"
"흠…."
솔직히 펠릭스와 둘이 마주하고 조금 놀랐다.
이 새끼, 원작 게임보다 훨씬 세졌다.
대체 무슨 변화가 생겼는지는 모르겠지만, 맞상대를 하면 상대가 안 될 것 같다.
"그래. 뭐, 내가 즐기고 남은 찌꺼기 정도는 줄 수 있지."
하지만, 다행히 그 힘의 차이 때문에 펠릭스는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
"작전은 내가 판단해서 최적의 시간대에 실행한다. 내가 연락망을 줄 테니 그걸로 알아서 찾아와라."
툭.
내 발치에 동그란 구 형태의 마도구가 떨어진다.
"그럼 나중에 보자고."
펠릭스는 그 말을 남기고 주변을 살피며 산책로로 돌아갔다.
그리고 혼자 남은 나는 마도구를 품에 집어넣고, 화를 삭였다.
내가 같은 마인이라는 착각때문에 펠릭스도 경계심이 많이 줄었는지, 이런 통신구까지 줬다.
분명 일은 순조롭게 풀리고 있었다. 그런데...
루시를 그저 즐길거리로 표현하는 펠릭스의 말.
행동으로 옮긴 것도 아니고 말만 들었는데, 이게 뭐라고 이렇게 화가 나는 건지. 참.
누가 보면 벌써 루시랑 사귀는 줄 알겠네.
뭐 어쩌겠어. 찌질한게 내 매력이다.
"이 개새끼야. 너는 내가 죽이고 만다."
주말 동안, 펠릭스를 죽일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